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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도의 존귀함과 교회의 영광 (엡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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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존귀함과 교회의 영광 (엡 1:1~2)


I. 에베소서를 공부하는 목적

한 젊은 엄마가 화장대 앞에 앉아 얼굴에 콜드크림을 발라 문지르고 있었습니다. 꼬마 아들 녀석이 궁금한 듯 물었습니다. "엄마, 뭐하는 거야?" "응, 엄마가 예뻐지기 위해 하는 거야." 잠시후 엄마가 화장지로 얼굴의 콜드크림을 닦아내자 아들이 안타까운 듯 말을 합니다. "엄마, 왜 닦아내. 벌써 포기한 거야?" 

때로 교우들 중엔 건강한 교회생활을 포기한 사람처럼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행여 우리 가운데 예쁜 신앙생활을 포기하신 분이 계십니까? 확실한 믿음 생활을 포기하신 분이 계십니까? 행복한 교회생활을 포기하신 분이 계십니까?

오늘부터 우리는 '에베소서'를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에베소서를 통해 교회생활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는 목적이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20:31에 의하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영생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요한일서 5:13에서는 우리에게 영생이 있음을 확신하기 위해서 라고 말합니다. 요한일서 1:3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깊은 사귐을 갖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예수님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을 공부합니다. 내몸 어디를 찔러도 A형 - 똑같은 나의 피가 흐르듯이 성경 어디를 찔러도 예수님이 흘러 넘칩니다. 

특별히 에베소서는 편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를 믿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했습니다.(고후3:13) 에베소서를 공부하는 동안 우리는 에베소서와 꼭같은 편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편지 노릇을 잘하기 위해 성경을 공부합니다. 

에베소서는 "주님 몸된 교회의 영광"을 보여주는데 그동안 한국교회가 교회의 영광을 보여주는 편지 노릇을 잘 못했다는 송구함이 있습니다. 

「게릴라 PR」(마이클 레빈)이란 책에 보면 "깨어진 유리창 법칙"이란게 있습니다. 
기업의 사소한 실수로 고객들에게 불쾌감을 주고 신뢰를 깨뜨린 사건 하나가 기업의 미래를 뒤흔들 수 있다는 이론입니다. 저자는 기업의 유리창이 왜 깨지는지, 어떻게 깨어진 신뢰의 유리창을 수리할 수 있는지 깨어진 유리창을 신속히 잘 수리한 기업이 얼마나 큰 보상을 얻을 수 있는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여러분, 한국교회 유리창이 깨어졌다고 느끼지 않습니까? 교회나 성도들이 잘못해서 깨어지기도 하고 못된 것들이 돌을 던져 깨어지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깨어진 유리창을 한국교회가 모두 함께 일어나 수리를 해야 할 때인데 더 깨뜨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에베소서를 공부하는 동안 우리의 신앙이 수리되고 교회를 향한 사랑과 애정이 수리되고 우리교회와 한국교회가 수리되는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 66권 가운데 어느 책이 귀하지 않겠습니까만 사람마다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좋아하는 성경이 있습니다. 삶이 행복하고 기쁠 때 좋아하는 성경이 있고 병들고 어려울 때 좋아하는 성경이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성경이 있고 나이 들고 늙어 가면서 좋아하는 성경이 있습니다. 

루터는 갈라디아서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로마 천주교회의 타락과 맞서 싸웠던 루터는 확실한 구원교리, 변증적인 글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교리 논쟁적인 갈라디아서를 많이 있었습니다. 

반면 같은 종교개혁자이지만 칼뱅은 에베소서를 가장 좋아했다고 합니다. 주님이 세운 건강한 교회에 대한 열망을 가진 칼뱅은 에베소서를 제일 많이 읽었다고 합니다. 존 낙스는 마지막 임종의 자리에서 칼뱅의 에베소서 강해를 읽으며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스코틀랜드 그라스코대학 윌리암 바클리 교수는 주일밤 8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성경강의 - 성서학당을 섬겼습니다. 백발의 노 교수는 까만 목회자 까운을 입고 칠판 앞에서 백묵을 손에 들고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이 바클리 교수의 성경 강의를 듣지 않으면 그 다음날 사람들의 대화에 끼지를 못했다고 합니다. 이런 바클리 교수는 에베소서를 가리켜 "서신의 여왕"이라고 했습니다. 칼뱅은 에베소서를 가리켜 "바울 작품의 면류관"이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는 6장밖에 되지 않는 비교적 짧은 서신임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주옥같은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 등 바울 신학의 주요사상들이 담겨있습니다. 그래서 성서학자들은 에베소서를 "바울 신학의 진수, 요약, 바울 사상의 왕관..." 극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에베소서는 에빌골빌 -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와 함께 옥중서신으로 불려집니다. 신약 성경 가운데 가장 심오한 진리들을 다루는 서신의 면류관의 옥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의미가 대단히 큽니다. 가장 어두운 환경 속에서 가장 심오한 진리가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이 쓰는 사람은 가장 어려운 환경에서도 가장 아름답게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가장 큰 고통 속에서 가장 빛나는 일을 만들어 갑니다. 옛 공산치하에서 모진 고문을 견디어낸 범브란트 목사님은 "하나님의 빛난 선물은 언제나 고난의 검은 보자기에 쌓여 있더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에베소서는 바울이 로마에 투옥되어 있을 때 가신의 사역지 중 가장 오랜 사역을 했던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물론 학자들 중에는 오래된 사본 가운데 "에베소에 있는"이란 말이 빠져 있어서 유독 에베소 교회만이 아니라 모든 교회에 보낸 회람서신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신약 27권 중 12권 내지 13권을 쓴 것으로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바울 서신은 대개 개교회가 처한 독특한 상황과 문제를 다루기 위해 쓰여졌습니다. 어떤 서신을 가리켜 "상황서신"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로마서나 에베소서는 상황서신이 아닙니다. 에베소서는 교회의 어떤 특정한 문제를 다루기보다는 성도의 삶, 교회의 본질을 포괄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에는 논쟁이 없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높은 하늘에 올라가 도시를 내려다 보면 도시의 전체 그림이 한눈에 보입니다. "저 산맥의 끝자락에 저 마을이 자리잡고 있구나. 강물 줄기가 저렇게 흐르는구나!" 이처럼 에베소서는 "하늘에서" 내려다 본 성도의 삶을 제시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에베소서에만 나오는 "하늘에"(1:3, 1:20, 2:6, 3:6, 6:12)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미국의 그랜드 캐년을 땅에서 보는 것보다 비행기를 타고 올라가 내려다 보면 또다른 장관에 감격과 희열을 느끼게 됩니다. 이처럼 성도의 삶, 교회의 영광을 하늘에서 바라보면 새로운 존귀함과 영광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II. 에베소 교회

에베소는 당시 소아시아 무역의 중심지로 상업과 무역이 크게 발달되어 있던 아시아에서 가장 큰 도시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종교의 중심지로 고대 7대 불가사이 중의 하나인 로마인들이 다이아나라고 부르는 아데미(Artemis) 신전이 이곳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에베소인들은 이 신전이 하늘에서 떨어졌다고 생각하여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 신전의 제사는 쾌락, 혼음 - 성적 타락과 관계가 있었습니다. 

아데미 신전 외에도 에베소엔 한번에 2만 5천명이 들어가는 대형극장이 있었는가 하면 각종 우상종교가 난무하여 축사와 마술 등 악령의 소굴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 타락의 도시에 복음이 어떻게 들어갔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제2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에베소서를 들러 잠깐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칩니다. 사도 바울이 본격적으로 에베소서에 복음을 전한 것은 제3차 전도여행을 할 때입니다. 에베소에서 바울은 관습대로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다가 그 후 유명한 두란노 서원으로 옮겨 약 2년간 목회를 합니다. 이 우상의 도시에 복음의 능력이 얼마나 힘있게 나타났는지 우상을 섬기던 수많은 사람들이 부적과 우상의 책을 다 가지고 와 불태워 버립니다. 

그 값이 은 5만에 달했다고 합니다. 은 하나는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요즘 하루 품삯을 5만원으로 잡으면 자그마치 25억에 달하는 돈입니다. 이때 우상 제조업자 데메드리오(Demetrius) 같은 사람들이 사업에 큰 손해를 보게되자 사람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그리스도인을 핍박합니다. 아데미신을 모독하는 자들이라는 것이지요. 이리하여 사도 바울은 에베소 3년 사역을 마치고 이곳을 떠나게 됩니다. 

에베소를 떠나며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장래를 걱정하며 성도들을 격려하는 말이 사도행전 10:29 이하에 나옵니다.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사람들을 혼란케 할 터이니 교회를 잘 지켜 달라고 합니다. 

말씀의 사역자 사도 바울을 전송하며 에베소 교인들은 바울을 안고 목놓아 웁니다.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니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행20:36-38)

이처럼 바울을 향해 애정이 끓고 있던 에베소 교회에 사도 바울이 투옥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성도들이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또 낙심이 되었을까요? 사도 바울은 낙심 중에 있는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교회가 얼마나 영광스런 곳인지, 성도가 되었다는 게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종말에 우리는 어떻게 되는지를 설명하여 저들의 믿음을 돈독히 해 주고 싶었습니다. 

바울 자신도 이방 교회를 위해 갇힌 것이니 그것조차 영광이라는 겁니다.(엡3:13)
염려만 하지 말고 바울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합니다.(엡6:19-20)

필을 들어 바울은 자신은 누구이며 에베소 교회 교인은 누구이며 결국 이 고통 중에 우리는 어떻게 승리할 것인지를 오늘 본문 1:1-2에서 밝힙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III. 에베소서

일반적으로 에베소서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눕니다. 1장에서 3장까지는 교리부분, 4장에서 마지막 6장까지는 실천부분입니다. 3장 교리가 끝나는 마지막은 "아멘"으로 맺고 4장 실천부분 시작은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고리를 연결합니다. 사도 바울은 교리와 실천을 따로 떼어서 생각하지 않습니다. 교리와 실천은 뿌리와 열매처럼 멀쩡한 관계를 가지고 연결되어 있습니다. 

중국의 전도자 위치만 니의 책 중에 「좌행참 - Sit - Walk - Stand」라는 책이 있는데 이 분은 에베소서를 「앉기 - 걷기 - 서기」 세 부분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전체에 흐르는 일관된 주제가 무엇일까요?
토인비는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세 종류로 나누었는데 배를 타고 가는 사람과 같다. ①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배에서 나누는 음식이 뭘까? 여기에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있고 ② 두 번째 주변에 도시를 지나가고 아름다운 산맥을 지나갈 때 좌우에 펼쳐져 있는 그 경관들을 구경하는데 온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③ 목표점에 도달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 목적지를 알고 목적지에서 해야 될 일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 가지 주장이 있을 수 있습니다만 저는 에베소서를 「성도의 존귀 그리고 교회의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성도들이나 세상 사람들이나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성도는 하나님의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존귀한 존재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교회도 허물 많고 약점 많은 인간집단, 종교단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그리스도의 몸 - 영광스런 천국 공동체 -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이 성도의 존귀함과 교회의 영광을 표현하기 위해 에베소서에서 반복되는 단어들이 등장합니다. 

1) 에베소서엔 신약 다른 곳에서 나타나지 않는 "하늘에"라는 단어가 여러 번 나타난다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2) 그 하늘의 관점으로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을 봅니다. 그 "하늘에"라는 단어와 의미상 같은 뜻을 가진 바울의 단어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 안에"라는 단어입니다. 

"엔 크리스토"라는 그 유명한 헬라어입니다. 바울 서신에 164회나 등장하는 단어인데 그 중에서도 옥중서신에 유독 많이 등장하는 말입니다. 대단히 역설적이지요. 바울이 지금 몸은 감옥에 있지만 그 영혼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몸은 세상 권세에 갇혀 있지만 그의 영혼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혀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겁니다. 

① 사도 바울의 "엔 크리스토 - 그리스도 안에"는 대단히 체험적인 고백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길은 율법을 많이 공부하고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종교의식을 잘 행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종교일뿐 바울을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난 후 구원과 자유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음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모시는 것은 신비체험입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다니? 내가 예수 안에 거하다니? 바울은 이 신비를 "엔 크리스토 - 그리스도 안에"라는 단어로 소화했습니다.

② 엔 크리스토 - 그리스도안에는 사도 바울 신학의 뿌리입니다. 바울은 그의 모든 신학 - 신론, 교회론, 성령론, 종말론, 구원론, 선택론, 예정론 등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라는 구조로 해결합니다. 우리가 바울 신학을 잘 몰라도 시험지에 "엔 크리스토 - 그리스도 안에"라고 대답하면 모두 100점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요? 그리스도 안에서 만나는 신입니다. 
구원이 뭐요?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교회가 뭐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공동체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종말이 뭐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예정이 뭐요?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③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사람 - 성도라고 하는 겁니다. 
성자란 도덕적 차원이 아닙니다. 성자는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내 인생의 목적이 그리스도안에, 내 삶의 목표가 그리스도 안에, 내가 하는 일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이 책은 한글로 쓰여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쳐 주기 때문에 성경입니다. 
이 건물은 크든 작든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고 예배하는 곳이기에 성전입니다. 
이 탁자나 기재들은 아무리 싸구려라도 성구입니다. 
주일은 비가 오고 춥고 덥고 찌뿌둥 해도 성일입니다. 
누가 뭐래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당신은 성자, 성도입니다. 

3) 반복되는 단어 - 우리를 주목시키는 단어가 있습니다. 하늘에서 바라본 성도의 존귀함, 그리스도안에 있는 교회의 영광을 표현하는 단어 「풍성과 충만」이란 단어가 에베소서에 반복되고 있습니다. 여섯 장 안에 영광이란 단어가 8번, 풍성이란 단어가 5번, 충만이란 단어가 7번 나옵니다. 

풍성과 충만은 비슷한 말이지만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해 놓으신 넉넉한 밥상 같은 것이 풍성이라면 그 밥을 내가 먹고 행복한 상태가 충만입니다. 풍성은 객관적인 하나님의 은혜이고 충만은 주관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위해 풍성한 은혜와 능력과 권세를 준비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내가 충만히 누리길 원하십니다. 


IV. 본문: 서두 문안

에베소서 본문으로 들어가 보십시다. 오늘 본문 1:1-2은 서두 문안입니다. 우리는 편지를 쓸 때 "... 에게, ... 전상서" 편지를 받는 수신자를 먼저 씁니다. 그리고 문안인사를 하고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발신자는 제일 마지막에 "... 로부터, ...올림"이라고 기록합니다. 바울은 헬라시대 사람이기 때문에 당시 이들의 관례를 따르고 있습니다. 누가 편지를 쓰는지 발신자를 먼저 밝힙니다. 그리고 수신자를 밝히고 문안 인사를 합니다. 오늘 본문도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발신자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된 바울"입니다. 바울 자신을 사도라고 말합니다. 사도란 에베소 고을의 "사또"가 아니라 "보냄을 받은 자"란 뜻으로 예수로부터 직접 보냄을 받은 자란 뜻입니다. 요즘 정치적 용어로 말하면 예수님 나라의 대사입니다. 본국의 최고 통치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아 보냄 받은 사람입니다. 

사실 사도란 예수님의 12제자를 일컫는 말인데 사도 바울이 어디를 가든지 비난의 대상이 되고 사도 바울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제멋대로 사도라는 겁니다.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는데 예수님하고 밥 한끼 먹어본 적이 없는 자가 예수님으로부터 부름 받았다고 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보냄 받았다고 합니다. 이 사도권 때문에 늘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뭐라고 얘기를 하는고 하니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아야 되는게 사도냐? 나도 다메섹 도상에서 살아계신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부름을 받았다는 겁니다. 그 분의 사랑을 덧입었고 그 분이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보냄을 받았다는 겁니다. 내 멋대로 자기 뜻에 따라서 나는 사도가 된 것이 아니다. 바로 이런 자신의 확신을 담아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나의 직분과 존재가 하나님의 뜻으로 된 것이다" 이것이 신앙의 출발입니다. 
"주님이 나를 찾아오셔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부르시고 나를 보내셨다" 이 믿음 - 이 확신이 없기 때문에 걸핏하면 절망하고 낙심하고 시험에 드는 겁니다. 왜 요즘 교인들의 믿음이 흔들리고 자신의 직분과 사명을 소홀히 감당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주셨다는 확신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내 안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일어난다는 확신이 모자라서 그렇습니다. 

"교회 성도로, 사역자로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다" 이 확신이 없기에 교회에 대한 애정과 헌신이 없는 겁니다. 이 확신이 없기에 교회의 비전을 벗어나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사는 겁니다. 

가정도, 부모도, 자식도, 직장도, 기업도,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내게 주신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대한민국 이 땅에 나를 살게 해 주셨다" 이 믿음이 애국심입니다. 이 믿음이 있을 때 이 나라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나와 관계가 있고 또 내 책임이 됩니다. 이 믿음을 잃으면 이 땅에 살기가 싫어집니다. 책임없는 비판과 욕만하게 됩니다. 자기는 아무 잘못이 없는 줄 압니다. 하나님이 주셨다는 확신이 있을 때 내가 사는 땅이 영광스러워집니다. 

사도 바울의 편지를 받는 에베소교회 수신자를 뭐라고 표현합니까?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입니다. 
음행과 쾌락의 도시 한복판에서 영적 전투를 하는 사람들 - 온갖 불이익과 핍박을 견디며 사는 그들을 일컬어 성도들 그리고 신실한 자들이라고 합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 구별된 삶을 살아 주리라는 사도의 신뢰가 담긴 말입니다. 

적어도 교인은 성도입니다. 신실한 자들 - 믿을만한 사람들입니다. 교인의 기본적인 자세는 "나는 이 땅에 속하지 않았고 하나님께 속한 성도"라는 것입니다. 내 소속은 마귀의 나라, 이 세상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이 구별의식이 없을 때 예배드리는 주일에 대한 구별의식 마져 사라지는 겁니다. 
초대교회 성도나 우리나라 초기 성도들은 주일 예배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 의식이 지나쳐 주일이면 빨래도 안하고 공부도 안하고 음식도 사먹지 않는 율법주의자가 된 것입니다. 

자신에게 물어 봅시다. 
하나님이 나를 믿을만한 자라고 부르실까? 나는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신실한 자인가? 세상이 오늘 성도를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하는가? 적어도 바울이 수신자를 "성도요 신실한 자"라고 한 것은 에베소 교인들이 자신의 편지를 신실하게 읽어주고 험한 세상에서 성도로 살기위해 몸부림을 해주리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얘기는 오늘 에베소서를 공부하게 될 나는 누구인지? 어떤 자세로 공부에 임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성도요 신실한 자로서 이 에베소서를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에베소서를 받아 먹는 여러분 모두에게 "은혜와 평강"이 넘치길 축복합니다. 
은혜가 먼저이고 평강이 뒤를 따릅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사랑을 받은 것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평강은 구원받은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 행복한 관계를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평할 때 나 자신과도 화평할 수 있습니다. 이웃과도 화평하고 행복한 관계를 누릴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교회사가 이만열 교수의 글에 보면 한국교회 초기시절 탐관오리들은 교회가 있는 고을엔 부임을 꺼려했더랍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정직하고 신실하여 탐관오리들이 발을 붙이기 어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에베소서를 공부하는 동안 힘든 세상에서 우리 성도들이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를 확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의 영광이 되살아 나기를 바랍니다. 한국교회의 깨어진 유리창이 잘 수리되고 신뢰가 회복되길 바랍니다. 교회에 대한 애정과 사랑이 타오르길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신실한 자로 인정되길 원합니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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