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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 (롬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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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은 하나님의 능력 (롬 1:16)


로마서의 주제는 복음, 복된 소식이다. 로마서 1장에만 복음이란 단어가 7번 나온다(1,2,9,15,16,17). 본문은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말로 시작된다. 이 말은 ‘나는 복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강조하는 말이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복음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복음을 자랑했다. 

우리도 이렇게 복음을, 자랑할 수 있기 바란다. 그러면 ‘나는 좋은 소식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말은, 당연히 소리이기 왜 이렇게 말했는가? 바울이 이렇게 표현한 이유는, 누군가 복음을 부끄러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랑스럽지 않으면, 부끄럽다고 여겨지면 숨기려고 한다. 

가끔 어떤 부부는 남편은 앞에 가고, 부인은 멀찍이 뒤따라간다. 부인이 옆으로 오면, 뒤에 멀찍이 떨어져서 오라고 하고, 자신은 앞쪽으로 가버린다. 부인이 자랑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게 내 아내라고 말하기가 부끄럽기 때문이다. 우리 성도들 가운데는 이런 분이 없기 바란다. 

어느 집사님의 이야기이다. 자신이 어렸을 때, 모기장에서 잠이 들었는데, 모기장에 불이 붙었다. 모기장이 불타는 모습을 어머니는 보시고, 어머니는 급한 마음에 손으로 불을 꺼, 손이 붙어 버렸다. 정말 자랑스러운 일인데, 철이 없었을 때에는, 어머니가 학교에 오시면 부끄러워 피했다고 한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이, 복음을 부끄러워한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십자가를 통해 나타났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셨다. 로마시대에 십자가는 아주 죄질이 나쁜 사람들을 죽이는 형틀이었다.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지은 자들을 처단하는 틀이었다. 

십자가는 너무 가혹했기에, 로마시민권을 가진 사람에게는 집행하지 않았다. 정복당한 백성들이나, 흉악범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십자가를 생각할 때, 자랑스럽기보다는 부끄러움과 수치스러웠다. 유대인들도 마찬가지다. 

나무에 달려죽은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는, 뿌리 깊은 의식이 있었기에(갈3:13), 저주받아 죽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고 부끄러운 일로 여겼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복음을 미련한 것(고전1:18)으로 여겼다. 이처럼 바울이 살던 시대에 십자가는, 결코 자랑스럽지 않았다. 

그러나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복음이 자랑스럽다.”고 선언한다. 바울은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이지만(행22:3) 예수님의 십자가만 알고, 자랑하겠다고 하였다(갈6:14). 우리도 복음을 분명히 안다면, 확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를 확실히 알고,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기 바란다. 복음은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기에,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자랑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그러면 복음의 능력은 무엇인가? 


1. 복음은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기에 자랑스럽다(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구원받는다는 말은 ‘어떤 악조건에서 구출 된다’는 뜻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악조건은 죄와 사망 지옥을 말한다. 죄로부터 사망과 지옥에 오기에, 죄로부터의 구원이 기독교의 핵심이다. 그러면 왜 죄를 해결해야만 하나?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가야만,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눅15장)을 보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탕자의 비유가 나온다. 어떤 아버지에게 아들이 있었는데, 이 아들은 돌아가시지도 않은 아버지에게 유산을 요구하여, 유산을 모두 챙긴 후, 집을 나간다. 집을 나간 아들은 허랑 방탕하여, 그 재산을 다 허비하고, 흉년을 맞아 비참한 모습이 된다.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며 산다. 처참한 인생을 체험한 후에,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하며 그는 후회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품을 떠난 인간의 삶이다. 돌아가시지 않았는데, 돌아가셨다고 여겼고, 아버지를 떠났음이 죄다. 

그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아버지께 돌아가, 용서를 빌겠다고 생각한다. 아버지를 떠났음이 죄라는 사실을 깨닫고, 아버지께로 돌아가려고 한다. 그리고 아버지께로 돌아간다. 이것이 회개다. 

우리는 죄가 있기에, 아버지께 돌아갈 수 없다. (롬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죄 때문에 아버지께 돌아갈 수 없다. 따라서 죄를 먼저 해결해야만 한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아들이 나간 이후, 아버지는 대문을 열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돌아오는 아들을 맞아, 죄를 묻지 않고 불쌍히 여겨, 안고 입을 맞춘다.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주었다. 데려다가 잔치를 베푼다. 아버지는 벌써 아들의 죄를, 다 용서하셨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다 용서하셨다. 돌아오기만 하면 된다.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님을 통해서, 죄를 다 해결하셨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다. 그래서 우리의 죄는 다 씻어주셨다. 이것이 복음이다. 이것이 좋은 소식이다. 그래서 이 소식을 세상 사람에게 전해야 한다. “여러분의 죄가 다 씻어졌다. 돌아오십시오.” 전해야 한다. 

저는 불교를 생각하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된다. 얼마나 고행을 하며, 도를 닦는가? 성철 스님은 8년 간 드러눕지 않고, 10년 동안 사람의 접근을 막기 위해, 암자 주위에 철망을 쳐놓고, 오직 홀로 용맹 정진하기도 했다. 생식으로 한 평생을 사셨다. 

그는 세계 불교사에서도 보기 힘든, 인간의 한계를 극복한 사람이다. 그러나 참 안타깝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죄를 없애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철 스님은 1983년에 “내 말에 속지 마라. 나는 거짓말하는 사람이여!”라고 했다. 

그의 열반송을 들어보자. 生平欺狂男女群(생평기광남녀군)하니, 彌天罪業過須彌(미천죄업과수미)라. 活陷阿鼻恨萬端(활함아비한만단)이여, 一輪吐紅掛碧山(일륜토홍괘벽산)이로다. 해석하면, “일생 동안에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미치게 했으니, 그 죄업이 하늘에 미쳐,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산채로 불의 아비지옥에 떨어지니, 그 한이 만 갈래나 된다. 한 둥근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불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종교가, 훌륭한 교훈과 사상이 있지만, 죄를 씻는 능력은 전혀 없다. 이것이 다른 종교와 기독교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다른 종교는 죄를 어찌하지 못한다. 그러나 복음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는다. 아무리 악한 죄인이라도,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용서되지 않는 중죄인이라도, 하나님께서는 구원해 주신다. 

‘내 영혼을 받으소서’라는 사형수들의 신앙 간증 집에, 1974년 무려 16명을 죽였던, 희대의 살인마 김대두의 간증이 나온다. 그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에게 버림받고, 사람들에게 버림받으며 자란 상처 때문에, 그 복수심으로 사람들을 죽였다. 

그는 1974년 사형이 집행될 때, 이렇게 신앙을 고백했다. “먼저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이미 죽어야 할 몸이지만, 하나님께서 저를 불쌍히 여기셔서, 주님을 믿고 구원받게 해 주셨으니 감사할 뿐입니다. 저는 여러분과 영영 이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가서 꼭 다시 만나고 싶습니다. 

목사님,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사람을 16명이나 죽인 희대의 살인마, 철저한 밑바닥 인생이었던 그가, 감옥에 들어와 복음을 듣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사형 집행에 참석한 목사님께서 (눅23:42-43)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는 말씀을 읽고 설교하자, 김대두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큰소리로 아멘을 외쳤고, 찬송가를 부르며 평화롭게 천국으로 갔다고 한다. 죄인이었던 그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었다. 

그러므로 복음은 참 자랑스럽다. 바울은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다. 이러한 복음의 능력을 알아서, 우리의 삶에 복음의 능력이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2. 복음은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기에 자랑스럽다. 

복음은 죄가 완전히 처리됐다는 소식이다. 그러나 여기에 한 가지 조건이 있다.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다. 복음은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구원은 은혜로 거저 주시지만, 아무에게나 주시지 않는다. 믿는 사람에게만 주신다. 믿기만 하면, 하나님은 그 능력을 선물로 주신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를 믿는 자에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이유는,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징계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영생을 얻도록 주 예수님을 보내주셨다. 

바울은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엡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선물이라고 했다. 선물은 믿음으로 그냥 받기만 하면 된다. 따라서 믿음은, 선물을 받기 위해서 내미는 손과 같다. 

구원의 선물을 받고자 할 때, 마음의 손을 내밀기만 하면 된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나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나의 죄를 다 해결했다는, 소식을 받아들이면 된다. 선물로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이렇게 물을 수 있다. ‘하나님은 왜 공짜로 주실까?’ 

그 해답은 인간에게,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죄인 스스로 하늘에 닿으려는 일은, 마치 헤엄쳐 태평양을 건너려는 것과 같다. 우리나라에 물개라는 별명을 가진, 조오련이란 수영선수가 있다. 그는 도버해협을 헤엄쳐 건넜고, 또 현해탄을 건넜다. 참 대단하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수영선수도, 태평양을 건너가는 사람은 없다. 인간으로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반드시 가다가 죽는다. 구원받아 천국 가는 길이 이와 같다.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아무리 착해도 불가능하다. 

태평양을 건너는 방법이 있다면, 배에 몸을 싣든지, 비행기를 타야 한다. 천국에 가려는 사람들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예수님께 맡겨야 한다. 믿어야 한다. 구원은 믿음으로 선물로 받는다. 이 부분이 명확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흔들리고 괴롭다. 

신천지는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을 수 없다고 한다. 그렇기에 이단이다. 구원은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음을 믿고 시인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선물로 구원을 주신다. 교회에 나오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한다면, 그것만큼 불행한 일은 없다. 

(요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이시고, 길이요, 생명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길 중의 하나이고, 진리 중의 하나이고, 생명 중의 하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하나밖에 없는 길이고, 하나밖에 없는 진리고, 하나밖에 없는 생명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누구든지 나를 믿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셨다. 많은 분들이 불교에도 이슬람도 구원이 있고, 어느 종교를 가지고 있든, 그 종교를 잘 믿으면 구원이 있고, 영원한 생명이 있다고 한다고 한다. 

이를 종교 다원주의라고 한다. 또 포스터 모더니즘 철학은, 모든 종교를 포용하면서,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속지 마시기 바란다. 예수님께서는 절대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면, 죄를 용서받을 수 없기에, 영원한 생명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구원이 없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복음이다. 그런데도 오늘날 많은 사람이, 그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 예배당에 안 나와서, 그 길을 모르는 사람은 불쌍하다. 

그러나 더 불쌍한 사람은, 예배당에 앉아 있으면서, 내가 구원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가장 불쌍한 사람은, 예수님을 믿었다가 이단에 빠지는 사람이다. (요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믿나요? 그리고 지금 하나님과 교회 앞에서 시인하나요? 아멘하실 수 있나요? 그러면 우리는 구원을 얻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 확신을 가지시고 기쁘게 살아가시길 바란다. 


3. 복음은 사람들을 가리지 않기에 자랑스럽다(16下).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이 말이 유대인과 로마사람들만 구원받는다는 말로 들릴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당시 유대인들의 세계관 속에는, 유대인 자신과 헬라인들뿐이었다. 

그래서 유태인 이외의 민족을 통틀어 말할 때, 그냥 헬라인이라고 말했다. 만약 제가 이 말씀을 성경을 썼다면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이방인들에게로다.”라고 했다. 유대인이든지 한국인이든지 관계가 없다. 사람을 가지지 않는다. 

착한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유식한 사람이든 무식한 사람이든, 어린아이든 어른이든, 관계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유대인들에게는 선민의식이 있다. 선택받은 민족이란 의식이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유대인만을 선택해서, 자신들의 신이 되어주셨다는 의식이다. 

그래서 자신들만의 하나님으로 여겼다. 그러므로 구원도 자신들만 위해서라고 잘못 생각했다. 이 잘못된 선민의식 때문에, 초대교회 때에 혼선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이 무엇인가? (창12:3)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후에, (출19: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하나님의 뜻은 이스라엘 통해 전 세계에 복음이 전파되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명은 감당하지 않고, 자신들이 택함을 받았다는 사실만을 자랑했다. 바울도 이 사실을 몰라, 어둠 속에서 방황했지만, 예수님을 만남으로, 복음을 밝히 깨달아 전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심은 사실이었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을 보여주기 위한 선택이었다. 

이스라엘의 안에서 이루어진 구원의 소식은, 세상 만방에 전해져서 구원을 얻도록 하신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말씀하셨다. 이처럼 복음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누구나 구원받는다. 자격이 필요 없다. 

어려워서 못 받는 것이 아니다. 무식해서 못 받는 것이 아니다. 죄가 많아서 못 받는 것도 아니다. 구원받지 못하는 이유는,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 죄인인줄 다 안다. 용서받지 못할 죄를, 수 없이 많이 지었음을 자기 영혼은 다 안다. 

이렇게 살다 죽으면,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불길한 일이 있음을 다 느낀다. 그렇지만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3:20)고 하셨다. 

지금까지 바울이 복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이유를 살펴보았다. 
(1) 구원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2) 믿으면 선물로 받기 때문이다. (3) 누구든지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복음은 이렇게 좋고, 효능이 뛰어나다. 그러므로 이 복음을 맘껏 누리시고, 자랑하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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