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누가 니느웨에 갈 것인가? (욘 1:1~3)

  • 잡초 잡초
  • 393
  • 0

첨부 1


누가 니느웨에 갈 것인가? (욘 1:1~3)


사람은 누구나가 다 이름이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사람들에게만 개별적인 이름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이름은 뜻이 있습니다. 뜻 글짜인 한문의 영향을 받아서 이름을 한문이름으로 짓기에 나름대로 이름의 뜻이 있습니다. 

제 이름은 一자 煥자입니다. 한 一자 빛날 煥, 불꽃 煥으로 사용합니다. 하나의 불, 하나의 빛이란 뜻입니다. 우리 아버님이 선견지명이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어두운 세상을 향해 비추는 하나의 빛이 되라고 지으신 것 같습니다. 아멘? 

저희 집사람은 복자 희자를 씁니다, 복 福자 계집 姬자, 복있는 여인입니다. 저를 만나서 그렇습니다. 농담을 하면 농담으로 받아 주어야 농담을 합니다. 썰렁하네요. 

성경에서도 이름의 뜻을 상당히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름을 바꾸어 주는 것을 봅니다. 아브람은 높은 아버지란 뜻인데 아브(아버지)라함(무리)즉 많은 무리의 아버지라고 바꾸어 부르시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큰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실 것이라는 의미에서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바꿔 주신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그 이름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또 발꿈치를 잡은 사람이라는 뜻의 야곱이 왕자라는 뜻의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모두 하나님이 바꾸어주십니다. 

특이한 점은 성경에 하나님이 이름을 지어준 사람들은 그 이름대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이름이 예수님입니다. 그 이름은 구원한다는 뜻입니다. 모세라는 사람 이름도 건져낸다는 뜻입니다. 그가 하수가에 버려졌을때 건져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이름대로 이스라엘 백성을 죄악의 땅에서 건져내는 사람이 됩니다. 그 이름대로 살았습니다. 여러분도 이름의 뜻대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 <요나>라는 사람의 이름은 대단히 부드러운 뜻을 가지고 있는 이름입니다. “비둘기”라는 뜻입니다. 그의 부친 아밋대가 그는 아들 이름을 신앙고백적인 이름으로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지었던 것 같습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릴 때, 소나 양을 드렸습니다. 그렇지만 가난한 자들을 위해 새를 드리기도 하였습니다. 많은 새가 있으나 유독 비둘기만이 제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비둘기가 갖고 있는 의미, “순전함, 순종”을 상징하는 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나는 비둘기 같이 순결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로 살아가야 했는데 그런데 오늘 우리가 봉독한 말씀을 보면 그런 모습이 보이질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지엄한 명령을 받고도 순종하기는커녕 오히려 반발하고 정반대 방향으로 도망을 칩니다. 

여러분! 왜 요나가 도망을 쳤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그 몇 가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1. 그가 하나님의 복음사역에 지명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구원 사역에 다른 사람이 아닌 요나를 지명하였습니다. 
1절을 다같이 보세요.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하나님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했습니다. 그 이스라엘 땅에 수많은 선지자가 있었는데 그들을 다 제끼고 하나님은 요나를 지명하여 불렀습니다.  

뭐라고 하셨나요? 2절 상반절을 다시 보세요.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일어나라 하십니다. 가라 하십니다. 쳐서 외치라 하십니다. 
그 거룩한 사역에 요나가 지명을 받았으면 기뻐해야 하잖아요. 감사해야 하잖아요. 이스라엘에 얼마나 많은 선지자들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유독 요나를 택했습니다. 그러면 감사해야 하는데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요나는 도망을 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제일 먼저 들고 가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도 가라고 제자들에게 여러 번 명령하셨습니다. 

막16:15절을 보면“너희는 온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다니며”라고 했습니다. 또 마28:19~20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하십니다. 

“너희는 가서”라고 했습니다.  

여러븐 명심하세요. 가야 합니다. 가만히 앉아서는 복음이 전파되질 않습니다. 복음전도자는 가야합니다. 요나를 택하여 가라합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가야 할까요? 하나님 당신께서 하시든지, 천사를 보내면 될텐데 왜 요나를 부르시고 보내시나요? 저는 전도할 때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전도 해도 해도 안되는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직접 하시면 한방에 끝날텐데 왜 하나님은 꼭 사람을 통해 하시나? 한번만 꿈속에 나타나 “너 예수 믿으라. 안 믿으면 죽는다.” 한번만 하면 되잖아요. 천사를 보내셔서 한마디만 하면 되잖아요. “안믿으면 데려간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여기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은 반드시 사람을 통해 전파된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세워 보내십니다. 그래서 오늘 저와 여러분이 선택된 것입니다. 그러면 감사해야 하잖아요. 기뻐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귀찮다는 것입니다. 왜 내가 가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남들이 알아서 하겠지 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금 여러분이 가길 원하셔서 여러분을 택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도 일어나시길 축원합니다.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찾아 가셔야 합니다. 그리고 전해야 합니다. 

  
2.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것 때문입니다. 

2절을 보세요.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목적지는 “저 큰 성읍 니느웨”입니다. 니느웨가 어디냐?  당시에 유대인들에게는 니느웨는 원수의 나라 수도입니다. 앗수르의 수도입니다. 

그런데 이 명령이 요나의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대상이 맘에 안든 것입니다. 
그러니 요나가 기뻐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너 예루살렘으로 가라하든지 아니면 베들레헴으로 가라든지 가버나움으로 가라 하면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원수의 나라 니느웨로 가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이스라엘만 구원해도 충분할 터인데, 왜 이방인을 구원하려고 그러시는가? 왜 이방인의 구원을 위해서 하필이면 나보고 가라고 그러는 것인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 인간의 생각은 분명 다릅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만이 아닌 이방인도 구원받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요나 생각은 달랐습니다. 이방인은 좋으나 저 니느웨 놈들은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절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요나서는 인간의 의분과 하나님의 사랑이 충돌하는 성경책이다”. 

어려운 말입니다. 인간의 의분은 뭡니까? 저 니느웨는 마땅히 심판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회개하면 용서하는 분입니다. 

그래서 내용이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드라마틱합니다. 일종의 영화을 보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인간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회개하면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요나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그것이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도망을 친것입니다. 


3. 악독이 하나님 앞에 상달하였다는 것입니다. 

2절 하반절을 보세요.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죄악을 그냥 넘기지 않습니다. 명심하세요. 하나님은 그냥 죄를 통과시키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를 깨닫게 하시든지 회개케 하십니다. 그래서 한번은 경고하십니다. 

니느웨는 엄청나게 큰 성입니다. 그런데 그 죄악이 너무나 커서 그들의 죄악이 하나님 앞에 드러날 정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심판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심판하기 전에 하나를 하십니다. 그게 뭡니까?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어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는 것입니다. 그일에 요나가 선택된 것입니다.  

니느웨가 어떤 도시입니까?  
그 니느웨 성이 삼일 길을 걸어야 할 만큼 규모가 크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수원성이 100만 명의 도시입니다. 그런데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걸어가면 얼마 걸릴까요? 길어봐야 하루면 충분할 것입니다. 아니 5~6시간이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니느웨는 자그만치 3일 길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큰 성인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땅에 죄악이 가득하니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어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요나가 거절했을까요? 

그땅에 악독이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언제 어떻게 위협을 당할지 모르는 도시에 가서 말씀을 전하라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할 일입니다. 그런 죄악이 관영하던 도시로 요나를 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선교지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안한 곳이 없어요. 안전한 곳이 없습니다. 어떤 지역은 선교사에게는 목숨을 걸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곳이 많습니다. 

데이비드 바렛 선교사가 해외선교연구센터에서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2008년도 올해 기독교 순교자의 예상 숫자가 16만 6천여 명에 달할 것이라는 예상된다고 합니다. 

어디서 나온 수치냐 하면 2000년 당시 순교자 수는 조사해보니 약 16만 명이었답니다. 그런데 3년간 연평균 순교자의 숫자는 1.24%씩 매년 증가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증가 추세라면 앞으로 2025년에 가서는 한해 21만 명까지 순교자가 나올 수 있다고 내다봤다고 합니다. 

“목사님 설마 그렇게 많겠습니까?” 할지 모르지만 우리나라는 거의 순교자가 없습니다. 1년이면 한두 사람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저 북한땅에서는 한해 몇천 명씩 죽습니다. 저 회교권 국가들, 거기서는 성경책을 갖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죽임을 당합니다. 교회를 다닌다는 이유로 죽습니다.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최근에 인도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이라는 이름 때문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걸어야 할 시대가 오늘의 시대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나라에서는 복을 주셔서 그런 순교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언제 그런 고난이 닥칠지 모릅니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합니다. 

문제는 죄악이 관영한 땅에도 하나님이 기회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요나가 싫다는 것입니다. 그 땅 백성들은 심판받아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은 죄악이 관영한 이 세상에 우리, 요!나!에게 복음을 외치라고 명령하십니다. 니느웨로 가라 하십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의 요나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1) 그는 거절하고 도망칩니다.  

3절 상반절을 보세요.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여기 “그러나”가 문제입니다. 그러므로가 아닙니다. 그러나입니다. 일어나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고 도망을 쳤습니다. 이해가 안되는 선지자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얼굴을 피할 수 있나요?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기 위해 일어났고 방향이 니느웨와는 정반대인 다시스로 도망을 칩니다.  

니느웨가 있는 동쪽으로 가야하는데 다시스가 있는 서쪽으로 도망칩니다. 
왜요? 그 땅 백성은 죄악이 가득하기에 반드시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심판이 아니고 회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빨리 가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요나는 그렇지 못합니다. 좁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들은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들이라는 것입니다. 더욱이 조상대대로 조국 이스라엘에 원수 나라입니다. 그러니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마음이라면 우리도 회개해야 합니다. 

선교를 이야기하다 보면, 아프리카, 남미, 동남아시아 선교사는 호응과 협력이 좋답니다. 그런데 선교지가 일본이라면 성도들의 얼굴이 경색되어 편안하지 못한 언사가 나오기 일 수랍니다. 왜 일본 ‘놈’들이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본은 우리 민족 모두에게 유별난 감정이 있습니다. 과거에 상처가 있었기 때문이기 하지요. 그러나 그렇다면 성경에 나오는 그 요나나 오늘 이 시대를 사는 이 요 나나 다를 것이 뭐가 있습니까? 똑같습니다. 

저도 일본에 대해 별로 좋은 감정이 아닙니다. 그래서인지 아직 일본 선교는 안 갔습니다. 이 설교 준비하다가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언젠가는 기회가 생기면 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그런 감정이 있습니다. 우리가 미국한테 져도 괜찮고 중국한테 져도 괜찮은데 그런데 일본한테 지면 역적이예요. 뭘 해도 일본은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축구도, 야구도 다른 나라에게는 다 져도 되지만 일본에게 지면 역적이 됩니다. 그게 뭡니까? 그 놈들은 반드시 이겨야한다. 그놈들은 마땅히 심판 받아야 한다는 좁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도 품으라 하십니다. 개인적인 감정을 갖고 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요나입니다. 그런데 우리 속에도 이 속좁은 요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일어나 가라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순종을 원하십니다.  


2) 요나의 줄행랑은 환경이 받쳐준다는 것입니다.  

3절 하반절을 보세요.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했습니다. “마침”, “때를 맞추어” 배가 출항 직전인 것입니다. 기가 막힌 타이밍입니다. 아마도 요나는 이랬을 것입니다. 

“거봐라 하나님이 실수 한거야” “그러면 그렇지, 내가 저 다시스로 가서 전하는 것이 하나님이 뜻일거야” 

그러나 여러분! 착각하지 마세요. 길이 열린다고 다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가봐야 압니다. 계속 착각하면 앞에 대풍이 기다립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가는 길이 순탄하다고 그 길이 다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그 길이 형통하다고 고집부리고 도망치면 머지않아, 십리도 못가서 발 병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인간은 모든 것을 我田引水격으로 해석합니다. 자기에게 유리한대로 해석합니다. 그러니 착각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잡아야 합니다. 말씀이 명한대로 가야하고 말씀이 명한대로 행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길이 열린다고 다 길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 넓은 길로 갑니다. 그러나 그길이 하나님의 길은 아닙니다. 좁은 길이지만 고난의 길이지만 주님이 명하는 길로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3) 엄청난 돈을 들여가며 도망칩니다. 

요나가 그 배를 탈 때 船價를 주고 도망쳤습니다. 배삯을 주었습니다. 
3절 하반절에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했습니다.  

욥바는 지중에 이쪽 끝이고 다시는 저쪽 끝입니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려면 배삯이 얼마나 될까 요즘 배삯을 대량 계산하면 최소한 50만원 입니다. 적어도 50~100만원입니다. 

도망치는 일에는 돈을 내고 도망칩니다. 그런데 그것은 다 헛수고입니다. 
돈이 아까워서라도 돌아서야 하는데 그러지 못합니다. 오히려 돈을 지불하고 도망갑니다. 그러나 그 길은 결국 헛수고입니다. 

어떻게 되었지요? 
그는 바다에 던져지고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 고생하고 가는 만큼 고생하는 것입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3일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면 짐작컨대 요나가 도망친 거리가 3일길 같습니다. 그러니 간거리만큼 고생하는 것입니다. 따라 하십시다. /간것 만큼 고생한다./ 

나중에 주님이 요나의 3일을 무덤 속 3일로 표현합니다. 요나의 표적밖에 보여 줄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3일이기도 하지만 가는 만큼 고생하는 것입니다. 

사명자는 기뻐서 해야 합니다. 그러나 도망치는 자는 무겁습니다. 고통이 임합니다. 그러기에 도망치는 여러분, 일찌감치 포기하시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왜 하나님은 그토록 요나가 니느웨로 가길 원하시는 것일까요?  

1) 구원은 유대인만이 아닌 이방인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런데 유대인은 자기들만 누린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인 요나도 그러니 일반 성도야 말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비행기가 지구를 한 바뀌를 도는데 몇시간 걸릴가요? 대략 36시간 이면 돕니다. 그런데 복음은 2000년이 넘게 걸렸습니다. 아직도 복음을 받지 못한 곳이 많습니다. 주님이 명령하셨는데, 주님의 지상 대 명령인데도 아직도 돌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땅 끝까지 가라 했습니다. 증인이 되라 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가야 합니다. 어디로요? 니느웨로 가야 합니다. 여러분의 니느웨는 어딥니까? 여러분의 니느웨는 여러분 남편일수도 있고 직장일수도 있고 친척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크게는 저 중국땅일수도 있고 저 일본 땅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가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유대인만의하나님이 아닌 이방인의 하나님도 된다는 것입니다. 믿으시길 축원합니다.  
  

2) 죄악을 심판하기 앞서 회개의 기회를 주시기 위해입니다. 

여러분에게도 마찬가집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심판하시기에 앞서 반드시 기회를 주십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도 야단을 칠 때 그럽니다. “너 다음에도 그러면 혼난다.” “너 다음에도 그러면 맞는다” 그런도 무시하면 결국 매를 맞습니다.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고 사랑이 많으셔서 심판하시기 전에 반드시 한번은 기회를 주십니다. 그 기회를 놓치지 마세요. 믿습니까? 

그래서 사도바울도 고전9:16에서 말하기를 
“내가 복음을 전할찌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했습니다. 

여러분이 복음을 전하지 않아서 이웃이 지옥 간다면, 여러분 남편이 지옥 간다면 누가 책임질 것입니까? 복음의 전달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3) 하나님은 이방인이라도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요나 한 사람이 니느웨로 갔을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났나요? 3일 길의 니느웨를 하루길 외쳤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귀찮으니 다운타운에서만 몇 번 전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엄청납니다. 그 성에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12만 명이라고 하십니다. 이 12만명은 성 전체인구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회개하여 돌아온 백성들의 숫자만을 말하는 것인지 분별이 어렵습니다. 어떻튼 12만명이 삽니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한데 12만 명이니 어찌 하나님이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요즘 우리교회에 목사가 보기에 기분 좋은 일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중보기도팀이 매일 운영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전도대의 발족입니다. 매주 금요일마다 전도대원들이 자원하여 나와서 전도합니다. 목사가 모이라고 한것이 아닌데 훈련받은 분들이 자발적으로 모입니다. 

그들은 대단한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모여드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에 모여듭니다. 부족하지만 주님이 외치라고 하는, 주님이 선포하라고 하는 그 말씀에 순종해서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길거리로 다니며 전하는 것입니다. 

열 번이면 아홉 번은 푸대접을 받지만 그래도 가는 것입니다. 대접을 받기 위해서, 환호를 받기 위해서 가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은 외쳐야 할 때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해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그리고 가라. 그리고 외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가야 할 니느웨는 어디입니까? 여러분 가정일수도 있고 직장일수도, 친척일수도 있습니다. 중국일 수 있습니다. 아니면 일본일수도 있습니다. 저 북한 땅 일수도 있습니다. 누가 가야 합니까? 아밋대의 아들 요나가 갔듯이 여러분이 가기를 축원합니다. 

능력이 있어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원하는 것은 순종입니다.   
우리의 능력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도구로 쓰임 받을 뿐이고 구원을 얻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런 놀라운 역사가 여러분 앞길에 일어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