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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데교회의 교훈 (계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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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계 3 : 1 - 6
제 목 : 사데 교회의 교훈

사도 요한이, 성령의 감동으로 지시한 일곱 교회에 대한 편지를 기록하였는데, 그 내용이 2장과 3장에 걸쳐 나오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게 되면, 각 교회에 대한 문제점을 하나하나 지적하면서, 주님이 때로는 책망을, 때로는 교훈을,   또 때로는 칭찬도 하시면서, 각 교회에게 깨어 경성하여, 주의 일에 더욱 힘쓰라는, 당부를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이 일곱 교회는,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이 일곱 교회는, 오늘날 세상 교회의 표준, 스텐다드라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각 교회가 처해진 형편이나 모습들을 보면, 이 일곱 교회의  범주에서 벗어나질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오늘 설교 제목이 뭡니까?    “사데 교회의 교훈” 입니다. 
왜 하필이면, 이 일곱 교회 가운데 사데 교회냐?  칭찬을 들은 서머나 교회나 빌라델비아 교회도 있는데, 왜 하필이면 사데 교회냐?  이렇게 마음에 의문을  품는 분들도, 혹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유독 책망만 들은 교회가, 사데 교회였기에, 이 교회를   설교한다는 것이, 자칫 우리 교회가 이러한 책망 듣는 교회이기 때문에, 이런 설교를 한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할 것은, 지금 현재 우리 교회의 모습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가능성을 두고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가능성이라고 할 때에,  우리는 어디까지 염두에 두어야 하겠습니까?   일곱 교회 중에, 우리 교회가 현재는 서머나 교회나, 또 빌리델비아 교회와 같은 모습이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우리 교회도 사데 교회와 같은 처지에 놓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건강도 그렇잖습니까?   우리가 조심을 하지만, 사람의 건강도 얼마든지 나빠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조심하겠습니까?   건강이 나빠져도, 쉽게 고칠 수 있는 병에 걸릴 것이라고 한다면,  누가 자신의 건강에 신경을  쓰겠습니까?   병에 걸려도 그 때 고치면 그만인데....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건강이란, 이렇게 자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병에 걸리면 쉽게 고칠 수도 있겠지만, 결국에는 고치지 못하고, 그 질병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주일 씨를 아시지요?  그가 흡연으로 인해 폐암 선고를 받고 투병   생활을 하다가, 몇 년 전에 죽지 않았습니까?  죽기 전에, 그의 모습이 어떠했습니까?   얼마나 비참합디까?  겨우 겨우 산소 호흡기에 의지해서 생명을 연장하고 있던 그의 모습,  여러분 기억하실 줄로 압니다.   
그러던 그가, 인생 마지막에 무슨 일을 했습니까?   담배의 해악성을 알리기 위해 금연 캠페인 대사 역할을 자처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담배를 많이 피우던  사람이, 이제는 “담배는 독약” 이라고 외치고 다녔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진작에 그가 담배의 해악성을 깨달았더라면, 좀더 긴  인생을 살다가 갔을 것인데,  그가 주위 사람들의 권고나, 의사의 권고를 무시하지만 않았더라도, 그러한 비참한 죽음은 맞이하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결코 그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에 그런 어려운 일을 당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제 동생도 암으로 치료를 받은 적이 있는데요, 담당하는 의사들을 만나보면,   한결같은 말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수술도 잘 되고, 치료도 잘되고 있지만, 조심하지 않으면, 5년 안에 재발해서,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다고 말을 합니다. 어떻게 보면, 겁을 주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뭐 그럴까?  이제는 암세포도 없다고 하는데”   그런데요, 환자가 퇴원을 하고 비어 있는 그 침상에, 재발된 환자들이 계속해서 들어와 누워 있는 것을 보게 되면서, “아. 의사의 말이 사실이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이 사데 교회를 살펴보면서, 우리 교회를 향한 주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우리 교회를 향한 주님의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항상 건강한 교회가 되라고 하는 것이, 주님의 뜻인 줄로  믿습니다.   

세상의 죄악된 모습들이 교회 내에 침투해 들어와서, 교회가 병들고, 심지어는 죽어가는 교회들이 이 땅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이러한 시대에, 우리 성천 교회는 결코 그러한 교회들을 닮지 말라고 하는 것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건강한 교회가 되라고 하는 것이, 주님이 우리 교회를 향하신 뜻이라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이 사데 교회를 통해서, 그러한 주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사데 교회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책망만 들은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심각한 것은, 그저 단순한 책망이 아니라, 그 교회를 향하여 주님이   “죽은 교회” 라고, 선언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에 보게 되면,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세상의 평가와, 하나님의 평가는,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라고 했는데,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사데 교회가, 세상으로부터는 좋은 평가를 듣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어떻게 평가하고 계십니까?  “죽은 자로다.”  죽은 교회라고  평가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무관한 교회임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세상으로부터 사데 교회가 좋은 평판과 명성을 얻었지만, 그 명성은, 하나님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명성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교회가 모이기를 힘쓰지 않는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그 지역은 섬유 공업이 발달해 있었기 때문에, 상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곳이어서, 늘 사람들이   붐비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재물도 넘쳐났습니다.  돈도 많았기 때문에,   성전을 지어도 화려하게 지었습니다.  크고 아름다운 성전에, 많은 사람들이  붐비는 곳이, 바로 사데 교회였다는 겁니다.

주일이 오면 사람들이 모이고, 항상 동일한 의식을 지킵니다.  교인들의 봉사는 매우 유용성있게 발휘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에는, 구원받는 사람들이 없었다는 것이지요.  회개하도록 부름 받은, 죄인들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거두어들이는 추수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사데 교회를 향하여 죽은 교회라고, 선언하셨던 이유라는 것이지요. 

사데 교회는 기도하는 교회였지만, 그 기도는 결코 하늘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사데 교회는 찬송하는 교회였지만, 그 찬송은 누구의 마음도 감동시키지   못하였습니다.  사데 교회는 헌금을 드리는 교회였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다만 의무적으로 드렸을 뿐이었습니다. 
또 사데 교회는 많은 일을 하였지만, 하나님을 만족하게 하는 일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저들은 수없이 많은 일들을 하기는 하였지만, 어느 한 가지도, 하나님을 위해, 완성하는 것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들이, 사데 교회가 처해진 형편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데 교회가 이처럼 활발하게 움직이는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외형적으로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듣는 교회습니다.  그러나 그 중심은, 그 심령은, 영적으로 죽어버린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살아있는 교회, 건강한 교회는 어떤 교회이겠습니까? 영적인 능력이 충만한 교회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고, 구원받은 자가 축복을 받는 교회, 성도들이 날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교회, 값진 영적 경험을 가지고, 하나님께   늘 감사함으로 봉사하는 교회, 나아가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가슴에 새기고, 자신도 주님을 위하여 희생하며, 피 흘리기까지 헌신할 줄 아는 교회, 이러한 교회가 살아있는 교회요, 주님이 기뻐하시는 건강한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데 교회는 어떻습니까?  그리하지를 못했습니다.  영적으로 죽은 교회였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었으나, 경건의 능력은 나타나질 않는, 영적으로 무기력한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사실을   그들은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 교회가, 영적인 능력을 추구하는 일을, 은연 중 에라도 멈추게 되어진다면, 결국 우리 교회도 이러한 사데 교회와 같은, 무능력한 교회가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만약에 그와 같은 모습이, 현재 우리의 모습이라면, 우리는 심각하게 우리의  죄를 자복하며, 이와 같은 형편에서 구원해 달라고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영적인 능력이 살아있는 교회, 건강한 교회로 회복되어서, 이후로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는, 복된 교회가  되어질 수 있도록, 힘써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다행스러운 것은, 이러한 사데 교회를, 주님이 완전히 버리질  아니 하셨다는 겁니다.  분명 책망밖에 받을 것이 없는, 무능력한 교회였지만, 그래도 주님이 피 값으로 세우신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를 향한 주님의 긍휼하심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는 것이지요.   주님은 사데 교회를 향하여  책망하셨지만, 더불어 권면하심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 권면의 내용이,  오늘 본문 2절과 3절에 나오게 되는데, 세 가지를 권면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첫째는 무엇입니까?   일깨우라는 것입니다.  2절 첫머리에 보면, “너는 일깨워”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일깨우라는 것입니까?   
자신의 영성을, 일깨우라는 것입니다.   
사데 교회의 교인들은, 육신의 만족함 속에서 영성이 흐려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삶 속에 말씀이 사라지기 시작했고, 기도가 사라지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했는데,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전혀 영적으로 접근을 하고 있질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저 표면적인 신앙생활일 뿐이었습니다.  그저 형식적인 신앙생활일 뿐이었습니다.  그저 교회에서 정한 예배 시간에 모이고, 흩어지면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그 외에 다른 어떤 열심이나, 모임이 없었다는 것이지요.  
신앙생활은 그것으로 족하고, 그 외의 나머지 시간들은, 오직 자기를 위해서만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데 교회의 성도들을 향하여, 사도들이나, 또 교회 앞에 세워진 지도자들이 권면을 하며, 때로는 책망도 하며, 얼마나 열심히 말씀으로 가르쳤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꿈적도 하지 아니했다는 겁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렸습니다.  그 말씀이 도무지 자신과는 상관이 없는 말처럼 들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을 두고, 주님이 경고하고 있질 않습니까?  
마 11 : 16, 17절 말씀을 보세요.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 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  하였다 함과 같도다.”  말씀에 대한 반응이 없는, 요지부동, 복지부동하는 성도들의 신앙의 모습을 책망하시는, 주님의 음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각해 봅시다.  왜 사데 교회 성도들이, 이처럼 말씀에 대한 반응이 없이, 저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며 살아갔을까요?  
이유는 단 한 가집니다.  그들의 영성이 깨어 있지를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영성이 잠자고 있었기 때문이고, 그들의 영성이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 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일깨우라고 권면하고 계신데, 그렇다면 이 권면이 누구를 향한   권면의 말씀이겠습니까?  사데 교회의 성도들을 향해, 일깨우라고 하는 이 권면의 말씀은, 곧 오늘 우리 모든 성도들을 향한 권면의 말씀인 줄로 믿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  각자에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음성이라는 것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사데 교회의 각 성도들을 향한, 권면의 말씀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오늘날 이 성경을 읽는 모든 교회의 성도들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했습니다.  자신의 신앙은, 자신이 관리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누가 내 신앙을 대신해 주겠습니까?   여러분, 신앙에는 왕도가 없습니다.  
저마다 자신이, 자신의 신앙을 관리하고, 또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성도는, 자신의 신앙을 수시로 살필 줄 압니다. 
자신의 영성이 떨어지지 않게 합니다.  마 25장에 나타난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같이, 자신의 신앙의 등에, 기름이 마르지 않게 합니다.  
수시로 자신의 신앙을 살피며, 예배의 기름, 기도의 기름, 봉사의 기름, 헌신의 기름이 마르지 않게 하기 위해, 채워 넣을 줄을 압니다.  
이것이 바로 영성을 일깨우는 신앙이라는 것이지요.  

영성을 일깨우라고 하는, 사데 교회를 향한 주님의 음성을, 나에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음성임을 깨달아, 자신의 신앙에 관심을 가지며, 날마다 하나님 앞에  영성을 회복하기를 힘쓰는 성도라고 한다면, 결코 그 인생에 있어서, 주님의  책망을 듣는 일은 없을 줄로 믿습니다.  

바라기는, 오늘 저와 여러분 모두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신앙을 늘 살피며,   영성이 마르지 않고, 언제나 깨어 있는 영성으로서, 하나님께 칭찬을 듣고,   많은 사람들에게 영적인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귀한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두 번째로 사데 교회에 임한 주님의 권면은 무엇입니까?  남은 것들을 굳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2절 말씀에 보면,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데 교회의 성도들의 문제점은, 항상 시작은 있으나 끝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일에 대해서 열심은 내는데, 이내 그 열심이 흐지부지해 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교회에 필요한 여러 가지 일들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각 자가 맡은 직분을 통해, 그 일들을 감당해 나갈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처음에는 기쁨으로 그 일을 맡아 하지만, 조금만 힘들고 어려워지면, 그 일들을 사도들에게 다 미루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사도들이 그 일들에 대한 마무리를 해 줄 것을 바라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데 교회 성도들의 신앙의 모습이었다는 겁니다.  
여러분, 교회의 일은 누가 하는 것입니까?   목사가 합니까?  
교역자들이 합니까?   물론 이 분들이 맡은 역할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교회의 일이라고 할 때에는, 교회에서 추구하는 전반적인   사역들을 말합니다.   그 일들을, 과연 누가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일은, 그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사도들이, 일곱 집사를 세운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회의 일들을 맡기기 위함이었습니다.   행 6 : 3 - 4절 말씀을 보세요.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말씀 준비와 기도에 전념하는 것이, 사도들이 할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사도들이 이 일이 힘이 들어서 임의로, 또는 억지로 이 일을 집사들에게 맡긴 것이 아닙니다. 
이어지는 행 6 : 5절 말씀을 보세요.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무슨 뜻입니까?  사도들의 이러한 제안을,   스스로가 기쁘게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사도들이 이러한 결정을, 성도들의 전후 사정을 살피지 않고 내렸겠는가?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미 성도들이 가운데서는, 하나님의 일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저 복음을 듣고 가르침을 받는 일에, 만족할 수 없었다는 것이지요.  
자신들에게 임한 그 은혜가 너무나도 크기에, 이제는 하나님을 위해 무엇  인가를 해야겠다는 마음들이 있었는데, 그 일은 당시만 해도 사도들이 주관하던  일이었기에, 함부로 그러한 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사도들이  이러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그 일을 허락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그렇게 부흥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성도들의 열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사데 교회는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사데 교회의 성도들에게는 이러한 열심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이름이 있기에, 성도라는 이름이 있기에, 하나님이 명하신 일들을 해야겠다는 마음은 있었지만, 초대 교회의 성도들과 같은 이러한 열정은 없었기 때문에, 모든 일을 시작만 하였지, 온전하게 끝을 맺지는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사데 교회가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열심이 식어졌기 때문입니다.   열정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화답이 없는 교회, 하나님은 결국 그 교회를 향하여 등을 돌리시고 맙니다.  하나님이 등을 돌린 교회, 그 교회에 무슨 역사가   있겠습니까?   무슨 능력이 나타나겠습니까?   
그래서 겉은 화려했지만, 영적으로는 죽어버린 교회가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십시다.  오늘 여러분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하나님 앞에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 최선을 다하고 계십니까?   
찬송하는 일에, 기도하는 일에, 예배하는 일에, 전도하는 일에, 봉사하는 일에, 헌금하는 일에, 구제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계십니까?  
이 일에 우리가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유지해 주는 것은, 보통의 헌신이 아닙니다.  “보통 정도만 하면 기본은 유지하겠지?”    아닙니다.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데 교회가 왜 죽은 교회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까?  바로 이런 잘못된 생각이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보통 정도만 하겠다고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내가 하나님과 거리를 두겠다고 하는 것과 다름 아닌 것입니다.   교회의 생명력은, 하나님이 유지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거리를 두기를 원하는 성도들과, 하나님이 함께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그 교회를 향하여 등을 돌리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날마다 최선을 다하는 것만이, 우리의 영적인 생명을 유지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가스 렌지에 음식을 올려놓았다고 해서, 용기에 담긴 그 음식이 절로 뜨거워는 것 아닙니다.  가스 렌지에 불을 당겨야만, 그 음식에 데워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내 신앙이 절로 유지되는 것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열심을 낼 때에, 열정을 가지고 뜨겁게 직분을 감당하는 모습이 있을 때에, 내 신앙이 상하지 않고 유지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뜨거운 신앙입니까?  냉랭한 신앙입니까? 사데 교회와 같이 책망을 들은 또 다른 교회가 어디입니까?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그 교회의 특징은, 미지근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1866년 “메트로폴리탄 처취” 라고, 스펄젼 목사님이 시무하시던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였는데, 4366명이 집계가 되었습니다. 스펄젼 목사님이, 그 수많은 군중들 앞에서 설교를 하다가 이런 말씀을 합니다. “여러분, 저는 지금 하나님 앞에 이런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에게 주님을 향해서 가슴이 뜨거운 사람들, 정말 주님을 위하여   뜨겁게 헌신하기를 소원하는 사람들, 12명만 주십시오. 
그러면, 런던 시내에 각 곳에 배치해서 이 삭막하고 고독한 환경을 기쁨이   충만한 환경으로 바꾸어 놓겠습니다.  그러나 사랑하시는 형제 자매 여러분, 4366명, 이 미지근하고 뜨겁지 아니한 여러분, 4천 몇백명을 데리고, 내가   무엇을 하라는 말입니까?” 

미지근한 신앙은 하나님이 토해 버린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속에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등을 돌린 신앙, 하나님께서 토해 버리는 신앙, 바로 열심이 없는 신앙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이, 이와 같은 신앙이라면, 
오늘 주신 이 말씀을 통해, 속히 돌이키시고, 맡겨진 사역들을 열정을 가지고, 온전히 이루어 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사데 교회에 임한 주님의 권면은 무엇입니까?   회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3절 말씀을 보게 되면,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주님은 그 사데 교회를 향해 ,회개하라 권면하시는 것입니까? 
주님이 사데 교회를 향하여 회개하라 명하시는 것은, 그 교회를 향한 용서를   전제한 것이었습니다.  정말 책망 받을 것 밖에 없는 사데 교회였지만, 주님이 지적하신 잘못들을 그들이 인정하고, 돌이켜 회개하면, 용서해 주시겠다는 것이, 주님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무지함 속에, 또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실을 아시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깨닫고 회개할 때는 용서를 해 주십니다.  아멘!!!  
그러나 죄를 지적해 주시고, 깨닫게 해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돌이키지 아니하고, 죄를 회개하지도 아니한다면, 하나님은 결단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3절 하반절을 보세요.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불현듯 내게 임하셔서, 그 죄에 대한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하시겠다는, 주님의 의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때에 주님은 심판주로 내게 오시게 될 것입니다. 
의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죄에 대한 심판을 하실 때, 그 때의 내 모습이 어떠하겠습니까?   불행할 것입니다.  초라할 것입니다.  후회함만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징계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은 없어지질 아니한다 할지라도, 비록 천국이 지옥으로 바뀌지는 일은 없다 할지라도, 이 땅에서 우리가 사는 동안, 지옥과 같은 고통을 당할 수도  있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주일 씨를 다시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가 담배에 대한 계속된 경고를 무시하고,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끊지를 못하고, 계속해서 담배를 피워왔기에,   그런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자신은 하루에 담배를 두 갑 이상을 피운다고, 평소에 자랑하듯 말을 했습니다. 의사는 흡연은 분명 나쁜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는데도, 정작 자신은 남들보다  많이 피우는 것을 자랑처럼 말하고 다녔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계속된 권면과 경고를 무시하고, 세상의 즐거움에 여전히 빠져있는 사람,  담배를 피우지 않고,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 정상적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그런 사람을 부족한 사람처럼, 무능한 사람처럼 취급하며, 자신이 담배를 많이 피우고, 술을 많이 마시는 것을 자랑삼아   이야기하듯이,  
성도라면 마땅히, 하나님 앞에 신앙생활을 최선을 다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일에 열심인 사람들을 보면, 무능한 사람처럼 여기며, 자신의 세상의  소유함의 많은 것을 나타내며, 그것을 즐기는 것을 자랑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바로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주님의 회개하라는 명령을 들을 사데 교회가, 회개함으로, 죽은 교회에서 살아있는 능력 있는 교회로 회복되었는지는, 성경에 나타나 있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주님과 함께 했던, 의의 흰 옷을 입은 소수의 신앙적인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로 인하여 교회가 분명 달라졌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추측이기보다는, 주님의 구원의 사역이, 남겨진 그루터기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아 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도 분명 주님과 함께 하고 있는, 정말 주님의 뜻을 헤아리며,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로 소원하는,  오늘 성경의 표현대로, 의의 흰 옷을 입고, 주님과 함께 다니는, 그리고 그 옷을 더럽히지 않고, 늘 깨끗한 모습  으로 입고 있는, 이런 열심 있는 분들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 분들이 우리 교회에는 많이 있다고 생각되기에, 우리 교회는 이런 사데 교회와 같이 책망을 듣는 교회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설교 서론에서 말씀드렸던 것과 같이, 가능성은 언제든지 있습니다.    교회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그렇지 않다고 할지라도, 성도들 중에 한 사람이라도 이러한 신앙을 가진 분이 있다면, 우리는 그 분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며, 또한 그 분들의 신앙을 바로 세우기 위해 힘써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에,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지어다.” 했습니다.  교회들이라고 했습니다.  비단 사데 교회를 향한 말씀만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각자의 심령 가운데 들려지는,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이,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심령에, 하나님 말씀으로 들려지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자신의 부족함과 범죄함을 깨닫고, 주님의 용서하심  가운데, 이제는 주님의 원하시는 기대대로, 아름답게 신앙생활 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라고, 또한 우리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영성이 늘 살아있는 성도, 주의 일에 항상 최선을 다함으로 끝을 맺고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성도, 주님의 음성에 민감하여 죄를 지적하실 때마다 속히 회개하며 다시금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성도, 

이러한 성도들이 가득한 교회가 되어서, 우리 성천 교회도, 하나님 앞에, 또 모든 세상 사람들 앞에 평가받을 때, 서머나 교회나 빌라델비아 교회와 같이 칭찬만 듣는 교회가 되어질 수 있기를, 능력 있게 주님의 사역을 멋있게 펼쳐 나가며,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고, 성령의 권능을 받는, 축복된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전승빈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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