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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의 열매 : 화평 (롬 12: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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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열매 : 화평 (롬 12:14~21)


미국의 어느 동물원에서 아이들이 자유롭게 각기 좋아하는 동물의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얼룩말을 그리면서 얼룩말의 몸을 온통 까맣게 칠하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이 한참을 지켜보았더니 그 다음에 흰색으로 줄을 그려 넣는 것이었습니다.'바탕색을 굳이 칠하지 않고 검은색으로 줄을 그으면 얼룩말이 될 텐데 왜 저렇게 어렵게 그리지 이상하다.'생각하면서 그 아이에게 말을 걸려고 하는 순간 선생님에게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 아이는 흑인 아이였습니다. 

흑인들의 생각으로 얼룩말을 볼 때는 검정색에 흰색 줄이 그어진 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기 때문입니다. 얼룩말은 무조건 흰색 말에 검은 줄이 그어진 말일 것이라고 판단했던 백인 선생님은 흑인아이가 틀린 것이 아니고 자신과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비로소 이해하였다는 듯이 고개가 끄덕여 졌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틀린 것>과<다른 것>의 차이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각기 다른 행동 양식과 다른 성격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면 마음을 열고 대화하는 가운데 짧은 시간 안에 격이 없어지는 사람입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은 자신을 드러내는데 시간이 걸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항상 경계심을 가지고 사람을 대합니다. 마음 열기가 쉽지 않은 사람입니다. 심지어는 부부싸움을 해도 표현하면서 정리가 되어 가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정리가 되어야 표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평생 부부싸움을 한 번도 안 하는 부부는 없다고 하는데 이런 저런 일로 부부가 다투고 돌아서니 남편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좋지 않는 마음을 어떻게든 풀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금방 돌아서서 미안하다는 직접적인 말을 하기가 겸연쩍고 쑥스러워서 괜히 아무 말이나 먼저 걸어봅니다."오늘 저녁 반찬은 뭐야!"그러면 부인 쪽에서"반찬은 무슨 반찬이야! 김치 먹으면 되지!"그러면 아직 안 된 겁니다. 그런데"된장찌개라도 끓여 먹지 뭐!"그렇게 부드럽게 나오면 된 겁니다. 이게 표현하면서 정리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정리가 돼야 표현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저 인간이 언제까지 사과 안 하나 두고 보자, 먼저 사과하기 전에는 밥은커녕 국물도 없을 줄 알아라.'끝까지 독을 품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렇듯 사람들의 성격은 남, 녀에 따라서 다르고 노, 소에 따라서 다릅니다. 문제는 우리가 다르다는 이 사실을 인정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을 수는 없다는 것을 인정 할 수 있어야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이해가 성립되고 화해가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고로 여러분, 먼저 다른 사람을 인정하십시오. 내 생각에 모두를 맞추려고 하지 마십시오.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지 않았다고 나무라지도 말고 나와 똑 같아지라고 요구하지도 마십시오. 

때로는 상식이라는 것이 우리를 구속할 때가 많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마땅히 사랑하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은 마땅히 미워해도 된다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반드시 이렇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이라고 강요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뭔가 모자라는 사람이나 바보로 취급받기도 합니다. 

구약성경 출23-25절에는 흔히<동해 보복(同害 報復)법>으로 불리는 상해에 대한 처리법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것을 오해해서 성경에도 나와 있으니까 얼마든지 되갚아도 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이 법의 근본취지는 보복이 목적이 아니라 감정에 치우쳐서 자기가 당한 피해 이상으로 보복을 함으로 발생하게 될 악순환을 예방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한 대를 맞아 코피가 났다고 합시다. 그러면 상대방에게 똑같이 코피가 나게 때려줘야 하는데 내가 맞은 세기만큼 때릴 수가 있나요? 되갚을 때는 반드시 지나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감정이란 내가 당한 것 보다 조금 더 세게 합니다. 그래서 나는 한쪽 콧구멍에 코피가 났는데 감정을 실어서 때리다보니까 쌍코피를 터뜨렸습니다. 그러면 또 상대방이 갚아야 됩니다. 이게 끝이 안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대로 정확하게 갚아줄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허용되는 것인데 사실은 어려운 것이지요.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 동해 보복법은 하나님의 사랑이 완전히 계시된 신약시대가 되자 오른 뺨을 치면 왼 뺨까지 돌려대는(마 5:39) 용서와 사랑의 법으로 성숙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14절 말씀이 바로 그 말씀 아닙니까?"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그리고 17절입니다."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이 세상에는 박해하는 사람도 있고, 박해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늘 문제를 만드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언제나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도 안타까워서 하신 말씀입니다만"차라리 세상에 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했다"던 가룟 유다도 있는 것이 세상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나와 생각과 뜻이 맞고, 나를 따라 주는 사람과만 살 수 있겠습니까? 어느 누구든지, 어떤 단체에서도 그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나와 다른 인격을 인정하고 나와 다른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세상에는 미움과 사랑이 공존하고, 상처와 용서가 함께 있으며, 분열이 있는가 하면 일치가 있고, 의혹이 있고 그것을 밝히는 믿음이 있고, 슬픔이 있으면 기쁨이 있고 절망만 있는 것이 아니라 희망도 함께 숨 쉬고 있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인정해야할 것은 이 세상에는 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악도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랑하려고 해도 사랑하지 못하고, 화목하려고 해도 어려운 것입니다. 

<탈무드>에 전해지는 재미있는 이야기 중에 옛날 노아 홍수 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많은 비로 인하여 모든 것이 물에 잠기게 될 때, 노아는 짐승들을 비롯하여 모든 것들의 암수 한 쌍씩 방주로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선(善)이 혼자서 덜렁덜렁 들어옵니다. 그러니까 노아가"전부 한 쌍씩 들어오라고 했는데 너는 왜 혼자 들어오는 것이냐?"하면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선은 자기와 짝이 될 것을 찾아 돌아다녀 보지만 짝이 될 만한 것이 없어서 결국 악을 데리고 왔고 그 후로 이 세상에는 선과 악이 항상 공존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왜 악이 있을까? 왜 선과 악이 함께 있을까?"를 머리 아프게 생각하며 이유를 찾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분명한 것은 선과 악이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여전히 착한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습니다. 문제를 만드는 사람도 있지만 화평을 만드는 사람도 얼마든지 함께 있는 것이 세상입니다. 

문제는 이제 이러한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조화로운 삶을 살 것이냐의 문제입니다. 오늘 성경은 그 비결을 알려줍니다. 18절입니다."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 하라."이게 결론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더군다나 원수 갚는 것은 우리의 할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의 할 일은 단지 화평 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성령이 그 안에 거하면 복수나 원수의 열매가 아니라 화평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열매는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있어야 할 열매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늘 문제만 일으키는 소위<트러블메이커(trouble Maker)>로 살아서는 안 되고 적극적으로 평화를 만들어 가<피스메이커(Peace Maker)>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떤 화평을 만들어야 합니까? 화목을 만들어가는 것도 보면 각각 다릅니다. 질적인 차원에서 화평을 세 가지로 구분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만 우리가 추구해야할 화평이라는 것은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는<상대적인 화평>이 그것입니다. 이것은 종속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상대방이 화평하면 나도 화평합니다. 다른 사람이 기쁘면 나도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에겐 언제나 자기 화평이란 것이 없습니다. 철저하게 끌려 다니면서 화평을 추구하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먼저 다가서서 화목을 만들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지나친 교만 때문입니다. 내가 먼저 손 내밀지 못하고 내가 먼저 용서하지 못하는 심리적 작용입니다. 

마음 밑바닥에 경쟁심이나 으뜸이 되고자하는 심리가 문제입니다. 그런데 더 문제는 하나님의 일을 두고도 이기적인 경쟁을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적당한 선의의 경쟁이 필요하긴 합니다만 내가 더 많이, 내가 더 훌륭히, 내가 더 인기를 얻겠다는 나 중심의 욕심을 가지다보면 어느 새 하나님의 일인지, 자기 일인지를 분간하지 못하게 되고 자신의 영광만을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솔직히 하나님의 일이란 하는 데까지 하다가 중단해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는 데까지 하다가 죽으면 영광 아닙니까? 반드시<업적>을 남겨야 되는 것은 아니요, 기필코 내가<기념비>를 세워야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최선을 다하다가 쓰러지면 거기까지가 하나님 앞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지 않아서 후회하는 것이지 최선을 다하는 거기에 바로 내 평화가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형편과 처지에 따라 종속적으로 끌려 다니는 상대적인 화평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두 번째로는<절대적인 화평>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무엇에도 깨어지지 않는 원초적 평화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얻은 평화이기에 누구 때문에 혹은 내 감정 때문에 화평이 깨어져서는 안 됩니다. 또한 남의 평안을 깨트려서는 안 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래서 나만 옳다고 여기는 편견을 버려야합니다. 나만 주님을 따르는 것처럼, 나만 의롭고 나와 같지 않은 사람은 다 정죄하고 심판해 버리려는 자세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막9:50에서 말씀하시기를"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 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소금>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계신 주님의 의도를 잘 읽어야합니다. 

구약성경 레2:13절을 보게 되면 소제를 드릴 때에 소금을 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소제>란 채소나 식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양은 죽여서 드립니다. 내가 죽어서 제물이 되어야 하는데 나 대신에 양을 드리는 것이니까 생명을 드리는 것입니다. 죽인다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거든요. 모든 제물은 제단 앞에 죽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죽은 것을 갖다 드리는 것이 아니라 산 것을 죽여서 바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곡식이나 채소를 드리는 소제는 어떻게 죽여서 드립니까? 바로 소금을 치는 것입니다. 뻣뻣한 채소가 소금을 먹어 누글누글하게 숨이 죽습니다. 김장할 때 소금에 배추를 절이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그렇게 나를 온유하고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드릴 때 하나님 앞에 절대적인 화평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창조적 화평>이 있습니다. 보편적으로 내가 화평하고 나서야 남을 화평케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상식적으로는 맞는 이야기입니다. 내 마음이 편해야 남의 마음도 편하게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내 마음이 그리 쉽게 평안해지더냐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평 하라는 말씀은 무슨 의미입니까? 이 말은 곧 진정한 화평이란 엄청난 희생이 있고서야 얻을 수 있고 내가 손해를 감수하고서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어떤 손해나 희생도 할 수 있는 한에서는 다 지불하고 최선을 다하여 화평 하라는 말씀이 오늘 본문의 의미입니다. 이것이 바로<창조적 화평>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이 창조적 화평이라는 것도 하나님께서 화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셔야 화평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능력은 내가 가지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할 때 성령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복이요, 은사입니다. 하나님께서 능력과 지혜를 주시고 함께 하셔야 화평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열매가 바로 화평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절대적 능력 안에서 화평을 구하고, 평화를 만들고, 그 능력 안에서 더불어 화목 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성령의 도움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화평의 문제는 힘의 문제가 아닙니다. 소유의 문제도 아닙니다. 사랑의 문제입니다. 회개와 겸손과 믿음의 문제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마5:9)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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