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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복한 죽음 (시 90:3~12, 요 12: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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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죽음 (시 90:3~12, 요 12:24~25)


우리는 행복한 죽음으로 한 삶을 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죽음을 보았다. 그는 세계평화와 사람의 인권과 인간의 자유를 위해 일생을 산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교황의 선종(善終)의 소식에 김수환 추기경은 ‘우리 시대의 큰 목자를 잃었다’고 말하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서도 ‘교황은 세계평화와 종교 간의 교류에 크게 기여 했다’고 말하며 조계종은 ‘반목과 갈등이 심한 이 세상에 평화와 자유를 위한 어버이 같은 분’이라고 했다. 그보다 더 귀한 말은 시인으로 유명한 김해인 수녀의 추모시(追慕詩)에 “당신을 보내고 슬퍼하는 백성들에게 ‘행복해라, 행복해라’ 웃으시며 오늘도 정겹게 손 흔들어 주십시오” 라는 그의 추모시가 우리의 귓전을 맴돈다. 

인간의 삶 전체는 주어진 한 생명을 다할 때까지 사람들이 삶을 알고 삶의 태도를 정하는 것은 사람들이 과거에 어떻게 행동했는가의 결과이며 미래에 사람이 겪을 삶의 태도는 지금 사람이 어떻게 스스로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달려있음을 알게 한다. 이것은 자기가 지금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 또 미래에 대한 어떤 부류의 사람이 될 것인지에 대한 책임감을 바로 자기 자신에게 알려 주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이것은 바로 지금의 삶이 가능한 헛되지 않게 살아야 할 이유를 알게 한다. 이것이 행복한 삶의 가치를 알게 한다. 

행복한 삶의 가치는 곧 ‘행복한 죽음’을 아는 것이다. 사람이 죽음에 임박하여 가지는 태도는 거의 자기가 살아온 태도에 달려 있음을 알고 더 좋은 죽음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 ‘병실에서 혼자 죽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살이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상황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사실이 되었다. 즉 이 세상살이 속에서 유명인이나 연예인들이 인기와 많은 물질을 소유하고도 삶을 포기하고 자살하는 경우를 본다. 또한 그 인기인과 자신을 동일시하여 자살하는 경우도 본다. 이것을 ‘베르테르의 효과’로 동조자살(copycat suicide) 또는 모방 자살이라 한다. 

요즘 연예인의 죽음을 보고 보았다. 몇 년 전 배우 이은주씨 그리고 최근 안재환씨에 이어 최진실 등 연예인의 자살을 보고 몇 펜들이 연이은 자살도 병인 양 하여 죽음의 태도를 보게 된다. 한국사회가 급격한 변화로 생명경시 풍조가 만연해 있다. 이러한 태도는 1774년 발표된 독일의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유래하는데 이 소설속의 주인공 ‘베르테르’는 다른 사람의 약혼녀 ‘로테’를 사랑하게 되어 괴로워 하다가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되는 데에서 1974년 미국의 사회학자 ‘데이비드 필립스’가 그 이름을 붙여 심리학을 공부하지 않는 사람도 심리효과 중에 ‘베르테르의 효과’라는 단어를 알게 한다. 

괴테의 실연의 아픔과 절친한 친구의 죽음이라는 배경으로 탄생한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우리들의 감성을 자극 하였고 당시 사회를 비판하는 주제를 담고 있지만 그로 인한 파급효과는 작가 자신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끔찍한 모방 자살이라는 태도로 나타나 그를 당혹케 함을 알게 한다. 이를 지켜 본 필립스가 미국의 유명인의 자살사건을 조사한 결과 언론에 사건이 대대적으로 보도된 후 2개월간 자살사건이 급증하게 되었던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여기에 대처하여 명명(命名)한 ‘베르테르의 효과’인 것을 알게 되었다. 

산업화이후 한국 사회가 많은 변화를 맞고 있다.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생명경시 풍조가 만연해 있고 이혼율이 높아지면서 전통적인 가족 관념이 해체되고 2002년도에는 자살로 인한 사망자 수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수를 넘어 섰다는 통계청발표는 충격적이 아닐 수 없다. 자살률은 10년 만에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나 사망자 100명 중 4명이 자살한 것이다. 자살은 세계의 모든 나라들에서 공통적인 현상으로 전체 사망원인의 약 1%를 점하고 있다 한다. 여기에 상당수의 심각한 자살시도까지 고려한다면 자살하려고 하는 경향은 높이 올라간다는 것이다. 

세계보건기구에서는 1968년에 ‘자살이라는 것은 죽음에 대한 의지를 지니고 자신의 생명을 해쳐서 죽음이라는 결과에 이르는 자멸행위이다’라고 정의 한다. '자살생각'이라는 말만으로도 ‘죽고 싶다’거나 ‘어떤 방법으로 자살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자체가 자살행동을 말한다고 한다. ‘자살기도’는 일반적으로 크라이트만(Kreitman)의 이론으로 ‘환자가 자발적이고 의도적으로 자해를 하는 경우, 또는 어떤 물질을 치료 상의 용량을 초과하거나 일반적으로 소비되는 수준이상으로 또는 환자가 약효를 발휘할 수 있다고 믿는 만큼 복용하는 행동’을 말한다. 즉 자살기도도 자신의 삶을 마감하는 적극적인 의도가 존재 한다는 것이다. 결국 자살은 죽음에 이르는 자살기도를 말하며 불행한 죽음을 말하는 것이다. 

오늘의 사회문제는 개인적인 문제와 구조적인 문제가 동시에 작용한다. 최근에는 구조적인 문제로 보는 경향이 되어가고 있다. 일본 내각부가 정부 차원에서 처음으로 ‘자살대책백서’를 펴냈다. 이것은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고 사회적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음을 보는 것이다. 사회적인 원인이 동기가 되는 것은 경제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양극화와 경제적인 고통이 심화하는 것에 기인하여 상대적인 박탈감에 준한 후유증으로 이런 사회는 ‘자살을 권하는 사회’가 되고 마는 것임을 알게 한다. 

오늘의 시대는 죽음에 대해 무감각하는 시대이다. 이 죽음에 대한 무감각은 결국 무감각한 사회, 냉정하고 냉혹한 사회, 비인간적인 사회를 형성한다. 인간이 현실에서 배제한 죽음은 사회 전체를 마비시키고 비인간적인 사회로 변질시키는 사회적 무관심과 냉담함을 확산시킨다는 것이다. 특히 대도시 문화권 속에 사는 현대인들은 누가 어떤 고통과 죽음을 당하든지 관심을 갖지 않으며 그것에 관여하고자 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이 죽음을 자기의 의식에서 배제하고 죽음에 대한 망각과 무의식 속에서 산다 할지라도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으며 죽음에 대한 의식을 벗어 날 수가 없다. 죽음의 필연성은 모든 생물의 존재구조에 속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음은 언제나 인간의 의식 속에 숨어 있다. 인간의 삶의 의식에는 생명체로 살아남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자살의 태도로서 죽음은 자연의 법칙을 조롱할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저항할 수 없을 때까지 살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존재들의 본성을 무너뜨리는 행위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럼으로 교회가 생명의 주 하나님의 은혜를 거역하는 자살을 죄로 단정한 이유를 알게 한다. 

최근 시중에 나온 책 하나를 소개한다. 저자는 미국의 남 캘리포니아의 연합감리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하고 있는 목회자 존 패네스틸(John Fanestil)목사가 펼친 “헌터 부인의 행복한 죽음”(MRS. HUNTER' S HAPPY DEATH)이라는 이야기가 시중에 화제가 되고 있다. 이 책에 대하여 미국의 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인 로버트 에드거 목사는 ‘완전히 죽음의 포로가 되기 훨씬 이전부터, 환자가 된 순간부터 죽음으로부터 끊임없는 괴롭힘을 당해야만 하는 지금 이 시대에 “헌터부인의 행복한 죽음”은 우리에게 영감을 불어넣어줄 뿐만 아니라 죽음에 관한 친절한 안내서로서의 역할도 톡톡히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생 수업”의 저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이후 삶과 죽음에 관해 이처럼 깊은 통찰을 담은 책은 없었다’고 한 그의 호평(好評)에 가의(加意) 주목하게 한다. 죽음과 임종에 관한 유명한 문학 작품들 안에는 분노와 후회, 죄의식과 용서, 그리고 평화와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에 관한 이야기들이 넘쳐난다. 그러나 오늘날 임종을 맞는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 저자가 목도했던 행복과 거룩함에 관한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다고 지적한다. 

인생의 마지막에 관한 오늘날의 보편적 지혜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고 현대 상담 기법까지 받은 저자였지만 어느 날 신학교 도서관 지하실에서 18세기에서 19세기 초까지 영국과 미국에서 발행되었던 종교 잡지에 실린 ‘행복한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우연히 찾아냈다고 술회(述懷)한 것이다. ‘행복한 죽음’은 수세대를 거쳐 널리 실행되었던 죽음의식의 일종이다. 

실제로 수세기동안 실행되어온 교회의 역사이기도 하였다.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고자 하는 이들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전하는 역설적인 복음에 기반을 둔 이 종교적 의식을 수행해 왔던 것이다. 이 의식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영적 절정’(SPIRITUAL HIGH)이라 부르는 하나님의 은총을 직접 경험하게 된 그리스도인들은 죽음과 함께 다가오는 고통과 괴로움 그리고 슬픔을 초월할 수 있었다. 

저자는 이 ‘행복한 죽음’이라는 새로운 의식에 매료되어 19세기로 접어드는 그 시대의 잡지와 신문에서 영국에서 발행된 [아르미니언](The Arminian)이라는 잡지의 1801년 7,8월호에 실린 ‘제이 우드’라가 쓴 “헌터 부인의 거룩한 삶과 행복한 죽음에 관한 기사”라는 제목의 글에서 그 내용이 1801년 1월17일 런던에서 26세의 나이에 알 수 없는 질병으로 죽어간 한 젊은 여자 ‘헌터부인’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저자는 그의 죽음의 기사를 읽고 내내 매우 귀에 익은 그 목소리가 수세기를 넘어 메아리쳐 울려온다고 한다. 여기에 그는 완전히 압도당했다고 한다. 

저자는 만족스럽고 행복한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비결은 무엇일까? 육체적 죽음에 이르면서 더욱 충만한 영적 절정에 이를 수 있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죽음이 비극적인 종말이 아니라 삶의 완결이라고 말 할 수 있게 해주는 힘은 무엇일까? 그들을 통해 삶과 죽음, 사랑과 상실, 슬픔과 영적 성장에 관해 무엇을 배울까? 이러한 ‘행복한 죽음’에 대한 이해는 19세기를 거치면서 사라졌다고 말함에 오늘의 교회는 유의하며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오늘의 시대는 죽음의 태도가 종교의 영역에서 의료 전문가들의 영역으로 옮겨 가고 있음을 보여 준다. “헌터부인의 행복한 죽음”의 전개는 제1부에서 헌터부인의 죽음을 함께 살펴보면서 행복한 죽음의 태도에 대해 소개한다. 삶의 마지막에 대한 경이롭고 유서 깊은 접근 방식을 조명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이야기로 은혜가 넘쳐난다. 제2부에서는 행복한 죽음의 기반이 되는 영적 수행에 대해 탐구한다.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삶에서 얻는 가르침’ 열 가지는 헌터부인이 죽음을 준비하면서 행했던 행동들을 하나씩 나열한다. 

기도, 회고, 회개,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 등 모두 기독교의 역사에 걸쳐 깊이 뿌리 박혀 있는 수행의 방법이다. 죽음은 본질적으로 의학의 대상이 아니다. 다른 자연적인 변화 과정과 마찬가지로 태어나고 아이를 낳고 사랑하고 사랑을 나누는 것 같은 일처럼 죽음 역시 심오한 감정과 영적인 힘이 들어있는 자연스러운 변화 과정임을 알게 한다. 

오늘의 교회가 죽음의 이해를 삶의 자리에서 펼쳐야 한다. 이것은 생명의 경외(敬畏)를 알게 함이다. 이것을 아는 것은 ‘행복한 죽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인간의 참 삶은 단순히 삶의 시간 연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자기헌신에 있다. 자기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기 속으로 구부러지며 자기 안에 폐쇄된다. 그래서 모든 것이 자기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의 삶은 사실상 고독하고 비참하며 생동성과 기쁨이 그 속에 없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고 자기를 개방하는 사람은 생동하며 그의 사랑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의 삶을 기쁘게 하고 생동케 한다. 이러한 삶의 정체성은 죽음의 순간에 궁극적인 모습으로 드러난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죽음은 ‘행복한 죽음’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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