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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께서 가라사대 '평안하뇨' (마 28: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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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가라사대 '평안하뇨' (마 28:8~10)
      

미국의 대통령은 매년 새해에 연두교서라는 것을 발표합니다. State of the Union 연설은 미합중국의 상태에 대한 진단과 보고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 대통령이 합중국의 대통령으로서 국가의 현재 상황에 대하여 진단을 내리고 미래의 청사진을 제시하는 아주 중요한 연설입니다. 

지금 우리의 최대관심사는 State of the Economy - 경제의 상황에 대한 진단입니다. 그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사람이나 될까. 며칠 전에 백분 토론을 봤더니 금융위기가 언제까지 가겠느냐, 어디까지 갈 것이냐 에 대해서 토론을 나누는데 아무도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흉년이 언제까지 갈 것이냐, 요셉은 애굽의 흉년이 칠년을 갈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금융위기가 그렇게 오래가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습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The State of the Church - 교회와 기독교의 상황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교회와 전 세계 기독교의 상황이 어떠한지 높은 곳에서 그것을 내려 볼 수 있다면 현재 우리의 영적인 상태가 어떠한지 그것은 성령만이 아십니다.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대해서 성령이 일일이 진단하시고 당부의 말씀을 하신 것처럼 성령만이 우리의 신앙과 교회의 상태에 대하여 보시고 판단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의 최대 관심사는 우리 자신의 상태에 대한 것입니다. The State of my life - 내 삶에 대한 진단. 나는 지금 어떤 상황에 있느냐. 우리가 건강검진을 받아서 건강 상태를 체크하는 것처럼 내 삶을 진단받을 수 있다면 과연 나는 지금 어떤 상황에 있는가. 

히트라는 영화를 보면 도둑과 형사간의 묘한 우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둘이 늦은 밤 커피숍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눕니다. 알 파치노와 로버트 드니로의 연기력을 보여주는 귀한 장면입니다. 한 사람은 도둑이고 한 사람은 형사입니다. 그런데 아직 증거가 없기 때문에 잡을 수는 없고 독수리처럼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도둑도 쉽게 물러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누가 이기나 두고 보려는 식으로 두 사람 간에는 팽팽한 긴장, 줄다리기 하듯이 팽팽하게 서로 맞서고 있는데 이들이 각자 개인의 삶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합니다. 서로 말을 안해서 그렇지 그들의 개인의 삶은 엉망진창입니다. 형사는 지금 세 번째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데 그것도 원만치 않고 딸이 하나 있는데 그 딸의 친부가 형편없는 남자에요. 그래서 딸의 심리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이제껏 형사가 한 일은 범죄자를 잡아서 감옥에 가두는 일뿐이었는데 그 일을 하는 동안 개인의 삶은 완전히 엉망이 돼 버렸습니다. 
  
도둑은 위험을 감지하면 자기의 친구든 가족이든 삼십초 만에 떠나야 하는 그런 기구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영원한 친구도 없고 집도 없고 사랑도 기대할 수 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 두 남자가 마음을 열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때뿐입니다. 이것이 그들을 그 진지한 대화의 한계이고 그리고 그들은 헤어져서 그 다음에 마주쳤을 때는 서로가 서로의 손에 총을 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비극적이고 절망적인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절망적인 인간의 모습, 그리고 남자의 세계를 보여준다고 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설교할 때 healing - 내적치유에 대해서는 별로 말씀드리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내적치유라는 것은 한도 끝도 없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판도라의 상자와 같습니다. 판도라의 상자를 여니까 별의 별 것이 그 속에 들어있었던 것처럼 인간의 속을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별의 별 문제들이 그 안에 산적해 있는데 의사가 수술을 하기 위해서 개복했다가 그 속을 들여다보고 감당을 못해서 질려서 다시 꿰매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성경도 인간의 상태에 대해서 아주 적나라하게 진단합니다. 내 속에 선한 것이 없노라,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것이 없느니라,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어디서부터 고칠 수 있고 어디서부터 이것을 healing 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까. 도대체 얼마만큼 교회를 다니면 인간의 모든 상처가 치유될 수 있다는 얘기입니까. 과거에 받은 상처는 치유할 수 있다 하더라도 현재에 받는 상처와 앞으로 받을 상처에 대해서는 어떠한 보장이 있다는 얘기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상태에 대해 관심을 가지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이 여성들을 만나셨을 때 '평안하뇨'라고 안부를 물으십니다. 예수님이 안부를 물으신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성경에 예수님이 사람의 안부를 물으신 경우가 별로 등장하지 않는데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나서 이 여인들에게 '평안하뇨'라고 물으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여자들이 물어야 될 질문입니다. '예수님 괜찮으세요?' 왜냐하면 큰일을 당한 분은 예수님이기 때문에. 사흘 전에 십자가를 지시고 오늘 아침 막 부활하셨으니까 안부를 묻는다면 이 여자들이 예수님에게 물어봐야 되지요. 그러나 예수님이 이 여자들의 안부를 물어보십니다. 이것이 주님과 우리의 차이점입니다. 

주님은 주시고, 주시고 또 주시고 베풀고, 베풀고 또 베풀고 섬기고, 섬기고 또 섬기시는 분입니다. 주님은 늘 우리에 대해서 염려하시고 늘 우리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십니다. 반대로 우리는 주님에게 드리는 것도 별로 없고 우리가 드리는 것도 별로 주님이 필요로 하시는 것이 없습니다. 사람이 주님에게 드린들 뭐를 드릴 수 있습니까. 사람이 하나님의 안부를 묻는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웃기는 일입니다. 하나님에게는 문제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안부를 묻는다면 사람에 대해서 물어야 됩니다. 당신은 평안하십니까? - How are you? 

우리는 과거에 영어를 배울 때 누가 How are you?라고 물으면 Fine thanks. And you? 이런 식으로 대답하라고 배웠지요. 그것도 명랑한 목소리로. 그러나 외국 사람들과 대화를 해 보면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Fine thanks. And you? 이런 식으로 대답하지 않더라구요. 왜 우리는 그런 식으로 배웠는지. 대답을 한다면 fine, thank you, 이런 식으로 말할까. 그리고 사실 How are you? 라는 질문은 굉장히 진지한 질문입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마치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말이지만 '안녕하세요?' 이 말은 상대방에 대한 질문이지요. 안녕하냐고 묻는 것입니다. 

오래전 제가 어느 아는 분 댁에 전화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전화를 걸어서 
'아, 그동안 평안하셨습니까.' 그랬더니 그분이 
'그동안에 평안하지 못했습니다.' 
깜짝 놀라서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삼풍백화점 사고에서 가족이 희생을 당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남들에게만 일어나는 줄 알았는데 제가 잘 아는 가족에게도 이런 일이 생겼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서로에게 안녕하냐고 묻지만 실제로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이 세상에는 많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솔직하게 대답하지 않아서 그렇지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이 세상에는 많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이 여인들에게 ‘평안하뇨’라고 물어보실 때 그들은 대답하는 대신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예수님을 경배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상담을 받기 위해서 오는 게 아니고 치유를 받기 위해서 오는 것도 아니고 교회에 하소연을 하러 오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오는 것입니다. 물론 상담도 하고 대화도 하고 여러 가지를 하지만 그것은 주된 목적이 아니고 주님을 예배할 목적으로 교회를 오는 것입니다. 

병든 사람이든 건강한 사람이든 마음이 아픈 사람이든 즐거운 사람이든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중에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연을 서로가 다 알 수도 없고 다 알 필요도 없습니다. 서로의 사정을 안들 누가 그것을 고쳐줄 수 있다는 얘기입니까. 여러분에게도 아픔이 있고 저에게도 아픔이 있는데 그것을 서로 나눈다고 해서 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 우리의 초점이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연을 가졌든 주님을 예배하는 중에, 그것이 열쇠입니다. 

마치 열 두해 혈루병 걸렸던 여인이 예수님의 겉옷에 손을 댔더니 치유의 능력이 주님으로부터 임했던 것처럼 우리에게 어떤 사정이 있든지 주님을 경배하는 중에 치유의 능력이 주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의 능력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아직 경험하지 못하셨다면 이것을 믿음으로 구해야 됩니다. 예배하는 중에 나를 고치시고 권고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셨다면 마치 다 똑같이 극장표를 사서 영화를 봤는데 예고편만 보고 나온 사람과도 같습니다. 예고편만 보고 나가요. 정작 main picture - 그날의 상영 영화는 보지도 못하고 '어, 그 이후에 영화가 또 있었어요? 나는 처음에 예고편을 보고 그게 다인 줄 알았는데.' '아, 그 다음에 영화도 있고 팝콘도 있고 콜라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다 열 두해 혈루병 걸렸던 여인의 주변에 있던 사람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서 계시는 것을 모든 사람이 보고 알지만 이 여성만 믿음으로 그 겉옷에 손을 대서 열두 해 그녀를 괴롭혔던 질병이 즉시 낫는 것을 경험했는데 그 이외의 사람들은 구경만 하고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도 못하고 구경만 하다가 끝나는 경우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저는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이 공부를 할 때도 최고의 성적과 결과를 기대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분들 또 사업을 하든 직장생활을 할 때도 최고의 성과를 기대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인생이 모든 면에 있어서 최고와 최선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 신앙에서만큼은 최고에 대한 욕심이 없는 사람들이 저는 이상합니다. 불신 중에서도 그런 불신이 없습니다. 아마 주님이 인간처럼 성질을 내셨다면 굉장히 불쾌하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너는 왜 남의 앞에서는 그렇게 네 자신을 잘 보이려고 애쓰고 내 앞에 올 때만큼은 그렇지 않느냐?’ 
  
남편들의 불만이 그것 아닙니까. 아내가 외출할 때는 찍어 바르고 화장하고 머리를 하고 옷을 입고 그리고 누구를 만나려고 나가는지는 모르겠지만 집에 와서 남편 앞에서는 머리도 광주리 같고 화장도 안 하고 옷도 아무거나 입고. ‘도대체 왜 당신은 내 앞에서는 그렇게 외모에 신경을 안 쓰다가 밖에 나갈 때는 신이 나서 그렇게 차려입고 나가느냐?’ 사실 남편들이 말을 안해서 그렇지 남편들에게 입이 있었다면 할 말이 많을 것입니다. 얼마나 남편들이 착한지 아내들이 그 사실을 몰라요. 남편들이 늘 말이 없다고 늘 불평하는 여자분들은 말이 없는 게 다행인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말을 하기 시작하면 아내에 대해서부터 말할 것입니다. 그게 싫어서 남편들이 과묵한 것입니다. 다른 이유로 과묵하다고 착각하지 마세요. 

할 말이 왜 없습니까. 그러나 남자들은 희생이라는 것이 익숙하고 남자들은 인내심이 많고 남자들은 남자이기 때문에 용감하고 여자와는 다르다구요. 여자들은 약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당연히 말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아버지는 자기가 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에 하소연을 할 수가 없습니다. 자식은 해도 됩니다. 아내는 해도 됩니다. 어머니가 와서 해도 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리더이고 최종적인 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에 힘들어도 힘들다고 말할 수가 없어요. 그럴 권리가 없지요. 안그렇습니까. 대장은 두려워도 두려운 기색을 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도자이기 때문에. 사람이 말이 없는 것은 할 말이 없는 것이 아니고 또 무뚝뚝하기 때문이 아니고 말을 한들 그것이 소득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말을 안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들어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들어줄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말을 할 것입니다. 

사실 기도가 어렵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하나님이 들어주실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요. 하나님이 지금 듣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만 있다면 일평생 마음속에 담아놓았던 사연을 쏟아놓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듣고 계시다는 것을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에 기도가 안되는 것이지요. 지금 주님이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걸 듣고 거기에 대해서 응답하신다는 것을 믿으면 어찌 우리에게 할 말이 없겠습니까. 할 말이 너무 많아서 어디서부터 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방언이 유익한 것이지요. 

방언은 마치 무엇에 비교할 수 있냐면 이십년 동안 매일 하고 싶었던 말을 순서가 없이 그게 한꺼번에 몰려나온다고 보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걸 차근차근 하면 ‘하나님, 제가 이십년 전부터 이런 생각을 가졌는데 첫째는……. 이런 식으로 해야 되는 게 한꺼번에 몰려나오니까 ‘아르르르’ 이런 식으로 그게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동안 내 안에 뭉쳐 있었던 사연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쏟아져 나오니까 ‘아부부부부’ 이런 식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이

상한 것이 아니에요. 이것은 영혼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예배 행위에는 만 가지 사연이 담겨져 있습니다. 다들 마음이 편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게 아니에요. 시쳇말로 팔자가 좋아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게 아닙니다. 다 멀쩡해 보이지만 ‘안녕하십니까’ 라는 질문에 선뜻 대답할 수 없는 사연들이 다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둘 다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저런 어려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고 그런 것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죄가 있어도 그럼에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고 죄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둘 다에요. 

예수님은 이 여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0절에 ‘무서워 말라 Do not be afraid' 물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뵌 이 여인들의 경악, 두려움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신 면도 있지만 이런 상황이 아니더라도 하나님은 늘 사람들에게 똑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왜 두려워하였느냐 믿음이 없는 자들아. 두려워하지 말라.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인간의 실존 상태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두려움입니다. 이 금융위기의 뿌리에도 두려움이 있습니다. 두렵기 때문에 주식을 팔고 두렵기 때문에 돈을 회수하는 것입니다. 또 정치의 뿌리에도 두려움이 있습니다. 테러라는 말은 두려움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두려움이 있습니다. 내가 망하지 않을까, 파산하지 않을까, 죽지 않을까, 실패하지 않을까, 사람들은 만 가지를 두려워하는데, 만일 하나님이 모세에게 열한 번째 계명을 주셨다면 '너는 두려워하지 말지니라' 이런 계명이 되었을 것입니다. ‘You shall not be afraid.’

믿음의 반대는 의심이 아니고 두려움입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두려워하지 말라’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는 법을 배운 후에야 하나님의 일도 하고 이웃을 섬길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 다음에 남을 섬길 수 있다면 우리 중에 남을 섬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다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내 두려움의 문제는 해결해야 됩니다. 이 두려움의 문제를 해결하고 내가 믿음으로 생각하고 믿음으로 판단하는 법을 배우고 그때부터는 하나님의 일을 하고 이웃을 주님의 이름으로 섬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두려움을 해결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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