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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 (출 3: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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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계시는 하나님 (출 3:13~14)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일학교에 다니는 어린이가 교회를 취미(?) 삼아 다니는 아저씨에게 하나님을 확실히 믿으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전도를 했답니다. 그러자 아저씨가 “이 녀석아, 네가 얘기하는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그 계신 곳을 나한테 얘기해주면 상금으로 1000원을 주겠다.” 이 말을 들은 아이는 “좋아요. 대신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곳을 저한테 얘기해주시면 아저씨한테 상금으로 2000원을 드릴게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 성도님은 순수한 어린아이입니까? 아니면 취미로 교회다니는 아저씨입니까?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따라 사람을 세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유신론과 무신론 그리고 회의론입니다. 유신론은 신의 존재를 믿는 것입니다. 무신론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회의론은 신이 존재하는지 안하는 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을 또 세 종류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다신론과 범신론 그리고 유일신론입니다. 

다신론(多神論Polytheism)은 여러 신들의 존재를 믿는 것으로, 자연 혹은 집단 생활의 다양한 현상을 각각 지배하는 신들이거나 여러 지역을 각각 지배하는 신들을 인정 하는 것입니다. 조르아스터교나 마니교 등과 같은 것입니다. 절대적인 신을 인정하지 않지 않습니다. 일본에는 신을 가미사마라고 하는데 공식적으로 800만의 신이 있다고 합니다. 

범신론(汎神論Pantheism)는 신은 유일(唯一)하지도 않고, 무한(無限)하지도 않으며, 영원(永遠)하여 자연을 초월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연은 신에 의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신이 곧 자연이고 자연이 곧 신(Deus sive Natura)이라는 주장하는 것입니다. 철학에서는 스피노자의 사상이 여기에 가깝고 종교에서는 힌두교가 대표적입니다. 

유일신론(唯一神論 Theism)은 범신론과는 달리 신은 자유 의지를 가진 인격체로 자연과는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존재이고, 다신론과는 달리 유일적인 존재요 전지전능하다고 믿는 것입니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에서 유일신 사상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유대교나 이슬람교와 다릅니다. 우리는 인격적인 삼위 일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무신론에도 세 종류가 있습니다. 비판적 무신론이 있습니다. 칼막스나 포이어바하, 니체, 사르트르, 공산주의자들처럼 신앙에 대하여 적대적인 무신론입니다. 칼막스는 종교는 아편이라고 말하고 포이어바하 같은 사람은 신은 단지 연약한 인간이 초월의 대상에게 투사한 것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니체의 신은 죽었다고 말합니다. 이신론이 있습니다. 이론적으로 하나님을 믿지만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내 삶에 개입하지도 않고 인격적 관계를 가지지도 않습니다. 실천적 무신론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제 생활에서는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이들 무신론자들의 질문은 한결 같이 하나님이 계시면 그 증거를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왜 세상이 이렇게 부조리하고, 불공평하고, 악이 판을 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여 주면 믿겠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제자 중 한 사람인 빌립도 예수님께 그런 요구를 하였습니다. 모세도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하나님을 경험하고 비슷한 질문을 하나님께 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시냐고 물어보고 있습니다. 

13절을 보십오. 이스라엘 민족에게 가서 너희 조상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었다고 말하면 분명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어 볼 텐데 그 때 하나님의 이름을 누구라고 말할 것이냐는 것입니다. 저와 우리 성도님은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입니다(14). 

1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 스스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이름을 통하여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름에는 속성이 담겨져 있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예흐웨 아쉐르 예흐웨)”라고 말씀합니다. 자존자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아쉐르'(who)는 관계 대명사로서 '나는 존재한다'(I am)는 뜻인 '예흐웨' 성호를 결합시켜 자존성(自存性)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즉 시작과 끝이 없으신, 언제나 존재하는 자존자(自存者)란 뜻입니다. 본래부터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으시고 독립적으로 스스로의 자유를 이뤄 가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사람에 의해 논증되어 하나님이 되신 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비판적 무신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이 만들어 낸 초월자, 이상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의존자인 피조물과는 달리 능동적으로 영원전부터 영원까지 스스로 계시는 분 (I am who I am)이시다는 말씀입니다(계 1:4, 8). 

절대 완전하고, 독립적이시며 우주 안의 모든 인과 법칙을 초월한, 모든 존재의 근거와 기반이 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증명을 받아 존재를 확인시켜 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무것도 필요치 않은 스스로 자족하시는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애굽의 여러 우상들처럼 인간에 의해 만들어 진 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회의하고 부정하는 인간들은 머지 않아 떠나지만 하나님은 영원하시다는 말입니다. 누구에 의해 논증되거나 만들어 지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존재론적으로 증명하지 않아도, 우주론적으로 증명하지 않아도, 목적론적으로 증명하지 않아도, 도덕론적으로 증명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존재를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주위를 둘러보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롬 1:20)”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시 19:1)”

저는 새벽 기도회를 나올 때 탄천을 따라 걸어서 교회에 옵니다. 교회에서 기도회를 하고 다시 집으로 걸어가면서 탄천을 보면 그 때가 하루 중 가장 맑습니다. 물이 맑으면 낮에 물이 더러울 때는 보이지 않던 큰 잉어들이 보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깨닫습니다. 물이 맑으면 물 속에 보이지 않던 것도 보인다는 단순한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 5:8)” 

유리창이 깨끗하면 집안 속이 훤히 보이지만 더려우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욕심과 음란과 정욕과 다툼과 허영과 교만과 탐욕 등 각종 죄로 마음이 어두어져 있으면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것이 전부로 보입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깨끗하게 씻겨져야 하나님이 밝히 보이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 1:7)”

내가 못 본다고 존재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실체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더러워 보지 못할 뿐입니다. 바람이 사랑이 보이지 않는다고 실존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변을 조금만 자세히 보면 하나님의 숨결과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난주 유명 탈렌트가 자살하여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면서 오늘 주보에 나와 있는 시를 지었습니다. 그 사건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나무는 홀로 온 땅을 차지하지 않습니다. 홀로 땅을 다 차지하려고 몸부림치지 않아도 뿌리 내리고 기다리면 어디서든 품어 주는 땅은 넉넉히 있습니다. 어쩌다 서로 뿌리 엉켜도 불평하며 원망하지 않습니다. 뿌리 서로 엉켜도 자신이 서 있을 만한 땅은 언제나 있고 엉킴으로 서로 버팀이 되어 모진 풍파를 더욱 잘 견디게 합니다. 나무는 많은 땅 차지한 큰 나무를 보며 우울해 자살하지 않습니다. 많은 땅 차지하면 그 만큼 그늘도 크고 비바람으로 앓아야 할 아픔도 그 크기만큼 큽니다. 땅 많이 차지하여 받는 관심도 겨울 오면 쉬 사라질 부질없는 인기일 뿐입니다. 큰 땅 차지한다고 부족함 없는 하늘을 다 품는 것 아니고 흐르는 빗물 다 차지하는 것도 아니며 때가 되면 한 줌 재로 남을 뿐입니다. 나무는 홀로 온 땅을 차지하지 않습니다. 

우리 살면서 너무 욕심 부릴 필요없습니다. 다 차지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명예와 부, 권력, 인기를 다 차지하고 살 수 없지 않습니까? 모진 풍파처럼 사람들이 비난해도 우리가 나아가기만 하면 어떤 경우든 받아주고 위로해주고 용서해주고 사랑해 주시는 우리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다 잃어도 하나님 한 분으로 우리는 만족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왜 사람들이 하나님이 없다고 합니까? 어리석고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시 14:1)”“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시 10:4)”

인간이 대단한 것같지만 3분 차이입니다. 3분 숨 안쉬면 모든 화려함도, 부도, 명예도, 인기도, 존경도 다 물거품처럼 살아지는 것입니다. 차디찬 시체가 되어 3일만 지나면 아무도 접근하지 않습니다. 다 가지려는 욕심이 마음을 가리니까 내가 최고라는 교만이 마음을 가리리까 하나님을 못 보는 것입니다. 착각은 자유지만 인간이 하나님마저 잣대로 젤 수 있는 존재라고 착각하면 안됩니다. 

“참호 속에서는 무신론자가 없다”는 말이 있듯이 인간은 누구나 곤경에 빠지게 될 때 자기보다 더 능력이 많으신 초월자(神)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무신론자라고 주장하던 불란서의 볼테르가 항해를 하던 중 풍랑을 만났을 때 엎드려 무릎을 꿇고 신께 기도 드렸다는 이야기는 웃지못할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는 “100년만 지나면 하나님을 믿는 따위의 미신가는 이 지구상에 한 사람도 없게 될 것이다.”라고 장담하였다고 합니다. 파리의 대로에서 하나님을 향해 욕을 퍼부으며 “만약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렇게 욕지거리를 퍼붓는 나를 이 자리에서 쓰러뜨려 보십시오!”라고 했다고 합니다. 군중은 그런 그를 환호했다고 합니다. 그가 노인이 되어 병들어 죽음 앞에 이르게 되었을 때 회진 온 의사에게 “만약 내 생명을 6개월만 연장시켜 주신다면 전 재산을 드리겠습니다.”라고 간절히 부탁했다고 합니다. 

그 때 의사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볼테르 선생님! 선생님의 생명은 6개월은 고사하고 이제 6시간도 연장시킬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는 의사의 선고에 무신론이 흔들려 “아! 나는 지옥으로 떨어져 가는구나.”라고 탄식했다고 합니다. 세월은 흘러 볼테르가 죽은 지 100년이 지났지만 신앙인은 더 많아졌고 무신론 책을 펴내던 그의 인쇄기는 성경을 인쇄하는 데 사용되었고, 그의 저택은 성경 보관 창고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사람의 양심이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롬2:15, 행17:23) 인간의 지적이고 도덕적인 본성이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창1:26, 시94:9) 동물은 아무리 영리한 동물이라고 하나님을 섬기기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아무리 둔치라도 저마다의 신을 섬깁니다. 예수님을 통해 변화된 인간들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 1장에 의하면 세상이 자기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으며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해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게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요 14:6-7)” 이 말씀을 듣던 빌립이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그 때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내가 행하는 일을 보면 알 수 있다(요14:11)” 는 것입니다. 예수믿고 변화된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어느 유명한 무신론자이자 비평가가 하루는 ‘현대인을 위한 강좌’라는 제목으로 광산촌을 찾아가 강연을 했는데 목적은 기독교와 성경을 비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의 이야기는 하나의 꾸며낸 신화에 불과합니다.” 그는 청중에게 자기의 주장에 동조할 것을 요구하며 음성을 높였습니다. 이때 검은 옷을 입은 한 사나이가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선생님, 저는 일개 광부에 지나지 않습니다만 예수의 이야기가 신화이며, 성경이 거짓이라고 하신 말씀은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3년 전까지만 해도 나와 우리 가정은 비참한 생활을 하였지요.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한 후 난 그분을 내 심중에 모셨고 나는 지금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지독한 술을 끊었고 처자식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온 가정이 새롭게 변화되어 행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여기 모인 광부들이 바로 증인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이야기가 신화라니요? 그렇다면 나의 가족과 세상의 수많은 사람이 변화되어 생활하는 이 생생한 변화의 삶이 신화를 믿고 되어진 일이라고 여기란 말입니까?

인간은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은 존재'입니다. 의존자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자존자이십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의지하고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2.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보내 사명을 이루게 하시는 분이십니다(4)

그 이름을 무엇이라고 말하면 되겠습니까? 라고 질문한 모세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을 밝혀 주시고 또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고 말하라고 합니다. “누가 보내었느냐?” 이것이 중요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사신, 하나님의 대사로 파송되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하나님의 대사로 하나님의 사자로 애굽에 보내는 것입니다. 당시 왕의 사신을 파견할 때는 왕의 패나 자신의 이름이 적힌 도장을 찍어 줌으로써 임무를 위임하였습니다. 

더욱이 당시 애굽인은 많은 신들을 섬겼는데 애굽인들은 신의 위임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자들에게 그 신이 누구인지를 묻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모세는 40년 전에 백성들에게 당해 보았습니다. 싸우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갔을 때 “누가 너를 주제와 법관으로 삼았느냐?”고 항의하였습니다. 누구의 권위로 이일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라”고 두 번이나 반복하여 말씀합니다. 스스로 존재하는 자, 자존자 하나님 야훼 하나님께서 보내셨다고 말하라고 합니다. 

이미 40년이 흘렀습니다. 전혀 생소한 사람이 어느 날 백성들 앞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노예 생활하며 갖은 고역을 감당하고 탄식하는 백성들에게 가서 하나님께서 너의 고통을 보았고, 부르짖음을 들었고 우고를 알았고 너희를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어 그 땅에서 인도하여 가나안 땅으로 이르게 하실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합니다. 너희를 애굽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너희 조상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듣겠습니까? 대단한 군대를 가지고 온 것도 아닙니다. 막강한 자금력을 가지고 온 것도 아닙니다. 80세가 된 지팡이를 든 초라한 목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자존자가 너를 보낸다고 말씀합니다. 암몬의 신 몰렉이 보낸 것이 아닙니다. 불레셋의 신 다곤이 보낸 것이 아닙니다. 모압의 신 그모스가 보낸 것이 아닙니다. 가나안의 신 바알이 보낸 것이 아닙니다. 애굽의 여러 신들이 보낸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계시는 야훼 하나님께서 보내셨다는 말입니다.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피조물을 보존하고, 협력하고, 통치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보내셨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할 때 하나님이 보내셨다는 사명의식을 가지고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비록 능력이 없고 힘이 없고 지식이 없고 부가 없다할지라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일하신다는 사명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대사라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얼마나 위대합니까? 아무리 문명이 발달되고 과학이 발달된다 해도 결코 하나님의 이름이 초라하지 않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목동에 불과합니다. 아버지도 신통치 않게 본 아들입니다. 가진 것 없습니다. 그러나 골리앗과 전쟁에서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삼상 17:45)” 

옛날 우리 나라에서 암행어사하면 모든 관원들이 벌벌 떨었습니다. 요즈음도 청와대서 왔다고 하면 기관들이 움추리게 됩니다. 천지를 만드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지존하신 하나님, 자존하신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 살아계셔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담대하게 하여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요 14:14)” 어려움과 고통 속에 있다고 절망하고 낙심하며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우리 예수님께서 무엇이든지 실행해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기도하니까(왕상 3: 1-15) 지혜를 줄 뿐 아니라 부와 영광도 주었습니다.(왕상 3 : 13) 

한나가 기도하니까(삼상 1장-2장) 아들 사무엘 뿐 아니라 세 아들과 두 딸을 더 주셨습니다. 

히스기야왕이 기도하니까(왕하 20: 1-7) 불치의 병도 낫고 나라를 앗수르왕의 손에서 구원해 주시고(왕하 20 : 6), 대를 이를 아들까지 주셨습니다(왕하 21 : 1). 

에스더가 자기 민족을 살려 달라고 기도하니까(에 4 : 8, 7:3) 민족이 살 뿐 아니라 원수의 생명을 멸하는 일까지 허락해 주었습니다.(에9:13). 

다니엘이 기도하니까 하나님께서는 꿈의 내용과 해몽을 알게 하실 뿐만 아니라 능력까지 주셨습니다(단 2: 23). 

이것은 성경에서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 삶의 현실 속에서도 이루어 지는 일인 줄 믿습니다. 이 땅에 처음으로 선교사로 들어 온 언더우드는 기도하였습니다. [오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와 앉히셨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사람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 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지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찌하나 합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복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수 있는 날이 있을 줄을 믿나이다. '믿음을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니...'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수 있게 될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서양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을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만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 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지켜주소서.] 그의 기도대로 우리 대한 민국은 가는 곳마다 십자가가 서있습니다. 대단한 신앙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능을 체험한 제자들은 고백합니다.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눅 10:17)”

그리고 제자들은 증거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행 2:21)”

베드로는 주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일으켰습니다. 성전 문에서 구걸하는 자입니다. 날 때부터 40간 앉은 뱅이 생활을 한 사람입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포기한 인생입니다. 경쟁에서 실패한 인생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이름이면 기적이 나타날 인생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이름의 권능을 믿고 선포적 기도를 드립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 3:6)” 

그는 일어나 뛰고 찬양하였습니다. 병든자가 있으면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예수 이름의 권세를 체험한 베드로는 기탄없이 말씀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행 4:12)”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주어진 사명을 이루어야 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골 3:17)”


3.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은 약속하시고 약속을 반드시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15).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다시 말씀합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신 분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는 말씀입니다. 6절에서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짧은 구절이지만 하나님의 이름이 세 가지가 나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이라고 번역된 하나님의 이름은 엘로힘입니다. 엘로힘은 원어상 “강함, 힘, 능력” 등을 강조하는 이름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능력을 강조하는 문맥에서 자주 쓰여졌습니다. 그리고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스스로 있는 자”입니다. 야훼 하나님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초월성과 영원성을 강조합니다. 

주로 언약과 관련된 문맥에서 영원히 초월자로 계시면서 언약을 세우시고 이루시는 분임을 암시할 때 많이 쓰였습니다. 그리고 15절에 또 하나님의 이름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 이름은 야훼 하나님과 같은 말입니다. '여호와'의 히브리형 '예호와'는 원래 자음만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영어식으로 표현하면 4개의 자음 곧 'YHWH'가 됩니다. 7세기 히브리어에는 모음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야웨'(야훼), '예호와' 등으로 불려져 왔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컷지 말라”는 계명에 따라 하나님의 성호에 대한 경외심에서 이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한 번 나오면 붓을 빨아 사용하였고, 두 번 나오면 목욕 재개하고 기록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도나이'(주님)라는 명칭으로 대신했습니다. 

따라서 성경을 옮겨 기록하거나 낭독하는 일을 맡고 있던 서기관들은 이 단어가 나오게 되면 '야웨' 대신 '아도나이(주,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라 발음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세 개의 모음을(a-o-a)을 야훼(YHWH)에 붙여 여호와(JaHoVaH)로 발음하게 되었고 여호와는 헬라어 및 라틴어를 거쳐 영어 제호바 한국어의 여호와, 영어의 제호바(Jehovah)를 음역하여 여호와로 된 것입니다. 이 이름을 하나님은 나의 영원한 이름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에게 가장 합당한 이름이자 영원토록 변하지 않는 속성과 본질을 지니신 영원 불변의 이름이란 말입니다. 대대로 기억해야 할 표호(表號) 즉 표시가 되는 이름이라고 말씀합니다. 곧 이름만 들어도 하나님의 품성과, 이뤄 놓으신 놀라운 사건들과, 미래에 완성하실 원대한 계획까지 생각할 수 있을 그러한 기념비적 이름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 이름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사용될 때의 특징이 무엇이겠습니까? 언약을 강조하신 이름으로 족장과 세운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언약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밝히는 것입니다.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약속한 바를 변함없이 온전히 성취하신다는 것입니다. 약속은 영어에 프라미스가 있고 커버넌트가 있습니다. 인간의 약속은 프라미스입니다. 이 약속은 쉽게 파기되고 변경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자존하시고 변함없으신 하나님 스스로 하시는 약속이시기 때문에 결코 변개치 않으시며 영원히 성취해 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불러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창 12:2-3)” 땅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씨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복의 근원이 되겠다고 했습니다. 400년 후에 애굽에서 나오게 하겠다고 약속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이삭에게 말씀하십니다.(창26:2-4) 다시 야곱에게 약속해 주시고 있습니다. (창28:3-4)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이 약속을 모세를 통해 이루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후손은 이제 200만이 넘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애굽에서 400년 후에 나오게 될 것이라고 했는데 바로 그 때가 모세의 때이고 모세를 그 언약을 이루는데 사용하겠다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으로 가는 언약을 성취하겠다는 것입니다. 

모세에게도 부르시면서 이미 약속하였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내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였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아직 이루어진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바로에게서 인도하여 내 후에 이 호렙산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국 이 약속을 그대로 성취시켜 주었습니다. 복의 근원이 되는 씨의 약속을 하나님께서는 결국 어떻게 성취하십니까?

예수님을 통하여 성취하십니다. 역사의 때가 되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히 1:1-2)”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갈 3:16)”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갈 3:29)”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복의 근원이 되는 약속을 결국 성취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약속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이겠습니까? 곧 하나님의 말씀 성경입니다. 

약속의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생명을 줍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7)”

약속의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지혜를 줍니다. 
“너는 귀를 기울여 지혜 있는 자의 말씀을 들으며 내 지식에 마음을 둘지어다 (잠 22:17)”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성숙한 인격자로 만들어 줍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딤후 3:16-17)”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위로를 주고 기쁨을 주고 소망을 주고 평안을 주고 앞 길을 인도해 주십니다. 
최종적인 권위를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문화(모두가 그렇게 하니까)입니까? 전통( 항상 그렇게 해왔으니까). 이성(논리적이니까). 또는 감정(옳은 일처럼 느껴져서)입니까? 다 상대적입니다. 하나님의 약속 말씀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내 뜻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했습니다. 배반하고 저주까지 한 베드로를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갖은 수모와 모독 앞에서도 용서하시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고백하시며 구속사를 성취하십니다. 

성경에 있는 3만 1,173개의 구절 가운데 한 말씀만 붙들어도 우리의 인생은 성숙하고 행복해 집니다. "천로역정"의 저자 죤 번연은 요한복음 6:37에 의해, 위대한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말씀에 의해, 세계 선교에 앞장 섰던 윌리암 캐리는 "네 장막터를 넓히라"고 하신 이사야 54:2의 말씀에 감동을 받아 인생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성경에 있는 진리 하나가 인간의 모든 지혜보다 나은 것입니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도 "하나님이 내게 주신 최고의 선물은 성경이다"라고 말했답니다. 링컨은 매일 성경을 묵상하며 삶의 지혜를 얻었답니다. 페스탈로치는 전쟁 후 고아들의 교육에 헌신한 스위스의 위대한 교육자였습니다. 그는 참 어렵게 살았습니다. 어려운 난관을 당할 때마다 아내와 함께 성경을 애독하며 인생을 가꿨다고 합니다. 

1815년 그는 아내를 잃었을 때 관 위에 성경을 놓고 이렇게 말했답니다."우리 두 사람은 성경에 의한 사랑을 체험했고 오랜 세월 동안 고난과 싸웠다. 극심한 가난 속에서 마른 빵을 먹어야 할 때도 하나님의 뜻에 거슬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 하나님의 가르침에 의해서 우리 두 사람은 헤어졌다. 그러나 성경의 정신으로 함께 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성경을 보십시오. 
시편 19편 7-1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율법은 우리의 영혼을 소성케 합니다.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합니다.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순결하게 합니다. 이것을 지키며 큰 상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정금보다 사모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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