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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의 열매 : 기쁨 (빌 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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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열매 : 기쁨 (빌 4:4~7)


어떤 성도 한 사람이 천국에 가게 되었습니다. 마침 어떤 사람 하나가 막 천국에 도착했고 보좌에 앉아 있던 예수님이 벌떡 일어나시더니 그 사람을 붙잡고 그렇게 기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자세히 보았더니 자기가 살던 동네 목사였습니다. 그 성도가 감격스러운 그 장면을 그리면서 자기도 저렇게 반겨주겠거니 생각하면서 기다리는데 예수님이 전혀 아는 척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화가 난 성도가 따져 물었습니다."아, 예수님 목사와 성도의 차이가 뭡니까? 왜 저는 그렇게 반겨 맞아 주지 않는 겁니까?"그러자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너, 내가 일어서면 내 자리에 앉으려고 그러지?"그러더랍니다. 

사람이 웃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좋은 일입니다. 웃음을 표현하는 말 중에<아이스 브레이크(Ice Breaker)>라는 말이 있습니다. 웃음은 얼어붙은 생각도 깨트린다는 의미입니다. 독일 속담에"웃음은 울음보다 더 멀리 들린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우는 사람은 자신의 고통만을 바라보지만 웃는 사람은 세상에 자신을 열어둔다는 의미 있는 말입니다. 

[존 에프 케네디 (John Fitzgerald Kennedy)]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세상에는 진실한 것이 세 가지가 있다. 하나님과 인간의 어리석음, 그리고 웃음이다. 그 중에 처음 두 개는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것이므로 우리가 제어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세 번째 것을 해야 한다." 

사람들이 언제 기뻐하는지를 심리학자들이 연구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우선 사람은 사랑을 받을 때 기뻐한다고 합니다. 어린아이나 어른 할 것 없이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끼면 기쁨이 생깁니다. 또 언제 기뻐하느냐 하면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을 손에 넣었을 때 기뻐한다고 합니다. 돈을 벌고 싶어 하는 사람은 돈을 벌었을 때 기뻐합니다. 명예를 얻고 싶어 하는 사람은 명예를 얻었을 때 기뻐합니다. 

또한 사람은 자기의 형편을 좋게 받아들일 때 기뻐한다고 합니다. 내가 잘살든 못살든, 내 자신의 형편이 형통하든 형통하지 못하든, 자기의 형편을 자기 스스로가 좋게 받아들이면 거기에 기쁨이 있다고 합니다. 마지막이 중요한데 자기가 갖고 있는 소중한 것을 남과 나눌 때 오는 기쁨이 있습니다. 

보통 심리학자들은 이런 네 가지로 사람의 기쁨의 정도를 이야기합니다만 가장 쉽게 생각해 보면 결국 인간이 기뻐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것은 그 사람의 가치관의 문제입니다. 무엇을 최우선으로 삼느냐에 따라서 남들이 슬퍼하는 일마저도 나에게는 기쁨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기쁘게 살아가는 방법이란 제 각기 찾아가야 하는것입니다. 

사람은 자기만의 삶의<패턴>이 있고 그 틀에 따라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 틀을 기준으로 생각하고 그 틀을 기준으로 해서 불행하기도 하고 행복하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합니다. 그것을 보고 흔히<부정적 가치관>을 가졌느냐,<긍정적인 가치관>을 가졌느냐를 구분합니다. 아무튼 진정한 기쁨과 행복이란 그 사람의 올바른 가치관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생각해야합니다. 

[빅토 프랭클(Victor E. Frankl)]이라는 심리학자가 올바른 인간의 가치관을 위해서는 필수조건이 있는데 이것이 올바른 곳에 인간 실존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필수조건의 첫째가<영성(Spiritual)>입니다. 인간은 영원한 것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살아야지 이 세대 이 순간만 가지고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입니다. 영원을 생각하며 초월적인 것에 대해서 민감하게 살아야 됩니다. 둘째가<자유(Freedom)>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진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자유 하십니까? 혹시 물질로, 욕심으로, 명예로, 시기 질투로 게다가 교만으로 얼룩져서 자유가 없다면 문젭니다. 무엇엔가 지독히 매여서 불쌍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불행입니다. 이 모든 것들로부터 내 영혼이 완전히 자유 할 만큼 높은 가치의 생을 사는 것이 인간실존이요, 또 하나는<책임성(Responsibility)>입니다. 

자주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내 책임은 물론이거니와 남의 책임에 대해서도 내가 느끼고 모든 것에서 자기의 책임을 찾을 줄 아는 그런 사람이라야 인간실존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 신앙의 과제는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야하고 깨어진 인간의 실존을 찾아야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이 속에서 발견되는 기쁨만이 참 기쁨이요, 그 기쁨을 누리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 인간의 가치이고, 인간실존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성경은 이런 기쁨을 누린 사람의 자기 고백적인 말씀입니다. 그는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오늘 우리는 바울에게서 기쁨의 법칙을 배우게 됩니다. 그가 말하는 기쁨은 신앙인이 된 자들이 세상과 다른 기쁨을 발견하는 원천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내가 누구인가를 확신하는 인간 실존과 성령 안에서 깨달은 진정한 가치에서 발견되는 기쁨입니다. 보세요.

우선 바울은 항상 누려야 하는 기쁨에 대해 말합니다. 4절을 보면"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말이 있는데"주안에서"라는 말을 의역하면"주님 때문에"라는 말입니다. 결국"주님 때문에 기뻐하라"는 말인데 이것은 세상 기쁨과는 다른 것입니다. 물질적인 것이나 세상적인 성취감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의 관계에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과의 관계에서 얻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 때문에 기뻐해야할 관계란 무엇이냐 말입니다. 가장 먼저는 죄 사함의 기쁨이요, 그 다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기쁨이요, 더 나아가 하나님의 일꾼 된 기쁨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어떤 고난이 와도, 어떤 시련이 와도, 어떤 아픔이, 어려움이 와도 절대적으로 빼앗길 수 없는 기쁨입니다. 은혜가 충만하고 신앙생활에 기쁨이 있을 때는 이 말씀에"아멘"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게 끝까지 잘 지켜지지가 않거든요. 

간혹 보면 전에는 예수를 잘 믿었다가 지금은 교회 근처도 안 간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있는데 어떤 사람이냐 하면 시험이 들면 꼭 교회 안 나오겠다는 사람, 기분 나빠서 예수 못 믿겠다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 가지만 분명히 합시다. 어떤 기분 나쁜 일이 있어도 교회 안 나간다는 말은 하지 맙시다. 설사 교회 안에서 안 좋은 인간관계가 있다하더라도 예수 믿는 거 관두겠다하지는 말아야 됩니다. 왜 싸우기는 우리끼리 싸우고 기분 나쁜 것은 우리끼리 나쁜 것이지 꼭 하나님을 괴롭게 하고, 예수님을 핑계합니까? 

우리는 화가 나면 가장 먼저 하는 말이 이런 말이거든요. 그런데 바울의 말은"주안에서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을지라도"주님 때문에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대부분이 내 기분 때문에 기뻐하고, 내 기분 때문에 슬퍼합니다.

그러나 배가 아프더라도, 아니꼽더라도 주님 때문에 기뻐해야 하는 그 근본적인 기쁨, 그것만은 굳게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에"내가 다시 말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일순간 적으로 한 번 기뻐한 것으로 그칠 것이 아니요, 계속적인 기쁨을 지켜나가라는 것입니다. "내가 화가 나도 한번은 참고 견딘다."는 게 아니라 끝까지 주님 때문에 그 기쁨의 자리를 지키고 있으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항상"이라고 하는 말은"모든 환경에서"라는 말과 바꾸어 쓸 수 있습니다."기쁨은 불행 속에도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말처럼 바울이 말하는 기쁨이란 환경을 초월한 기쁨을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오기 직전까지 집에서 싸우다가 오더라도 교회 와서는 인상 펴고 웃으라는 말입니다. 집에 가서 또 싸우더라도 서로가 쳐다보고 예배드리는 순간만큼은 속으로"내가 예수님 때문에 웃는다."하란 말입니다. 

이런 말하면 어떤 분들은 그럽니다."사람이 감정에 충실해야지 억지로 그럴 수 있습니까?"맞습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 원래의 감정인 것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실 그렇게 한 시간만 웃고 가면 집에 가서 멋쩍어서 더는 못 싸웁니다. 이것이 주안에서 기뻐하는 신앙의 승리입니다. "부부싸움 했는데 교회는 무슨 놈의 교회야 안가!"하고 예배 빠져 먹는 집은 그 여파가 최소 2주일은 갑니다. 


둘째로 바울은 모든 사람과 더불어 누리는 기쁨을 말합니다. 

본문 5절을 보면"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항상 기뻐하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원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옹졸해서 그렇답니다. 즉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이 부족해서입니다. 이해하는 마음이 넓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우리 말하는"밴댕이 소갈딱지"라는 말 있지요. 그래서 바울이 하는 이 말씀을 달리 이해하면 마음을 넓히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어떤 사람과 함께 있어도 그 기쁨의 행복이 깨지지 않았습니다. 바울 곁에 있었던 다양한 사람들을 아십니까? 그 중에는 열렬한 동지요, 후원자였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만 어떤 사람들은 바울을 비난하고, 헐뜯고, 바울을 방해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마음은 모든 사람을 향해서 열려 있었습니다.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열려 있고, 자신을 비방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열려 있었습니다. 비방하는 사람들에게까지 넓은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여유, 어떤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고, 그들을 위로하고, 인도해주고, 더불어 같이 살 수 있는 사람, 이게 바로 바울의 기쁨의 모습이요, 인간실존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어쩔 수 없는 편견 된 마음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마음이 나를 좋아하는 사람은 나도 좋아할 수 있지만 나를 싫어하는 사람을 좋아하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오늘 이것을 뛰어 넘을 수 있어야 진정한 기쁨을 아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우리 마음을 성령으로 채워야 가능합니다. 

관용하는 마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성령이 우리를 다스리게 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기쁨은 성령의 열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주변 사람들 때문에 흔들리는 그런 기쁨이 아니라 내가 먼저 남에게 기쁨이 되고 나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의 기쁨을 빼앗지 않도록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특히 남의 기쁨을 빼앗는 일은 참으로 나쁜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하지 않아도 될 말을 괜히 전해서 기분 나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굳이 본인에게 알려 주지 않아도 될 만한 일도 미주알고주알 전해서 긁어 부스럼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말 생각해 봐야 될 사람입니다. 그에게 유익되지 않는 말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게 남의 기쁨을 빼앗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께 지혜를 구해야할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의 사람은 참 기쁨을 아는 사람입니다. 6절 말씀처럼 모든 일에 염려하는 사람은 부정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요, 감사함으로 구할 줄 아는 사람이 긍정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입니다. 긍정적인 가치관으로 사는 사람이 하나님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가 소유해야할 기쁨은 항상 누려야 할 기쁨이라는 사실을 알기 바랍니다. 성령의 열매로 얻은 오늘 우리들의 기쁨은 나 자신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과 더불어 누려야 할 기쁨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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