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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의 연합과 성장 (살전 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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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연합과 성장 (살전 5:11)


캘리포니아의 스퀘어 나무는 300피트 정도의 높이까지 무성하게 잘 자랍니다. 1피트가 30.48 센티미터이니까 300피트는 약 91m나 자란다는 것입니다. 91m는 사실 엄청난 높이입니다. 특이한 것은 이 거목의 뿌리가 얕고 사방으로 길게 뻗어있다는 사실입니다. 뿌리가 얕으니까 태풍이 오면 쉽게 쓰러질 것 같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 쓰러지지 않고 거의 100m에 육박 하도록 자랍니다. 세퀘어 나무가 쓰러지지 않고 자랄 수 있는 비밀이 있습니다. 이 나무들은 군집을 이루고 살아갑니다. 집단으로 서식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나무들의 뿌리가 서로 뒤엉켜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를 지지해주고 있기 때문에 거센 비바람에도 잘 쓰러지지 않고 거대한 나무로 잘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나무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성장의 비밀을 가르쳐줍니다. 쉐퀘어 나무가 군집을 이루고 있듯이 그리스도인은 교회라는 공동체를 통해서 연합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쉐퀘어 나무가 서로 뿌리가 뒤엉켜서 서로를 지지해 주기 때문에 100m에 육박하도록 자라는 것처럼 성도들끼리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까지 이르러야 하는 것입니다. 엡 4:16에서는 신자들의 신앙의 성장에 대해서 말하면서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고 말합니다. 몸 된 교회의 지체들인 성도들은 서로 도움을 받고 연결되고 결합되어 자라는 것입니다.  

그럼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연합하여 성장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방법을 살펴보도록 합니다. 

1. 서로 본이 됨으로 성장합니다. 

사람들은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잘못 된 생각입니다. 사실 우리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인격은 혼자 고립된 상태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관계를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본을 보고 자라는 것입니다. 부모의 본이 자녀의 생각과 언어 그리고 행동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결국 자녀들은 부모에게서 배운 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선 사람의 본을 보며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이 전도하면 전도 받은 사람도 기도를 많이 하고, 전도를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 전도된 사람은 전도를 많이 하는 것을 교회 안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보니 좋은 것도 본이 되지만 좋지 않은 것도 본이 되더군요.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생활할 때 그들 가운데 섞여 사는 사람들이 원망하고 불평하니 순식간에 온 백성들이 원망하고 불평했던 것 같습니다. 10명의 정탐꾼이 부정적이고 불신앙적인 보고를 할 때는 전 국민이 그들의 부정적이고 불신앙적인 태도를 본받아 부정적이고 불신앙적인 반응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누구하고 교제하느냐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신앙이 성장하는 사람은 믿음이 좋은 사람들 긍정적인 사람들과 교제합니다. 하나님 중심, 교회 중심, 목회자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과 교제하는 사람은 반드시 영적으로 성장합니다. 반대로 시험 든 사람, 부정적이고 불신앙적인 사람과 가까이 지내면 꼭 그 사람도 시험이 들고 부정적이되고 불신앙적인 모습을 닮아갑니다. 


2. 서로 격려함으로 성장합니다. 

혀의 권세가 엄청난 것입니다. 성경은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다고 말합니다(잠 18:21). 
우리는 말로서 상대를 죽일 수도 있고 말로서 상대를 살리기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살리는 말보다 죽이는 말을 더 쉽게 합니다. 

죽이는 말의 예를 몇 가지 들어봅시다. 
“너는 하는 일마다 그러니, 네가 하는 일이 늘 그렇지, 네가 하는 일이 잘 될 리가 없지..” 

이런 말을 들으면 듣는 사람이 마치 독을 먹은 것처럼 의욕이 꺾이고, 소망이 사라지고, 도전 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지게 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살리는 말을 해서 죽이는 말의 결과로 찾아온 부정적인 것들을 상쇄시켜야 합니다. 

이렇게 말해 보십시오. “너는 나에게 중요한 사람이야, 너의 삶은 귀중하고 목적이 있어, 하나님은 너를 사랑하셔, 누가 뭐래도 나는 너를 응원한다. 너는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걱정하지마 하나님이 너를 도와주실거야...” 

이런 말을 들으면 듣는 사람이 소망을 갖게 됩니다. 새 힘이 납니다. 도전 정신을 갖게 됩니다.
격려자가 되려면 실질적인 노력을 해야 합니다. 격려란 단어는 익숙한 말이지만 실제로 찾아가서 격려하는 것은 힘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격려하겠다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격려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귀하게 여겨야 하고 다른 사람의 장점을 찾아야 하고 다른 사람의 가능성을 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격려는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도 격려를 받으면 더 힘이 나고 더 큰 용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딤후 1:16에 보면 바울이 오네시보로에게 자주 격려를 받았다고 고백합니다. 목회자에게도 격려가 필요하고 주의 일을 앞장서서 하는 사람에게도 격려가 필요합니다. 운동선수들은 자신을 응원해주는 사람이 많을수록 힘이 넘치게 되고 때로는 자신의 실력 이상의 실력을 발휘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목회자나 주의 일을 앞장서서 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에게 잘하고 있다고 응원해 주십시오. 그들의 장점을 보고 가능성을 보고 아낌없이 격려를 보내주십시오.

우리 주변에는 우리의 격려가 필요한 바울들이 많습니다. 가정에도 셀에도 그리고 교회와 직장에도 우리의 격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제 격려자가 되기로 결심하십시오. 그리고 만나는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시고, 장점을 찾으시고, 가능성을 보시고 그것을 입으로 표현하기를 바랍니다. 


3. 서로 가르침으로 성장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든지 배워야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먼저는 배우기를 힘써야 하지만 배우면서 또한 가르쳐야 합니다. 불신자들에게는 복음을 가르쳐야 하고 신자들에게는 건강한 신앙생활을 가르쳐야 합니다. 

배움은 축복입니다. 사람은 배운 만큼 성장할 수 있습니다. 신앙도 주님을 배운 만큼 성장하는 것입니다. 요 17:3에 보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안다는 것은 배움이 전제되는 것입니다. 

호 4:6에서는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라고 말합니다. 지식이 없다는 말은 배우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배우고 가르치는 것은 꼭 신앙이 성숙한 사람이 미성숙한 사람을 가르치는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신앙이 미성숙한 사람들이 선배들을 가르치기도 하는 것입니다. 

어느 농촌 교회에서 비가 오지 않아 논밭의 작물이 모두 타 죽어갔습니다. 성도들은 안타까운 마음에 산상에서 비 오기를 기도하는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일시를 정하고 미리 광고가 나갔습니다. 정해진 시간에 사람들은 모두 성경 찬송과 햇빛을 가릴 모자들을 가지고 모여들었습니다. 그런데 한 어린이는 우산을 들고 모임 장소에 나타났습니다. 교인들이 이상히 여기면서 “넌 왜 우산을 들고 나왔니?”라고 물으니 어린이는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이 “지금 우리 비 오게 해 달라고 기도하려고 모인 것이잖아요 아니예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아이의 대답을 들으면서 그곳에 모인 목사님과 장로님들 그리고 모든 어른들이 진정한 믿음에 대해서 배우게 되었습니다. 비가 오기를 위해서 기도하러 모였는데 비가 올 것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목회자와 교회의 중직자들 그리고 교회에 오래 다닌 성도들은 뒤 따라오는 성도들을 바른 길로 인도할 책임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뒤 따라오는 성도들은 앞선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서 신앙생활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사, 장로, 권사, 안수집사의 자리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 자리가 중요하기 때문에 교회에서는 중직의 자리에 앉을 사람들에게 십일조, 예배생활, 봉사활동 등의 조건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제가 후배 목사에게 들은 이야기 하나 하겠습니다. 진짜인지는 모르겠는데 강남의 어느 교회에서 주일 낮 예배 후에 식사를 하고 오후 예배까지 시간이 남으니까 남자 교인들이 교제하기 위해서 고스톱을 쳤다고 합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고스톱을 치자고 한 사람이 목사나 장로는 아닐 것입니다. 아마도 이제 교회에 막 나온 초신자일 가능성이 큽니다. 아무튼 누군가의 제의로 고스톱을 치게 되었는데 그 판에 목사도 끼어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일로 말이 나기 시작하더니 일파만파로 퍼져서 결국은 교회가 없어지고 말았다고 합니다. 저는 이 사건은 앞선 사람들의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고스톱을 하자고 하면 그런 일은 교회에서 안 된다고 해야 합니다. 덕이 안 되고 은혜가 안 되는 일은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어야 하는데 잘 가르치지 못한 것입니다. 

골 3:16을 보면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살펴보면 모든 지혜로 피차 잘 가르치기 위해서 중요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가르치는 사람 속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참된 지혜, 하나님의 지혜로 바로 가르칠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이 가르침의 기준입니다. 자기 생각을 가르쳐서는 안 됩니다. 다른 교회에서 한다고 다 옳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가라는 만큼 가야 하고 성경이 서라는 곳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4. 서로 권면함으로 성장합니다. 

권면하고 권면을 받아드리는 것을 운전을 가지고 설명해보겠습니다. 운전을 해 보신 분들을 사각지대를 아실 것입니다. 운전자의 눈에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조수석에 있는 사람이나 뒷좌석에 앉은 사람들에게 봐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면 그들은 운전자에게 경고를 해줍니다. 장애물이 있으면 정지 시키고 지나치게 핸들을 돌리면 반대로 풀라고 권면합니다. 운전자는 자신에게 경고를 하거나 권면하는 사람의 말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또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말을 귀담아 듣고 그대로 실천합니다. 권면하고 권면을 받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영적인 사각지대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데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이 때 누군가가 나에게 권면해준다면 영적인 사고 없이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나의 사각지대를 보고서도 말해주지 않는다면 나는 영적인 사고를 일으키게 될 것이고 상대는 침묵하므로 나를 사고자로 만드는 방관의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권면을 받는 사람은 겸손해야 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권면을 받아드리지 않습니다. 사울왕은 사무엘 선지자의 여러 번의 권면을 무시했습니다. 그는 교만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사각지대를 보지 못하고 영적인 큰 사고를 당해서 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윗왕은 겸손히 타인의 권면을 받아드렸습니다. 왕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선지자의 권면에 귀를 기울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권면은 사랑입니다. 권면한다는 것은 관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관심이 없다면 절대로 권면하지 않을 것입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충고를 한다면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를 취하고 우리야를 죽였을 때 나단이 침묵했다면 다윗은 계속해서 죄가운데 거했을 것이고 결국 그도 사울처럼 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나단의 권면은 다윗에게는 엄청난 사랑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남의 훈계 즉 권면을 받는데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타인이 나에게 권면하면 기분 나쁘게 생각합니다. 심지어 설교를 통해서 훈계를 받는 것도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영적인 바보입니다. 자기를 살리는 말씀 싫어하고 자기를 죽이는 말씀만 찾는 어리석은 바보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자기가 3년을 밤낮으로 훈계했다고 말합니다(행20:31). 바울의 설교는 훈계요 충고요 권면이었던 것입니다. 

권면이 있는 공동체는 거룩한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권면을 받는 사람은 죄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히 3:13에 보면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고 말씀합니다. 


5. 서로 존중함으로 성장합니다. 

이 부분은 지난 주 설교에서 서로 존경함으로 교제하라는 내용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가볍게 지나가겠습니다. 
상대를 존중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시각으로 상대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세상 가치로 상대를 보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가치로 상대를 보십시오. 

가정문제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흔히 역기능(逆機能) 가정 혹은 순기능(順機能) 가정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여기서 역기능과 순기능은 자녀들의 수, 경제적 수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관계입니다. 부부관계, 부자관계, 형제자매관계가 깨어져 있으면 아무리 경제적으로 풍요로워도 그 가정은 역기능 가정입니다. 반면에 가난하더라도 온 가족이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는 가정은 순기능 가정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순기능의 역동적이고 성장하는 교회는 성도의 수, 경제력, 건물의 크기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성도와의 관계, 교역자와 성도와의 관계, 성도와 성도와의 관계가 얼마나 역동적이고 아름다우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관계를 아름답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서로에 대한 존중입니다. 상대를 빈부귀천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한 영혼으로 보고, 하나님의 자녀로 보고, 천국의 상속자로 보는 것입니다. 상대의 배경과 상관없이 하나님 앞에서 보배롭고 존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로 대하면 가정은 순기능적인 가정이 될 것이고 교회는 순기능적인 교회가 될 것입니다. 


6. 서로 고백함으로 성장합니다. 

죄는 우리의 성장을 방해합니다. 영적인 성장도 방해하고 관계의 성장도 방해합니다. 우리가 죄를 해결하지 못하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데 방해를 받습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당당히 나아가게 됩니다. 죄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면 기도응답이 안 됩니다.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교제하는 상대와 나 사이에 죄라는 담이 생겨서 깊은 교제가 불가능하고 피상적인 교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죄를 처리하는 방법으로 고백을 사용하십니다. 우리가 죄를 고백하면 주님은 곧 우리의 죄를 해결해주십니다. 사도요한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자백하면 하나님은 죄를 사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주십니다. 다윗은 죄를 고백하기 전에는 너무나 큰 고통을 당했습니다. 

시 32:3,4에 보면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라고 자신이 죄를 고백하지 않았을 때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하자마자 하나님은 즉시로 사죄의 은총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시 32:5을 보십시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성도들 가운데 죄의 고백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주님에게 죄를 고백하면 용서를 받는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지체에게 죄를 고백하므로 자신이 고침 받는다는 것을 잘 모릅니다. 약 5:16에서는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고 말합니다. 죄를 고하고 기도하면 병을 치료해주신다고 약속합니다. 

죄의 고백은 집요한 추궁의 결과가 아니라 자발적인 고백이어야 합니다. 교회생활을 하면서 약 5:16의 말씀이 실천될 장소가 필요합니다. 이 일이 소그룹 안에서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소그룹 안에서 죄를 고백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첫째는 비밀이 보장되어야 합니다. 소그룹 안에서 나눈 이야기가 밖으로 세나가서는 안 됩니다. 
둘째는 은혜의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고백하든 그 사람을 받아 드릴 수 있는 수준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이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지 못한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외부로 세 나가도 되는 이야기 정도 그리고 상대가 받아드릴 수 있는 정도의 이야기만 해야 할 것입니다. 부디 여러분이 속한 셀그룹이 절대적으로 비밀이 보장되고 모든 것을 받아드릴 수 있는 성숙한 셀이 되기를 바랍니다. 


7. 서로 용서함으로 성장합니다. 

서로 용서하자는 이 대지는 다른 이론보다 용서의 실예 몇 개를 들어보려고 합니다. 

대학생선교회 CCC를 운영하면서 한국교회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키신 김준곤 목사님의 실화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목사님의 가족이 다 공산당에게 끌려가서 갖은 고초를 겪었습니다. 목사님의 눈앞에서 목사님의 부친과 아내가 공산당에게 맞아 죽는 것을 보아야 했습니다. 목사님도 너무 매를 많이 맞아 혼수상태에 빠졌습니다. 그 때 미군 함정이 나타나는 바람에 겨우 위기를 벗어나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급기야 김목사님의 가족을 죽인 공산당원들을 미군들이 잡아들였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빵을 들고 미군에게 찾아가서 공산당원에게 주고, 미군에게 사정사정해서 풀어달라고 하였습니다. 미군이 목사님의 간청에 못 이겨서 풀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공산당원들이 산 속에 들어가서 계속 게릴라전을 벌였습니다. 그 때 김목사님은 성경책을 들고 산 속에서 게릴라전을 벌이는 공산당원들을 찾아 들어갑니다. 그 결과 그들 공산당원들이 회개하고 돌아와 108명이 모이는 시골교회를 설립할 수 있었습니다. 김목사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아버지를 죽이고 아내를 죽인 사람까지도 용서했던 것입니다. 놀라운 사랑이지요. 

김장환 목사님이 미국에서 신학대학을 졸업하던 해인 1958년 4월 25일에 한국 출신 유학생 한 명이 살해되었습니다.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다니는 오인호라고 하는 학생이, 부산에 살고 있는 부모님들에게 쓴 편지를 부치고 돌아오는 밤길에 깡패 열한 명을 만났습니다. 그 깡패들은 오인호가 가지고 있는 돈을 뺏기 위해서 쇠파이프로, 야구방망이로, 구둣발로 마구 걷어차서 실신시킨 다음에 몇 푼 되지도 않는 돈을 빼앗아 가지고 달아났습니다. 신고를 받은 경찰이 출동했을 때는 이미 오인호 학생이 싸늘한 시체로 죽은 상태였습니다. 그 소식을 접한 전 미국 국민들은 그 열한 명을 체포해서 사형에 처해야 된다고 난리였습니다. 사건을 맡은「빅토르 블랭크」라고 하는 유명한 검사는 범인 모두에게 사형을 구형했습니다.

그 때 마침 한국 부산에서 편지 한 통이 날아 왔습니다. 오인호의 가족들이 필라델피아 법정에 낸 진정서였습니다. 그 진정서는 “여러분들의 법률이 허락한다면, 그 열한 명에게 가장 적은 형벌이나, 무죄로 판결 지어 주시기를 진정으로 호소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장래를 위한 참된 교육을 위해서 적으나마 우리 가족들이 모여서 거둔 사랑의 표시, 약간의 현금을 보내드립니다. 이것은 다만 우리가 기독교인이요,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편지가 미국 언론에 보도가 되자 미국 사람들은 숙연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의 사랑! 그의 피 흘린 희생의 대가를 입은 오인호의 가족은 십자가의 위력을 체험했기에, 그러한 결단을 내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 아들을 죽인 원수들을 위해서 탄원서를 보냈고 그들의 장래를 위해서 가족이 모은 돈을 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의 실예는 김용문이라는 집사님의 간증입니다. 남편이 도박에 빠져있고, 늘 술에 취해서 가족들의 생활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부인이 행상을 하면서 연명했는데 하루는 장사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몸이 홱 돌아가더니만 골반이 삐뚤어져서 그때부터 절름발이가 되었습니다. 골반뼈가 옆으로 손바닥만큼 튀어나왔습니다. 일어나니까 왼쪽다리가 끌려서 발을 절게 되었습니다. 다리를 끌면서 머리에 바구니를 이고 장사를 하니까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육신도 고통이 심했지만, 남편에 대한 원한과 미움으로 눈물 속에 살다가 그 미움과 분노 때문에 심신이 병들어 버렸습니다. 그런 삶을 18년 동안 살다가 견디다 못해서 ‘나도 교회에 나가야 되겠다’ 생각하고 교회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교회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는 중에 남편에 대한 모든 원한을 예수님 십자가 밑에서 다 회개하고 용서하고 남편에 대한 미움을 청산하니 병들었던 속사람이 시원해지고 그동안의 소화가 되지 않고 신물이 늘 가슴속에서 솟구쳐 올라서 속앓이 많던 것이 깨끗이 나았습니다. 성령 받고 은혜 받고, 기뻐하며 신앙생활하는 중에 하루는 잠을 자고 일어나니. 18년간 튀어나왔던 골반뼈가 싹 들어가 버리고 다리도 깨끗하게 나아버리고 말았습니다. 미움과 원한과 분노가 그 영혼을 병들게 하고 그 위장을 병들게 하고 속앓이를 가져오고, 골반뼈가 튀어나오게 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끌어않고 그 남편을 용서하고 미움과 분노를 삭이고, 사랑하자 마음도 몸도 고침을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용서해야할 사람은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하고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가족, 교우, 직장 동료 들입니다. 그들에게 주님의 사랑으로 다가가십시오. 주님이 나를 용서하셨듯이 용서하십시오. 
  
용서는 감정이 아니라 결단이요 선택입니다. 나를 공격한 사람을 더 이상 공격하지 않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빚을 탕감해주고 나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을 사면해주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연합하여 성장해야 합니까? 

1. 서로 본이 됨으로 성장합니다. 
2. 서로 격려함으로 성장합니다. 
3. 서로 가르침으로 성장합니다. 
4. 서로 권면함으로 성장합니다. 
5. 서로 존중함으로 성장합니다. 
6. 서로 고백함으로 성장합니다. 
7. 서로 용서함으로 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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