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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으라 (빌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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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으라 (빌 2:1~11)


『[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1-11) 

교우님들의 성원과 기도로 지방교역자들의 성지순례를 잘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이번에는 사도 바울의 2차, 3차 전도여행지였던 그리스와 이태리를 순례했습니다. 교회에 감사를 드립니다.

예전보다 요즘이 훨씬 많은 쌍둥이들이 태어나는 듯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주변에 쌍둥이가 하나밖에는 없어서 늘 신기했습니다. 너무 닮아서 형과 아우를 분별하지 못하곤 했습니다. 우리교회도 쌍둥이가 몇 분계신데 현재 청년부 회장을 맡고 있는 이덕수(건수)는 어려서부터 우리 교회에서 자랐는데도 지금도 제가 분별을 못합니다. 얼굴모양이나 해동거지가 너무 흡사하기 때문에 구별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일란성 쌍둥이들의 특징입니다. 

미네소타대학교(The University of Minnesota) 연구진들이 오래 전에 402쌍의 쌍둥이들을 관찰한 후 재미있는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분리시켜 접근하지 못하게 한 채 양육하였습니다. 1919년부터 몇 십년동안 서로 알지 못하는 다른 지역에서 자라게 하였습니다. 몇 십 년을 서로 떨어져서 성장했는데도 여러 가지 면에서 아주 흡사한 행동들을 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그중에서 짐 루이스(Jim Lewis)와 짐 스프링거(Jim Springer) 쌍둥이 형제들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둘은 서로 나면서부터 떨어져서 마흔 살이 되었을 때 만났습니다. 40년 동안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요? 

둘 다 교통법규위반 교육을 받았습니다. 둘 다 취미로 설계, 제도, 목공예를 하고 있었습니다. 루이스는 세 번 결혼을 했고, 스프링거는 두 번 결혼을 했습니다. 둘 다 첫 번째 부인의 이름이 린다(Linda)였고, 두 번째 부인 이름도 모두 베티(Betty)였습니다. 둘 다 첫째 아들의 이름은 제임스 알렌(James Allen)이었습니다. 둘 다 개를 길렀는데 개의 이름을 토이(Toy)라고 지었습니다. 그들의 첫 번째 만남에서 루이스는 “마치 거울을 보는 듯 했다”(It was like looking in mirror)고 했습니다.

이 두 형제는 모두 비슷한 IQ지수를 갖고 있었습니다. 성격검사, 뇌전도, 심전도, 지문, 그리고 글 솜씨가 비슷했습니다. 스프링거는 말하기를 “모든 검사에서 우리는 한 사람을 조사하는 것 같았다. 모양만 그런 것이 아니라 행동거지도 한 사람을 두 번 보는 듯 했다”고 했습니다. 

이 두 쌍둥이 형제는 멀리 떨어져 살았는데 생김새만 같은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들이 매우 흡사한 것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유전인자의 힘이 얼마나 큰가를 발견케 하는 탐구였습니다. 

왜 갑자기 쌍둥이 얘기를 하느냐구요?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로써 예수님을 닮고 싶어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과 쌍둥이처럼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예수님을 닮으려고 애를 썼던 분이 사도 바울입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은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예수님의 마음을 닮으라고 가르친 말씀입니다. 글쎄요,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불가능할 것입니다. 이번 성지순례에서 빌립보 지역을 순례했습니다. 아시아에서 환상을 본 바울은 아시아 선교 여정을 바꾸어 에게해를 지나 그리스로 건너갑니다. 네압볼리에 도착한 바울 일행은 빌립보에 들어가 성문 밖 강가에서 자주장사 루디아를 개종시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는 점술하는 여자아이에게서 귀신을 떠나가게 하여 난리가 났습니다. 

점술을 통해서 돈을 벌던 여자아이의 주인이 사람들을 동원하여 바울과 실라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냥 가둔 것이 아니라 심히 매로 쳐서 온몸을 상처투성이로 만든 다음 감옥에 넣었습니다.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는 한밤중에 기도하고 찬송을 하였더니, 지진이 일어나서 옥터가 흔들리고 옥문이 열렸으며 죄수들에게 채워졌던 착고가 풀렸습니다. 놀란 간수가 죄수들이 탈옥한 줄 알고 자살하려 할 때 바울이 만류했습니다. 우리가 다 여기 있으니 자살하지 말라 했습니다. 감동을 받은 간수가 예수를 믿고 바울 일행을 집에 모셔다가 치료를 해주었습니다. 

이번 순례 길에 성문 밖 강가에 있는 루디아 기념교회, 루디아가 세례 받던 개울가, 바울과 실라가 재판받던 곳, 갇혔던 감옥을 순례했습니다. 바울의 전도열정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고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 데살로니가에 교회를 세우고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 아덴과 고린도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수 천리길을 발로 걸어서 복음을 전한 바울의 여정을 답사하며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교통수단도 없던 시대에 그 먼 길을 걸어서 복음을 전파했던 바울, 뭇매를 맞고 감옥에 갇혀도 끝까지 복음을 놓지 않았던 바울, 그분은 정말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당당히 빌립보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말 할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불가능합니다. 그런 열정이 없는 것이 부끄럽고 복음의 말씀을 따라 살지 못하는 것이 죄스러울 뿐입니다. 감히 예수님의 마음을 품었다고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은 우리와 비교해 볼 때 거의 완벽하리만큼 예수님을 닮으려 했던 분입니다. 그럼에도 그분은 인간의 한계를 고백하곤 했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바 악을 행하는 도다”(롬7:19). 바울은 자신도 할 수 없는 일을 어떻게 우리에게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하셨겠습니까? 바울이 본받으려했던 예수님의 마음은 바로 겸손과 섬김과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이었습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예수님의 겸손, 섬김,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마음이 청결하고 순결하신 분이셨습니다. 흠과 티가 없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처럼 마음에 흠과 티가 없는 분만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시편기자도 “주님의 언덕을 오를 수 있는 사람은 손이 깨끗하고 청결한 마음을 가진 자”라고 노래하였습니다. 손이 깨끗하다는 말은 쉽게 이해됩니다. 어려서 밥을 먹으려하면 엄마는 “손을 씻었느냐?”(Have you washed your hands?)라고 물으십니다. 손을 씻고 밥을 먹어야 세균이 옮겨오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청결한 자” 또는 “청결한 마음을 가진 자”는 누구입니까? 온 몸에 피를 펌프해서 보내는 심장을 깨끗이 씻으라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이는 곳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깨끗이 하라는 의미입니다. “선한 생각을 하고(good think), 사랑하는 생각(Loving thoughts)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청결한 마음은, 곧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생각과 감정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생각과 감정을 가지셨나요?

첫째로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겸손한 마음을 본받으려 했습니다. 겸손은 굴종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짓밟고 지나가는 발깔개(Doormat)가 되라는 말도 아닙니다. 바울은 겸손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 2:2-3)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 이것이 겸손의 의미입니다. 

큰 사업에 성공한 사람과 인터뷰를 했답니다. “당신의 성공은 당신의 인생에 어떤 유익과 보람을 줍니까?” 이 질문에 그는 “그런 건 잘 모릅니다. 나는 단지 게임을 즐길 뿐입니다. 경쟁과 싸움에서 이기는 쾌감을 사랑할 뿐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은 오직 경쟁만 필요합니까? 어떤 이들은 경쟁이 삶의 의욕을 불러일으킨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꼭 성공해야 한다는 경쟁 심리는 때로는 인간성을 파괴하고 맙니다. 경쟁이 언제나 좋은 동기부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경쟁 심리는 언제든지 건강한 동기부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이 사회 안에는 때때로 경쟁을 필요로 하는 곳이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경쟁이 가장 좋은 방법은 아닙니다. 경쟁이 오히려 삶이 의욕을 파괴하고 파멸의 길로 빠지게 하는 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일본을 세계 산업국으로 만들어내는데 큰 영향력을 준 사람은 에드워드 데밍(W. Edwards Deming)이라는 사람입니다.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는 90대에도 쉬지 않고 전국을 돌며 강의를 했습니다. 그의 주제는 언제나 ‘삶의 질의 통제’(quality control)였습니다. 90대에도 1년에 20여개 이상의 도시들을 돌며 강좌를 열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5세난 여자아이 얘기로 강좌를 시작했습니다. 이 여자아이는 할로윈파티 경연을 위해서 엄마와 함께 옷을 만들었습니다. 파티에 오는 아이들은 모두 너무 좋아했습니다. 너무 재미있어 했습니다. 호기심을 가지고 옷을 만드는 방법을 배우려고 열심을 냈습니다. 데밍은 낮은 목소리로 그러나 힘 있는 목소리로 이야기합니다. 

“경연대회상을 시상하기 전까지는 아이들은 엄마와 함께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상을 주고 난 후에는 아이들은 추락하고 맙니다. 집으로 오면서 울어 제낍니다. 왜 소수의 어떤 사람만 꼭 우승해야만 합니까?” 때로는 경쟁이 행복을 무너뜨린다는 말입니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왜 어떤 사람은 늘 이겨야 하고, 왜 어떤 사람은 늘 져야만 합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 2:4) 

겸손은 당신 자신에게 나쁜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에게 나쁜 느낌을 갖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도 그들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겸손은 다른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면서 당신이 즐기는 유익함을 그들에게도 갖게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겸손은 win/win 자세입니다(Humility is a win/win attitude).

가끔 농담 삼아 인생삼락(人生三樂)을 말합니다. 차를 몰고 갈 때 자기가 가는 길은 훤히 뚫려서 시원하게 달릴 수 있는데 비해 반대 차선이 꽉 막혀서 마치 주차장처럼 차들이 밀려 있으면 배나 더 기분이 좋답니다. 골프를 치기로 약속한 날 무슨 일이 있어 못 갔는데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필드에 나간 사람들이 헛걸음하고 집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골프를 친 것보다 더 기분이 좋답니다. 자기는 승진했는데 가까운 동료가 승진하지 못했거나 자기 아이는 명문대학에 합격했는데 가까운 친구의 아이가 낙방했을 때는 기쁨이 배나 크다는 얘기들이 그것들입니다. 물론 농담이지만 인간의 잘못된 심보를 엿보게 하는 농담입니다. 

겸손은 win/win, 즉 너도 이기고 나도 이기는 것입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겨 그의 기쁨이 내 기쁨이 되게 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는 말은 예수님의 겸손의 영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섬김의 영(a sprit of service)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어떤 섬김의 영입니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의 영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이 말씀을 보면 분명 win/win이 아닙니다. lose/win, 즉 지고 이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자신을 내어 주셔서 잃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 내 모든 것을 내려놓을 때 우리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기쁨을 얻는 것을 말합니다.

Redcap42(붉은 모자 42)라는 별명을 가진 랄스톤 영(Ralston Young)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랄스톤 영의 직업은 미국 그랜드 센츄럴역(Grand Central Station)에서 짐을 날라주는 도우미였습니다. 랄스톤은 그들의 짐을 운반해주며 그들의 삶의 문제를 상담도 해주곤 했습니다. 그의 이야기가 리더스 다이제스트(Reader's Digest)에 실렸습니다. “가장 잊을 수 없는 사람들”(Most unforgettable character)란에 실렸던 이야기입니다. 그의 사역은 영화로도 만들어졌습니다.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랜드 센츄럴역을 통과하는 모든 사람들이 허니문이나 파티에 가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 많은 이들 중에는 장례식에 가거나, 병원에 가거나, 심지어는 감옥에 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랄스톤은 그들의 짐을 날라주며 많은 생명들에게 영향력을 주었습니다. 비록 짐은 나르는 짐꾼이었으나 많은 사람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자기를 낮추는 랄스톤은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분임이 틀림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임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처럼 자신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신을 갖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신만 있으면 예수님의 마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To be like-minded with Christ is to know that you are a child of God).

예수님께서 겸손할 수 있었던 것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섬기는 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기 까닭에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려놓고 죽기까지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지 못합니다. 만일 온 우주의 주인 이신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면 다른 사람들에게 보다 더 긍휼함을 보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것이 모두 내 것이거늘 부족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내려놓으면 놓을수록 하나님은 우리를 더 높여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택함 받은 사람입니다. 구태여 다른 사람들을 허물어트리거나 상처를 주어 끌어내릴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당신의 일은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옮겨온 수준만큼 올려놓는 것입니다. 공연히 머리를 어디에 둘까 방황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당신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The very Son of God died in your behalf). 바울은 말합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8)

그랬더니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

바로 이 예수님이 우리를 형제 또는 자매로 부르셨습니다. 우리 가슴 속에 우리를 부르신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사는 것은 너무나 행복한 일입니다.

인도에는 재미있는 우화가 하나 있습니다. 암호랑이가 새끼를 낳자마자 죽었습니다. 갓 난 새끼 호랑이는 염소가족에 의해 입양이 됩니다. 호랑이 새끼를 염소들은 염소의 말을 하게 했습니다. 염소의 행동을 하게 했습니다. 염소들이 먹는 풀 같은 음식을 먹으며 자랐습니다. 새끼 호랑이는 자라면서 좀 이상하게 생긴 염소라고 자신을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왕 호랑이가 나타났습니다. 모든 염소들이 공포가운데 흩어져 숲으로 들어갔습니다. 새끼 호랑이는 왕 호랑이를 보면서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왕 호랑이가 보니 호랑이 새끼가 염소처럼 풀을 뜯고 있었습니다. 왕 호랑이는 새끼 호랑이를 수영장이 있는 곳으로 데려갔습니다.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게 했습니다. 새끼 호랑이는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꼬리를 말아 올렸습니다. 앞발로 흙을 팠습니다. 그는 마침내 고개를 번쩍 들어 하늘을 보며 포효를 합니다. 그는 한번 몸을 뛰어 올라보더니 소리를 지르며 숲으로 들어갑니다. 그의 소리에 산천초목이 떱니다. 

머리를 드십시오. 소리를 뽐내는 목소리로 외치십시다. 주님께서 당신을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든지 섬기는 종이 될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든지 긍휼을 베풀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매일매일 실수를 저지르고 잘못도 범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입니다. 아무리 겸손해도, 아무리 섬겨도 하나님은 당신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으로 높일 것입니다. 오히려 모든 이들이 당신의 무릎 앞에 머리를 숙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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