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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계속되는 구원의 계보 (룻 4: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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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되는 구원의 계보 (룻 4:13~21)


I. 장례식에서 결혼식으로(4:13)

목회를 하다보면 새벽에 장례식 오후엔 결혼식을 주례할 때가 가끔 있습니다. 
룻기는 문이 열려지면 1장 장례식으로 시작됩니다. 아버지와 장성한 두 아들의 주검 앞에서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그러나 4장 룻기 마지막 부분에서는 결혼식이 거행됩니다. 신혼의 달콤한 입맞춤으로 룻기는 마지막을 장식합니다. 룻기는 끝이 유쾌하고 기쁨 해피엔딩 - 나아가 아름다운 역전의 드라마입니다. 

룻기 1장의 그림은 "남겨진 여인들의 고통"입니다. 남편 잃고 버려진 여인들의 눈물입니다. 2장의 그림은 "은혜의 눈빛"입니다. 룻은 하나님의 은혜의 눈빛 한 번, 이삭 한 줌, 부스러기 한 토막이면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3장을 화가들이 그림으로 그린다면 "안식을 기다리는 여인"을 그릴 것입니다. 4장의 그림은 "행복한 결혼식"입니다. 이 결혼식으로 남겨진 여인의 고통은 사라집니다. 안식을 그리워하던 사람들에게 안식이 주어집니다. 4장의 결혼식은 천국 혼인잔치 신랑 예수를 예고해 줍니다. 

저 하늘에는 눈물이 없네 거기는 슬픔도 없네
저 하늘에는 눈물이 없네 거기는 승리만 있네 
고통은 모두다 사라져 버리고 영광만 가득차겠네
우리의 주님과 함께 있을때는 영원한 기쁨있겠네 

1장에서는 울음소리가 들려옵니다만 4장에서는 웃음소리가 들립니다. 
1장에서는 가난에 주린 배가 보입니다만 4장에서는 함포고복 부른 배가 보입니다. 
1장에서는 으이으이 장송곡소리가 들려옵니다만 4장에서는 딴딴딴딴 웨딩마치가 들립니다. 
1장에서는 무너지는 가정의 이야기가 4장에서는 회복되는 이야기로 바뀝니다. 
1장에서는 모압에 남겨지고 버림받은 사람들이 4장에서는 베들레헴 스타가 됩니다. 
1장의 장례식은 4장 결혼식으로 바뀌어 집니다. 인생 역전의 드라마 그것이 룻기입니다. 

이 모든 말씀을 모아 모아서 오늘 본문 시작하는 4:13절 "이에"라는 단어 하나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4:13 "이에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룻의 프로포즈는 위기를 만나지만 보아스의 능력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재판은 끝이 났습니다. 재판이라고 하면 살벌한 분위기가 느껴져야 하는데 베들레헴 사람들은 서로 존중해 주고 축복해 주며 재판을 합니다. 패배자에게 침을 뱉거나 저주하지 않습니다. 참 아름다운 마을입니다. 재판은 끝이 났다. 이에 행복한 결혼식이 펼쳐졌다 하는 이야기로 오늘 본문은 시작하고 있습니다. 

결혼식장을 상상하면서 사람들은 몇 가지 의문점을 갖습니다. 
보아스는 상당히 나이가 많았을 텐데 두 사람 나이 차이가 얼마나 되었을까? 보아스는 부인을 잃고 지내던 홀아비인가 아니면 부인을 두고 두 번째 아니면 세 번째 부인으로 룻을 맞이한 것인가? 그러나 정작 룻기 저자는 이런 문제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습니다. 보아스가 룻을 아내로 맞이 했다고만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공부할 때 성경이 말하지 않는 엉뚱한 일에 관심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 성경 연구가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확신을 가지십시오. 당신은 지금 성경을 잘못 읽고 있다는 사실을. 그 어뚱한 관심은 성경의 관심이 아니라 바로 당신 자신의 관심일 뿐입니다. 

13절 한 절 안에서 룻은 결혼을 하고 아들을 낳습니다. 한절 안에서 그렇게 후딱 10개월이 지나갔습니다. 기록은 없지만 참 행복하고 달콤했던 10개월이었으리라 쉽게 짐작이 됩니다. 여기서 룻기 저자는 "여호와께서 룻으로 임신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임신을 하나님의 사건으로 고백합니다. 이 한마디 고백을 통해 보아스와 룻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결혼을 하고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임신을 하고 아들을 낳았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모든 비극과 눈물, 모든 괴로움과 염려를 털어버리는 한 마디 말입니다. 


II. 축복의 여인(4:14-17)

룻이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이 베들레헴 마을에 전해지자 여인들이 나오미를 찾아가 축하인사를 합니다. 이때 축하 인사를 한다면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일반적으로 "옥동자를 얻었으니 축하합니다" "애기가 복스럽게 생겼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곳 베들레헴 여인들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인간은 생겨먹길 남이 잘 되는 것을 보면 배가 아프게 되어 있습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괜히 나왔겠습니까? 그러나 베들레헴 여인들은 나오미가 잘되는 것을 보고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진심으로 나오미를 축복합니다. 참 귀한 사람들입니다. 

축복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14절 계속된 말씀입니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우리 번역엔 "이 아이의 이름"이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원문엔 "그의 이름이"입니다. 

그가 누구일까요? ① 우리말 번역처럼 "지금 태어난 이 아이의 이름"일 수 있습니다. ② 두 번째는 여호와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불려지길 축복한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같은 14절 "찬송할지로다" 이 말이 "복 받으소서. 여호와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어서 "여호와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불려지소서"라고 이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③ 셋째는 같은 14절에 "기업 무를 자"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에 보아스의 이름이 유명해 지기를 축복하는 말이 될 수 있습니다. 
④ 넷째는 언어 사용에 탁월했던 룻기 저자는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이 대명사를 통해 독자의 상상력에 맡겨 하나님을 찬양하는 의미를 풍성하게 하고 싶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정답은? 역시 여러분의 상상에 맡깁니다. 

15절 마을 여인들의 축복의 말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아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생명의 회복" - 이 말은 시편 23편에서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며"하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그동안 나오미는 인생의 모진 풍파에 시달리다 삶의 의욕과 기쁨을 다 잃어버리고 그의 영혼이 탈진 상태에 빠져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제 룻이 자식을 낳아주므로 나오미의 영혼이 소생되는 기쁨을 얻었습니다. 이 아이로 말미암아 마라(괴로움)가 다시 나오미(기쁨, 환희)로 회복되었습니다. 이 상황을 룻기 저자는 "생명의 회복"이란 말로 정리했습니다. 

베들레헴 여인들은 의례적인 축하 인사를 하는 것 같지만 그 축복의 내용은 성령의 감동을 전하는 계시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축복이 정교하고도 세련되었습니다. 그 축복 가운데 룻을 축복의 며느리로 칭송하고 있습니다.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 보다 귀한 네 며느리"라고 합니다. 이 기록을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잘 키운 며느리 하나 일곱 아들 안 부럽도다" 이 말입니다. 

룻은 과연 복덩어리, 복의 근원 - 축복의 딸이었습니다.
① 우선 룻은 나오미에게 복덩어리였습니다. 나오미는 룻으로 말미암아 생명이 소생되었습니다. 룻은 나오미 노년의 보양자가 되었습니다. 일곱 아들 보다 귀한 며느리가 되었습니다. "일곱 아들"이란 이 땅에서 어버이가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복을 말합니다. 

② 둘째 룻은 남편 보아스에게 복덩어리였습니다. 보아스는 룻과 함께 구속의 족보, 메시아 가계를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유명한 가문으로 거듭났습니다. 룻이 라헬 같은 국모라면 보아스는 자연히 이스라엘 국부가 되었습니다. 

③ 셋째 룻은 베들레헴 마을을 복되게 만든 복덩어리였습니다. 무명의 마을이 룻이 낳은 아들과 함께 다윗 왕의 고향, 메시아가 태어나는 마을이 되었습니다. 이 이상 더 유명해 질 수가 있을까요?

④ 나아가 룻은 이스라엘 민족의 복덩어리, 온 인류의 복 덩어리가 되었습니다. 모든 이방 족속의 복 덩어리가 되었습니다. 과연 룻은 "생명의 회복자" - 능력있는 애인, 현숙한 여인 - 에쉐트 하일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나오미는 룻이 낳은 아이를 품에 품고 감격에 겨워합니다. 
16절에 나오는 "아기"는 대단히 중요한 말입니다. 히브리어로 "옐레드"인데 이미 1:5에 나왔던 두 아들과 같은 말입니다. 1장에서 어미보다 먼저 죽어 어미를 아프게 하고 슬프게 했던 그 아들 - 옐레드가 4장 마지막에 와서 기쁨과 회복의 아기, 아들로 태어납니다. 옐레드의 죽음으로 시작된 룻기는 옐레드의 탄생으로 끝이 납니다. 먼 훗날 한 옐레드 - 아기가 태어나 인류를 구원하게 될 것입니다. 

** 축복의 아이가 조금씩 자라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을 볼때마다 방실방실 웃으며 사람의 애간장을 녹입니다. 성경에 보면 대단히 재미있는 사건을 우리에게 남겨주고 있습니다. 이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는데, 일반적으로 이름을 짓는다고 하면 그 아이의 아비가 이름을 짓겠지요. 아니면 집안의 어른들 가운데 누가 이름을 짓겠지요. 아니면 학식이 있고 덕망이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이름을 지어달라고 얘기했겠지요. 그런데 이 아이의 이름은 베들레헴 마을의 여인들이 몰려와서 아이의 이름을 지어줍니다. 성경에 보면 한번 말한 것이 아니라 두 번씩이나 반복해서 그 여인들이 이름을 지어 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오벳이라" - 섬기는 자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 아이가 너의 늙음을 섬겨줄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아이가 될 것이다. 오고오는 세대에 인류를 섬기는 아이가 될 것이다. 오벳이라 이름을 짓게 되는 것입니다. 이 아이는 베들레헴 모든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이 되었습니다. 

이 얘기가 어떻게 이어집니까? "이 아이가 바로 다윗의 할아버지가 되었더라"는 것입니다. 이제 베들레헴 마을의 관심은 온 이스라엘의 관심으로 번졌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결국 이 사랑과 관심은 모든 인류 하늘의 천사 - 역사의 관심이 됩니다. 역사는 한 아기로 말미암아 BC와 AD로 나뉘어 집니다. 


III. 베레스(4:18)

룻기의 결론 - 마지막 다섯 절은 계보입니다. 계보는 일반적으로 앞부분에 나오는데 유독 룻기만은 계보가 제일 마지막에 나옵니다. "보라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계보는 다윗왕까지 이어지는 계보인데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하필 왜 베레스로부터 시작하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됩니다. 12절에서도 마을 사람들이 보아스를 축복할 때 베레스의 집 같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베레스가 누구입니까? 
창세기를 살펴보면 37장부터 끝까지 요셉의 이야기가 기록됩니다. 중간 38장에 야곱의 12아들 중 넷째 아들 유다의 별로 좋지 않은 에피소드가 불쑥 끼여듭니다. 유다는 잠시 신앙적으로 침체되어 아버지 야곱의 집을 버리고 이방 땅에 들어가 살게 됩니다. 거기서 이방 여인을 만나 결혼을 하여 세 아들을 낳습니다. 그 첫째 아들이 엘이란 아들인데 이 장남 엘과 결혼한 여인이 다말입니다. 엘이 자식 하나 낳아주지 못하고 일찍 죽고 둘째 아들도 다말과 관계 속에서 죽습니다. 

시아버지 유다는 며느리 다말을 친정으로 보냅니다. 다말은 유다의 집에 메시아의 약속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시아버지가 자식 낳는 일을 방해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시아버지 유다가 다말의 친정집 가까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다말을 창녀로 위장을 하여 유다를 유혹합니다. 그날밤의 징표로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얻습니다. 석달 후 유다는 며느리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며느리를 죽이려 합니다. 유다가 다말이 내민 증표를 보고 그 뱃속 아이의 아버지가 자신임을 알게 되지요. 

다말이 드디어 해산을 하고 쌍둥이를 낳는데 첫째 아이가 바로 베레스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다말이 낳은 베레스와 지금 룻이 낳은 오벳과는 어떤 관계가 있길래 룻기는 야베스를 시조처럼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요? 

창세기 다말과 룻기의 룻은 유다 집안 메시아 족보가 끊어질 위기에서 메시아의 약속을 믿었던 사람입니다. 구원의 때를 이어가려는 열망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구원의 대를 이어가려는 열망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대를 이어간 사람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구원의 열심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려는 그 계획을 끊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바로 이런 하나님의 열심을 가졌던 사람이 이방 여인 다말이요 룻이었습니다. 이 열심히 얻은 아들이 창세기 베레스요 룻기의 오벳입니다. 다말은 이스라엘의 아들을 얻기 위해 목숨을 걸고 모험을 하여 베레스를 얻었습니다. 룻은 이스라엘의 아들을 얻기 위해 고향 땅 동족과 자기 신들을 버리고 어머니를 붙쫓아와 얻은 아들이 오벳입니다. 

이제 왜 룻기 저자가 베레스와 오벳을 연결하고 그 연장선상에서 다윗을 말하고 있는지 아시겠습니까? 당신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열심을 막을 자는 없습니다. 당신을 하나님의 백성 삼으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끊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IV. 하나님의 구원의 폭(4:19-21)

마지막 다섯절 족보 안에는 각 절마다 두 사람씩 모두 10명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누가 누구를 낳았다는 단순한 문장을 아홉 번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룻기는 1장에서 죽음의 이야기를 들려주더니 4장 마지막에서는 출생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헤스론 - 람 - 암마나답 - 초반에 등장하는 이들이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살았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구약 성경이 우리에게 이들의 이야기를 알려주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어린이 청년 시절을 거쳐 시집 장가가고 자식 낳고 살았겠지요. 그러나 우리에겐 숨겨진 인물들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족보속에 이름 한번 등장하는 인물들이지만 구원의 맥을 이어준 위대한 인물들입니다. 

21절에 오면 룻기의 주인공들 이름이 드디어 나옵니다.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지금까지 룻기는 보아스가 룻의 친족 구원자 - 고엘이 되어 많은 헌신과 희생을 해 주었다고 설명해 왔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룻이 낳은 아들 오벳이 보아스의 대를 이어간 아들로 언급됩니다. 룻은 나오미의 가문을 회복했을 뿐 아니라 보아스의 가계를 회복했습니다. 룻은 보아스 가계의 축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보아스가 룻을 위해 손해 보고 희생한 줄 알았는데 그것이 결국 자신을 통해 이루어 가는 하나님의 구원사를 회복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희생이 축복이 되었습니다. 

또 한 가지 21절은 룻기의 한 주인공 보아스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알려줍니다.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 과정을 이끌었던 리더 가운데 한 사람인 살몬이라는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1:5에 의하면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보아스의 어머니는 여리고성의 기생으로 이스라엘 정탐꾼을 숨겨준 라합이란 사람입니다. 살몬이 라합과 결혼한 것을 보면 살몬은 여리고성을 정탐하러 갔던 두 사람 중 한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이 여인 라합이 이방 기생이었다는 사실을 전혀 숨기지 아니하고 우리에게 자랑하듯 알려줍니다. 히브리서는 그가 믿음의 사람이었다고 평가합니다.(히11:31)

룻기의 족보는 하나님의 구원의 폭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방 여인 다말이 시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얻은 아들 베레스를 구원 역사 중심에 세웁니다. 여리고의 기생과 살몬은 결혼하여 룻기의 주인공 보아스를 낳습니다. 보아스는 모압 여인 룻과 결혼하여 다윗 왕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됩니다. 이 부끄러운 가계를 조금도 괘념하지 아니하고 당당히 기록합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그 높이와 넓이와 깊이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V. 다윗을 낳으니라(4:22)

이제 우리는 룻기의 종착역에 도착했습니다. 마지막 절입니다.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룻기는 사사기의 연속편입니다. 사사시대는 왕이 없었던 시대였는데 룻기는 이스라엘의 왕 다윗이 태어났다는 말로 끝을 맺습니다. 룻기의 마지막 단어가 바로 "다윗"입니다. 그리고 그 다윗을 다음 책 사무엘서로 넘겨줍니다. 

룻기는 다윗으로 끝이 나지만 신약 마태복음은 다시 다윗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결국 룻기는 예수 그리스도로 끝이 납니다. 룻기는 다윗을 거쳐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이어지는 거대한 구원의 이야기입니다. 인류의 친족 구원자 - 고엘되신 예수 그리스를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룻기의 마지막은 우리에게 긴 여운을 남깁니다. 룻기의 마지막은 우리에게 큰 도전을 합니다. 

누구는 누구를 낳고, 누구는 누구를 낳았다는 구원의 계보는 지금도 이어져 가고 있습니다. 당신을 낳아준 사람은 누구입니까? 당신에게 복음을 전하여 준 사람은 누구입니까? 당신에게 은혜를 끼친 사람은 누구입니까? 당신의 영적 아비는 누구입니까?

그리고 당신은 누구와 누구를 낳았습니까? 행여 당신에게서 구원의 계보가 중단되지는 않았습니까? 끊어질 위험에 처한 구원 계보를 이어가기 위해 목숨을 담보했던 다말의 열심히 내게 있습니까? 백성과 자기 신들을 버렸던 룻의 열정이 당신에게 있습니까? 

또 다른 도전이 있습니다. 또 다른 영웅이 있습니다. 행여나 구원의 물줄기가 그대에게 도달하고 난 다음에 다시는 흘러가지 않는 썩은 물로 썩은 복음으로 내 삶속에 고여 있지는 않느냐? 구원의 물줄기 구원의 계보를 그대는 만들어 가고 있느냐? 우리에게 묻는 것입니다. 그대의 자녀들에게 구원의 물줄기가 제대로 흘러가고 있느냐. 그대가 만났던 친구와 이웃과 동료들에게 구원의 계보가 만들어져 가고 있느냐. 또 너는 누구를 낳았더냐. 그대가 낳은 믿음의 자녀는 누구이며 그대가 만들었던 그대의 제자는 누구이냐. 그대가 구원해서 또 만들었던 계보를 내게 보여다오. 룻기의 저자는 우리에게 마지막 도전을 우리에게 남기고 있는 것입니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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