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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기도문]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마 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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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마 6:13)


요즘은 컴퓨터 시대요 인터넷 시대입니다. 컴퓨터 시대에 컴퓨터식 주기도문이 있답니다. 
한번 읽어 볼테니 들어보십시오.

“하드디스크에 계신 우리 프로그램이시여. 패스워드를 거룩하게 하옵시고 운영체계에 임하옵시며 명령이 키보드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모니터에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데이터를 주시옵고 우리가 프로그램의 오류를 용서한 것 같이 우리의 오타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바이러스에 들지 말게 하옵시며 다만 불시의 정전에서 구하옵소서”

재미있고 기발한 발상입니다. 주기도문에 관련된 예화를 찾다가 발견한 것입니다. 반짝 웃을 수 있는 유머 예화입니다. 그냥 이런 유머들은 듣고 한번 까르르 웃으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한번 까르르 웃고 지나가는 정도로 받으면 안됩니다. 마음에 새겨듣고 간직하고 그 말씀이 늘 나에 삶에 영향을 끼치도록 해야 합니다. 이 시간 여러분의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태도로 바꾸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주기도문 강해 여덟 번째로 마지막 시간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주기도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부르는 호칭으로 시작하여 여섯 가지의 기도내용이 있었습니다. 

호칭 /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기도 / ①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② 나라이 임하옵시며 
③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
④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⑤ 우리 죄를 사하시고
⑥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원하소서
송영 /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

오늘은 주기도문의 결론과 같은 송영 부분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을 읽어보겠습니다.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니다.'

여섯 개의 기도 제목이 마치면 주기도문의 송영 부분이 바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아옵나이다”입니다. 이 부분은 누가복음에는 없는데 마태복음에는 괄호 안에 처리되어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기도의 끝 부분에는 항상 하나님을 찬미하는 송영으로 끝내는 습관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기도를 끝낼 때에 예수 이름으로 끝내는 것처럼 유대인들은 찬송으로 기도를 끝냅니다. 주님도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송영으로 끝내신 것입니다. 

이 송영의 첫 부분에 대개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대개’(大槪)는 한문으로 ‘대부분’ 또는 ‘대체로’ 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성경 마태복음에서는 중국어 성경의 大槪를 그대로 한글로 번역하여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대개란 말은 성경 원어의 뜻을 제대로 번역한 것이 아닙니다. 

헬라어 원어에는 ‘호티’(ὅτι)로 되어있습니다. 
호티는 “이유를 설명하는 문장을 이끄는 접속사로서 그 의미는 영어의 because 또는 for 에 해당하는 의미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대개의 정확한 의미는 "왜냐하면 ... 하기 때문이다"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최근에 번역된 중국어 성경에서도 대개라는 말 대신에 “因爲”(인웨이 / ...이기 때문에)로 번역하여 영어의 because 또는 for 해당하는 뜻으로 바로 잡았고 우리 한글 번역본에서 1933년 신약성경 번역본에 <대개>로 썼다가 그 뒤, 그 대개가 원문의 뜻과는 상관이 없는 "대체로" 라고 오해될 소지가 있으므로 아예 생략하여 번역하지 아니하였으며, 다만 찬송가 앞장에 인쇄된 주기도문에 그 흔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송영 부분을 정확히 번역 한다면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왜냐하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에게 영원히 있기 때문입니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송영 부분에 언급된 접속사 ‘대개’ 즉 “왜냐하면...” 이라는 말을 통해서 하나님께 간구한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이미 주기도문에서 간구한 모든 기도의 근거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의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첫째는 나라가 하나님의 것입니다. 

“나라” 라는 원어로 “바실레이아” 라는 말로서 왕국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이 왕이 되어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나라는 전 우주적입니다. 천국만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지옥도 하나님의 통치권이 미치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천국은 은혜와 긍휼만 나타나는 곳이고 지옥은 진노와 저주만 나타나는 곳입니다. 결국 사단도 하나님의 심판적 통치에 굴복하는 곳이 바로 지옥이라면 지옥도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둘째는 권세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권세는 모든 능력을 제어하는 권한 또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사탄의 세력도 다스리며 제어하시는 권세자이십니다. 그래서 마귀도 하나님이 통치에 순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통치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죄를 사하시는 권세가 있으며 사탄을 멸하고 세상을 심판하실 권세자 이십니다. 

셋째는 영광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라와 권세가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온 세상 영광의 주인이시라는 것입니다. 물질세계와 영적인 세계를 통털어 존재는 하는 영광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영광이란 원래 “빛이 비취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빛이 비추면 모든 어두움이 물러가고 정의와 생명과 환희가 약동하듯이,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이 원래 가지고 계신 거룩하고 영화로운 것들과 그 영광을 피조물에게 비춰 주시는 빛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찬란한 영광의 광채로 존재하십니다. 
이 영광의 빛이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나셨습니다. 
요 1:9절에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가지고 세상에 오신것입니다. 

요 1: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빛의 영광을 모든 믿는 자들에게 비춰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을 빛의 자손이라고 했고 예수님도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 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빛이란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 5:16절에서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오늘날 기도하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즉 빛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면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불신자들이 우리의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했습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은 주기도문이 단지 우리가 하나님께 어떤 필요를 구하는 간구로 끝나는 것이 아님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은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주기도문을 암송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기도하는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주시고 있습니다. 

이런 글이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이라고 하지 마라. 세상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라고 하지 마라. 나 혼자만 생각하고 살아가면서. 
"아버지"라고 하지 마라. 아들딸로 살지 않으면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라 하지 마라. 자기 이름을 빛내고 높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시며"라고 하지 마라. 물질 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하지 마라. 내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면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하지 마라. 죽을 때까지 먹을 양식을 쌓아두려 하면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하지 마라. 누구에겐가 아직도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라고 하지 마라. 죄 지을 기회를 찾아다니면서.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하지 마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아멘"이라고 하지 마라. 주님의 기도를 삶의 현장에 실천할 의지도 없으면서. 

그렇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적어도 내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원한다는 고백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뜻 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부르짖어 구했던 것 처럼 자신의 삶속에 주님의 뜻을 실현시키겠다는 의지의 고백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꽃다운 나이에 혼자되어 자식을 생명 같이 여기며 외아들을 키워낸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가시고기처럼 자기 몸이 으스러지는 줄도 모르고 분에 넘치도록 뒷바라지를 했습니다. 
아들은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해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사람으로 성장했고 아들은 더 많은 것을 배우기 위해 어머니를 홀로 남겨두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서 그곳에서 정착하게 됐습니다. 아들은 고향에 계신 어머니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으로 매달 정성을 담아 송금을 해드렸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늘 굶주렸고 동네의 험한 일을 도맡아 했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어머니를 돌보지 않는 불효한 자식이라고 아들을 욕했는데 어느 날 어머니는 그토록 사랑하는 아들을 보지 못한 채 쓸쓸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들이 도착하기 전, 마을 사람들은 장례를 치르기 위해 할머니의 방에 들어갔습니다. 

그 순간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허탈감에 빠졌습니다. 
할머니의 고통은 자기들의 무관심 때문이었음을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돈이 없어 병원도 못가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며 갖은 고생을 다한 할머니의 방 벽에는 달마다 송금해온 아들의 수표로 도배가 되어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아들이 보내온 수표를 단순히 편지로 알았던 것입니다. 아들을 바라보는 것처럼 수표를 바라보며 아들을 그리워했던 것입니다. 

모르면 아무리 귀한 것을 가지고 있어도 누릴 수 없습니다. 또한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아들의 편지가 돈인 줄 알았다면 그렇게 구차한 인생을 살지 않았을 것입니다. 수표도 그러할진대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은 어떻겠습니까. 주기도문은 수표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를 부를 때 가슴이 아려야 합니다. 
가슴이 뛰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 속에 내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그날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오시는 날까지 하나님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의 아버지의 것이라는 고백을 통해 이 땅에 아버지의 영광이 나로 인해 가득하게 되게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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