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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살은 돌이킬 수 없는 무서운 죄 (삼상 31:1~6, 왕상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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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은 돌이킬 수 없는 무서운 죄 (삼상 31:1~6, 왕상 19:1~8)


헬라의 시인 <호머>가 어느 날 길거리에서 낚시를 하고 돌아오는 아이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호머가 그 아이들에게 “몇 마리의 고기를 잡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한 꼬마 아이가 말하기를 “잡은 고기는 버렸고요 잡지 않은 고기는 바구니에 넣어왔어요”라고 했습니다. 이 아이의 말은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호머는 그 아이들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밤새도록 생각하다가 자신의 우둔함에 절망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어 자살하고 말았답니다. 

참 어처구니가 없지요. 자살하는 사람들의 이유를 살펴보면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 몇 주 동안 TV와 신문을 보기가 싫었습니다. 특히 뉴스를 듣기가 싫었습니다. 정말 말세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을 절실하게 했습니다. 연예인들의 자살, 정치인의 자살, 여기저서 자살 소식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하루 평균 36명 정도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고 합니다. 대부분은 보도가 되지 않으니 모르고 지나갑니다. 그러나 유명연예인들, 정치인들의 자살은 국민들에게 많은 충격을 줍니다. 저는 정말 목사로서 부끄럽기도 하고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왜냐면 그들 대부분이 기독교인들이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는 속담이 있듯이 자살한 사람들에게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들이 자신들이 생각하기에는 복잡한 고민이었겠지만 너무나 단순한 이유 때문에 자살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사채 빚 때문에 죽었다.” “인터넷 악풀 댓글 때문에 자살했다.” “1등을 지켜야 한다는 중압감에 투신자살했다.” 심지어는 “부모의 결혼반대에 부딪친 젊은이들의 동반 자살을 했다” 등등. 이유를 살펴보면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안 죽어도 되는 일들이었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그들 옆에서 생각을 나누고, 그들의 소리를 들어주고, 그들에게 소망이 되는 말을 해주었다면 막을 수 있었던 일들입니다. 또 조금만 더 여유를 갖고 생각하면 자살하지 않아도 될 수 있는 문제인데도 그들은 이 세상을 등지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자살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가장 중요한 원인은 두가집니다. 하나는 생각의 오류이고 또 하는 질병입니다. 

몇가지 살펴보면 

1)삶의 의미에 대한 잘못된 생각이 원인입니다. 사람의 모든 행동은 생각에 의해 지배를 받습니다. 그런데 이 생각이 잘못되면 결국 그 잘못된 생각이 자살로 몰고 가는 것입니다.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살아봐야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2)자신의 주관적 판단의 절대화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판단은 정확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은 죽는 것이 최선책이라 생각하고 실행에 옮기는 것입니다. 

3)미래에 대한 소망의 상실이 자살의 원인입니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은 도저히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 자신에게는 도저히 미래가 없다는 것입니다.  

4)사단의 교묘한 속임수입니다. 사단은 죽음이 문제 해결책이라고 우리에게 생각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해결책이 아닌데도 사단의 교묘한 속삭임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죽이면 끝이다” “죽으면 끝이다.” “죽음으로 네 결백을 말하라” 

이것이 사단의 속임수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속지 마세요. 정신 바짝 차려야 합니다. 

5)자기감정을 절제치 못한 결과입니다. 그래서 홧김에 불을 싸질러 자살을 합니다. 술을 먹고 분노의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일을 저지릅니다. 최근 자살한 연예인도 술을 먹고 흥분된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극단적인 행동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6)가장 무서운 것은 우울증입니다. 우울증에 걸려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여 자살하게 됩니다. 우울증에 빠진 사람은 슬픔, 절망, 비관, 자기비하 등의 현상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자기를 비난하고 식욕이 감퇴되고 수면장애가 나타납니다. 결국 이런 현상을 주변에서 발견하고 도와주지 않으면 죽음을 택하게 됩니다.  

어떤 분에 제게 묻습니다. 목사님 기독교인이 자살하면 천국 갑니까? 지옥 갑니까? 나는 말합니다. 지옥에 간다고, 신학적인 견해는 두가지 충돌합니다. 하나는 한번 구원받은 것은 인간의 범죄로 취소 되지 않는다 하여 천국을 간다는 견해와 또 하나는 자살은 살인이기에 살인자는 계시록 21장의 말씀대로 불과 유황에 따는 못에 들어가는 형벌을 받게 된다고 했으니 지옥 간다는 것입니다. 저는 후자를 강조합니다. 

성경에도 이런 이유로 자살로 인생을 마감한 사람들이 몇 사람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1) 사울의 자살입니다.  

오늘 본문 삼상 31:4~5절에서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하게 되자 적군의 손에 죽는 것이 명예롭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칼을 취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는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2) 아히도벨의 자살입니다. 

다윗의 고문이며 모략가였던 아히도벨의 자살은 다윗을 반역하고 압살놈을 지지했다가 잘못된 판단과 배신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고 목메어 자살 했습니다.  

오늘날도 아히도벨의 자살처럼 오늘날 자신의 사업이나 자신의 계획들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아니할 때 자살하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래 인생의 삶은 자기 뜻과 계획대로 완전하게 살아갈 수 없는 인생임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일이 자기 뜻대로만 되어 진다면 이 세상에 행복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3) 시므리왕의 자살입니다.  

시므리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5대왕으로 7일간 통치했던 비운의 왕이었습니다. 

그는 야심가였으며, 권력에 사로잡힌 사람이었습니다. 그 결과 자기의 왕을 암살하고 디르사에서 스스로 왕이 되었으나 백성들이 시므리를 따르지 않고 “오므리”를 왕으로 세우게 됩니다. 결국 시므리는 왕궁에 불을 지르고 그 불 가운데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7일간의 왕 노릇을 끝내고 자살한 왕이었습니다. 권력의 욕망에 사로잡힌 자는 그 권력으로 말미암아 비극적인 종말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4) 가룟 유다의 자살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가룟 유다는 스승을 배반하고 스승을 판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입니다. 그는 스승을 판 그 돈을 성소에 던져 넣고 스스로 목을 매었습니다. 유다가 은 삼십을 성소에 던진 것은 스승을 팔았다는 그 양심의 가책에서 비롯된 행동입니다. 그러나 그 양심의 가책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로 행동한다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이라 할 수 없습니다. 

가롯유다와 베드로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베드로는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 위대한 사도가 되었고 가롯유다는 죄를 깨닫고 자책하여 자살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러기에 회개가 문제 해결책입니다. 

이렇게 성경에 나타난 자살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결론은 자살은 결코 정당화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무서운 죄악입니다. 


그렇다면 왜 자살은 무서운 죄가 될까요? 

1.자살은 하나님께 대한 범죄 행위입니다. 

자살은 스스로의 의지로 자신의 생명을 끊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인간이 스스로의 생명을 끊을 수 있다고 표현된 부분이 한군데도 없습니다. 

도리어 성경은 인간이 인간의 생명을 주장하지 못하는 존재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고 하나님의 손에 좌우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는데 이 생명을 내가 마음대로 결정한다는 것은 명백히 말씀에 어긋나는 범죄행위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살인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살인은 가장 흉악한 범죄행위입니다. 그러기에 자살은 자기 자신을 살해하는 행위이기에 이것은 명백한 범죄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소크라테스도 “인간은 자기의 감옥 문을 두드릴 권리가 없는 수인이라… 인간은 신이 소환할 때까지 기다려야하며 스스로 생명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를 죄악시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자살은 하나님의 주권을 월권하는 행위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십시오. 

역사가 요세푸스는 말하기를 자살을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불경건한 행위”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모든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2.자살은 책임회피의 이기적인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셨을 때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일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부모로서, 남편, 아내로서, 자녀로서, 일터에서, 교회에서 맡겨진 일이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을 잘 감당해야 함에도 자살하는 것은 모든 것을 책임 회피하는 일입니다. 나 한 사람이 단순한 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자신의 문제를 자기가 감당치 않고 남들에게 넘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고귀한 생명,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이 생명을 자살로 끝내버린다면 그것이야말로 내게 부여된 책임을 저버리는 무책임한 것입니다. 


3.자살은 문제의 해결책이 아닙니다. 

자살을 문제의 최종 해결책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자살은 인생문제의 해결책이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이 세상에서 죽음으로 생이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세가 분명하게 실존함을 성경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자살을 한다고 책임에서 벗어나는 것도 아니고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첫째 사망이 끝이 아닙니다. 둘째 사망이 있습니다. 그 심판은 정말 무서운 심판입니다. 계21:8을 보세요.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자살로 겪는 가족식구들이나 자녀들이 겪는 고통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습니다. 

부모에게도, 자녀나 배우자에게도, 그리고 교회 목회자와 성도들에게도 지울 수 없는 고통과 상실감을 가져다줍니다. 제가 아는 어느 분은 아버지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분입니다. 그런데 그 일 때문에 평생 고통스러워합니다. 자신이 돌보아 드리지 못하여 그렇다고 괴로워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생명은 소중하고 그 삶은 아름답습니다. 아무리 절망스런 고통이 있다할지라도 그 고통을 통해서 인생은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는 것입니다. 

참 신기합니다. “자살”이라는 글자를 거꾸로 읽어 보세요. “살자”가 됩니다. 살아야 합니다. 
그래도 정말 죽고 싶은 상황이 생겼습니까?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누구나 한번쯤은 자살을 생각해 보았을 것입니다. 
저도 예수 믿기 전 세상에 소망이 끊어졌을 때 한번은 죽을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앞길에 소망이 없었습니다. 장래로 공무원도 못하고 선생님도 못하고.. 그러니 살 소망이 없어 죽으려 했는데 저희 어머님이 일평생 괴로워 할까봐 버렸습니다. 나를 위해 얼마나 고생하셨는데 내가 먼저가면 얼마나 괴로워하실까? 그러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 소망이 보이고 삶의 이유가 보였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위대한 종이 자살은 아니지만 죽여 달라고 했습니다. 

그는 갈멜산 전쟁에서 우상선지자 850명을 이긴 능력의 선지자요. 불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죽으려고 했습니다. 이유는 당시 이스라엘의 왕인 아합왕의 부인 이세벨의 말 한마디 때문입니다. 

왕상19:2절입니다.  

2 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엘리야가 그 말을 듣고 풀이 죽습니다. 그리고는 브엘세바 광야로 들어가 로뎀 나무 아래에서 죽기를 구합니다. 생명을 거두어 달라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나요? “애라 바보야, 네가 선지자냐” 하고 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자처했던 엘리야가 죽고 싶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몇가지 처방을 내리십니다. 이 말씀이 여러분의 문제의 처방일 수 있습니다. 잘 들으세요. 


1) 휴식을 누리게 합니다. 

실컷 자게 하십니다. 정말 힘들고 어려울 때는 실컷 자야합니다. 죽고 싶은 이유는 힘들고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를 보세요. 휴식이 없었습니다. 쉴 틈이 없이 달려 왔습니다. 그러니 탈진상태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광야로 나가 로뎀나무 아래 주저앉아 죽여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에게 휴식을 주십니다. 실컷 자게 만드십니다. 그 수면을 통해 새로운 힘을 얻게 합니다. 그러기에 쉼과 안식을 누리는 것이 낭비가 아닙니다. 죽겠습니까? 쉬시기 바랍니다. 


2) 마음껏 먹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먹을 것을 주십니다. 쉼은 먹을 것이 있을 때 쉼이 됩니다. 그러기에 천사를 통해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물 한 병을 가져다줍니다. 

그리고는 먹으라는 것입니다. 까마귀를 통해서도 먹이셨던 주님, 이번에는 천사를 통해 엘리야가 먹이십니다. 그렇게 며칠 동안 먹고 자고, 먹고 자고합니다. 그러니 삶의 의욕이 생깁니다. 

죽을 지경입니까? 그러면 잘 먹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주변에 누가 힘들어 합니까? 그러면 불러내서 맛있는 것 실컷 사 먹이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죽을 수 없습니다. 배가 고프니 힘들어 죽겠는 것입니다. 배부르면 만족함이 옵니다. 그러면 살게 됩니다. 

  
3) 호렙산으로 가게 합니다. 

호렙산은 하나님의 임재장소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는 그곳에 가서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다 죽었습니다. 나만 남았습니다.” 라고 호소합니다.  

왕상19:10을 보세요. 

10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엘리야는 죽고 싶은 심정을 토로 합니다. 나만 남았고 이제 나도 머잖아 죽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죽고 싶으면 영적 호렙산인 교회로 오세요. 언제든지 오세요. 우리 교회는 24시간 열려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만나 부르짖으세요, “주님! 힘들어 죽겠습니다. 나만 왜 이렇게 힘이 듭니까?” 부르짖으세요. 그러면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뭐라 하시나요? 죽으라 하시나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의 심정을 아십니다. 사실은 죽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그에게 살길을 주십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4)사명을 부여하십니다. 

15~16절을 보세요. 
15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로 말미암아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16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흘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죽고 싶다는데 “죽으라” 소리는 안하시고 일거리를 주십니다. 

사람이 죽고 싶은 이유는 일의 의욕이나 목적이 상실되어 그렇습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죽고 싶은 엘리야에게 엄청난 일을 맡깁니다. 

“하사엘을 아람 왕으로 세워라” “예후에게 기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세워라.” “엘리사에게 기름 부어 후계자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사명이 보이는 사람은 죽을 생각을 못합니다. 하나님이 부여하신 사명이 있는 사람은 그 사명이 다 할 때까지 하나님이 생명을 보장하십니다. 


5)혼자가 아니라고 하십니다. 

18절을 보세요. 
18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엘리야가 착각한 것은 자기 혼자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힘들고 어려워 죽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너 혼자가 아니라고 하십니다. 7000명 남겨 두었다.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니한 자들이 칠천이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힘드시죠? 죽고 싶으세요. 여러분 혼자가 아닙니다. 여러분보다 더 힘들고 어려워도 죽음에 무릎 꿇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수없이 많습니다. 

나 혼자라면 죽을만한데 나보다 더 힘들고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니 힘내세요. 죽을힘이 있으면 그 힘으로 발버둥 치면 안 될 일이 뭡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고 계십니다. 오늘 죽으려고 약봉지를 들고 교회 나오신 분 있나요? 하나님이 사랑하고 계십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욥은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이렇게 찬미합니다. 
욥1:21을 보세요.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 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 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 지어다” 

욥은 그렇게 고통스럽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만물의 주인이시요, 인간의 생사회복을 주관하시는 분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생명도 하나님의 것이요, 우리를 살리고 죽이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심지어 내 생명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기에 내 생명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월권이요 무서운 죄악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고전 3장16~17절을 보세요. 
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했습니다. 

여기서 “성전을 더럽힌다”는 것은 “멸한다”는 것입니다. 생명을 손상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신다 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내게 주신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성전 되도록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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