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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마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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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마 5:6)

요즘 우리는 예수님의 산상수훈 가운데 팔복의 가르침에 대하여 상고하는 중입니다. 지금까지 세 주일에 걸쳐서 ‘심령이 가난한 자’와 ‘애통하는 자’와 ‘온유한 자’가 받을 복에 관해서 살펴보았고, 오늘은 팔복 가운데 네 번째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받을 복’에 관해서 알아보려고 합니다. 먼저, 팔복의 가르침을 상고할 때 우리는 이 말씀이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각 사람에게 주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팔복의 가르침을 한 가지씩 살펴보는 가운데 변화를 받아 천국 시민으로서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네 번째 복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는 것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의가 무엇이며, 그리고 어떤 상태가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인지, 그리고 그런 자가 받을 복이 무엇인지에 관해서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상고하는 동안 우리 자신의 심령 상태를 진솔하게 진단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려는 각오’를 새롭게 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첫 번째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의” 가 무엇인지 알아봅시다.

성경에 의하면 의에도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의가 그것입니다. 로마서 10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2)…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3)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양심을 갖고 있고 정의를 추구하는 마음을 갖고 있지만, 사람에 따라서 그 수준이 천차만별입니다. 그뿐 아니라, 사도 바울의 지적과 같이 자기를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거역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감히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의로움을 내세웁니다. 그러나 성경은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롬 3:20) 곧 인간의 의를 가지고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이에 대한 적절한 예로서 우리는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율법을 열심히 지키려고 애썼던 사람들입니다.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철저하게 안식일을 지키고, 소득의 십일조를 구별해서 바쳤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주님의 칭찬을 받기는커녕 혹독한 책망을 들었습니다. “27)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8)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 23:)고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의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형식적인 의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의를 의미합니다. 의에 관한한 인간적인 기준은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하신 주님의 말씀에 언급된 “의”는 인간적인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에 보면,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주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하나님의 의를 강조하신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소유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앞에서도 살펴본 대로,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 인정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죄가 무엇인지와 우리가 죄인인 사실을 알려주려는 것이 율법을 주신 목적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율법을 주신 최종적인 목적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최종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의를 얻을 수 있는 길로 우리를 안내하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율법처럼 훌륭한 안내인은 달리 없습니다.

자, 그러면 하나님의 의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첫째로, 하나님의 의란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칭의를 가리킵니다.

로마서 3장 21절로 22절에 이르기를 “21)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의를 가리킵니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의를 소유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욕심에 따라서 세상에 속한 것들을 위해 살지 아니하고 천국 시민답게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사는 것, 그리고 우리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면서 사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의를 위해 사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어떤 상태가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인지 알아봅시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려면, 먼저 주리고 목마른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주리고 목마른 것이 무엇인지 절실하게 경험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쓰러지거나 마실 물이 없어 숨이 넘어갈 정도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문에 나오는 ‘주리는 것과 목마른 것’은 당장에 음식을 먹지 않으면 굶어 죽을 수밖에 없고, 당장 물을 마시지 않으면 쓰러질 수밖에 없는 갈증을 말합니다. 

지금도 지구상에는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저는 금요기도회를 마치고 귀가하면 자정이 되는데, 한 시간 정도 MBC에서 방영하는 W라는 프로그램을 즐겨봅니다. 이번에는 엘살바도르와 케냐의 빈민촌 어린이들에 관해서 방영했는데, 초등학교를 다녀야 할 일고여덟 살 난 아이들이 생계를 위해 바닷가에 가서 맨손으로 조개를 캐고, 쓰레기더미를 뒤지는 광경이 너무나 마음 아팠습니다. 하루 종일 수고해서 버는 돈이라고 해야 겨우 1달러에 불과합니다. 

그 아이들의 소원은 음식을 한번 실컷 먹어보는 것입니다. 수도나 우물이 없어서 웅덩이에 고인 더러운 물을 길어다 식수로 사용하는 캄보디아 빈민촌의 참상도 보여주었는데, 오염된 물을 마셔서 피부병과 각종 질병에 시달리고 있는 모습이 안타까웠습니다. 어느 여인은 더러운 물로 인해 남편이 병들어 죽었다고 하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오염된 물이라도 마실 물이 있다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사막을 횡단하다가 물이 떨어지면 그 때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목말라 죽는 일이 생길 수 없지만, 이스라엘을 비롯한 중동 지방에는 실제로 그런 일이 생긴다고 합니다. 일전에 어느 여행객이 이스라엘로 가서 짚차를 타고 광야로 나갔는데 그만 광야 한 복판에서 차가 고장이 났습니다. 그 관광객은 광야 깊이 들어가서 구조 요청을 할 수도 없는 처지에서 가지고 간 음료수가 다 떨어지자 그만 탈진해서 죽고 말았다고 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하신 말씀은, 굶어죽어 가는 사람이 음식을 원하는 것처럼, 그리고 목말라 죽어가는 사람이 물을 원하는 것처럼, 그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의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여러분은 지금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고 있으십니까?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의 소원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나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정도로는 부족합니다. 막연하게 그랬으면 좋겠다는 동경이나 소망 정도로는 실천적인 행동을 이끌어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굶주린 자가 음식을 구하듯이, 갈증으로 허덕이는 자가 물을 찾듯이, 그 같은 갈급한 심정으로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멸망의 위기에 처한 유다 백성에게 말씀하시기를 “12)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13)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 29:)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유다 백성에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되 주리고 목마른 자의 심정으로 구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때도 마찬가지로 적용할 수 있는 원칙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면 감사할 일이고 주시지 않으면 그만이고 하는 식으로는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주리고 목마른 자의 심정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저는 살 수 없습니다’ 그렇게 간절하게 매어달릴 때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42편 1절에 보면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하였고, 63편 1절에 보면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갈급한 심정으로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를 받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우리 자신의 의로움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의를 선물로 받기 위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건성으로 믿을 수 없습니다. 교회 나오게 된 동기가 어떠하든지 간에,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알게 되었다면 이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 길만이 구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하셨고, 사도들도 증거하기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고 했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유일한 구주가 되심을 알게 된 사람은 주님을 믿는 자세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시몬 베드로와 같이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요 6:68) 라고 예수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합니다. 예수 믿는 일로 핍박이 다가와도 믿음을 저버릴 수가 없습니다. 여러 가지 시험이 다가와도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핍박과 시험이 다가오면 뒤로 물러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주님을 의지하고 신앙생활에 열심을 냅니다. 

그리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애쓰고 힘쓰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런 사람은 언제나 마음속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려는 열망이 가득합니다. 평소에는 자기 생각대로 살다가 이따금씩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나 죽으나 하나님의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살아갑니다. 어떻게 하면 주의 일을 잘 감당할 것인지 늘 궁리하고 최선을 다해 충성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완전무결한 의인이 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인은 복이 있다” 하지 않으시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는 아직 의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 의에 도달하기를 간절히 소망하면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점에서, 주님의 이 말씀은 우리에게 위로와 힘을 줍니다. 만일 “의인은 복이 있다”고 하셨다면, 부족하고 결함투성이인 우리로서는 감히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 누릴 것을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비록 결함이 많더라도 의를 위해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될 수는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체질을 아시고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시는 분이시므로 우리의 완전무결함을 요구하시기 보다는 하나님의 의를 위해 힘쓰고 애쓰는 것을 귀하게 보십니다. 우리가 주리고 목마른 자의 심정으로 하나님의 의를 위해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실패를 나무라지 않으시고 용서해 주십니다. 

시몬 베드로는 주님을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대제사장들이 보낸 장정들이 들이닥쳐서 주님을 잡아가려고 하였을 때 베드로는 검을 빼어 휘둘렀습니다. 대제사장의 뜰에 들어가서 하인들 틈에 앉아서 모닥불을 쬐면서 예수님의 재판과정을 멀리서 지켜보았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베드로가 얼마나 주님을 위해 최선을 다했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께 대한 신의를 끝까지 지키지 못하고 여종 앞에서 세 번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베드로로서는 너무나 참담한 패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때 새벽닭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으로 나가 심히 통곡했습니다. 솔직히 저는 주님을 부인한 베드로를 비난할 마음이 없습니다. 그것은 그가 고의적으로 부인한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인간적인 연약함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후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른 아침에 갈릴리 해변으로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숯불을 가운데 두고 둘러앉아서 아침을 먹는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하니, “내 어린 양을 먹이라”하셨습니다. 

또 두 번째 말씀하시기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셨습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니, “내 양을 치라”고 하셨습니다. 조금 있다가 세 번째로 말씀하시기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며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니,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날 아침에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용서하셨을 뿐 아니라 주님의 양 무리를 맡겨 돌보는 사명을 부여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주님을 위해 살려고 하나 자주 실패하십니까? 낙심하지 마시고 다시 한 번 주리고 목마른 자의 심정으로 시도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 이 같이 말씀합니다. “12)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13)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사도 바울과 같은 위대한 인물도 이미 얻었거나 온전히 이룬 것이 아니라 쉬임없이 신앙의 경주를 달려 나간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부족한 우리는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정도면 됐다고 만족할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 서는 그 날까지 하나님의 의를 위한 우리의 배고픔과 목마름이 지속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받을 복이 무엇인지 알아봅시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현대인들은 평소에 배불리 먹기 때문에 배부름의 행복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늘 굶주려서 허기가 진 사람은 한번 배불리 먹는 것이 소원입니다. 더구나 성경에서 배부름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상태를 상징합니다. 

신명기 11장 13절 이하에 보면, “13)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나의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섬기면 14)여호와께서 너희 땅에 이른비, 늦은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15)또 육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가나안은 그곳에 들어가면 배불리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에 축복의 땅이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영적으로 볼 때 “배부를 것임이요” 라는 구절은 심령에 만족을 누리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이사야서 5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1)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2)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3)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이 말씀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풍성한 은혜의 잔치를 마련하시고 초청하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구원의 즐거움과 영생의 복을 받아 한없는 만족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하고 영혼의 양식이 아닌 세상의 헛된 것들을 위해 삶을 낭비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무엇보다도 믿는 사람들이 영적인 축복을 등한히 하고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고 산다면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신자들은 자기의 영적 상태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17)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18)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하신 말씀을 새겨듣고 혹시라도 우리 자신이 그러한 상태에 있지는 아니한지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받을 복이 얼마나 풍성한지, 고린도전서 2장 9절에 보니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사실, 우리가 지금 누리는 영적인 행복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함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맛보고 있는 은혜도 마찬가지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믿는 우리를 위해 예비해 두신 은혜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둘째 아들은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여 재물을 다 허비하고 나자 그 나라에 흉년이 들어 돼지 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돼지가 먹는 쥐염열매도 배불리 먹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드디어 이 아들은 스스로 돌이킵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이 비유에 나오는 둘째 아들은 범죄한 우리 인생들을, 아버지는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킵니다. 아버지가 얼마나 부요하시고 너그러우신지 그 집에서 날품팔이하는 품군들도 양식이 풍족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어찌 신령한 양식으로 배불리 먹게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즉 이제 주리고 목마른 자의 심정으로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위해 살아가야 할 줄 믿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성도님들의 심령 속에 다함이 없는 영적인 기쁨과 만족이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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