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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충만의 최종 모습은? (행 7:5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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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충만의 최종 모습은? (행 7:54~60)


모세는 세상을 떠나면서 백성들에게 뿌리를 찾으라는 유언을 남깁니다(신32:7). 뿌리 없는 열매는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우리교회 창립 63주년이 되는 주일입니다.

1945년 10월, 이북에서 남하한 몇몇 성도들이 서대문에서 첫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이후, 교회는 크게 흥왕했습니다. 그러나 교회 역시 인간이 모인 공동체인지라 이런 저런 일들로 상처를 입기도 하고, 예배 처소도 몇 번이나 옮기는 우여곡절 끝에 지난 2000년 11월, 일산시대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축복의 장마비를 맞으며, 감격의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서대문시절부터 교회를 섬기는 분들은 하나님의 교회가 든든히 서가는 것을 기뻐하며 출석하고 있고, 여기에 일산에 예비해두신 주의 백성들이 합류하여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이 공동체를 세워나가는 것을 볼 때 얼마나 귀한 일인지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교회에 ‘날마다 구원받는 사람(행2:47)’이 더하여가니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더 겸손하고 더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악한 사탄에게 언제든지 휘둘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초대 예루살렘교회처럼 말입니다.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행6:1)" 120여명으로 시작된 예루살렘교회는 날로 부흥하고(행2:41; 4:4), 제자가 더 많아졌습니다(행6:1). 그런데 헬라파, 히브리파, 이 ‘파(派)’라는 단어가 유난히 눈에 거슬립니다.

계속되는 시련을 이기지 못하고 조국을 떠난 사람들이 디아스포라, 헬라파 유대인이요, 조국을 떠나지 않고 언어와 전통을 지킨 사람들이 히브리파 유대인들입니다. 때문에 숫자가 적지만 당연히 히브리파가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처음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서로 물건을 통용하고, 교제하고, 떡을 떼었습니다.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였습니다(행2:44-47).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히브리파 과부들에게는 구제금을 더 많이 주고 헬라파 사람들은 구제에서 제외되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돈', 하니까 모두 다 예민해지고 이것이 '주도권'과 맞물리면서 종국에는 파가 나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7명의 성령충만한 사람'이 세워졌을 때,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되었고, 하나님의 교회는 오히려 더 든든히 세워졌습니다(행6:5, 7).

오늘 우리를 향한 주님의 간절한 소원은 바로 ‘성령충만(聖靈充滿)’입니다(눅24:49; 행1:4, 8). 교회 안에, 가정에, 부부사이에 문제가 생기는 이유는 오직 '성령충만'하지 못해서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충만’하기만 하면, 어떤 난관도 극복하며, 어떤 태산도 능히 평지로 만들어 버릴 수 있습니다(슥4:6).

'성령충만', 그 최종적인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성령충만'했던 사람 스데반(행6:3, 5, 8, 10; 7:55), 그는 지금 날아오는 돌덩이를 맞으며 최후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런 끔찍하고 비통하며 억울한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스데반의 기도를 들어보십시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7:59)"

스데반의 이 모습에서 우리는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성령충만했던 그는 주님을 닮은 자가 되어 있습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의 최종적인 모습은 이렇듯 '주님을 닮은 자'가 되어 주님처럼 살다가 주님처럼 죽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용서(容恕)'였습니다(눅23:34; 행7:60). 그렇습니다. '용서'야말로 성령충만한 자의 최종적인 모습입니다.

스데반은 첫째, '다른 사람을 용서'했습니다. 자신을 향하여 이를 갈며 계속 돌을 던지는 저들을 용서하고 나아가 아니, 저들을 위해 기도합니다(행7:60). 용서, 내 힘으로는 안되고 능(能)으로도 안됩니다. 그러나 ‘성령충만’하면 가능합니다.

둘째, 스데반은 '자신을 용서'했습니다. 남을 용서하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은 바로 내 자신을 용서하는 일입니다. 욥은 극한 시련을 겪으며 자기의 생일까지 저주했습니다(욥3:1-3, 10). 그런데 스데반은 기도합니다.

"주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행7:59)" 스데반은 '성령충만'했기에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빌4:18)'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용서하면 부정적인 자아상(自我像)을 벗어버리고 마음에 평강이 찾아옵니다. 이것은 '성령충만'할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셋째, 스데반은 ‘하나님을 용서’했습니다. 하나님을 용서하는 것은 앞의 두 가지 용서보다 더 어려운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것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기치 못하는 일들이 일어날 때 우리는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하며, 하나님을 원망을 쏟아냅니다(욥2:9; 합1:3, 13; 시22:1-2). 어떤 이들은 하나님을 끝내 용서하지 못하고 떠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때 진정한 평강(平康)을 맛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직 ‘성령충만’할 때 가능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충만, 그 최종적인 모습은 '용서'입니다. 남을 용서하고, 자신을 용서하고 나아가 하나님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곧 '회복(回復)'을 의미합니다. '남과의 회복', '자신과의 회복', '하나님과의 진정한 회복'이 성령충만한 사람의 최종적인 모습입니다. 이렇게 용서할 때에 무엇보다도 이 땅에 사는 날 동안에 놀라운 능력과 평화가 임합니다. 기적이 나타납니다.

지금 어떤 문제를 안고 있습니까? 혹시 용서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은 아닙니까? 요셉은 '용서'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그렇게도 괴롭혔던 주변 사람들을 용서하고 자기 자신을 용서했습니다. 하나님을 용서했습니다. 그 결과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는 축복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용서는 곧 나를 위한 것입니다. 나아가 이 세상을 떠나는 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용서를 받게 될 것입니다(마6:14-15).

성령충만, 그 최종적인 모습은 '용서'입니다. 모든 것을 용서하면서 살다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용서는 내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인도하심이 필요합니다. 내가 성령충만할 때, 누구든, 무엇이든, 어떤 문제든 주님처럼, 스데반처럼 용서할 수 있습니다. '성령충만'하여 진정으로 용서할 줄 아는 주의 자녀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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