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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경을 이루기 위한 주님의 고난 (마 26:4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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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이루기 위한 주님의 고난 (마 26:47~56)

자신이 죽어 죄된 인생을 살려낼 수 있다면 그 생명의 길을 위해 고난을 짊어질 수 있는가?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를 통해 고민하고 슬퍼하면서도 예수님은 고난의 잔을 수용하신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주님은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소원한다. 예수님은 자고 있는 제자들에게 다가와 예언을 하신다.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리라.”

고난을 수용한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는 다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자기 자신을 붙잡으러 온 사람에게 삶의 전부를 맡겨버리고 죽음을 향해 나아가겠다는 결단을 한 것이다.

땀방울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며 고민하던 예수님. 이제 잡히시는 밤, 예수는 우리들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가? 태연함이다. 두려움을 초월한 모습이다. 자신의 길에 대해 가진 확신의 모습이다. 무엇보다도 붙잡으러 온 무리들에게 무저항이다. 비폭력이다. 순순히 죽음에 자기를 맡기고 가는 초연성이다. 

나는 이 주님을 보면서 한없이 작아지는 나를 보게 된다. 조금만 억울해도 요동하고 흔들리는 나, 조금만 손가락질을 당해도 분풀이를 못해서 진노하는 나, 예수님을 모셨다고 하면서도 삶의 환경에 초연하지 못하니 얼마나 나는 초라한가? 예수님을 따른 지, 아니 목회를 한 지 30년이 되었다. 그런데 아직도 나의 삶의 태도는 소극적이다. 희생 앞에서 두려워한다. 예수님을 따르자고 하면서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주님의 시선이 있는 곳에 나의 시선을 두지 못하고 있다. 

주님은 왜 이렇게 잡혀가는 자리에서 요동함이 없이 당당한가? 무엇에 사로잡혀서인가? 그 당당한 주님의 모습을 보자. 잡혀가는 순간에 나온 예수님의 언행심사를 보자.


1. 위선과 거짓의 제자를 허용한다. (마26:50)

마26:50 “예수께서 가라사대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저희가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느니라.”고 하였다.

예수님의 제자인 가룟 유다는 무리들을 이끌고 왔다. 검과 몽둥이를 들고 예수를 잡아가기 위해 왔고 유다는 군호를 짰다. “내가 입 맞추는 자가 예수이니 그를 잡으라.”고 하였다. 유다가 예수께 나아와 “랍이여, 안녕하십니까?”하고 입을 맞춘 것은 배반의 키스다. 선생님을 은 30냥에 팔아버리는 배은의 키스다. 아, 무서운 거짓의 입술이여, 위선의 인사말이여. 주님을 체포하기 위해 앞장 서서 역할을 담당하는 사단의 종이 되고 말았다. 

그 위선과 거짓으로 가면을 쓴 유다라는 제자를 주님은 꾸짖지 않으신다. 이미 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하였다고 경고했고 내 그릇에 손을 같이 넣는 자가 나를 팔 자라고 말씀해 두셨기에 주님은 그를 허용한다. 오히려 그 가룟 유다! 원수의 종노릇하는 유다를 친구라고 불러 주셨다. "친구여!"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는가? 주님은 바로 이런 원수된 죄인을 위해 죽기로 작정하고 십자가를 지기로 작정했기에 유다도 주님에게는 친구다. 사단의 종노릇하는 이에게 불러주는 이 호칭, 친구라는 말은 너무도 가슴을 저리게 한다.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유다의 위선 앞에 서서 자기를 내어 맡긴 예수님은 더 이상의 후회나 안타까움을 보이지 않으신다. 무엇이 이렇게 위선의 제자를 허용하고 있는가?


2. 충성된 제자의 행동을 만류한다. (마26:51~52)

마26:51의 말씀을 보면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린다.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무리들 가운데 열세인 제자 한 사람이 다수를 헤아리지 않고 주님을 지켜드리려고 한다. 주님을 위해 검을 들었다. 주님을 위해 칼집을 버리고 대제사장의 종을 겨누었다. 그리고 그 종의 귀를 잘라버렸다. 너무나도 멋있는 제자의 모습이다. 

헌신을 맹세하고 의형제 결의를 한 사람도 자신의 입장이 불리하면 숨어버린다. 검과 몽둥이의 숫자가 많고 싸워볼 수 없는 약함을 알게 되면 숨소리마저 죽이고 가만히 있는다. 그런데 이 제자는 주님을 위해 싸우다가 죽으려고 하는 것이다. 

나는 고등부 시절, 고향 교회 담임목사님의 심방 행렬을 본 적이 있다. 시내 사거리에서 교회의 장로님 아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장로 아들이 담임목사님께 다짜고짜 행패를 부렸다. 아버지 장로님께 불만이 많은 이 아들은 거리에서 폭력을 휘둘렀다. 그런데 그 자리에 같이 가던 사람은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다 도망가고 목사님 혼자만 남아 있었다. 이게 웬일인가? 어떻게 저럴수가. 목사님을 따르던 성도들이 그의 행패로부터 피하기 위해 사라져 버리다니, 참 분하고 놀래버린 광경이었다. 누구 한 사람이 나와서 가로막고 싸워야 할 것 아닌가? 

지금도 이런 생각에 변함이 없다. 편 들어주는 교인이 제일 예쁘다. 감격하게 된다. 잊을 수 없다. 그런데 예수님은 충성을 다하는 제자의 행동을 만류하신다. 마26:52을 보라.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진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아! 주님은 왜 이렇게 엉뚱하신가? 칼을 뽑았으면 사용해야지, 사용하지 않는다면 뽑지 않은 것만도 못하지 않는가? 그러나 주님의 만류는 진심이었다. 검을 가진 자는 다 검으로 망한다는 이 말씀을 보면 제자를 흥하게 하고 싶어서 만류하였다. “칼집에 칼을 꽂아두라.” 칼집에 갈을 두려고 갈을 가지고 다니는가? 그러나 주님은 칼집에 도로 꽂는 칼이 되게 하신다. 

주님은 살인, 폭력, 상해와 같은 일을 원치 않으셨다. 누구의 잘못이든지 간에 주님은 비폭력을 가르치신다. 인도의 간디가 이 비폭력 사상을 가지고 살았고 기미 독립 운동 선언서의 만세 시위 운동도 이 비폭력 신앙의 사상을 담아 기록되었다. 역사에 나타난 마틴 루터 킹 목사도 비폭력, 무저항의 시위로 인권을 평등하게 하는 운동을 성취하였다. 

오늘 우리의 삶의 주변에는 자기를 정당화하는 폭력이 너무도 많이 산재해 있다. 주먹의 폭력, 언어의 폭력, 누명 씌우기의 폭력이다. 그러나 내게 도움이 되고 충성을 다하는 제자의 폭력을 만류하는 주님의 생각은 폭력이 흥왕의 길이 아님을 분명히 알게 해준다. 도대체 무슨 힘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제자를 만류하게 하였는가?


3. 본인의 능력조차도 사용하지 않고 내려놓는다. (마26:53)

마26: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주님은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능력이 있었다. 하늘의 천군을 동원하는 권세가 있었다. 주님이 하늘 아버지께 구하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고난과 희생, 죽음을 거절하고 당신 자신의 이름만 위해서 살려고 하셨다면 주님은 천군을 구할 수 있다. 하늘의 힘을 알고 있는 예수님은 12영 더 되는 천사를 움직일 수 있었다. 12영 더 되는 천사란 1영이 6,000명의 군대 조직이다. 그러니까 무리들이 검과 몽둥이를 들고 나왔다면 12영 즉 72,000명의 천군 천사로 몽땅 이 폭력의 무리들을 소탕할 수 있다는 선언이다. 

주님은 힘이 없어서 당하신 것이 아니다. 힘이 없어서 체포당한 것이 아니다. 얼마든지 힘의 능력으로 권세로 한다면 잡혀갈 필요가 없으신 분이었다. 그런데 주님은 하늘을 움직이지 않는다. 이 일만큼 능력과 권세를 사용하지 않는다. 가장 약한 자처럼, 가장 연한 순가지처럼, 가장 미련하고 무능한 자처럼 잡혀가신다. 

도대체 무엇이 주님을 이렇게 고난에 내 던지는 몸이 되게 하였는가? 
다른 것이 아니다.

마26:54에 보면 성경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이는 마26:56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고 하였다. 즉, 하나님의 말씀의 예언이 예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성취하려는데서 온 순종 신앙이었다. 힘을 과시하지 않으신 것도, 위선을 비난하지 않으신 것도, 제자를 만류할 수 밖에 없으셨던 것도 다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는 신앙의 결단이었다.

말씀은 하나님의 것이다. 예언도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담긴 구원의 설계도이다. 그 말씀을 어기면 안된다. 말씀이 이루도록 성취되게 살아야 한다. 어떤 시련, 어떤 고통, 어떤 고난이 일어나더라도 성경을 이루도록 하는 삶을 사는 것이 메시야의 길이요, 하나님의 아들의 길이요, 주님의 사명의 길이다.

아! 성경이 이루어지도록 사는 삶, 우리가 분노하고 폭력을 쓰고, 상처를 입히고 하는 삶이 성경을 이루지 못하는 불순종이라면 더 이상 붙잡아서는 안된다. 복수하고 원수를 갚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난다면 내려놓아야 한다. 

반대로 아무리 남편을 기쁘게 하고 아내를 기쁘게 하고 상천하지 만민을 기쁘게 하는 것일지라도 예언을 외면하고 말씀을 거스르는 삶이라면 더 이상 계속해서는 안된다. 여러분과 나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고 우리 모두 말씀을 이루기 위해 사는 삶을 결단해야 한다. 꿈도 미래도 다 내려놓을 수 있고 권리도 요구도 포기할 수 있음은 말씀을 이루려 선지자의 글을 이루려는 순종 신앙에서 나온다.

이제부터 자신의 몸을 산제물로 올려드리자. 누군가를 향해 겨눈 칼, 칼집에 칼을 도로 꽂고 빈손으로 서라. 미움의 칼, 위선의 칼, 살인의 칼들을 칼집에 꽂고 순명의 삶을 위해 거지가 되고 바보가 되고 조롱을 받아도 그것이 순명이기에 거뻐하자. 순명은 생명이요, 순명은 사는 방식이며 순명은 사는 이유다. 다툼, 분쟁, 폭언, 학대, 증오, 이혼의 화살을 쏘아대며 심장에 피를 흐르게 하는 것을 버리고 말씀을 이루는 삶을 살자. 

1880년 동광리 천태산 기슭에서 태어난 이세종은 성경을 읽다가 변화를 받았다. 그는 말씀대로 살았는데 아내는 그때부터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갔다. 두 번이나 시집을 갔다. 그때마다 이세종은 아내의 세간을 지게에 지워 옮겨주었다. 결국 남편의 감화로 부인 문순희는 마음을 고쳤고 이세종이 산 속 은거 생활을 할 때도 병수발을 들었다. 이세종은 말씀을 이루려고 살았다. 그의 부인은 잘 믿는 남편을 만나 행복했다고 감사해했다. 

순명의 신앙을 가진 말씀을 이루는 삶, 성경을 이루기 위한 순명을 좌우명으로 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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