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복음의 감격 (롬 3:9~24)

  • 잡초 잡초
  • 426
  • 0

첨부 1


복음의 감격 (롬 3:9~24)
   

로마서는 복음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롬1:15절에 바울은 
    할 수 있는 대로 로마 교인들에게 복음 전하기를 원한다고 하는데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은 16절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고 합니다.
로마서는 이 복음을 우리에게 말하기 전에 
         먼저 복음이 필요한 사람들을 밝혀둡니다. 
복음이 내 귀에 들리어지는 은혜의 시간되시기 바랍니다. 

본문말씀 가운데 10절 13절 15절에 
바울은 계속 로마에 가기를 원한다고 하면서 
15절에 [할 수 있는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복음은 누구에게 전합니까? 
      안 믿는 사람에게 전해야 합니다.
바울은 선교사이기 때문에 분명히 복음을 전하는데 원칙이 있습니다.
롬15:20절
[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하였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 
로마 교회는 바울이 세운 교회가 아닙니다.
그런데 바울은 지금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하면서
     로마에 가서 복음 전하는 것을 간절히 바랍니다.

그럼 로마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1:8절에 보면 
저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 바울이 감사한다고 할 만큼 
      믿음이 좋다고 사방에 소문이 퍼져있는 로마교회 교인들입니다.
바울이 이런 로마교회 교인들을 향하여 복음을 전하기를 원한다는 것은 
      무언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그렇게 잘 믿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애썼을까요?
애를 써도 한두 번 쓴 것이 아닙니다.
13절에 보니 내가 여러 번 가기를 애썼다고 합니다.
바울은 길만 열리면 어떠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신학자들마다 1:15절에 의문표를 달고 있습니다.
왜 바울이 믿음이 좋다고 소문이 나있는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그렇게 애썼을까?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복음을 전할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닌데 
  왜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기를 애썼을까?
저 나름대로 여기에 대해 깨달은 바가 있습니다.
즉 15절의 의미를 목회하는 목사이기 때문에 깨닫게 된 것입니다. 

로마교회는 그 당시 1,2년 된 교회가 아닙니다.                       
성경학자들은 세운지 20년 이상 된 교회라고 합니다.           
대부분 교회들이 설립될 당시는 교인들이 아주 열정적입니다.
특히 복음을 받고 구원의 감격을 맛본 새신자들은 
     물불 가리지 않고 교회에 열심히 봉사 충성합니다.
그래서 집사 되고 권사 되고 장로된 것 아닙니까?

그런데 대부분 교회가 초창기 때는 계속 신앙이 자라다가 
       20-30년 쯤 되면 성장이 멈추는 것 있지요?

이 말은 그 교회 교인들의 신앙의 성숙이 멈춘다는 것입니다.
왜? 연륜이 쌓이니 습관적이 되어 신앙의 경직화 현상이 나타나니 
  신앙이 안일해지고 교만해져서 복음에 대한 불감증이 오는 것 있지요.

그리고 30,40대 교인들이 바로 50,60대가 되어 
       육신적으로도 늙는다는 것을 느끼는 나이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들어도 이것은 누가 들었으면 좋겠다고 하지
       자기 자신이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어느새 복음의 감격과 능력을 상실하고 마는 것입니다.

정말 복음이 필요한 사람은 교회 밖에도 있지만 
    교회 안에도 생각보다 많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에 대하여 가장 감격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복음에 대해 너무 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 교회 안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복음은 결코 과거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복음은 현재사가 되어야 하고 일인칭이 되어 나의 복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지금도 복음에 감격하고 그 복음이 나의 것이 되어 
     남에게 전할 수 있는 복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복음은 듣고 또 들어야 합니다.
복음 앞에 꺾이어지고 또 꺾이어져야 합니다.
복음은 반복될수록 능력을 나타내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럼 복음이 내 귀에 들리어져서 복음의 감격을 가지려면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1. 하나님 말씀은 본래의 사람의 모습이 어떠하다고 하며
          왜 모든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할까요?(9-10절)

오늘 본문말씀 9절에 보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선언합니다. 
사람들은 죄를 구체적으로 지적하기 전에는 부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구체적으로 유대인과 헬라인의 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럼 유대인의 죄가 무엇이고 헬라인의 죄가 무엇입니까?
앞에 1:18절 이하에서 헬라인들 즉 이방인들의 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20-21절에 만물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분명히 보이는데도
         [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 아니하고 감사치도 아니하고 ] 
그리고 유대인들의 죄가 무엇인가?
2:1절 이하에 보면
      비판의 명수고 고집불통이고 위선자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런 성경을 대할 때
아 이건 이방인들의 죄고 저것은 유대인들의 죄구나
이렇게만 보인다면 성경이 나하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저는 성도들에게 성경을 읽을 때
     단체사진 보듯이 보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1) 시대적 배경과 환경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2) 나 어디 있는가? 를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방인들 죄 속에서, 유대인들의 죄 속에서
         나 자신의 죄를 발견해야 합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잘 몰라서 
     영화롭게도 감사치도 아니하지만 
     너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하고 감사치도 아니하느냐?
유대인들만 비판의 명수고 고집불통이고 위선자냐?
      너는 사랑 사랑하면서 왜 남을 미워하고 남의 흉을 보고
           그러면서도 자기가 제일 잘 믿는 것 같이 고집을 부리느냐?
아이쿠!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바로 나 보고 하는 말이군,
그래서 10절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오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오기를 꺼려하는 이유 가운데 한 가지가 
이것은 마치 우리가 병원에 가기 싫은 이유와 같습니다. 
       저도 가기 싫은 곳이 바로 병원입니다. 
       왜 싫어합니까? 불안감 때문입니다.
                      혹시 중병이나 죽을병이라도 걸렸다 하면 어떻하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오기를 꺼려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싫든 좋든 몸 상태가 안 좋으면 의사에게 가야합니다. 
그리고는 염치 불구하고 [ 자 마음대로 하세요 ] 하고 다 벗어야 합니다. 
아무리 수줍어하는 아가씨도 아프면 다 드러내야 합니다. 
오늘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 앞에 
자신을 한번 드러 내어놓고 영적으로 진단 받는 귀한 시간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시51:5절에                                               
[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 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오늘 이 말씀은 진리구나 하고 받아 드리면 
            여러분 삶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 말씀도 아무리 읽어봐도 이상한 말씀입니다. 
이게 누가 한 이야기인가 하면 성경에 다윗 왕이 한 이야기입니다.
무식한 사람이 이런 이야기했다면 몰라서 그렇다 하지만 
다윗은 박식하고 지혜롭고 그리고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 일인자로서 왕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우리도 한번 생각해 봐야할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이 말을 다윗이 했지만 다윗의 생각으로 했습니까?
성경이라는 것은 사람을 통해 말하지만 
하나님이 다윗의 마음을 움직여 하나님이 하시고 싶은 말을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 라는 말은
        [ 너희는 다 죄악 속에서 태어났다 ] 하는 말입니다.
       즉  [ 너희는 다 죄인이다 ] 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반발했습니까?

교회에 나와도 이 말씀 들으면 열 받아 돌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 라고만 하면 좋을 것인데
[ 당신은 죄인이다 ] 라고 하니 열 받는 것도 당연하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병원에 가서 의사가  [ 당신 죽을병에 걸렸소 ] 라고 하면 
       충격은 받겠지만 그러나 곧 의사의 처방만 기다립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를 죄인이라고 진단하실 때 
우리를 만드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 분의 말에 수긍을 해야 합니다. 

그럼 왜 성경이 모두가 다 죄인이라고 합니까?
그것은 복음이 귀에 들리어지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은 별 수 없어요, 
삼일 간만 소화가 안 되고 위장이 불편하면 별의 별 생각 다합니다.
그래서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위염입니다 라고 하면 곧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위암 3기라고 하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그때는 한 가지 밖에 안 듣깁니다. 살 수 있다는 소리 밖에 안 들립니다.
우리가 죽을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비로소 복음이 내 귀에 들리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 
항상 신앙의 출발선 앞에 설 줄 알아야 합니다.
신앙의 출발선이 어디입니까?
       구약적으로 말함변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입니다.
       신약적으로 말하면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는 자입니다.
그럴 때 복음이 내 귀에 들리어 질 줄 믿습니다. 

이제 의사가 당신 죽을병에 걸렸소 라고 하면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을 갖습니다.
[ 이 병이 왜 생겼는가 ? ] [ 이 병이 어떻게 생겼는가? ]
본래는 병든 몸이 아니었거든요. 그리고 어떤 사람은 증상도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도 의사가 진단결과 죽을병입니다. 하면 수긍해야 합니다.
        왜 모든 인간이 죄인이 되었습니까?
        왜 모든 인간이 죄악 중에 출생합니까?
        그래서 왜 악한 생각을 하고 기회가 주어지면 죄를 짓게 됩니까?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떠난 인생의 영적 상태는 어떠합니까?


2. 하나님 떠난 인생의 영적 상태는 어떠합니까?(11-18절)

하나님 떠난 인간은 11절 이하에
스스로 하나님을 찾을 수도 없고 선을 행할 수도 없고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고,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기존 신자도 은혜 떨어지면 이런 영적 피폐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결국은 16절에
[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한다 ] 고 합니다.
왜 이렇게 되었느냐? 
18절 [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러시아가 낳은 유명한 문호인 솔제니친이란 분이 있습니다.
수용소 군도라는 작품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어
       이름은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1917년 러시아에 공산혁명이 일어났을 때 솔제니친은 어린아이였습니다.
매일 수십명 수백 명씩 끌려가 학살 당하고 시베리아로 추방당하는 가운데
온 나라가 공포 분위기에 빠지고 아수라장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후 <솔제니친>은 대학에서 러시아 혁명사를 전공하였습니다.
오늘날 그는 그 분야에 최고의 권위자로 존경받는 지성인입니다.
그가 수십 년 동안 러시아 혁명사를 연구한 끝에 결론을 내렸습니다.
“불과 반세기 만에 6,000만명이 넘는 사람의 생명을 앗아갔던
 악마 같은 공산주의 혁명의 비극이 왜 러시아에서 일어났을까?”
1983년 미국 템풀톤에서 강연을 하였을 때
여기에 대한 결론을 의외로 간단하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솔제니친이 어릴 때 이러한 재난 속에서 
           어른들이 앉아서 주고받는 말들을 들었습니다.
그 말들이 너무나 인상적이라서 어른이 되어서도 잊어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 말은 “ 사람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렸기 때문이야
                   하나님을 잊어버렸기 때문이야 ”
바로 이 말이 그가 템풀톤 강연에서 들려준 그의 결론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멸시하는 나라는 지옥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레닌과 스탈린>이 대신 앉았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엄청난 대가를 치루고 말았습니다.  
이 사실은 <맑스 레닌> 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리에 지식이, 물질이, 권력이 자리 잡으면
                엄청난 비극이 초래된다는 것 아셔야 합니다.
특히 우리의 자녀들 공부 때문에 신앙 양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 하나님 잊어 버렸기 때문이야 ” 라는 탄식이 나오면 
  벌써 때는 늦은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은 이 세상의 삶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영원한 삶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 똑 같은 삶은 아닙니다. 천국과 지옥이 있습니다.
하나님 떠난 영혼은 지옥에 갈 수밖에 없습니다. 
지옥은 돌이킬 수 없는 고통이 있는 곳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떠나  마귀의 종이 되어 살아가는 이상 행복이 없습니다. 
더 불행한 것은 자기만 여기에 빠져있는 것이 아니라                
   자식들까지 구렁텅이에 빠트려 놓습니다.
이것이 죄인의 영적상태 파멸과 고생인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죄인인 것을 알 수 있습니까?


3. 우리가 어떻게 죄인인 것을 알 수 있습니까?(19-20절)

오늘 성경 말씀에 19절에 [ 이는 모든 입을 막고 ] 라는 말이 나오는데
롬1장에서 3장 초반에 이르기까지 죄인이라는 것을 거부하는 인간에게 
          모든 사람들의 입을 막았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모든 사람은 죄 아래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착한 사람 좋은 사람을 만나면
   “ 저 사람은 법 없어도 살 사람이야” 라고 말합니다.
세상에 법 없어도 살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사실 법 없어도 살 수 있는 사람일수록 법이 있어야 합니다.
착한 사람일수록 주변에 악한 사람들에게 불이익을 당할 수 있음에도 
     나름대로 법이 그를 보호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법은 좋은 것입니다.
때로는 불편한 것 같지만 국가와 사회와 교회와 심지어 가정도
       법이 있어야 든든히 서 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에게 법은 긍정적인 느낌보다는 
         부정적인 느낌이 훨씬 크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성경에 율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은 하나님 백성들에게 주신 선물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성도님들이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이 있습니다.

1)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기 위하여
           율법이 주어졌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속성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통해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원하심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에 우리에게 거룩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선한 것입니다.
롬7:12절 [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고 합니다.


2) 율법은 죄를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법이 없으면 죄가 될 수 없습니다.
지금 진보계에서는 보안법 없애라고 탄원하고 있습니다.
왜? 보안법이 없으면 김정일을 찬양해도 죄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법은 무엇이 옳은가를 선언할 뿐만이 아니라 선의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율법은 인간에게 죄를 깨닫게 해 줍니다. 
       그리고 죄 지은 사람을 정죄합니다. 죄의 울타리에 가두어 버립니다.
      그런데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죄의 울타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율법을 알아가고 하나님의 뜻을 알면 알수록 인간이 선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얼마나 죄인이고 무능한 존재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율법은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해 주어도
   죄를 벗어나 선을 행하는 능력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인간은 자신이 죄인인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율법은 인간의 죄를 지적하며 하나님의 심판대 앞으로 가지고 옵니다.
20절에 보니
[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음이니라 ]
사람들이 율법을 지켜서 구원 얻으려고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더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럼 죄 문제를 어떻게 해결 할 수 있느냐?


4.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까?(21-22절)

율법이 죄를 정죄하는 역할만 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21절에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율법은 마치 의사의 청진기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청진기를 갖다 대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병을 치료하기 위한 것입니다.
물론 청진기가 병을 치료할 수 없습니다. 처방을 내리기 위한 진찰이지요.
하나님이 인간에게 율법을 주신 궁극적인 목적은 
         살길을 열어주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 앞에서 죄인이라고 깨닫는 순간 절망적이라고 느끼는 순간
       구원의 희망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모른채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율법 앞에서는 모두가 다 죄인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내가 죄인인 것을 인정할 때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눈을 뜨게 하여
       예수님 앞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합니다.
다시 말해 죄인인 것을 인정하는 것이 은혜요 복인 것입니다.

갈3:24절 [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 
전에 성경에는 초등교사 대신 몽학선생이라고 했습니다.
몽학선생은 아이가 학교에 사고 없이 오갈 수 있도록 인도하고 보호하는 
           수행 가정교사를 말합니다.
율법이 바로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와야 만이
     우리의 죄 문제가 해결되고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습니다.
22절 [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음이라 ] 
차별이 없다는 말은 누구든지 예수만 믿으면 죄 문제가 해결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가 하면
히9:22절 [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  
누군가가 죄 값을 치뤄야 합니다.
그런데 죄의 삯은 사망이라 했는데 누가 나를 대신하여 죽어줍니까?
[ 자기 ! 날 사랑해 그렇다면 나대신 죽을 수 있어? ]
물론 총각이 결혼하기 위해서 이 생명 바쳐 자기 사랑해 할지 모르지만
결혼 해 보세요. 대신 죽을 수 있는가?

그런데 우리가 감사해야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롬5:9절에 [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하나님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셨든지 
나를 위하여 아들을 대신 피 흘리는 자리에 내어놓고 나를 살려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내 모든 죄를 깨끗하게 씻어 주시기로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이 예수만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5. 죄인이 구속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처방은 무엇입니까?(23-24절)
23-24절 [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 
죄는 권세가 있습니다. 죄를 만만하게 보지 마십시오.              
죄는 우리를 결국 지옥으로 끌고 가고 
     죄는 유전성을 가지고 자식 대 까지 오염됩니다.
     가만히 보면 죄에 대한 집안 내력이 있습니다.
     이것은 마귀가 약점을 이용한 것입니다.

결국 죄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합니다.
23절「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
그러나 사실 하나님은 죄를 정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절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를 가르쳐 주기 위함입니다.
24절「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 즉 예수님이 죄 값을 치루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입었습니다.
죄인이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내 대신 십자가에 피흘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내 마음에 구주로 믿으면 구원 얻을 수 있는 줄 믿습니다. 

그럼 예수 믿고 의롭다 하심을 입었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의로움이란 말은 하나님다움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답게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 믿으면 가장 뚜렷한 변화는 바로
죄사함에 대한 확신과 새로운 신분에 대한 확신 
        즉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자녀는 
요1:12절에  [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 고 합니다.

오늘 예수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가지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가지고 
        인간의 불행한 삶을 가져다주는 마귀를 대적하여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죄의 권세는 사망입니다. 파멸입니다.
죄의 권세를 이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권세요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입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가지고 
              세상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결론>

112비전 전도주일을 앞두고 있습니다.
내가 복음의 감격의 맛을 보고
내가 복음의 능력을 덧입어야 만이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 마다 자신이 누구인지 바로 알아
      신앙이 출발선에 서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내 귀에 복음이 들리어지고
      복음의 능력을 덧입어 
      자신의 삶의 승리뿐만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줄 믿습니다.
(김성덕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