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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바라라 (시 4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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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바라라 (시 43:1~5) 
 

중국 모택동(毛澤東)시절에 지하교회 성도들의 영적 아버지라 불리우던 왕밍따우((王明道)목사가 있었습니다. 그가 공안당국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는 과정에서 너무도 고통이 심하여 예수를 부인하고 풀려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석방이 되어 나온 그는 주님께 너무도 송구한 마음에 더 큰 정신적 고통을 겪었습니다. 두통이 떠나지 않고 그를 괴롭힌 것입니다. 그는 주님의 징계임을 바로 깨닫고 기도하면서 결심을 합니다. 목에 현판을 걸고 북경거리를 돌아다니며 울면서 외쳤습니다. "제 이름은 베드로입니다. 저는 저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배신했습니다. 제 이름은 베드로입니다." 그는 즉시 체포되어 19년 동안 감옥에 갇혀 지냈습니다. 만기가 되어 감옥에서 나오자 전도자인 라비 재커라이어스(Ravi Zacharias) 는 어떻게 고난을 이겨낼 수 있었는지 그에게 질문하였습니다. 그러자 찬송을 부르고 싶다고 말합니다. 몸은 늙었고 손마디는 뒤틀려 있었지만 눈동자만큼은 빛나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찬송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내 주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하리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하리라." 434장 찬송이었습니다. 찬송에 이어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감옥에서 한시라도 이 찬송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찬송의 가사처럼 하늘의 위로가 임했습니다. 주님의 위로가 임했기에 19년동안 저는 행복했답니다". 왕밍따우 목사는 무려 19년이라는 세월 동안 감옥 속에서도 참된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사방으로 우겨 싸임을 당한 감옥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인도자이신 하나님을 바랐기에, 소망이 없는 감옥 속에서도 큰 행복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의 성군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피신하고 있을 때 읊은 것으로 알려지는 시입니다. 참을 수 없는 배신과 분노로 몸부림치면서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시도하려는 다윗의 심경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다윗이 반복해서 고백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바라라.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입니다. 여기 '하나님을 바라라' 의 '바라라' 는 히브리어로 '아페크 테크마이' 입니다. '기대하다. 주목하다. 향하다' 라는 뜻입니다. 낙망하며 불안해하는 자아와 평안의 삶을 찾는 자아가 내면 속에서 투쟁을 하는 모습을 묘사하면서 오히려 다윗은 하나님을 바라며 찬송하였습니다. 

종교개혁주일입니다. 우리는 종교개혁을 기념만 하는 주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당시 지도자들의 오만과 권위의식, 타락한 모습에서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개혁자들은 타락한 교회와 잘못된 지도자들의 모습을 보고 고민하면서 결국 바른 믿음의 길을 가고자 목숨을 내어놓고 개혁한 것이 아닙니까? 우리에게도 낮아지고 내려감을 통한 개혁이 일어나야 합니다. 세상의 명예와 욕심을 바라며 살았던 모습을 버리고 하나님만 바라는 진정한 모습으로 다시 개혁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만 바라야 할 이유는, 


첫째로 나의 힘이 되시기에

독일 국민들은 루터(Martin Luther)가 작사한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라는 찬송을 애국가처럼 좋아합니다. 이는 개신교 신자들이 가장 즐겨 부르는 찬송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 루터가 이 찬송을 만든 동기가 있었습니다. 1529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갔을 때 국가적 위기가 닥쳤습니다. 터키군의 침략을 받아 비엔나는 완전히 포위되었고 함락이 초읽기에 들어갔습니다. 터키군대는 호전적 민족으로 오스트리아와 비교하면 독수리와 참새로 비교될 만한 강력한 존재였습니다. 국가의 비극적 운명이 닥치자 비엔나 시민들은 모두 교회로 몰려가 하나님께 급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순간 터키군대가 물러가게 됩니다. 이유는 본국에서 비엔나를 함락시키지 말고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비엔나에서 현장을 목격한 루터는 말합니다. "이런 것이 기적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힘이다." 그래서 그는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즉 적군이 못 들어오도록 하나님이 성이 되어 지켜주심을 노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진정 우리의 힘이 되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본문 2절입니다.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어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을 '나의 힘'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울 왕의 핍박과 원수의 대적을 피해 피난생활을 하던 그에게 힘과 용기를 부어준 것은 추종하던 부하들도, 절친한 친구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위로와 힘이 되어 주셨던 분은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처지와 상황에 대해서 원망이나 불평을 접어두고 항상 힘이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인간적인 관점에서 문제를 파악하지 않고 하나님의 시각에서 이해하려고 기도했습니다. 자신만 바라보는 근시안적 태도를 버리고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고 기도하였습니다. 수동적인 신앙의 자세에서 능동적으로 하나님을 주권자로 인정하고 찬양하였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세상의 무엇과 누구보다도 그에게 힘이 되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힘이 되십니다. 특정한 사람에게만 힘이 되시는 편협하며 불공평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가난한 자, 병든 자, 억울한 자, 세상에서 의지하고 바랄 것이 없는 자, 오로지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에게는 누구에게나 힘이 되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강한 힘이 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끝까지 힘이 되시는 하나님만 바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나의 기쁨이시기에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Lev Nikloaevich Tolstoi)는 귀족의 아들로 태어나 백작 칭호까지 받은 사람입니다. 모태신자로 교회에 다녔지만 믿음이 없었기에 구원의 확신도 없었습니다. 많은 죄를 범하고 절망에 빠져 기쁨이 없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중년에 접어들었을 때 그는 향락에 빠져 부족함이 없이 사는 귀족들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멸시와 천대를 받는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농노들은 무엇이 즐거운지 항상 얼굴에 기쁨이 충만하여 사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톨스토이는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접근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 모두가 예수 믿는 독실한 신앙인임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신앙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으며 깊은 신앙의 세계에 들어가 그들처럼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 후 초대 기독교로 돌아가 근로, 채식, 금주, 금연을 표방하는 간소한 생활을 영위하고, 악에 대한 무저항주의와 사랑의 정신에 의해 세계 복지에 기여하는 톨스토이즘(Tolstoyism)을 탄생시켰습니다. 예로부터 임금이 사는 성에 깃발이 꽂혀 있으면 성안에 임금이 계시다는 것을 상징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인들도 자기 안에 만왕의 왕이신 주님이 계시다는 표시로 기쁨의 깃발이 항상 펄럭여야만 합니다. 

본문 4절입니다.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단에 나아가 극락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여기 '극락의 하나님' 이란 원어의 뜻은 '기쁨 중의 기쁨이신 나의 하나님' 입니다. 최고의 기쁨을 제공하는 근원은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더군다나 고통을 당하던 끝에 하나님 전에 나아가 찬양하며 맛본 기쁨은 다윗에게 최고의 기쁨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무엇도 하나님보다 더 이상의 즐거움과 기쁨의 대상이 없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작곡자 밀러(R. F. Miller)는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매튜 헨리(Matthew Henry) 목사는 '하나님만이 최고의 기쁨이 된다' 고 말했습니다. 고해와 같은 삶의 여정에서 하나님이 기쁨의 대상이 되실 때 우리는 소망을 잃지 않고 사명을 끝까지 감당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힘이며 모든 난관을 극복하는 강력이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극락이며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 최고이며 영원하다고 고백하는 다윗처럼 하나님을 최고의 기쁨으로 맛보며 사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나를 도우시기에 

미국 메사추세츠(Massachusetts) 세관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던 사람이 무능하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해고되었습니다. 집에 돌아온 그는 실직 사실을 아내에게 알리고 '자신은 인생의 실패자' 라며 낙심을 합니다. 그 때 아내는 남편에게 "낙심하지 마세요. 지금이야말로 당신이 원하셨던 일, 글 쓰는 일을 시작하셔야 할 때입니다." 그러자 남편은 아내에게 "그러면 무얼 먹고 산단 말이오?" 아내는 말합니다. "일년 정도의 생활비는 저축해 두었어요. 적어도 일년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라며 용기를 줍니다. 이 말을 들은 남편은 "일년 내 좋은 작품을 쓸 수 있을까?" 라며 주저하자, 아내는 말합니다. "여보, 당신이 하나님을 신뢰하면 하나님이 도우실 것예요". 그리고 두 사람은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습니다. 

얼마 있지 않아 그는 '두 번 들려준 이야기(Twice-Told Tales)’라는 작품을 발표했습니다. 이어 10년 동안 작품을 쓴 결과 미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작품이라고 평가되는 걸작‘주홍글씨’를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바로 작가 나다나엘 호손(Nathaniel Hawthorne)입니다. 낙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도우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극복하여 명작을 낳는 계기로 만든 것입니다. 

본문 5절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여기의 '얼굴을 돕는다' 는 말은 하나님께서 '얼굴과 얼굴을 맞대는'(face to face) 친구처럼 우리와 교제하며 어려움을 해결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바라는 성도들을 수치로 보내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만족하게 도우십니다.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빈약한 자에게는 부요함을, 은혜를 사모하는 자에게는 충만한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삶의 무게에 눌려, 죄악의 짐에 쓰러질 때도 말없는 위로와 치유로써 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도움이 되신다는 사실을 믿을 때에 환경을 초월하여 오히려 찬송을 부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도우시면 환난의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역경의 파도가 괴롭힌다 할지라도 결코 우리에게 미치지 못합니다. 

어느 성도가 질문을 받았습니다. "당신 교회 목사님의 눈은 무슨 색입니까?"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기도할 때는 목사님이 눈을 감으시고 설교할 때는 제가 눈을 감아서 한 번도 목사님의 눈을 본적이 없는데요!" 하나님을 바라보세요. 신앙은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눈을 크게 뜨시기 바랍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힘과 기쁨과 도움이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는 믿음을 가짐으로 개혁자의 신앙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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