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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기회 (마 2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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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기회 (마 22:1~14)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초청하셨습니다. 

가을철을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여러 종류의 초청장을 받고 있습니다. 누군가로부터 초청장을 받을 때 우리에게 두 마음이 생깁니다. 하나는 설레며  기대가 되기도 하고 또 하나는 조심스러우며 부담이 되기고 합니다. 우리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초청장이 오면 반갑습니다. 그러나 초청장의 내용이 나를 원하기보다는 돈과 수고를 요구하는 의미가 불분명해지면 갑자기 부담이 됩니다. 자녀들이 다 장성해서 결혼을 시킨 부모들은 다른 사람의 자녀들이 결혼한다는 청첩장을 받으면 “내 아이는 결혼을 다 시켰는데”하는 부담이 생기는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는 때로 친구들끼리 모여서 국가원수인 대통령에 대해서 비판하는 이야기 할 때도 있습니다. “국민의 소리를 좀 듣지.”, “이 정책은 잘못된 것 아니야? 다른 정책을 써서 경기를 부양해보지.” 마치 우리 자신이 전문가인 것처럼 이리저리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곤 합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청와대에서 보낸 초청장을 받는다면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아마 만사를 제쳐놓고 초청에 응해게 될 것 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최고의 지도자가 불러서 함께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누는 것은 명예로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권력과 힘을 가진 대통령으로부터 초청을 받으면 누구나 마음이 설렐 것입니다. 혹 어떤 사람은 안가면 뒤탈이 날까봐 겁이 나서 가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대부분은 영광스러워서 이 초청에 응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상의 대통령에게 초청받을 때도 이런 마음을 품을 우리는 왕 중의 왕이고 지도자들 중에 지도자인 하나님으로부터 초청받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성경말씀은 이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십니다. 임금으로 비유하신 하나님께서 초청하고 계십니다. 

자기 나라의 전권을 지닌 왕, 백성들의 생사여부를 손에 쥐고 있는 막강한 권력자인 왕이 그동안 애지중지 키우던 아들이 성장해서 귀한 며느리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 중에 특별히 청할 사람을 지정해서 왕이 베푼 결혼잔치에 초청장을 발급했습니다. 그리고 이 잔치가 가까이 다가왔을 때 종들을 보냈습니다. “빨리 와서 함께 즐기자! 기쁨을 나누며 함께 먹고 마시자. 내가 살진 짐승을 잡아서 산해진미를 준비했으니 즐겁게 참여해 주시오.”

그런데 초청을 받은 사람이 오기를 싫어했고 심지어 거부했습니다. 심지어 초청장을 들고 온 종들을 조롱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말씀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마태복음22:5-6)
 
모두가 자기 일에 바빠서 왕의 일에 신경 쓸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한결 같이 자기가 하는 일이 중요하기에 왕의 초청을 거부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초청장을 가지고 온 왕의 신하들을 모욕하고 죽였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왕이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성경말씀을 보면 사람들은 아주 격노했습니다. “내가 힘이 있는 줄 모르더냐? 내가 권세가 있고 권력이 있는 줄 모르더냐?” 그는 강력한 군대를 동원했습니다. 그리고 살인한 사람을 진멸하여 그 동네는 불타 없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참담한 이야기입니다.


우리에게는 악한 무관심과 거절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이스라엘 백성들은 슬픈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선택하여 초청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귀하게 여기며 말씀과 율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셨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종을 모욕했고 핍박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죽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세례요한도 모욕과 참수를 당했습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아들을 보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악을 행했던 것을 성경에서는 생생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참으로 참담한 자리에 들어갑니다. A.D 68년부터 72년 정도까지 약 3,4년 동안 예루살렘에서 유대독립전쟁이 일어납니다. 그때 예루살렘성이 불타 초토화가 됩니다.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는 슬픔과 고통의 역사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했습니다. 그 후 그들은 무려 2천년 동안 나라 잃은 백성, 전 세계에 흩어진 백성으로 살았습니다. 

이 모습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나타나는 모습은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러한 악함과 무관심, 거절과 모욕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초청을 거부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바르게 깨닫지 못한 위기의 인물들이였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독자적이고 임금과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은 왕의 백성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복종해야할 나라의 왕이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왕이 군대를 데리고 와서 백성들에게 고통을 줄 때에야 복종해야 할 왕이 계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을 무시하고 멸시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의 소중함을 모르고 마치 초청을 거부하는 사람들처럼 “나는 당신하고 상관없어! 나는 당신 말 안 들어도 돼!”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 우리 몸에 질병이 들거나 시험에 떨어지게 되었을 때, 사업에 실패하거나 낙담할 때, 사랑하는 사람이 곁을 떠나거나 인생에 죽음의 그림자가 가까이 다가올 때 결국 다시 깨닫게 됩니다. 

인생은 내 것이 아니라 선물입니다. 
인생은 내 것이 아니라 초청하는 분이 계십니다. 
다만 우리는 맡겨진 인생을 누리고 사는 것입니다.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할 때 주님 앞에 나올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드립니다. 인생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살고 싶기에 우리는 주님 앞에 예배드립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지혜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사실을 모르고 너무 늦게 깨달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가면서 교만하고 다른 사람들을 무시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참으시는 하나님이 기다리시면 하나님이 무능한 줄 알고 하나님을 모욕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우습게 생각합니다. 이것은 마치 초청받는 사람들이 왕을 우습게 생각하고 조롱한 것과 같은 신앙의 잘못된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막강한 권력과 능력을 갖고 계시면서도 사랑으로 우리의 결단과 결정을 존중해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초청하지만 강제로 오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물을 주시지만 강제로 주입하지 않습니다. 

저는 성경을 읽을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이 강제로 주입하시며 이끌어주기면 더 좋을 것 같아 “하나님 제가 못났잖아요. 하나님 제가 본래 미련하잖아요. 하나님 제가 본래 판단력이 없잖아요. 그냥 강제적으로 나를 이끌어주세요.”라고 생각하다가도 말씀을 묵상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알려주십니다. “나는 강제는 원하지 않는다. 나는 네가 자발적인 마음으로 초청에 응하기를 원한다. 자발적인 마음으로 기도하고 자발적인 마음으로 예배드리기를 원한다.”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내 삶의 열쇠를 가진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을 늘 기쁘게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들어오실 때 마음의 문을 여십시오. 

주님께서 내 문 밖에서 두드리고 계십니다.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립니다. 우리가 열어드려야 주님께서 내게 들어오십니다. 이런 글이 있습니다. 

당신은 열쇠를 가진 사람, 당신은 마음의 수문장 
그 문을 통과하기 위해 줄 서서 기다리는 것은 ‘사랑’ 그리고 ‘미움’ 
그 안에 들어가기 위해 줄 서있는 것은 ‘부드러운 평화’ 그리고 ‘격렬한 전쟁’이다. 
당신은 누가 그 문을 통과하고 통과할 수 없는지 선택해야 하리. 
관용이 부족한 마음은 두려움이나 오만이라는 날개를 달고 몰래 들어가려고 한다. 그것은 소유의 욕망 뒤에 숨어 안으로 살짝 들어가려고 한다. 
오! 조심해. 당신은 누가 들어가고 누가 남을지 결정하는 수문장 
당신은 마음의 열쇠를 가진 사람 
오늘 당신은 누구를 안으로 들여보낼 것인가? 

예수님이 오실 때 우리 마음을 열어야 주님이 들어오십니다. 우리 마음의 결정과 결단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축복해 주기 원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은총주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기회가 찾아올 때 마음에 문을 열고 받아들어야 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교만과 게으름, 잘못된 판단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의 기회를 끊임없이 무산시킵니다. 

기회를 잡지 못하고 놓치는 것은 최고의 실패를 뜻하기도 합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이런 재미있는 말을 합니다. “삶을 사는 방식은 두 가지 밖에는 없다. 하나는 모든 일이 기적인 것처럼 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어떤 일도 기적이 아닌 것처럼 사는 것이다.” 

여러분은 어떤 태도로 인생을 살아갑니까? 삶이 기적인 것처럼 살아가면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만나는 사람, 생각하고 일하는 것, 내가 밟는 땅과 모든 것 속에서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일에도 기적이 아닌 것처럼 살아가면 모든 것이 덤덤하고 감사와 기쁨이 없는 삶이 됩니다. 

우리는 아인슈타인의 말을 바꿔서 말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삶을 사는 방식은 두 가지 밖에는 없다. 하나는 모든 순간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축복의 기회인 것처럼 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순간은 그냥 흘러가는 시간에 불과한 것처럼 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인생은 축복의 기회입니다. 

순간순간을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시간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어렵고 힘들 때 도전하며 극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모험을 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어제 있는 것이 오늘 있고, 오늘 있는 것이 내일 있다고 생각하면 그냥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것으로 생각하면 새로운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지루하고 싫증나게 됩니다. 인간의 변화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역사가 나타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기회로 여기며 살아가는 인생을 생각할 때 테레사 수녀가 쓴 이런 글이 생각납니다. 
 
삶은 기회입니다. 이 기회를 통하여 은혜를 받으십시오. 
삶은 아름다움입니다. 이 아름다움을 찬미하십시오. 
삶은 기쁨입니다. 이 기쁨을 맛보십시오. 
삶은 꿈입니다. 이 꿈을 실현하십시오. 
삶은 도전입니다. 이 도전에 대응 하십시오. 
삶은 의무입니다. 이 의무를 완수하십시오. 
삶은 놀이입니다. 이 놀이에 함께 하십시오. 
삶은 값어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소중히 대하십시오. 
삶은 풍요롭습니다. 그 풍요로움을 지키십시오.
삶은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만끽하십시오. 
삶은 신비입니다. 이 신비를 깨달으십시오. 
삶은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이루십시오. 
삶은 슬픔입니다. 이 슬픔을 극복하십시오. 
삶은 노래입니다. 삶의 노래를 부르십시오. 
삶은 투쟁입니다. 이 투쟁을 받아들이십시오. 
삶은 비극입니다. 이 비극을 대적하십시오. 
삶은 모험입니다. 담대하게 대하십시오. 
삶은 행운입니다. 이 삶을 행운으로 만드십시오. 
삶은 너무나 소중한 것입니다. 이 삶을 파괴하시 마십시오. 
삶은 삶이니 멋진 삶을 위하여 분투하십시오. 


하나님의 주신 축복의 기회를 누리면서 살아갑시다.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입니다. 우리가 숨을 쉬며 보고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축복입니다.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축복입니다.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주신 기회와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로 삶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삶은 축복이고 기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함께 들어갈 은총을 주셨기에 우리는 다시 도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실패 때문에 두려워서 그만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말을 합니다. “실패란 왜 실패냐? 계속하다가 그만두기 때문에 실패다.” 계속 하는 한 실패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평가할 때 어떤 지위와 명예에 올라가 있다는 것에 성공여부를 평가를 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 부딪치고 있는 장애물과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하고 있는가에 의해서 사람의 성공을 평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축복의 기회를 주십니다. 다시 한 번 일어서라고 요청하십니다. 슬픔과 어두움 속에서 안주하지 말고 기쁨과 빛으로 나오라고 초청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면서 혼인 잔치와 같은 즐거움의 자리로 부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먹고 마시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세상에 선포하라고 가르쳐주십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축복의 기회가 열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축복의 기회를 주십니다.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 대” (마태복음 22:9) 

본문 앞부분에 초청할 때는 하나님께서 초청자를 이미 지정해 두셨습니다. “너희들만 오라! 이스라엘 백성들만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실패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있는 기회를 다시 주셨습니다. “누구나 와라. 선한 자, 악한 자를 다 데리고 오라. 가난한 자, 부자 상관 말고 데리고 오라. 배운 자 배우지 않는 자 상관하지 말고 데리고 오라. 남녀노소 상관하지 말고 다 데리고 오라.”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초청이십니다. 주님의 초청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누구나 하나님의 축복의 자리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유일한 축복의 조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다 떨어지고 시커멓게 때가 묻은 옷 대신에 주인은 예복 한 벌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잔치가 시작되고 보니 어떤 사람 하나가 예복을 입지 않았습니다. 그 때 주인이 말합니다. “너 왜 예복을 입고 있지 않았느냐? 이 사람을 길거리로 쫒아버려라. 그리고 그는 어두운 데서 이를 갈게 되리라.” 

예수님께 나오는데 다른 조건은 없지만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기쁨으로 초청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주인인 것을 고백하면서 나올 때 다른 것 필요 없습니다. 외적인 조건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세상에서 자랑하는 것이 없어도 됩니다. 수고와 업적이 없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믿음으로 오라고 요청하십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들이시고 축복해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아직도 슬픔과 어둠의 그늘 속에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모든 것을 떨쳐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 앞으로 나와 이렇게 고백합시다. “주님 제게 부족한 것이 있지만 오직 믿음의 눈으로 주님을 바라보며 예수님의 보혈의 피 앞으로 나옵니다. 주님을 사랑하며 다시 시작합니다. 주님과 더불어 새롭게 이 길을 가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응답하는 자,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사람이 믿음의 옷을 입고 나온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주님 앞으로 나와 이 기쁜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합시다.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축복을 이 땅에서 마음껏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혼인잔치의 믿음의 예복을 주셔서 부끄럽고 연약하지만 기쁨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옵니다. 이제는 주님의 혼인잔치에 참여하여 우리 인생을 하나님과 더불어 감사하며 살아가는 복된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게 하시고, 슬프게 하는 세력들을 물리치게 하옵소서. 기쁨과 감사함으로 살아가는 복된 사람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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