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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선한 일에도 위기는 있다 (룻 3:12 ~ 룻 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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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일에도 위기는 있다 (룻 3:12 ~ 룻 4:12)


I. 프로포즈 그 이후(3:12-18)

오늘 설교제목이 「선한 일에도 위기는 있다」입니다. 여기서 선한 일이란 아들도 하나 얻지 못하고 과부가 된 룻의 유산을 이어 주기 위한 선한 댓가를 지불하는 일 즉 "고엘"을 말합니다. 설교도중 "고엘"이란 말이 많이 나올텐데 "고엘"이란 히브리어로 "기업 무르는 자"란 뜻입니다. 혹은 "친족 구원자"란 뜻입니다.

보아스네 농장 보리 추수, 밀 추수가 끝이 났습니다. 자연 룻의 이삭줍기도 끝이 났습니다. 보아스네 농장에서 타작을 마치고 파티가 열리는 날 밤이었습니다. 룻은 시어머니의 제안에 따라 목욕 재개하고 아름다운 화장을 하고 매혹적인 옷을 입고 타작 마당 야영 캠프에 준비된 보아스의 침실을 찾아가 대단히 적극적인 프로포즈를 합니다. 

과외의 관심이긴 합니다만 모압 여인 룻과 베들레헴 사람들과의 자유스런 의사소통을 보면서 룻이 어떻게 그토록 히브리어를 자유스럽게 구사할 수 있을까 하는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1868년 모압 지방에서 발견된 비문을 연구해 보면 모압 말과 히브리 말 사이엔 거의 차이가 없었다고 합니다. 좀 심한 사투리 혹은 영어와 미국어의 차이 정도였다고 합니다. 

아무튼 룻의 프로포즈가 조금은 지나쳤다 싶었지만 보아스는 이 문제를 감정적으로 처리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신앙과 인격을 믿고 백지위임 프로포즈를 해온 룻을 부끄럽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맡겼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법 - 하나님의 헤세드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보아스는 자신이 고엘 - 기업 무를 자 인 것만은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고엘의 책임을 다하고 싶다는 뜻을 밝힙니다. 그런데 문제는 고엘이 자기 혼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나오미와 룻의 집을 책임질 고엘이 여럿 있는데 자신보다 우선순위를 가진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말합니다. 고엘들 사이에도 촌수에 따라 고엘 의무를 행사하는 순번이 정해져 있었던 모양입니다. 만약 보아스가 우선순위자를 무시하고 고엘이 되겠다고 나서면 법적으로 큰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고엘이 되고자 하는 마음은 있지만 우선 권리가 자신에게 없습니다. 

그렇다면 룻에게 "당신은 잘못 찾아온 것 같다고. 그 우선순위자에게 가서 알아보는게 좋겠다고." 거절하고 돌려보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그렇게 룻을 민망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보아스는 날이 밝으면 자기가 직접 첫 번째 고엘을 만나 물어보고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말합니다. 룻을 어려움에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어려운 일을 룻에게 맡기지도 않았습니다. 자칫 룻이 봉변을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유다의 아들 중에 오난이란 자가 있습니다. 형이 죽고 오난이 고엘이 되어야 하는데 오난은 성관계만 갖고 자연 피임을 하므로 아들을 낳아주지 않습니다. 고엘로서 과부를 농락한 오난을 하나님은 죽여 버립니다. 당시 과부를 농락한 오난을 하나님은 죽여 버립니다. 당시 과부에겐 이런 어려움이 늘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보아스는 첫 번째 고엘로부터 권리를 넘겨받게 되면 자신은 반드시 룻의 고엘이 되어줄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룻은 보아스의 배려로 보아스의 발치 이불 밑에서 하룻밤을 보냅니다. 그밤 두 사람은 순결을 유지했음을 저자는 암시합니다. 그렇게 묘한 밤이 지났습니다. 

이른 새벽 - 사람들이 서로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시간 - 성문이 열리는 첫시간 룻을 집으로 보냅니다. 그리고 보아스는 룻이 그밤 타작마당 침실로 찾아 왔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록 조심을 시킵니다. 

그날 밤 사람들이 상상하는 그런 일은 없었지만 룻이 보아스와 타작마당 침실에서 하루밤을 보냈다는 사실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면 두 사람은 큰 어려움을 겪을 수가 있습니다. 

두 사람이 음행을 했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고엘이 큰 돈을 요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두 사람의 결혼 자체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모든 일을 시시콜콜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것이 정직은 아니지요. 가정에서 일어나는 부부간의 일들이나 목장 가족의 프라이버시를 밖으로 알리지 말라고들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보아스는 고엘이 될 수 있는 모든 절차가 끝날 때까지 매사에 신중을 기하고 있습니다. 

선한 일에도 언제나 난관과 위기가 있을 수 있습니다. 프로포즈가 거절된 것은 아닙니다. 상당히 예민하고 복잡한 문제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른 새벽 몸을 낮추고 룻은 집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3:15에 보면 이런 룻에게 보아스는 "겉옷을 펴라" 그리고 보리를 여섯 번 되어 룻에게 지워줍니다. 성경 연구가들은 왜 하필 치마를 펴라고 했을까? 왜 여섯 번을 되어 주었을까? 여러 가지로 고민을 해 봅니다만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확답없이 어머니에게로 돌아가는 룻의 손을 부끄럽지 않게 하기 위해 선물을 들려보낸 것일 뿐입니다. 

룻이 보리를 잔뜩 치마에 싸서들고 이른 새벽에 나타나자 밤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궁금해 있던 어머니 나오미가 버선 발로 달려나오며 이건 성경에 없는 얘기입니다. '내 딸아 어떻게 되었느냐?'라고 묻습니다. 원문을 직역하면 '너는 누구냐, 내 딸아'입니다. 간밤에 보아스의 부인이 되었느냐? 이 말입니다. 자초지종을 다 듣고 나오미는 3장 마지막절에서 말합니다. '딸아, 이제 공은 보아스에게 넘어갔다. 일이 어떻게 풀릴지 조용히 기다리자. 이 일이 잘 해결되기까지 그분이 쉬지 아니할 것이다.' 여기까지가 3장의 이야기입니다. 3장 다음에 어떤 얘기가 나올까요? 궁금하지요? 4장의 얘기가 나옵니다. 


II. 고엘권리 얻기(4:1-6)

보아스는 룻의 심야 프로포즈를 받고 크게 놀라기도 했지만 동시에 큰 격려를 받았습니다. 룻이 자신에게 백지 위임장을 맡기며 결혼하고 싶다는 뜻을 밝혀온 것입니다. 이제 자신도 그렇게 하겠다는 뜻을 전했기 때문에 고엘의 권리를 얻을 법적 절차를 밟아야 했습니다. 선한 일 앞에 놓인 장애물을 해결해야 했습니다. 

4장의 문이 열려지면 보아스는 성문에 올라가 자리를 잡고 앉습니다. 이곳은 때론 시장으로, 때론 회중 집회장소로, 때론 재판장으로 쓰이는 광장입니다. 여기서 보아스는 재판을 열고 주관하는 재판장으로 나옵니다. 이는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 지체높은 신분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재판을 주관하는 모습 때문에 보아스는 이 시대 이 마을의 사사가 아닌가 추측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침 보아스가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갑니다. 여기 마침은 앞에서 여러번 나왔던 감탄사 '힌네'입니다. 보라(behold) 혹은 짠!으로 번역된 단어입니다. 뜻하지 않게 우연히 짠!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자기 보다 앞선 우선 순위자 고엘이 룻의 기업을 무를 의사가 있는지 공개적으로 확인하고 싶었는데 마침 그가 이곳을 지나가는 겁니다. 

보아스가 그를 불러 세우는데 '아무개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고 합니다. 여기 호칭이 재미있습니다. '아무개'라고 부릅니다. 보아스가 실제로 이 사람의 이름을 몰라서 그렇게 부른 것인지? 보아스는 이름을 제대로 불렀는데 세월이 흐른 다음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룻기 저자가 그의 이름을 몰랐는지? 룻기 저자가 앞으로 소중한 기회를 잃게될 이 사람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서 인지? 의도적으로 저자가 이름을 생략하여 신앙적으로 그가 하찮은 존재임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인지? 그 이유는 분명치 않지만 룻기에서 이 사람의 이름이 밝혀지고 있지 않습니다. 

보아스는 이제 재판을 하기 위해 베들레헴의 장로 열 명을 부릅니다. 열 명의 장로는 일종의 배심원으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이들은 나오미 집안의 고엘을 결정하는 재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드디어 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보아스가 안건을 제시합니다. '그대가 나오미 가정의 고엘 제1순위자인데 그들의 고엘이 되어 유산을 무르주라. 그대가 이것을 원치 않는다면 제2순위자인 내가 무르겠다'고 합니다. 

그때 이 아무개는 '내가 무르리라' 선뜩 고엘이 되겠다고 합니다. 보아스는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습니다. 작전과 기대가 일순간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 순간 보아스는 아무개의 속셈을 금방 알아차렸습니다. 나오미의 기업을 무르게 되면 나오미는 늙어 아들을 낳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자연히 그 가문의 모든 유산은 자신의 것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래서 5절에서 보아스는 이번 사건의 핵심과 본질을 얘기합니다. '나오미의 고엘이 되려면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결혼을 해야 하고 유산은 물론 룻의 자식에게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기업을 무르는 고엘의 사랑과 희생의 정신이 없었던 아무개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남의 불행을 틈타 자기 이익을 챙기려 했던 아무개는 손을 들고 고엘이 되지 않겠다고 합니다. 

6절입니다.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하여 무르지 못하노라 보아스 그대가 부르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고엘 제도란 철저히 연약한 자를 헌신적으로 돌보는 헤세드 정신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헤세드의 정신이 없었던 아무개는 이익을 챙기려다 오히려 손해를 보게 생긴 것을 알고 포기를 해 버립니다. 얼마나 놀랐든지 무르지 못하겠다는 말을 두 번씩이나 반복합니다. 고개를 절래절래 흔드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III. 신발 벗기(4:7-8)

오늘 본문에 아무개로 등장하는 어느 무명씨는 '손해가 있을까'하여 고엘의 권리를 포기합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아름다운 희생과 헌신의 마음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능동적으로 부여잡습니다. 

역사가 흐른 다음 뒤돌아 보면 지금 룻의 고엘이 되고 남편이 되는 이 기회는 보통 기회가 아닙니다. 메시야의 가계에 들어가는 기회입니다. 구속사를 만들어 가는 기회입니다. 

아무개가 기업 무르기를 거부하자 고엘 양도의식을 행하게 됩니다. 본문 7절 8절에 보면 고엘 양도는 신을 벗어주는 예식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신발은 권리를 나타냅니다. 종이나 죄수들이 신을 신을 수 없었던 이유도 그들에겐 아무런 권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유산을 잃고도 회복할 힘이 없는 사람들에게 기업을 무르주는 고엘제도는 약자와 고난 당한 자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헤세드를 친족이 실천하는 일이었습니다. 신약 디모데전서 5:8에서도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신한 자요 불신자 보다 더 악한 자니라"고 했습니다. 

또한 고엘제도는 신약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기업 무르기를 거부하는 자에 대한 예식이 신명기 25:7-10에서는 대단히 단호하게 거행되었습니다. 신25:9입니다.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이르기를 그의 형제의 집을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책임을 도피하는 자는 모든 권리를 빼앗고 침을 뱉어 저주하라는 겁니다. 공동체에 대한 책임성이 있는 오늘의 교인들을 비판하여 어떤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갱들이 자기 집단에 충성하는 만큼만 하나님과 교회에 충성하고 로터리클럽 회원들이 자기 클럽에 다하는 책임만큼만 책임감이 있었다면 교회와 세상은 달라졌을 것이다." 이 시대가 이렇게 혼란스러운 이유, 힘이 없어 보이는 이유는 바로 공동체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사람들이 도피하기 때문입니다. 발에 신을 벗기고 침을 뱉어 주어야 할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룻기에서는 신명기와는 조금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고엘 책임을 거부하는 사람이 스스로 자기 신을 벗어 고엘 의무를 양도받은 사람에게 주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침을 뱉어 저주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고엘 의무가 정히 부담이 되면 그것을 거부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고 사람들은 그것을 욕하거나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신명기 보다 훨씬 성숙된 모습을 보입니다. 

보아스는 룻의 프로포즈를 받고 고엘이 되어 주겠다고 약속은 했지만 커다란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이 장애를 잘 극복했습니다. 고엘의 권리를 얻어냈습니다. 선한 일에도 언제나 위기는 있습니다. 선한 일은 그 위기를 극복할 때 더욱 소중해 지는 것입니다. 장애물 앞에 주저앉는 사람은 선한 약속의 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 그것이 아무리 선한 일이요 하나님의 뜻이라 할지라도 장애가 있을 수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 장애는 우리의 믿음과 진실을 시험하는 것이기에 반드시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무명씨 아무개가 거절한 고엘의 책임을 흔쾌히 감당할 수 있었던 보아스의 힘이 무엇이었을까요? 아무개의 관심이 무엇이 내게 유익한가에 있었다면 보아스의 관심은 무엇이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책임이요 사명인가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앞선 3:13에서 내가 고엘의 권리를 얻게 되면 반드시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하리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 - 가정, 교회, 나라 - 의 문제가 바로 책임지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는 책임을 회피하는 자를 가장 비겁하고 악한자라고 합니다. 아무개는 자신의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보아스는 소유를 하나님의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데에 쓰는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구속자의 삶을 결단하고 희생과 헌신의 길을 간 보아스를 하나님이 손해만 보게 하셨나요? 과연 그의 희생과 헌신이 인생의 손실이었을까요? 조그마한 개인적 손실 때문에 책임을 회피한 아무개는 우리가 이름조차 알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거대한 구속역사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IV. 내가 고엘이 되었노라!(4:9-12)

선한 일 앞에 놓인 위기를 모두 극복하고 고엘의 의무를 양도받은 보아스는 재판의 마무리 작업을 합니다. 자신이 고엘의 권리를 양도받았으니 흔쾌히 고엘이 되겠노라고 선포합니다. 

"여러분은 오늘 이 일의 증인입니다. 나는 엘리멜렉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과 기룐과 말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나오미의 손에서 사겠습니다. 나는 말론의 아내인 모압 여인 룻도 아내로 맞아들여서 그 유산이 고인의 이름으로 남아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여 고인의 이름이 그의 고향 마을에서도 끊어지지 않고 친족들 사이에서도 끊어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이 일의 증인입니다"(4:9-10. 표준새번역 개정판)

보아스의 이 선언으로 룻이 집에서 가슴 졸이며 애태우던 모든 문제가 통쾌하게 해결되었습니다. 걸림돌이 되었던 첫 번째 무명의 고엘이 신발을 벗어던지고 스스로 물러났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한 헤세드의 사람 유력자 보아스가 룻의 남편이 되어 모든 것을 회복해 주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제 이 밭 저 밭을 떠돌아 다니며 이삭을 줍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가난을 못이겨 종으로 팔려갈 염려도 없습니다. 모압 여인 룻은 하나님 나라 시민권을 얻었습니다. 영원히 하나님 나라 기업을 얻게 되었습니다. 완전히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나오미와 룻에게 기쁜 소식이 되었을까요?

사탄은 범죄한 인간을 율법의 끈으로 꽁꽁 묶어 인간은 자기 권리안에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음으로 죄의 값을 다 지불하셨습니다. "내가 다 이루었다. 내가 다 지불했다" 테텔레스타이.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지옥으로 팔려가는 일은 없습니다. 사탄의 나라에서 자유케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 시민권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기쁜 소식,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기업을 무르주신 분 - 나의 고엘이 되십니다. 나를 붙들고 있던 사탄은 신발을 벗어던지고 도망갔습니다. "사탄! 너는 모든 권리를 상실했다. 떠나가라." 여러분을 묶고 있는 지옥의 권세, 질병과 실패, 죄와 유혹은 모두 힘을 잃었습니다. 권세를 잃었습니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었습니다.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보아스가 성문 광장에 모인 백성들과 배심원으로 참여한 장로들에게 증인이 되어 달라고 했을 때 모든 사람이 일제히 '우리가 증인이 되리라' 외칩니다. 그리고 룻을, 다음엔 보아스를 축복합니다. 불평, 원망, 비난, 저주의 사사시대 베들레헴 사람들은 기회만 있으면 서로 축복합니다. 기특한 사람들입니다. 

룻이 이스라엘 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 같게 해 달라고 축복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베들레헴에서 유력하고 유명한 자가 되라고 축복합니다. 베들레헴 사람들은 12지파를 세운 라헬과 레아를 국모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특이한 점이 발견됩니다. 언니 레아보다 동생 라헬을 앞세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바로 이 베들레헴에 라헬이 묻혀 그의 묘비가 있었기 때문에 라헬이 묻힌 마을이라는 긍지가 그들에게 있었던 것입니다.(창35:16-20, 48:7) 

베들레헴 사람들이 룻을 향한 결혼 축사에서 국모 라헬같이 되라는 말은 엄청난 축복이었습니다. 축복을 받아도 이런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나라를 세우는 국모가 되라는 축복을 받으십시오. 천국에 갔을 때 교회를 세운 교회의 어머니였노라는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12절 보아스를 향한 축복은 더욱 독특합니다. 
"여호와께서 이 젊은 여자로 말미암아 네게 상속자를 주사 네 집이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드디어 모압 여인이란 말 대신 다른 이름을 얻었습니다. 룻을 다말에 비교하고 있습니다. 다말과 룻은 둘 다 이방 여인입니다. 둘 다 일찍 자식없이 과부가 되었습니다. 형제 결혼제도를 따라 결혼을 해야 하는데 마땅치가 않아 친족결혼을 합니다. 두 사람 다 끊어질 위기에 처한 유다 지파 가문의 자식을 이어갈 거룩한 열망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메시아 왕국에 대한 비전이 사라지고 있을 때에 이방인으로 그 비전을 받은 여인이 다말과 룻이었습니다. 메시야 족보를 이어가기 위해 당당히 제물이 되었을 여인이 다말이요 룻이었습니다. 온 땅이 속물이 되고 세속주의로 전락해 가는 사사시대에 기특한 신앙을 가진 이방 여인이 이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이 시대의 룻을 찾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기회에 손해가 따르고 장애물이 있고 위기가 있다고 포기하고 돌아서렵니까? 

헌신의 기회를 그야말로 헌신짝처럼 버린 무명의 아무개가 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인물이 되시렵니까? 행여 너도 이 시대의 또 다른 아무개로 살아가지는 않느냐? 묻습니다. 

위기와 장애물을 뛰어넘어 기쁨으로 하나님 나라 기업을 위해 댓가를 지불하고 고엘의 길을 간 보아스의 후예가 되지 않으시렵니까?

붙쫓아 베들레헴으로 들어온 여인!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현숙한 여인으로 자신을 준비한 룻! 아름다운 몸가짐으로 자신의 인생을 위임하며 프로포즈했던 룻처럼! 거룩한 일, 신령한 일을 사모하는 신부가 되지 않으렵니까?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 가운데 보아스와 룻을 찾아내어 당신의 왕국을 건설해 가십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무개로 살아가다가 룻기를 공부하다가 단 한 명이라도 분연히 일어나서 보아스가 될 수 있다면, 자기를 준비하고 백지위임 프로포즈를 주님께 드리고 주님의 영광스런 신부가 되어서 그 길을 가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룻기의 강해는 의미가 있을 것이요 우리 모두의 예배는 바로 그 한 사람을 위해서 중보했다 하더라도 가치 있는 예배가 될 것입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꼬 주여 제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보내 주시옵소서. 
이 한국이 지금 이 어려운 시대를 극복하고 일어나 세계를 살리는 역사의 기업 무르는 백성이 되기를 원합니다. 한국교회가 이 민족의 역사를 짊어지고 나가는 오늘 이 시대의 보아스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교회가 한국교회의 아픔을 감싸쥐고 한국교회를 일으켜 세우는 이 시대의 기업 무르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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