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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은 승리자 (마 8:2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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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승리자 (마 8:28~34)


(28)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저희는 심히 사나와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만하더라 (29) 이에 저희가 소리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30) 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는지라 (31) 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가로되 만일 우리를 쫓아내실진대 돼지 떼에 들여 보내소서 한대 (32) 저희더러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33) 치던 자들이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들린 자의 일을 고하니 (34)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중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기적들 중 많은 부분은 귀신을 내어 쫓는 사역이었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처음 행하신 기적도 귀신을 내어 쫓으신 것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장 23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은 가버나움 회당에서 더러운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내어 쫓았습니다. 

마태복음 8장 16절에는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역에서 행하셨던 사역들을 요약하면서 이렇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주님께서 열두 제자들을 세우신 주요한 이유 중 하나도 귀신축출과 관련됩니다. 마태복음 10장 1절입니다.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귀신을 내어 쫓은 기적은 신약시대에 와서 갑작스럽게 많아진 특별한 현상입니다. 구약성경에는 귀신들림 현상이나 귀신을 쫓는 기적이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복음서에 이르게 되면 귀신과 관련된 내용들이 마구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많은 귀신을 내어 쫓는 예수님을 보면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는다고 비난할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의 가족들은 예수님이 더러운 귀신에 들렸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찾으러 오기까지 하였습니다.


귀신들린 자 둘이

특히 복음서에 귀신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은데 우리는 먼저 귀신의 정체가 무엇인지 정의를 내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귀신이라고 할 때는 죽은 자의 혼령이라고 흔히 생각합니다. 전설의 고향 씨리즈가 그렇고 제사 때 죽은 자의 혼령이 온다는 전통적인 생각 때문에 그렇게 굳어진 것 같습니다. 기독교 어느 단체에서는 자신들의 축귀 경험을 들어 믿지 않고 죽은 불신자의 혼령이 귀신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은 그렇지 않습니다. 귀신은 죽은 자의 혼령이 아닙니다. 죽은 자는 낙원이든 음부든 주님의 최후 심판이 있기 전까지 죽은 자의 세계에 거합니다.  성경은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고 타락한 천사들이 귀신이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유다서 1장 6절입니다.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그렇다면 우리가 주변에서 경험하게 되는 죽은 자의 혼령의 형태를 한 귀신들은 무엇입니까? 이는 귀신들이 그들이 속한 문화나 전통 등을 이용하여 우리를 미혹케 하는 현상일 뿐입니다. 사단과 그의 세력들이 마치 죽은 자의 혼령인 것처럼 가장한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그것은 영화 ‘엑소시스트’나 ‘오멘’ 같은 서양 공포 영화에서는 죽은 자보다는 사단이 직접 귀신들린 현상을 만들어내는 자로 등장하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귀신은 민족마다 지역마다 다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은 귀신이 문화나 전통을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서양에서는 죽음의 사자가 천사들 인 반면에 우리나라에서는 죽음의 순간에 저승사자가 나타납니다. 무엇이 옳습니까? 이는 단지 문화의 차이일 뿐이고 사단이 사람들의 집단적 의식을 이용합니다. 

귀신축출과 관련하여 우리가 또 하나 유의해야 할 것은 복음서에 나온 현상들이 모두 귀신이라는 영적인 존재와 관련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분명 영적인 세력이 관여된 귀신들림입니다. 귀신이 이중인격자처럼 말을 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정신병으로 분류될 수 있는 귀신들림 현상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12장 22절에는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이 같은 경우는 영적인 현상에 의한 것인지 정신적인 질병인지 구분이 쉽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7장에서는 귀신들린 아들을 예수님께 데려오는데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마17:14)고 설명합니다. 간질 현상인데 예수님은 말씀으로 귀신을 내어 쫓습니다. 

누가복음 13장에서는 “십팔 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눅13:11)를 예수님이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눅13:12) 하실 때 그 병이 낫게 됩니다. 처음에는 귀신들렸다고 하였는데 예수님은 단순히 병을 치유하신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이로 보건대 예수님 시대에는 정신적으로 이상한 현상을 보이면 귀신들렸다고 정의하였던 같습니다. 오죽했으면 예수님도 귀신들렸다고 사람들이 소문을 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정신병을 귀신들렸다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분명 영적인 존재에 의해서 일어나는 귀신들린 현상이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정신이상으로 생기는 병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때는 기도나 귀신을 쫓는 축사보다는 약이나 상담으로 치료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무조건 “귀신아 물러가라”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 당시의 기준으로 본다면 현대인들은 정신병원에 입원한 모든 사람들은 귀신들린 자로 분류될 것입니다.


저희는 심히 사나워

그런데 문제는 왜 이처럼 예수님 시대에는 귀신들린 자들이 많이 생길 수밖에 없었느냐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입니다. 내 자유는 아무도 침범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자유의지가 약화될 경우가 있습니다. 환경적 요인으로 인한 어떤 충격이나 상처를 받게 되면 내 자유의지가 약화됩니다. 그때 악한 영들이 침투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됩니다. 저는 오늘 말씀에서 귀신들린 자들이 많이 생긴 이유를 추적하고 오늘날의 현실과 비교하려 합니다.

첫째로는 이스라엘의 정치 경제적 상황을 들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동일한 기사가 마가복음 5장 1-20절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이 좀 더 이 상황을 자세히 보도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귀신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막5:9)고 묻습니다. 그러자 귀신이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대답합니다. ‘군대’는 헬라 어로 레기온이라 하여 로마 군대의 군단을 가리킵니다. 이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 상태였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기 이후 독립 국가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제국의 식민지에 이어 하스모니안 왕조라는 짧은 독립국가를 거쳐 이제는 로마의 식민지 상태에 들어갔습니다. 이곳은 급격히 헬라화가 되어 이름도 데가볼리라 불리게 되었습니다(막5:20). 데가볼리는 곧 데카 폴리스로 10개의 헬라 화된 도시를 말합니다. 오늘 마태복음 28절에서는 가다라 지방이라 부르고, 마가복음에서는 거라사 지방이라 부르는 곳이 바로 이 열 개의 도시들 중 하나를 일컫는 지명입니다.

식민지라는 현실은 경제적인 수탈과 잦은 전쟁이라는 위기를 안고 있습니다. 이 귀신들린 자의 이름이 ‘군대’인 이유는 단순히 많다는 것 외에 이곳이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거나, 큰 전쟁이 있었다는 증거일지도 모릅니다. 팔레스타인 땅에는 잦은 독립전쟁이 있었고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죽게 되면 그 장소가 원한의 땅이 됩니다. 사람들의 억울한 죽음이 많은 곳에는 귀신들린 현상이 많이 일어납니다. 이는 죽은 자의 혼령이 그렇게 해서가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아벨의 핏소리가 땅에서 호소한다(창4:10)고 하듯이그 땅이 원한 맺힌 땅이 되고 그것이 귀신이 일하기 좋은 조건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극단적인 위기나 폭력의 경험은 그 땅에 상처를 내고 결국 그것이 사람들을 귀신들림이나 정신병으로 몰아갑니다.

또 식민지 현실이라는 것은 자기 정체성의 상실을 의미합니다. 식민지 백성은 자기 민족 고유의 전통 사상 언어 문화 종교를 자유롭게 행사하지 못하고 외부의 것을 강요받습니다. 그러니 자꾸 정체성 혼란이 생깁니다. 자기 고향을 잃는 것과 같습니다. 든든한 반석처럼 여겨졌던 것들이 흔들릴 때 인간이란 존재는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런 점에서 현대 한국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들 대부분은 정신병을 앓고 있다 할 것입니다. 급격한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대부분 고향을 떠나 도시로 이주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흙을 밟고 만지며 생활했던 인류가 급격히 흙을 떠나 칙칙한 콘크리트 건물과 아스팔트 위에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자라는 아이들을 보며 이 아이들은 무슨 추억을 가지고 살까 하고 염려가 될 때가 가끔 있습니다. 항상 집과 학교와 학원만 오가지 흙을 밟아볼 기회가 없습니다. 인터넷과 TV에만 익숙하지 살아있는 생물과 자연을 접하기가 어렵습니다. 고향과 흙을 잃어버린 세대입니다. 수천 년 동안 인간의 삶의 방식을 떠나 새로운 생존 방식을 배우고 있는 저들에게는 지금은 과도기요 불안의 때입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에게 점점 정신병이 더 많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둘째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물질 중심 사회의 병폐입니다. 

과거에는 농경과 유목 위주로 돌아가던 이스라엘이 헬라 로마 사회가 되면서 급격히 물질화되기 시작합니다. 그 모습은 돼지 떼를 치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그 떼가 2천 마리나 되었다고 합니다. 돼지는 이스라엘에서 대표적인 부정한 짐승입니다. 아마 이곳에 살던 이방인들이 이것을 쳤을 것입니다. 대규모 사육이었습니다. 경제 규모가 커졌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물질중심의 사회가 되면 사람의 가치가 저하되어 물질적 기준으로 평가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보다 물질을 중시하는 태도는 오늘 말씀에서도 뚜렷이 확인할 수 있습니다. 

34절입니다.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귀신들린 자를 고친 놀라운 기적을 보고 예수님에 대해서 궁금증도 생기고 진리의 말씀을 들으려는 욕구도 일어날 만도 합니다. 한데 그들의 반응은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이 한시라도 빨리 떠나시기를 간구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유는 몰살당한 돼지 때문이었습니다. 2천 마리나 되는 수많은 돼지 떼들이 몰살을 당했으니 그들의 경제적 손실이 얼마나 막대했겠습니까? 그들에게는 귀신들린 자가 온전케 된 것에 대한 기쁨이 전혀   없습니다. 그 귀신들린 자는 돼지만도 못한 미미한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물질중심의 사회가 되면 인간 정신병은 더 심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물질사회는 필연적으로 경쟁사회와 연결됩니다. 경쟁사회는 사람으로 긴장하게 만듭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이용대상이거나 밟고 넘어야 할 대상일 뿐입니다. 경쟁의 우위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긴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사회가 자살자가 급증하고 있는 원인중 하나가 바로 이처럼 사회가 급격히 물질중심의 사회, 경쟁중심의 사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사회에도 정신질환자가 많습니다. 대략 보호시설에 수용되어 있는 정신병자가 50만 명에 이를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합니다. 한국사회는 정신병을 대단히 부끄럽고 위험한 병이라 하여 감추고 드러내지 않을 뿐입니다. 오늘날은 예수님 시대보다 더한 귀신들림 현상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다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돼지 2천 마리를 아끼지 않고 한 사람을 구원하셨습니다. 왜 그냥 귀신을 향하여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이렇게 명령하실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을까요? 저는 예수님이 이렇게 하실 때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런 것입니다. 지금 이 사람을 장악하고 있는 귀신은 군대 귀신입니다. 예수님의 명령대로 귀신들이 떠날 수 있지만 그 사람에게 어떤 해를 입히고 떠날지 모릅니다. 주님은 그 사람이 해를 받지 않도록 귀신들의 간구대로 돼지 떼에 들어가도록 허락하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결과는 예수님은 돼지 떼의 물질적 가치보다 한 영혼의 가치를  더 소중하게 생각하셨다는 것입니다. 

종교의 힘은 바로 이런 사랑의 힘에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가치 없다고 여기는 작은 소자를 사랑하는 마음이 사람들에게 위로를 줍니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교회마저도 물신주의에 빠지지 않았습니까? 작고 가난한 자보다 능력 있고 부유한 사람이 대접받는 곳이 되어 있지 않습니까? 대형화되면서 한 사람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익명의 공동체가 되지 않았습니까? 


세 번째 원인으로 들 수 있는 것은 이처럼 종교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현실입니다.

정신적인 위기는 항상 발생합니다. 그러나 그 위기를 해소시키는 것이 종교이고, 종교가 위로를 주면 귀신들림 현상은 완화됩니다. 예수님 당시의 주류 종교는 바리새파로 대표되는 율법주의입니다. 율법주의는 불행히도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로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딱딱한 율법과 교리를 들이대며 민중들을 더 힘들게 하였습니다. 안식일과 정결법을 지킬 것을 강요했습니다. 가난한 농민들이 언제 손 씻을 여유가 있었겠습니까? 그들은 안식일에 병든 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며 한 생명이 구원받는 그 기쁨에 동참하기보다는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난하기 일쑤였습니다. 삶도 힘든데 종교가 위로가 되기보다는 더 큰 정신적 압박으로 작용했던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끊임없이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을 나누며 사람들을 긴장시켰고 그 기준에 못 미치는 사람들을 무덤가로 몰아내었습니다. 

한편에서는 율법주의가 있었다면 또 다른 편에는 묵시문학으로 무장된 종말론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현재의 현실을 부정하고 메시야와 하나님나라를 대망하였습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은 좋지만 그것이 현실에 대한 극도의 체념에서 나온 것이라면 건강하지 못하다 할 것입니다. 예수님과 귀신과의 대화는 이런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귀신들이 예수님을 먼저 알아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29절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이라는 것은 권능으로 하나님니라가 온전히 실현될 때를 말합니다. 그 때가 되면 사단과 어둠의 세력들은 조금도 발붙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자기의 때라는 인식이 담겨 있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현재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나라는 미래에 임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바로 지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주님은 귀신들의 이런 태도를 거부하시고 당장 귀신들린 사람에게 해방을 선포합니다. 현실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종교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만이 아니라 지금 바로 이 땅에서 경험하는 현실입니다. “귀신아 물러가라!” 하실 때 귀신은 이미 그 힘을 잃기 시작합니다. 주님의 구원은 현재에 이루어지는 구원입니다. 더 강한 자로 오신 주님께서 백성들을 억압했던 귀신들을 결박하고 그 집의 주인이 되셨습니다. 이제는 어떤 정사나 권세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할 수 없습니다. 그 은혜는 바로 지금, 이 시간 우리에게 부어지고 있습니다.


무덤 사이에서

이처럼 복합적인 이유 때문에 예수님 시대에는 귀신들린 자들이 많았습니다. 사회가 그들을 외면하니 그들은 더 이상 인간사회에 살 수 없습니다. 그들은 무덤으로 격리되었습니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그들을 고랑과 쇠사슬에 매어 놓았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 매인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릴 정도로 초인적인 힘을 발휘했습니다. 또 밤낮 무덤 사이에서 소리를 질러 댔으며 심지어 자기 몸을 상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괴물이 되어 간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군중 속의 고독이라고 우리는 인류역사에서 그 어떤 시대보다도 좁은 공간에 한데 몰려서 삽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마치 외딴 섬처럼 혼자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한 아파트 같은 라인에 살지만 서로를 너무 모릅니다. 매일 만나지만 인사도 잘 나누지 않습니다. 가족들 간에도 대화가 부족합니다. 아이들에게는 공부 잘하느냐, 아내에게는 아이들은 잘 있나 식의 일상적인 대화뿐입니다. 우리도 여기 귀신들린 자처럼 마구 소리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지만 마음속으로는 괴수 같은 분노의 소리를 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결정적 이유는 공동체가 파괴되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장 27절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 하였습니다. 여섯째 날 만들어진 것은 그냥 사람이 아닙니다. 남자와 여자로 이루어진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의 형상 개념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하나는 사랑의 관계성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을 잇는 끈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혼자가 아니라 사랑의 끈으로 엮어진 공동체입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공동체적 존재입니다. 혼자 존재할 수 없습니다. 사회적인 유대가 깨어지고 혼자서 그 모든 고통을 견뎌야 하는 사회는 인간을 미치게 만듭니다. 가족이지만 대화가 단절된 가정은 인간으로 하여금 본질적인 외로움을 느끼게 만듭니다. 이 속에서 우리는 미쳐가고 심한 경우 자살에 이르게 됩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이 『자살론』에서 분석한 다음과 같은 글은 우리 기독교가 새겨들어야 합니다. “우선 종교를 통해 개인이 집단생활에 긴밀히 통합되는 가톨릭 교도들 사이에는 자살률이 낮으며 반대로 개인주의적 경향이 짙은 프로테스탄트 교도를 가운데는 자살률이 높다. 또한 가족간의 친밀도가 높은 경우 자살률이 낮으며, 가족이 와해된 경우 자살률이 높다. 국가와 정치사회의 경우에 있어서도 사회 통합이 강조되고 개인의 사회생활에의 참여가 활발해지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위기에는 오히려 자살률이 감소되고 있음을 통계자료는 입증한다.”

말이 어려워 해석이 필요한데 이는 요즘 한국사회에서 연예인들의 자살, 특별히는 기독교 신앙을 가진 연예인들의 자살이 많은 이유를 잘 설명합니다. 만인 제사장설을 주장하는 개신교는 근본적으로 모든 문제를 자신이 혼자 풀어야 합니다. 단독자로서 신 앞에 나아가 자기 죄와 연약함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개인주의적 경향이 짙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가톨릭은 신부라는 사제들과 교회 전통이 신과 인간 사이를 중재합니다. 최소한 사제와 성도 사이의 공동체가 형성되고 이 과정에서 인간의 연약함이 일단 해결됩니다. 제가 어느 교리가 옳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그만큼 공동체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대형교회든 소형교회든 개신교는 근본적으로 목회자와 성도 사이에, 또는 성도들 간에 서로 마음을 터놓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다 보니 혼자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믿음이 있을 때는 견딜 수 있지만 인간이 항상 강인할 수만은 없습니다. 연약할 때는 공동체를 통하여 다른 사람으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혼자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익숙해진 사람은 결국 자기 통제력을 잃으면 자살을 시도하고 맙니다.

교회가 아니어도 가족이 튼튼한 유대를 형성하고 있다면 그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신적 질병을 앓고 있는 가정의 대부분은 그 관계가 원만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약자를 배려하고 공동체를 강조하는 사회라면 그만큼 정신병이 줄어듭니다. 그러나 현대 한국사회 처럼 극도의 이기심과 경쟁이 주류가 된 사회에서는 끊임없는 자살자와 정신병자를 양산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가 다시 예수님의 정신을 회복해야 합니다. 물질보다 사람이 중요하고 정신적 가치가 가진 충만함 보여주어야 합니다. 인간을 이용하는 정치논리보다는 사회 정의에 대해서 가르쳐야 합니다. 경쟁보다는 함께 사는 법이 행복함을 가르쳐야 합니다. 이것이 귀신들린 자를 고치셨던 예수님의 삶을 따르는 오늘날의 제자들의 모습이라 할 것입니다.


예수임은 승리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셨던 권능을 이 시간 다시 한 번 묵상하시길 바랍니다. 마가복음 16장 17절과 18절입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교회는 능력의 공동체입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할 때 귀신이 쫓겨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제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분이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돕고 계십니다. 

독일의 19세기의 신학자이자 목회자였던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라는 분의 경험을 나누고 마치려 합니다. 19세기는 이성의 시대라 할만큼 합리성이 강조되던 시대였고 기독교 또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 블룸하르트의 생각을 바꾸었던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귀신에 들렸던 고트리빈 디투스라는 소녀와의 영적 싸움이었습니다. 이 소녀는 전형적인 빙의 현상을 보였습니다. 이상한 말을 하고 이상한 형체가 보인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거품을 내뿜거나 영화의 장면들처럼 집안에 있는 물건들이 갑자기 흔들리기도 하였습니다. 이 지역의 목회자였던  블룸하르트는 이 사건 앞에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마음속에 분노가 일어나 그 소녀의 손을 잡고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손을 모으고 기도해! 예수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우리는 마귀가 하는 것을 충분히 보았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하실 수 있는 것을 보기 원합니다.” 그러자 발작이 멈추고 소녀가 평온을 되찾았습니다. 가장 깜짝 놀랐던 것은 블룸하르트였습니다. 예수의 이름에 이런 능력이 있는 것에 놀랐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영적싸움은 1년 반이나 지속되었습니다. 언니의 병 때문에 이 소녀의 동생까지도 병에 걸렸었는데 이 싸움은 결국 성탄절 무렵이 되어서야 끝이 납니다. 이때도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데 그 동생이 발광을 하면서 큰소리를 지르다가 귀신이 최종적으로 떠나갔습니다. 이때 마지막으로 이 소녀의 입으로 외쳤던 것은 “예수는 승리자다” “예수는 승리자다”는 외침이었습니다. 이후 “예수는 승리자”라는 이 말은 블룸하르트의 평생을 이끌어가는 목회 슬로건이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는 승리자라는 확신을 가지고 이후 수많은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치유하였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승리자이십니다. 어떤 어둠의 세력도 예수의 이름을 당할 수 없습니다. 승리자 되신 예수님의 권능으로 모든 싸움에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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