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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교개혁] 마가의 양심선언 (막 14:4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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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의 양심선언 (막 14:43~52)


지난 2002년 2월 28일 대한민국 국회의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은 광복회와 함께 친일 인사 708인의 명단을 발표했습니다. 이 중에는 을사오적을 비롯해서 각계각층의 지도급 인사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명단 발표를 보면서 느끼는 두 가지 느낌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친일 인사들에 대한 분노입니다. 나라를 팔아먹은 사람들이라는 분노가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저를 당혹스럽게 한 것은 그 다음 느낌입니다. 그 느낌을 표현하자면 씁쓰레함이라고 할까요? 
이런 느낌을 가지게 된 이유는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명단을 작성하고 발표하는 사람들은 죄가 없는 것일까? 우리가 그 시대 사람이었다면, 명단에 실린 사람들보다 더 많이 친일하지는 않았을까? 이런 명단 발표가 마치 하루 세끼 밥을 배불리 먹고 간식거리까지 쌓아놓고 먹는 아이가 배가 고파 빵을 훔친 아이에게 ‘왜 집에 가서 먹지 않고 나와서 훔치느냐?’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특이한 이야기를 보게 됩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부끄러운 행태를 고발하는 내용입니다. 그 주제는 <배신>입니다. 한 마디로 제자들은 배신자라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먹은 배신자입니다. 나머지 제자들도 모두 예수님을 놓아 둔 채로 도망친 배신자입니다. 베드로는 후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말하면서 저주한 배신자입니다.

그런데 여기 이름 없는 한 사람의 이야기가 덧붙여져 있습니다. 본문 51-52절을 보십시오.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이 말씀은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 요한복음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마가복음에만 나옵니다. 
여기서 한 청년은 마가 자신입니다. 마가는 제자들의 배신 이야기에 자기 이야기를 끼어 넣었습니다. 

본래 마가는 그 중요성에 있어서 여기 등장할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3년 동안 이루어진 예수님의 사역에는 수많은 등장인물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드라마라고 생각해 보세요. 그 드라마의 주연은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조연이었습니다. 그러나 마가는 엑스트라에 불과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혀가실 무렵 마가는 이름 없는 청년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이름 없는 청년이 왜 자기 이야기를 덧붙였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마가의 심정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는 자신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예수님을 팔아버린 유다 선생님, 다른 제자 선생님들, 그리고 내가 가장 존경하는 베드로님의 배신 이야기를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건 성령님의 명령입니다. 저는 지금 당신들을 나쁜 사람들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명령은 그게 다가 아닙니다. 성령님은 제 이야기도 쓰라고 하십니다. 

지금 저는 당신들의 배신 이야기 끄트머리에 제 이야기를 덧붙입니다. 저는 당신들을 욕할 자격이 없습니다. 물론 당신들은 주님의 제자들이므로 후세의 사람들로부터 더 많은 욕을 먹겠지만, 그리고 저 같은 이름 없는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도 욕하지 않겠지만, 그러나 지금 제 마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제 마음은 당신들보다 제가 훨씬 나쁜 놈이라고 고발하고 있습니다. 저는 뭐가 그리 급했던지, 옷도 벗어버리고 도망한 사람입니다. 그 분을 배신한 것은 당신들이나 저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전 정말 나쁜 놈입니다. 제가 저를 향해 돌을 던집니다> 

마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양심선언을 했다고 하겠습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과 우리 성도들은 말하는 방식이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넌 나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내가 나쁘다>고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너 때문이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 탓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 말하는 것일까요? 그 첫째는 성경의 가르침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은 선언하기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배운 우리들은 <우리가 죄인>임을 압니다. 그러므로 난 죄가 없다는 식으로 버티는 사람은 아직 말씀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정말 말씀을 안다면 그렇게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이나 교회 안에서 끊이지 않는 분쟁의 원인은 따져보면 우리가 아직 성경 말씀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우리 안에 성령님께서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마비된 양심을 깨우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돌아보게 하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앉게 만듭니다. 그 결과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아직도 자신은 죄가 없다는 식으로 말하면서 남을 비판하여 분쟁을 일으키는 것은 아직 성령님의 사람이 아니라, 그 영혼이 악령에 의해 조정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종교개혁기념주일입니다. 이번 주간에는 종교개혁과 관련된 행사가 많습니다. 내일 부산진교회당에서는 <부산교회개혁실천연대>가 주관하는 세미나가 있습니다. 논문 발제와 토론이 이어질 것입니다. 저는 토론 사회자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발표할 교수님께서 글을 미리 보내 주셨습니다. 그 분은 한국 교회의 개혁의 과제를 네 가지로 선정했습니다. 그런데 그 네 가지는 모두 구조적인 문제들, 법과 제도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 글을 읽으면서 한 가지 아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법과 조직과 제도의 개혁으로 진정한 개혁이 될 수 있나?>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저는 분명히 믿습니다. 이제는 <메가 트렌드>식의 변화를 추구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법과 조직과 제도를 범사회적으로, 범교계적으로, 범국가적으로, 범세계적으로 바꿈으로 무언가를 이루려는 노력은 한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지금 시대는 <마이크로 트렌드> 시대입니다. 이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변해야 합니다. 작은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종교개혁은 나 한 사람의 변화에서 시작됩니다. 종교개혁은 마틴 루터라는 한 젊은 수도사의 심령에서 일어난 변화로부터 출발했습니다. 루터는 유럽 전체를 개혁한다든지, 교회 전체를 개혁하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자신의 심령에 도사리고 있는 죄악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서부터 시작했습니다. 결국 종교개혁은 개인 개혁이요, 심령 개혁이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변해야 합니다. 저는 늘 목사가 변해야 교회가 변한다는 가르침을 받아왔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목사가 거룩해야 교회가 거룩하고, 목사가 신령해야 교회도 신령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어떤 문제가 생기면 목사는 누구도 원망할 수 없습니다. 결국은 목사 자신의 책임이 제일 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마가가 되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우리 개인의 문제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 각자가 자신의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난 깨끗한데, 저 사람들이 문제야>라든가, <우리는 아무 문제가 없는데, 법과 조직과 제도가 문제야>라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각자의 죄를 발견하고 고백하는 그 순간, 진정한 개혁은 시작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마가가 본문에 자신의 부끄러운 고백을 덧붙인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단지 자신의 죄를 고백하려는 것만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마가가 마가복음을 기록한 것은 그가 벌거벗고 도망하는 일이 있은 후 수십 년이 지난 다음입니다. 대략 30년도 더 지난 다음입니다. 그러므로 마가가 이 구절을 쓸 때는 옛날 일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글을 쓸 무렵의 마가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여전히 두려움에 빠진 사람이었습니까? 지금이라도 벌거벗고 도망할 사람이었습니까? 여전히 예수님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이었나요? 

아닙니다. 마가는 이제 예전의 그 비겁한 죄인이 아닙니다. 이제 그는 변화되었습니다. 그는 어엿한 예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그를 벌거벗고 도망한 젊은이로 남겨두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그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후에 그는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주님은 그의 손을 통해 마가복음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마가복음은 모든 복음서 중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고귀한 이야기를 가장 먼저 기록하는 영광을 마가에게 주셨습니다. 벌거벗고 도망한 한 젊은이가 이제는 주의 종의 옷을 입고 무대 위에 등장한 것입니다. 더 이상 그는 이름 없는 <한 젊은이>가 아닙니다. 그는 마가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에 그의 이름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에 갇혀 순교를 기다리고 있을 때, 바울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 중의 한 명으로 성장해 있었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11절을 보면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도망하던 비겁한 죄인을 불러 그 죄를 용서하시고, 복음의 위대한 사람으로 변화시켜 쓰시는 것, 이게 무엇입니까? 그게 바로 은혜입니다. 주님의 은혜는 그렇게 사람들을 구원하십니다. 마가는 이 고백을 통하여 <보라, 나 같은 비겁한 죄인도 은혜를 받으니, 변화되지 않았느냐? 그러니 당신들도 주님의 은혜를 받으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도 이 은혜를 경험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금식도 하고, 고행도 하고, 울기도 하고, 순례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노력으로는 죄를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시편과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말씀을 연구하면서 깊이 깨달았습니다. <죄인이 구원받는 것은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통해서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씻기 위해 죽으신 것이 은혜다. 그 은혜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경을 통해 이 진리를 알게 되었으므로 <오직 성경으로>라고 외쳤고, 은혜로 구원받는 것이기에 <오직 은혜로>라고 말하게 되었으며, 그 은혜를 자신의 것으로 받는 방법이 믿음뿐이기에 <오직 믿음으로>라고 외치게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직 은혜로 됨을 믿으십시오. 은혜로 구원받습니다. 마가도 은혜로 구원을 받아 주님의 종이 되었고, 루터도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주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 사실을 믿으십시오.은혜를 사모하십시오. 은혜가 임하면 그 어떤 죄인도 회개하고 변화되어 주님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물론 하루아침에 새 사람이 되지는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조금씩 끌어올리고 변화시키십니다. 마가도 미숙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가 성령을 받고, 은혜를 받아, 바울 사도의 수행자로 제1차 전도여행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는 부족함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전도 여행의 고단함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중간에 돌아오는 실수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는 끊임없이 그를 훈련시키고 변화시키셨습니다. 그는 후에 베드로에게 말씀을 더 배웠고, 결국은 성숙한 주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끊임없이 영적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늘 기도해야 합니다. 늘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늘 성령 충만함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늘 은혜로 우리를 채우기 위해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은 한 번의 사건으로 완성되는 게 아니라,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 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은혜로 채워지면 우리는 고귀한 사람이 됩니다. 이름 없는 한 청년이 위대한 주의 종 마가로 우뚝 선 것과 같습니다. 시인 <롱펠로우>는 어느 날 갑자기 떠오른 시상을 적을 종이가 없어서 휴지에 적었습니다. 그런데 그 휴지 조각은 후에 6천 달러에 팔렸습니다. 작은 종이 한 장은 보잘것없지만, 거기 한국은행의 직인이 인쇄되어 나오면 그것이 돈이 됩니다. 우리는 그 종이조각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위에 주님의 은혜의 도장이 찍히면, 우리는 주님의 사람이 됩니다. 이게 은혜입니다. 이 은혜에 충만한 성도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날마다 은혜 위에 은혜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은혜로 변화된 사람은 그 은혜에 감격하여 감사와 헌신의 삶을 살게 됩니다. 여러분, 다음 주일은 감사주일인데, 무엇에 대해 감사하시겠습니까? 바로 이 은혜,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으심에 대한 감사가 넘쳐야 할 것입니다. 감사는 참 헌신을 가능하게 하고, 주변 사람을 사랑하게 하고, 참 봉사를 가능하게 할 것입니다.

어제도 부산의 모 교회 장로님이 우리 교회에 오셔서 5백 만원을 놓고 가셨습니다. 그 분은 우리 교회의 비전이 너무도 아름답고 귀하다고 하면서 일천 만원의 헌금을 작정하셨는데, 그 두 번째 오백 만원을 드리신 것입니다. 그 분은 주보에 광고도 하지 말아 달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분이 누구인지 알려드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여러분들에게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닙니다. 우리 교회 교인도 아닙니다. 무엇이 그 분으로 거룩한 비전에 참여하게 만들었을까요? 그 마음을 움직인 것이 무엇일까요? 그건 다름 아닌 구원받은 감격이요, 은혜에 대한 감사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다음 주일 우리가 주님께 드릴 예물을 준비할 때, 그런 감사의 믿음으로 하게 되길 원합니다. 내일 새벽부터 나오셔서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되새기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다음 주일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는 한 영혼을 모시고 오시길 바랍니다. 이 모든 것은 은혜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격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 한 주간 은혜와 감사가 여러분의 마음을 채우게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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