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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으시는 하나님 (벧후 3: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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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시는 하나님 (벧후 3:8~13)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한 주간을 어떻게 사셨습니까? 신나고 재미있는 일이 얼마나 있었습니까? 저 개인은 수요일 저녁까지는 부흥회를 인도하느라 여념이 없었습니다. 참 여러분들이 기도하여 주신 힘으로 서툰 부흥회를 잘 마쳤습니다. 저에게는 모두 참 좋았다고 하는데 진실은 모르겠습니다. 집회를 하지만 그 시간을 제외하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 대부분이 그리 유쾌하지 못한 대화의 내용들이 마음을 무겁게 하였습니다. 물론 대부분이 교단의 당면한 문제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국민 대부분이 주식이며 국내외 펀드에 다문 몇 푼이라도 걸려있어 그것으로 몹시 심기가 불편해 있습니다. 당장 먹고사는 먹거리의 불안은 말할 것 없거니와 내일의 경제가 어찌될지 불안함이 모든 사람들의 가슴속에 가득합니다. 내일이 보이질 않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이러한 우리들에게 오늘도 하나님의 음성이 설교를 통하여 들려지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퇴근시간 즈음에 일기예보에도 없었던 장대 같은 소나기가 쏟아졌습니다. 퇴근길에 선 사람들은 이리저리 비를 피하면서 허둥지둥 뛰어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다섯 명 정도가 가까스로 비를 피할 수 있는 작은 집 처마 밑에 옹기종기 비좁게 서서 초조히 비가 멎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때 뚱뚱하게 생긴 아주머니 하나가 그 틈바구니에 비집고 들어옵니다. 도무지 들어설 자리가 없는데 막 밀치고 들어오는 바람에 가장 자리에 섰던 청년 하나가 그만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어이가 없지마는 이 밀려나는 것을 보고 모두가 외면했는데 함께 서 있던 노인 한분이 이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젊은이, 세상이란 게 다 그런 거라네.” 

이 말을 들은 청년은 노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빗속으로 비를 맞으며 사라졌습니다. 그러더니 한참 만에 비닐우산 다섯 개를 사들고 와서 거기 서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씩 나누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노인에게 한마디 합니다. “세상은 절대로 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네 사람은 우산을 들고 좋아라 하고 다 갔지마는 이 노인은 한참 생각하더니 우산을 땅에 놓고 비를 맞으며 빗속으로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세상을 어떻게 보십니까? 정말 세상은 다 그렇고 그런 것입니까? 아직도 세상에 소망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총체적으로 부패해서 기대해 볼 것도 없이 절망하고 있습니까? 기다려볼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까? 얼마나 더 기다리면 좋겠습니까?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아직도 세상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있다고 한다면 기다리는 동안에 내가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통계에 의하면 현재 우리는 음식쓰레기를 연간 8조 원어치나 버린다고 합니다. 생활쓰레기의 31%가 음식쓰레기라고 합니다. 생각하면 다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저 북녘땅에서 옥수수가루를 먹고 있는데, 이 옥수수가루에 풀을 넣어 죽을 쑤어서 그것을 가지고 연명을 한다는데, 우리는 지금 멀쩡한 음식을 쓰레기로 버리고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어렸을 때, 그 옛날에 보지 않았습니까. 농촌에서는 음식을 절대로 버리지 못합니다. 버리면 큰일나는 줄 압니다. 버릴 것이 있다면 다 모아서 그것으로 돼지를 기릅니다. 돼지 기르면 냄새나는 것 다 압니다. 돼지 우리 안의 질퍽거리는 오물의 더러움은 장난이 아닙니다. 온 동네에 냄새가 납니다마는 상관없습니다. 이렇게 음식을 버리면 천벌을 받는 것으로 알고 배우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던 우리가 언제부터 건방져가지고 이 모양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자, 하나님 편에서 한번 봅시다. 걱정되는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음식을 내버리는 사람들에게서 이 다음에 양식을 거둬가시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입니다. 이렇게 미련한 짓을 하는 인간들을 그래도 불쌍히 여기시고 금년에도 풍년을 주셨다니 이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는 짓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심지어 교회까지도 하나 신통한 것이 없습니다. 당장 저주해버리고 싶은 마음도 있으시겠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참아주십니다. 개인적으로나 여러분의 사생활에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많이많이 참아주셔서, 오래오래 참아주셔서, 그 은혜 가운데, 그 위대한 은혜 가운데, 하나님의 인내 속에 오늘 우리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생각해 보면,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보다 우리 죄를 더 잘 아십니다. 우리가 실망하고 있고, 이것이 부패요 저것이 잘못됐다고들 하지마는 그보다 더 깊고 깊은,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도 못하는 그 많은 부패상, 하나님 앞에야 오죽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시선으로 보실 때 그 많은 죄악을 하나님께서는 다 아시고 계십니다. 아시고,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사랑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이처럼” 오늘도 사랑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여전히 우리를 향하여 기다리십니다. 실망하시지 않습니다. 기대를 걸고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합니다. 분명히 말씀합니다. 하루를 천 년같이 기다리십니다. 천 년을 하루같이 뜨겁게 사랑하십니다. 기다림에는 하루가 천 년같고 사랑함에는 천년이 하루같이, 오늘도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종말론적 심판이라고 하는 것, 혹은 종말론적 약속이라고 하는 것에는 이중의 의미가 있습니다. 축복과 저주, 구원과 심판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한 사건 속에서 동시적으로 역사합니다. 우리는 구원받기를 바랍니다. 구원받으려면 심판받는 자가 있습니다. 심판받아야 할 사람이 심판받을 때에야 구원받을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과 심판이 함께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신비로운 인내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다리심 -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은 달리 표현하면 성도의 고난을 말합니다. 성도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보고자 애쓰고 진실한 분들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복을 주시고 평안함을 주시고 행복을 주셔야겠지요. 그런데 이 사람들, 기다립니다. 복 주시는 것을 기다리고, 그들에게 주실 행복을 기다립니다. 그런고로 성도가 고난을 당합니다. 이렇게 고난당하는 일이 있고, 또 한편으로 악인의 일시적인 형통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인내입니다. 악한 사람들이 악으로 기울고 있고 죄악에 머물고 있는데 이것을 용납하시는 동안 성도에게는 고난이 있고 악인에게는 형통이 있고 득세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인내의 성격이란 먼저는 하나님의 아픈 가슴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고통을 당하시는 것입니다. 이 죄악을 참으시고, 이 불의를 참으시고 견디십니다. 하나님께서 몸소 아픔을 겪으십니다. 하나님 자신이 고통을 당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성도의 고통을 애처롭게 여기십니다. 성도들의 고난당하는 것을 마음 아프게 여기시며 기다리고 계십니다. 

일본작가 엔또 슈사쿠의 작품에「침묵」이라고 하는 소설이 있습니다. 언젠가도 간단히 소개한바 있습니다. 일본에 들어온 기독교, 천주교가 많은 박해를 당할 때, 극심한 박해를 당해서 많은 성도들이 순교할 때에 되어진 일을, 역사적인 사실을 주제로 해서 쓴 소설입니다. 박해자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 십자가 좋아하는데 너희들도 예수처럼 십자가에서 죽어보라, 하고 사람들을 십자가에 비끌어매어서 죽이는데, 바닷물이 쭉 빠진 다음에 바다 한 가운데다 십자가를 세워놓고 거기에 사람들을 묶어놓습니다. 

이제 밀물 때가 되면 물이 점점 차오릅니다. 가슴까지 물이 차오릅니다. 파도가 치면 물에 잠겼다가 나왔다가 이것이 반복됩니다. 물이 콧구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반복합니다. 단숨에 죽이지를 않고 이렇게 고통을 길게 하여 죽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라도 예수를 배반하고 하나님을 버리면 살려주겠다는 조건을 답니다. 

이야기 속에서 두 사람의 가톨릭 교인이 순교를 하게 되는데, 물이 점점 차오릅니다. 그들은 계속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지켜보는 네덜란드 신부는 멀리서 저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너무 안타까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침묵하시나이까?” 이런 순간에 왜 하나님은 잠자코 계시느냐고 목을 놓아 통곡하며 기도합니다. 

그 때 그의 뒤로 강하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나는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저들의 고통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고통을 함께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들의 고난을 지켜보시면서 그 아픔에 동참하고 계신 것입니다. 왜 그러시는 것입니까. 여기에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보다 많은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하여 이 고난을, 애처롭게 순교하는 자의 죽음을 지켜보고 계시는 것이 하나님의 인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오만한 자의 교만도 참으십니다. 일본이 한창 제국주의로 득세하고 있을 때, 제국주의자들끼리 손을 잡았습니다. 나치독일과 일본이 손을 잡을 때 일본의 수장 도오조(東條)가 독일의 히틀러를 방문했습니다. 히틀러가 많은 사람 앞에서 독일군의 사열을 보여주었습니다. 힘차게 발맞추어 지나가는 사열대를 보고 히틀러가 잔뜩 우쭐해져서 도오조에게 한마디 했습니다. 
“우리 독일군은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무서워하지 않아요. 천하무적이지요.” 이렇게 자랑을 했습니다. 

일본의 도오조가 이에 응수합니다. 
“우리 일본군은 하나님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이 오만한 사람, 이 교만한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오래오래 참으셨습니다. 물론 그 말끝에, 얼마 후에 일본이 망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 하나님의 능력을 부인하는 사람, 많은 사람이 얼마나 하나님을 욕되게 합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오래오래 참으십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인내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참아가시는 중에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모든 사람이 주님께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하나씩 하나씩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자들을 보시면서 기뻐하십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은 사람처럼 기뻐하십니다. 탕자가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며 잔치를 하던 아버지처럼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한 심령 한 심령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를 보시며 기뻐하십시다. 그 기쁨으로 이 아픔을 견디시는 것입니다. 이 기쁨이 너무 크기에, 천하보다 귀한 한 생명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이 너무 좋아서 이 많은 고통을 참고 견디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고 그 참으심이 우리의 구원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그 굴욕과 그 욕됨과 그 비방을 다 참으셨습니다. 동시에 죄인들을 참으셨습니다. 많은 죄인들, 참으셨습니다. 

간혹 우리는 왜 우리의 의를 인정해주시지 않고, 왜 빨리 상을 주시지 않나, 왜 나의 소원을 이루어주시지 않나, 왜 우리에게 빠른 구원을 허락하시지 않는가, 답답해할는지 모릅니다마는 그렇다면, 만일에 그렇다면 말입니다, 내가 죄지을 때에 형벌도 빨리 내리셔야 됩니다. 내가 잘못할 때에 진노도 바로 떨어져야 될 것입니다. 그런고로 변변치 않은 선한 일 좀 했다고해서 하나님 앞에 빨리 상을 주십시오, 빨리 보상을 하십시오 -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나의 구원이 되고 우리의 구원이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로마서 2장 4절에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라고 질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혹시라도 멸시하거나 그것으로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생각이나 망언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도행전 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백성의 죄악을 40년 동안 참으셨습니다. 참으셔서 결국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개개인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참으셨나, 깊이 생각하여야 됩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오늘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소니 멜로우라고 하는 작가가 쓴「The prayer of the frog」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루는 지나가는 거지를 대접했습니다. 음식을 잘 대접했는데 이 거지가 글쎄 대접한 만큼 고맙게 생각하고 감사하면서 먹기는커녕 하나님께 기도를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왜 나는 이렇게 가난하게 만들어서, 나는 왜 병들게 만들어서, 내게는 왜 이렇게 복을 주시지 않아서 항상 얻어먹고 살아야 되느냐고 불평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꼴을 보자 아브라함은 참지를 못하고 거지를 내쫓아버립니다. “너같이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모르는 놈은 대접받을 자격이 없다, 썩 나가라!” 그날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아브라함아, 나는 이 사람을 50년 동안 참아왔다. 그리고 음식을 계속 주어왔다. 그런데 너는 어째서 한 끼의 음식도 주지 못하느냐.” 하나님의 이 말씀에 아브라함이 무릎을 꿇었다고 하는 얘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래오래 참고 계십니다. 그 인내를 생각하여야 합니다.

아주 오래전「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소개된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제목의 글이 있는데, 시사하는 바가 있어서 소개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이며 자기중심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사랑하라.

만일 그대가 좋은 일을 하면 사람들은 그대에게 숨은 동기가 있을 거라고 비난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일을 하라.

만일 그대가 성공하면 그대는 가짜친구들과 진짜 적들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하라. 

만일 그대가 정직하고 솔직하면 그대는 상처받기 쉬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직하고 솔직하라.

오늘 그대가 하는 일이 좋은 일일지라도 내일이면 모든 사람에게서 잊혀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일을 하라.

그대가 수년을 걸려 건설한 것이 하룻밤 사이에 파괴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설 하라.’ 느낌이 있습니까?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세상을 보아도 교회를 보아도, 정치 지도자를 보아도 교회 지도자들을 보아도 희망을 가질 수가 전혀 없습니다. 앞이 안보입니다. 당장 하늘에서 벼락이라도 내려 절단이 났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답답합니다. 내게 힘이 있다면 당장 요절을 내고 싶을 뿐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이럴때 뭘하고 계신단 말인가? 한편으로는 가령 하나님이 당장 요절을 내시면 나는 어떻게 될 것 같은가? 심판을 면하게 될 사람이 몇이나 될 수 있을까? 이쯤되면 하나님께서 이를 악물고 참고 계시겠구나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인내를 알고 감사드립니다. 그 인내 속에 오늘 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우리는 하나님의 인내하심을 알고 그 마음을 받아서 우리 또한 참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을 향해서 낙심하지 맙시다. 비관하지 맙시다. 절망하지 맙시다. 끝까지 내가 하여야 할 일을 합시다. 오늘도 내가 하여야 할 일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내하심에 감사하면서 오늘도 그 길을 묵묵히 가야 할 것입니다. 

13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義)의 거(居) 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인내 후에 우리에게 주실 더 큰 은혜를 믿음으로 바라보고 사는 백성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한 말씀 첨가한다면, 하나님의 인내를 생각하며 우리도 오늘을 참고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주 안에서 승리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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