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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라에서 엘림을 바라보자 (출 15: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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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에서 엘림을 바라보자 (출 15:22~27)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행하였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 물샘 열 둘과 종려 칠십주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우리의 인생은 아침부터 밤까지 선택으로 가득 차 있다. 아침에 일어나면 어떤 옷을 입을 것인지, 교회에 가서 어떤 자리에 앉을 것인지,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면 기도를 먼저할 것인지 말씀을 먼저 읽을 것인지 등등 우리는 수많은 것을 선택하면서 살아간다. 

우리의 인생은 이렇게 선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우리는 선택의 결과를 반드시 책임져야 한다. 그런데 선택은 ‘치명적인 선택’과 덜 치명적인 선택’으로 나눌 수 있다. 치명적인 선택이란 마땅히 선택해야 할 것을 선택하지 못할 때에 치명적인 결과를 맞게 되는 형태를 말한다.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선택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구원이 있고 없고에 관련된 선택이기 때문에 치명적인 선택이다. 어떤 의미로는 결혼도 치명적인 선택이 될 수 있다. 반면에 덜 치명적인 선택은 일상생활 안에서 하는 일상적인 선택을 말한다. 예를 들면 음식을 선택하는 것이나 summer time 때에 시간을 변경하는 정도의 일이다. 이것은 덜 치명적인 선택일 수 있다. 

우리가 선택을 이해할 때에 우리의 습관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좋은 선택을 하게 될 때에 우리는 좋은 습관을 가지게 된다. 공부라는 좋은 선택을 하게 되면 공부라는 좋은 습관을 가지게 되는 것과 같다. 우리의 좋은 습관은 반복되는 좋은 선택을 통해서 가능해진다. 

예를 들면, 우리는 웃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고 찡그리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다. 즉,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 분과 동행하면서 늘 웃는 것을 선택하면 그것이 우리의 습관이 된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이라는 책이 있다. 그 안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어떤 환경과 상황 속에서도 좋은 습관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신앙생활의 선택은 곧 영적인 습관을 만든다. 그러므로 좋은 영적 선택은 좋은 영적 습관을 좌우한다. 어떻게 하면 좋은 영적 습관을 가질 수 있나? 좋은 습관은 어떤 환경 속에서도 늘 은혜를 받는 사람들에게 가능하다. 반대로 항상 은혜를 피해가는 사람도 있다. 습관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좋은 습관은 오래 될수록 좋은 것이지만, 나쁜 습관은 오래 될수록 뽑기가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좋은 습관은 늘 은혜로 나아가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영적습관에 달려있다.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후 삼일이 지나서 먹을 물이 필요할 때의 상황을 보여준다. 그들은 목마름 가운데 한 곳에 도착하는데 그곳의 이름이 ‘마라’였다. 그 이름은 쓰다는 뜻이다. 그 지역은 바다와 가까워서 그곳의 물에는 염분이 많이 녹아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예 생활을 오래하다보니 좋은 영적 습관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지속해서 노력하지 못하고 마라에서 처절하게 깨어지고 만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나쁜 습관이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은 어떠한가? 오늘은 우리가 가져야 할 두 가지 영적 습관에 관하여 나누어보자. 하나는 입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눈에 대한 것이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가장 어려움을 느끼는 것이 또한 입과 눈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에 대하여 승리해야 한다. 그러면 무엇이 진실로 좋은 습관인가?

(1) 원망하기 보다는 기도하기를 선택하는 습관이다.

삼일만 물을 얻지 못해도 사람의 습관이 나타난다. 우리 인생에는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상대와 사계절을 다 지내봐야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진정한 친구는 가장 어려울 때에 구별되고 그 정체를 알 수 있게 된다. 궁지에 몰리면 그 사람의 참 모습이 드러나게 되는 법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친구를 믿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진실한 친구이다. 삼일을 굶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도적질을 하려고 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건넌 뒤 첫날을 잘 지냈을 것이다. 그러나 둘째 날이 되니 목마름으로 인해서 신음소리를 내게 되고 인내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셋째 날, 그들의 고통이 점점 심해지면서 그들은 마라에 이르게 된다. 참고 참았던 그들은 정신없이 마라의 물을 마셨을 것이고 그것이 쓴 물임을 알게 되면서 마침내 참았던 원망이 터져 나왔을 것이다. 

그들의 습관은 원망이었다. 그들의 원망은 광야 생활 내내 계속되었다. 
24절을 보자. ‘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그들은 모세를 원망하였다고 했다. 원망이란 단어는 몸에 불평이 붙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그 다음 절인 25절에는 믿는 성도들이 가져야 할 자세가 나와 있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모세는 원망을 선택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열정을 다하여 간구하는 자세를 선택하였다. 그 때에 하나님은 한 나무를 보여주셨고 그것을 물에 던지니 물이 달아져서 모든 사람들이 마실 수 있게 되었다. 

성도의 덕목은 원망이 아니라 기도이다. 원망하는 사람은 절대로 성공할 수 없다. 원망을 가지고 성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또한 원망은 전염성이 있다. 한 사람이 원망을 시작하면 주위 사람들이 함께 원망하게 되고 결국 온 백성들이 그렇게 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지도자를 공격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와 가깝고 우리에게 잘해주던 사람을 원망할 때가 많다. 그러나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습관이 바로 영적 거장들의 습관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역사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이다. 이것이 지도자들의 특성이다. 어려울 때에 우리의 기도가 먼저 나와야 한다. 참고 참았다가 마라를 만났을 때에 원망이 아니라 기도가 나와야 하는 것이다. 

원망하는 사람은 주위 사람들을 다 어렵게 하지만 기도하는 사람은 가정과 교회와 국가를 살린다. 우리는 기도가 먼저 나오는 사람인가? 아니면 원망이 먼저 나오는 사람인가? 기도파인가? 원망파인가? 원망하는 사람들은 지금 이순간에도 원망이 나올 것이다. 참고 참다 못 참을 때에도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란다. 그 사람들이 쓴 물을 단 물로 바꿀 것이다. 그러나 원망하면 아무런 역사도 만들 수 없을 것이다.


(2) 자기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을 선택하는 습관이다.

이것은 눈에 대한 습관이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입만 닫고 있어도 큰 일은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눈을 조심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철저히 자기 중심적이었다. ‘하나님이 알아서 하세요. 우리는 불편하지만 않으면 됩니다.’ 그들은 이런 마음으로 마라에 도착하였고 그곳에서 짜증을 부리며 원망하게 되었다. 그들은 아마도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시다면서요, 도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라고 불평했을 것이다. 어떻게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쓴 마라의 물을 주실 수 있는가? 

그러나 조금만 살펴보면 하나님의 깊은 뜻을 읽을 수 있다. 하나님은 왜 그들에게 마라를 주셨는가? 하나님께 있어서 마라의 물은 쓴 물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어떠한 쓴 물도 단 물로 바꿀 수 있는 분이다. 하나님은 마라의 쓴 물을 단 물로 바꾸시어 그들을 먹이고 싶으셨다. 그들이 장차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어려운 일을 당할 때에 하나님은 치유하시고 기적을 베푸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려주고 싶으셨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현재 상황만을 바라보니 불평만 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달랐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의 자녀들이 마라에 서있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단지 ‘그 물 먹지 말라’고 할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대단히 많은 분이다. 하나님은 ‘제발 내 이름을 불러다오. 너희가 부르짖고 간구한다면 줄 것이 아주 많단다’라고 말씀하고 싶을 것이다. 우리 인간의 부모들도 가진 것이 많을 때에는 다 자녀들에게 주고 싶지 않겠는가? 

27절을 보자.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 물샘 열 둘과 종려 칠십주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이것은 더욱 중요한 point이다. 쓴 마라의 물이 단 물로 변하였다. 그들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마라를 말하면서 살짝 엘림이라는 오아시스를 붙혀 놓았다. 

성경학자들에 의하면 엘림과 마라의 거리는 단지 5~7마일 정도라고 한다. 이 상황에서 하나님의 최종 목적지는 마라가 아니라 엘림이었다. 그들은 목마름의 원망으로 가득찼다. 하나님은 쓴 물을 단 물로 만들어서 백성들에게 주고 싶었지만 그들은 마라만 바라보고 원망하였다. 우리는 마라만 바라보아서는 안되며, 그 뒤에 있는 엘림이라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선물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은 홍해를 건너고 첫째 날을 흥분 속에서 지냈을 것이고, 둘째 날부터 목마름으로 원망을 시작하였을 것이며, 셋째 날에는 마라에 이르러 온통 절망으로 가득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마라는 더 이상 마라일 수 없었고 그의 백성을 위한 선물일 뿐이었다. 마라의 단 물을 마신 사람들은 오직 이스라엘 백성들 뿐이었다. 어느 누구도 마실 수 없었으며 오직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마실 뿐이었다. 우리가 만난 고민, 어려움, 그리고 무거운 짐들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선물들이다. 그 뒤에 있는 엘림이라는 선물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엘림을 바라보아야 한다. 마라에서 기적의 단 물을 마시고 더욱 힘을 얻어 축복의 엘림으로 가는 것이 바로 우리 하나님의 뜻이다. 몇 시간만 걸어가면 엘림이 있는데, 그 몇 시간 뒤를 모르는 것이 우리 인생들이다.

우리 인생 중에 있는 마라는 누구나 거치는 지점이다. 인생들이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지만 하나님이 하실 일은 너무도 많다. 성도는 마라를 만났다고해서 죽지 않는다. 단지 마라 앞에서 생각을 잘못하기 때문에 죽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과 뜻과 기적을 알고 기도하면 그곳을 통해서 엘림을 만나게 된다. 

어거스틴이 한 말을 기억하자. 그는 우리 인생의 고통이 수를 놓은 천과 같다고 한다. 수를 놓은 천의 뒷 면은 참으로 볼품이 없다. 그러나 앞 면은 아름다운 수가 장식되어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본 것은 수의 뒷 면이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서 수를 놓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렇게 인도하고 있다. 우리는 오늘도 마라를 통과하고 있지만 이 상황을 눈으로 보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에 집중하여 마라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소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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