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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로운 포도원 (마 2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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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포도원 (마 20:1~16)


예전에 있던 교회에서 재밌는 일이 있어서 소개하려 합니다. 점심시간이 되어서 교역자들과 “오늘은 자장면을 시켜먹자” 해서 간짜장을 시켰습니다. 간짜장은 여러분도 드셔보셔서 아시겠지만 면 그릇과 짜장 그릇이 따로 옵니다. 비닐을 씌워서 가지고 옵니다. 여러 명이니까 여러 개를 놓고 비닐을 벗깁니다. 자장을 벗겨서 면에 부어야 합니다. 그런데 한명의 교역자가 약간 시력이 안 좋았던지, 아니면 너무 빨리 자장면을 먹고 싶은 마음에 자장을 벗겨가지고 면 그릇에 부었는데 아직 비닐이 있는 상태로 부었습니다. 자장이 비닐 위에 쏟아졌습니다. 비닐을 구분하기 어려워서 착각했나 봅니다. 누구나 착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 이야기가 바로 착각 이야기입니다. 착각하며 살면 자신도 불행해지고 남도 불행해 집니다. 착각하며 살면 불평하며 원망하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이 착각한 사람들이 도대체 어떤 착각을 했는지? 왜 그렇게 되었는지? 우리가 함께 깊이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요즘 시장에 나가면 포도가 많습니다. 사과도 있고, 배도 있고, 감도 있고 그런데, 그 중 당연 포도가 눈에 많이 띕니다. 요즘 포도가 당도가 높습니다. 알도 굵고 먹으면 아주 맛있습니다. 이제 포도수확은 대게 끝났지만 시장에 가면 포도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포도농사를 많이 짓습니다. 9월이 되면 포도수확기인데 일손이 많이 딸립니다. 그래서 포도원 주인들은 필요한 일꾼들을 적절하게 빨리 보충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입니다. 왜냐하면 9월에 다 수확을 못하면 10월에 우기가 되어 비가 오면 그 포도를 다 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9월에 다 수확을 해야 합니다.

어떤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구하기 위해서 인력시장 장터에 나갔습니다. 요즘 우리 한국에도 청계천이나 종로에 나가면 이런 인력시장이 있습니다. 겨울 추울 때도 새벽 2~3시면 벌써 장작불을 떼 놓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봉고차가 와서 “미장이 5명” “목수 3명” 이러면 쫓아가서 “제가 하겠습니다.” 그래서 하루 일당을 계약을 하고 봉고차를 타고 사라져 버립니다. 물론 그 가운데서도 건강한 사람들은 빨리 뽑혀 가지만, 특히 막노동 같은 경우는 몸이 연약하다거나 장애가 있다든지 연세가 많다던가 하면 누가 잘 데려가지를 않습니다. 그런 분들은 아침에 왔다가 공치고 그냥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루 벌지 않으면 하루 가족들의 생계가 막막한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포도원 주인이 이른 시간 새벽 7시쯤 나왔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직 일할 곳을 찾지 못해 빈둥거리는 사람들을 불러서 “우리 포도원에 가서 일하자. 하루 품삯으로 1데나리온을 주겠다.” 1데나리온은 노동자 하루 한 사람의 품삯입니다. 이렇게 약속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자기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도록 하게 했습니다. 

오늘 성경에는 3시, 5시, 9시, 11시 나오지만 우리 시간으로 환산하면 아침 7시에 사람들을 데려옵니다. 두 번째로 간 것이 오전 9시입니다. 9시에 또 나갔더니 아직도 일자리를 못 찾고 빈둥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또 자기 포도원으로 데려갔습니다. 이 포도원 주인이 또 혹시나 해서 12시에 나와 봤더니 아직도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빈둥거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도 또 자기 포도원에 데려가서 일을 하도록 했습니다. 오후 3시에 나왔더니 역시 또 그렇습니다. 오후 5시에 나왔더니 또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자기 포도원에 데리고 갔습니다. 오후 5시에 간 사람은 6시면 일과가 끝나는데 얼마나 일할 수 있습니까? 1시간 밖에 일 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하루 공치고 노는 것보다는 그래도 거기 가서 품삯을 받는 것이 낫습니다. 1데나리온은 못 받지만 5분의 1을 줄지, 10분의 1을 줄지 모르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없이 돌아가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포도원의 주인의 부름을 받고 그들은 포도원에 가서 한 시간 동안 일을 했습니다.

이제 6시가 되니 어두워져서 더 이상 일 할 수 없었습니다. 이 품꾼들을 다 부르더니 청지기를 불러서 이들에게 품삯을 주게 했습니다. 품삯을 주는데 먼저 온 사람부터 주지 않고, 제일 마지막에 온 사람부터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시간 일한 사람 ‘얼마나 받을 수 있을까? 이거 한 5분의 1 데나리온이나 줄까? 혹시 주인이 은혜를 베풀면 한 3분의 1 데나리온이나 줄까?’ 그런데 웬걸 1데나리온을 주는 것입니다. 노동자 한 사람의 품삯입니다. 요즘 돈으로 5만원 내지 10만원 되겠지요. 깜짝 놀랐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1시간 일하고 1 데나리온을 주다니.’ 이제 입이 벌어진 사람은 누구입니까? 아침에 온 사람입니다. ‘야! 1시간 일하고 1데나리온을 받으니까 나는 10시간 일했으니까 10데나리온은 받겠다.’ 기분이 너무 좋아서 입이 벌어졌습니다. ‘이런 주인이 세상에 있다니’ 그랬더니 웬걸요. 오후 3시에 온 사람을 부르더니 역시 1데나리온을 주는 것입니다. 오전 12시에 온 사람도 1데나리온, 오전 9시에 온 사람도 1데나리온, 아침 일찍 7시에 온 사람도 역시 1데나리온을 주는 것입니다.

그 순간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입이 벌어지고 싱글벙글하던 사람들이 웃음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입을 실룩대며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그들은 자기를 불러주는 주인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일을 했는데, 1데나리온 받는 것 때문에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제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불편하지 않으십니까? 당연하게 여기십니까? 이게 바로 예수님 말씀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이렇게 천국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불평하는 자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와 나 사이에 1데나리온을 계약하지 않았느냐? 내가 계약한대로 주는데 네가 왜 불평이냐?” “내 것을 가지고 내 맘대로 할 수 없더냐? 내 뜻대로 주고 싶어 주는데 네가 왜 참견이냐?” 하나님의 주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을 통해서 통치되고 다스려지는 것입니다.

오늘 이 품꾼들의 불평을 한번 읽어봅시다. 9절부터 11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제 십 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감사는 다 사라져버렸습니다. 원망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버렸습니다. 누구의 잘못입니까? 

만약에 요즘에 이런 포도원주인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곤란하겠죠. 만약에 어느 날 일꾼들을 불렀는데 아침, 점심, 저녁에 부른 일꾼들에게 똑같이 10만원씩 줬다면 문제가 생기겠죠. 그 다음부터는 누구도 아침에 안 올 것입니다. 오후 5시에 다 줄을 설 것입니다. ‘한 시간만 일해도 하루 품삯을 주는데 뭐 하러 아침부터 가서 고생해.’ 세상적인 기준이나 질서로 보면 그것이 맞습니다. 

오늘 이런 기업주가 있다면 부당노동행위로 아마 고소 받을지도 모릅니다. “무노동 무임금인데 일한 사람에게 왜 돈을 주느냐고”, 또 노조에서 들고 일어날 것입니다. “일을 안 한 사람에게 이만큼 주면 일을 한 사람에게는 10배를 줘야하지 않느냐? 부당하지 않느냐? 공평에 어긋나지 않느냐?” 하면서 항의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세상적인 기준은 아닙니다. 천국의 기준입니다. 그러나 오늘도 교회의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여러분! 세상의 기준과 질서가 있고, 천국의 기준과 질서가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의 것을 따라야 합니까? 천국의 것을 따라해야 합니까? 천국의 것을 따라해야 합니다. 교회도 종종 이런 일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적인 가치관과 질서를 가지고 교회를 보면 불평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저건 저렇게 하느냐?” “세상은 이렇게 안 하는데.” 그렇습니다. 세상에서는 1시간 일한 사람보다 10시간 일한 사람에게 10배를 주는 것이 맞습니다. 그것이 세상적인 기준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그렇지 않습니다. 일생동안 예수 믿고 천국 가는 사람도 있는데 예수님 한 쪽에 십자가에 있던 강도는 5분 전에 믿고도 구원 받았습니다. 불공평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저놈은 우리의 구원의 10분의 1만 받아야지 어떻게 똑같은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 그렇게 항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주님께서 천국의 기준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먼저 온 품꾼들이 왜 불평했을까요? 이것을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들은 왜 원망에 빠졌을까요? 간단합니다. 비교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처음부터 주인이 지혜로워서 “야! 아침 일찍부터 온 사람부터 와” 그렇게 해서 아침에 온 사람에게 1데나리온을 줍니다. 그러면 불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불만이 없습니다. 그 사람을 돌려보냅니다. 그 다음에 9시에 온 사람, 12시에 온 사람 다 1데나리온씩을 줘도 그들은 돌아갔으니까 몰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줬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오후 5시, 오후 3시, 오전 12시, 오전 9시, 오전 7시 다 똑같이 1데나리온을 주니까 비교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비교하다가 시험에 들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종종 이 비교할 때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 이 사람들은 자신을 부른 주인과의 관계로 보면 불평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나는 10시간 일했는데 1시간 일하고도 똑같이 받는 저 사람 때문에 시험에 드는 것입니다. 비교하면 시험에 듭니다. 다른 사람하고 비교하지 마십시오. 왜 우리 남편을 자꾸 다른 집 남편하고 비교하십니까? 그러니까 시험에 들지 않습니까. 왜 우리 집 아내를 다른 집 아내하고 비교하십니까? 그러니까 시험에 드는 것입니다. 그냥 내게 아내를 주시고, 남편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런데 ‘아이고! 어떻게 저 집 남편은 같은 남자인데 저렇게 멋있을까?’ ‘저 집 아내는 꼭 미스코리아 같아. 돈도 잘 벌어오고.’ 비교하니까 시험에 드는 것입니다. 내 아내가, 내 남편이 뭔가 좀 못 나 보이는 것입니다. 뭔가 부족해 보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비교하지 마십시오. 신앙생활도 비교하면 시험 듭니다.

비교라는 것이 꼭 사실이 아닙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 가지고 우리는 비교하기 쉽습니다. 여우와 사슴이 같이 놀았다고 합니다. 여우가 늘 부러운 것이 있습니다. 사슴이 뿔이 얼마나 멋있는지 모릅니다. “야! 사슴 너는 어떻게 복을 타고 나서 뿔이 그렇게 근사하냐? 나는 뿔 같은 것이 없잖아. 나는 볼품이 없어.” 여우는 늘 한탄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여우하고 사슴하고 노는데 사자가 으르렁 대며 쫓아왔습니다. 둘은 도망가기 시작했습니다. “걸음아 날 살려라.” 그런데 사슴이 가다가 풀 넝쿨에 자기 뿔이 걸려버렸습니다. 그리곤 꼼짝 못했습니다. 그는 사자의 밥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것을 보고 여우가 너무 감사했다고 합니다. 뿔이 없는 것이 너무 감사했습니다. 뿔이 부러웠는데 이제 하나도 부럽지가 않습니다. 

여러분! 비교라는 것은 대게 이런 것입니다. 남에게 드러나는 것은 좋은 것만 보이는 것이지 그 사람의 고민과 고통과 아픔은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비교하면 다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행복했던 사람이 비교하면 불행해 집니다. 여러분도 그러시지요? 그럴 것입니다. 직장에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사장님이 특별히 불러가지고 “김 대리 열심히 일했으니까 내가 특별히 10만원 보너스 줄게!” 나만 10만원 줬다고 너무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들으니까 옆에 있는 박 대리도 별로 일도 안 했는데 10만원 똑같이 받았다고 합니다. 감사한 마음이 싹 사라졌습니다.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비교라는 것은 이렇게 위험합니다.

또 한 가지, 부모들이 불평하는 이유가 또 한 가지 있습니다. 공로의식 때문입니다. 성경말씀을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11절~12절 말씀입니다.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우리는 하루 종일 수고하고 더위를 견뎠습니다. 내게는 공로가 있는 것입니다. 저 1시간 일한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공로와 업적이 있습니다. ‘공로와 업적이 있는 우리들을 왜 이렇게 대하느냐’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종종 시험에 빠지는 분 중에 신앙생활 오래 하신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 그 교회를 오래 다니신 분들이 있습니다. 왜 그러냐면 “우리는 오래 일했다”는 것입니다. 이 교회가 시작되어서 오늘날까지 우리는 더 많이 헌금하고, 더 많이 봉사하고, 더 많이 충성했는데 어떻게 어제 등록한 새신자하고 똑같이 대할 수가 있느냐? 는 것입니다. “1년 된 새신자하고 30년 된 이 뿌리교인하고 어떻게 똑같이 대우할 수 있느냐?” 이것이 섭섭한 것입니다. 
무엇이 찾아옵니까? 섭섭귀신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담임 목사를 보면 섭섭합니다. 
“목사님 저 섭섭한 것이 많아요. 말 안하고 참아서 그렇지.” 
“부목사님 섭섭한 게 많아요. 왜 새신자만 돌보고 우리들한테는 관심이 없어요?” 
섭섭한 것이 많습니다. 

어떻습니까? 이것이 지당한 것입니까? 틀린 것입니까? 물론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면 맞습니다. 공로자들입니다. 교회를 세우고,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헌금을 드렸겠습니까? 건축할 때 얼마나 많이 애 쓰셨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공로를 내세울 수 없습니다.

오늘 이 이야기는 베드로의 질문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마태복음 19장 27절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하고는 다릅니다. 근본적으로.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물론 주님께서는 영생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안 되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뭔가 더 특별한 다른 무언가를 주시겠습니까?” 

베드로는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먼저 온 사람입니다. 제자들은 먼저 왔고, 많이 수고했습니다. 우리에게 무얼 더 주시겠습니까? 그것이 무엇입니까? 공로의식입니다.

그런데 공로의식만큼 또 위험한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공로 때문입니까? 예수님의 은혜 때문입니까?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공로주의를 반대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만큼 많이 주님 앞에 충성했는데’ ‘내가 이만큼 많이 일했는데’, 물론 그것은 주님의 칭찬이 있고, 하늘의 상급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가 드러내고 자랑할 것은 되지 못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래서 우리는 공로의식을 조심해야 합니다. ‘더 많이 일 했는데’, ‘더 많이 구제했는데’, ‘더 많이 충성했는데’, 이것을 내세우게 될 때 결국 은혜를 잊어버리게 됩니다. 공로의식을 가질 때 감사한 마음이 싹 사라집니다. ‘나는 이렇게 많이 봉사했는데 저 사람하고 똑같이 대할 수가 있나?’ 이렇게 생각하면 은혜를 잊어버리고 감사를 잃어버릴 수가 있습니다.

교회에 먼저 오신 교우들, 초대교인들, 이 교회의 뿌리가 되신 훌륭한 분들은 주님 앞에 가면 칭찬과 상급이 클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여기서 우리가 공로를 주장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공로를 주장한다면 그것은 곧 새가족과 기존교인들을 나누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먼저 온 교인들이 섭섭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히려 새가족을 돌보아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집사님, 권사님들은 이렇게 하셔야 합니다. “목사님! 우리한테까지 신경 쓸 시간이 어디있으세요. 새가족들이나 열심히 돌보세요. 우리는 괜찮아요. 우리는요 믿음의 뿌리를 내렸기 때문에 괜찮아요.” 여러분! 그것이 옳습니다. “목사님들은 새가족들만 알고 우리 기존교인들은 쳐다보지도 않아. 뭐 이런 교회가 다 있어?” 이것을 섭섭하게 여기시지 말라는 것입니다.

저희 가정이 7남매입니다. 제가 한 다섯 살 때 저희 형님이 저보다 나이가 많으니까 벌써 고등학생입니다. 그러면 어머니의 손은 막내인 저에게 많이 오지 고3된 큰형에게 많이 가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큰 형이 제가 젖 먹고 있는 걸 치워버리고 “엄마 저도 젖 주세요. 엄마 나도 안아주세요. 나도 업어주세요.” 이런다면 얼마나 웃기겠습니까? 큰형, 누나들은 다 컸기 때문에 오히려 동생들을 돌봐주어야 합니다. “엄마의 손길은 이제 더 이상 필요 없어요. 이제 다 컸는데.” 그래서 동생들을 돌봐주어야 합니다. 젖도 먹여주고, 업어주고, 잠도 재워주고, 엄마를 도와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합당한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 성도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자라고 계시지만 어제 우리 교회에 등록하신 분, 1년 전에 등록하신 분은 새가족입니다. 신앙적으로 아직 어린이입니다. 그럼 우리 형 된, 누나 된 우리들이 그분들을 잘 돌봐주어야 합니다. ‘왜 엄마는 우리한테 관심 없고 저 미운 오리새끼 같은 동생만 돌봐줄까?’ 이것이 불평이라면 섭섭귀신이 들어온 것입니다. 그때는 예수 이름으로 명령하십시오. 거기에 동감하시면 안 됩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야지 교회는 새가족들이 잘 성장해갈 수 있고 또 그분들이 훌륭한 일꾼으로 자라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그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오늘 여기서 먼저 온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유대인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나중 온 사람들은 기독교인들, 크리스찬들입니다. 유대인들은 공로를 내세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오히려 외면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부름 받았던 은혜는 다 잊어버리고 그들은 율법만을 내세우고, 비판과 비난의 눈길로만 행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은혜를 잊어버리면 우리는 율법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고, 남을 판단하고 또 비판하는 눈길만을 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삶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나의 나된 것은 은혜다.”라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감사할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 당시 팔레스타인은 굉장히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일하고 싶어도 일하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상당히 많이 있었습니다. 내가 일하지 못하면 우리 가족은 굶어죽게 됩니다. 그런데 나를 일할 수 있는 자리로 불러준 것 얼마나 감사합니까? 일하러 가면 적어도 점심은 얻어먹고 오지 않습니까? 내가 일할 수 있다는 것이 축복입니다. 때를 가리지 않고 불러주는 것,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또 품삯을 줄 때부터 먼저 온 사람들보다는 나중 온 사람들부터 품삯을 주는 이유가 뭘까요? 먼저 온 사람들은 당당하게 품삯을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중 온 사람들은 부끄럽습니다. “제가 뭐 품삯 안 주면 그만이지. 제가 무슨 염치로 달라고 그러겠습니까?” 약한 자들에게 먼저 품삯을 나눠주는 것입니다. 연약한 자들에 대한 배려입니다.

또 1시간 일한 사람이나 10시간 일한 사람이나 똑같이 품삯을 주는 것은 가난한 사람에 대한 배려입니다. 하루에 적어도 한 가정이 생활하려면 1데나리온이 있어야 하는데 1데나리온이 없이 돌아가면 가족 중에 누구는 굶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그들에게 똑같이 1데나리온씩 주는 것입니다. 일을 시키기 위해서 그들을 부른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품삯을 주기 위해서 그들을 부른 것입니다. 바꿔 생각하셔야 합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품삯을 주기 위해서 그들을 불러서 일을 시킨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배려입니다.

저는 이 배려라는 말을 생각해 보면 이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어떤 목사님이 나체촌에 가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나체촌은 다 벗고 생활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목사님이 생각했습니다. ‘내가 목사인데 옷을 벗을 수는 없지 않나.’ 그런데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보니 ‘교인들은 남자 여자가 다 벗고 있는데 목사인 나만 옷을 입고 와서 설교할 수가 있나?’ 이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벌거벗은 교인에 대한 배려의 차원에서 목사님은 그날 옷을 다 벗었습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니 그래도 우리는 벗고 생활하지만 목사님이야 우리하고 다르지 않느냐, 목사님이 오는데 우리가 벌거벗고 있으면 얼마나 미안하시겠냐? 그러니 우리가 그날은 목사님처럼 다 옷을 입자.” 목사님이 가보니 교인들은 다 옷을 입고 자기만 벗고 있는 것입니다. 너무 배려하다보니 이런 결과가 온 것입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일 아닙니까? 나보다는 다른 사람을 먼저 배려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주님의 정신입니다. 은혜입니다. 나 중심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늘 ‘다른 사람이 불편하지 않을까?’ ‘다른 사람이 편안할까?’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이 포도원주인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가난한 자들에 대한 배려를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누구에게나 일할 수 있는 축복을 선물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편 이런 생각도 해 봅니다. 만약 여기서 제일 늦게 온 이 품꾼, 5시에 와서 1시간 일한 사람이 바로 나라면 어떻겠습니까? 그래도 이 주인을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내가 1시간 전에 왔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내게 똑같은 임금을 줘서 우리 가족이 굶지 않게 되었습니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그 처지에 있다면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포도원의 비유는 우리에게 은혜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위기란 무엇입니까? 은혜를 잊어버릴 때 오는 것입니다. 신앙의 위기란 내가 어디서부터 출발했는지 잊어버릴 때, 감사를 상실할 때 위기가 오는 것입니다. 왜 우리 마음이 메말라갑니까? 왜 자꾸 판단하게 됩니까? 왜 자꾸 비판하게 됩니까? 은혜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대인들의 모습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그래서 주님의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불러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다면, 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다면, 내가 할 일없이 빈둥빈둥 놀다가 지옥에 갈 존재인데 하나님이 나를 불러주시고 이 은혜의 포도원에서 일 할 수 있게 하시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 포도원은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의 교회인 것입니다. 

여러분! 은혜의 포도원으로 부르심 받은 분들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직분자로 세워주시고,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살게 하신 것 얼마나 감사합니까? 내 업적으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내 대신 이 모든 죄를 감당하셨기 때문에 구원받는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어떤 책에 보니까 사람이 공통적으로 죽을 때 후회하는 것이 3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좀 더 베풀걸” 하며 후회한다고 합니다. ‘내가 왜 그렇게 구두쇠처럼 살았나?’ ‘내가 왜 그렇게 인색하게 살았나? 다 가지고 갈 것도 아닌데 좀 더 베풀면서 나누며 살 걸.’ 그것이 후회가 됩니다. 죽음의 직전에. 

두 번째 후회 되는 건 “좀 더 즐겁게 살 수 있었는데.” ‘좀 더 즐겁게 살 수 있었는데 내가 왜 즐겁게 못 살았을걸.’ 늘 인상 붉히며 살고, 고함지르고 살고, 남에게 상처 주며 살고, 가정을 공포분위기로 이끌며 살고, 이것이 후회가 된다고 합니다. ‘좀 더 즐겁게 살 수 있었는데 이왕 사는 거.’ 

세 번째는 “좀 더 참을걸” 하고 후회가 된다고 합니다. ‘내가 좀 더 참았더라면 우리 가정이 행복했을 텐데’, ‘내가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다른 사람들이 좋았을 텐데’, ‘내가 그 때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우리교회가 평안했을 텐데’, 그것이 후회가 된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포도원 비유의 은혜를 회복할 수 있다면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정말 우리 가정이라는 포도원, 교회라는 포도원, 민족이라는 포도원을 행복한 곳이 되게 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여러분! 오늘도 감사가 넘치는 삶, 기쁨이 넘치는 삶, 그리고 은혜에 감격하는 그런 삶이 저와 여러분에게 넘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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