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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도의 승리자가 됩시다 (막 1:3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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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승리자가 됩시다 (막 1:35~39) 


교회를 다니시는 분들에게 가끔 질문을 던져 봅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특별히 어렵다고 느끼는 것이 어떤 것이 있습니까?" 그러면 놀랍게도 많은 분들이 기도가 어렵다고 대답을 합니다. "기도가 제일 힘들어요. 어떻게 기도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1분만 기도하고 나면 할 말이 없어요. 목사님 기도를 꼭 해야 됩니까?" 이런 이야기들을 가끔 합니다. 

신앙 생활을 시작한 후에 기도 때문에 고민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기도를 잘하는 사람을 보면 어찌도 그렇게 부러운지, 또 기도를 응답 받았다는 사람이나,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사람을 보면 보통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신령한 사람으로 존경스럽기까지 합니다. 저 역시 어쩌다가 대표기도를 해야하는 기회가 주어질 때면 얼마나 마음이 두근거리고 당일까지 거의 초죽음이 될 정도로 힘이 들었던 시절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기도를 모르는 사람이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기도를 가볍게 여기는 사람이 건강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의 마음에 이 질문을 한번 담고 스스로 대답해 보십시오.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이렇게 대답이 나올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이 주시는 대답입니다. 

기도의 거장인 바운즈라고 하는 사람은 이런 말까지 했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기도를 대신할 만한 것도 없고 기도에 버금갈 만 한 것도 없다." 옳은 말입니다. 정말 기도를 빼버리면 신앙생활은 심장이 멎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습니까? 예수를 믿으면 누구든지 반드시 기도해야 합니다. 또 기도할 때에 바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 할 때에는 뜨겁게 해야 합니다. 반드시 해야 합니다. 바로 해야 합니다. 열정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진면모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예수님의 하루 일과가 아주 세밀하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는 본문은 예수님의 안식일 하루의 일정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2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 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자, 안식일 날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 가셨습니다. 그리고 설교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설교 도중에 사건이 일어납니다 예배를 방해하는 귀신들린 사람의 부르짖음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에게 들어갔던 귀신을 축출하시는 축사 사역을 행하셨습니다. 여러분, 귀신과 대결하고 그를 위해서 기도해주는 일 한번 해보면 엄청난 힘이 소모됩니다.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는 끝납니다. 예수님께는 안식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어디로 가셨습니까? 베드로의 집으로 가십니다. 29절을 읽어보십시오.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아마 안식을 위해서 들어가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들어가 보니까 또다시 사건이 기다리고 있어요. 어떤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시몬 베드로의 장모님이 열병에 붙잡혀 누워있었습니다. 사람들 은 그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예수님이 그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병자를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또다시 예수님은 자신의 힘을 에너지를 소모하시면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고치셨습니다. 자 이것이 예수님의 그 날의 사역에 마지막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사역은 계속됩니다. 해질 무렵 안식일 해가 지는 석양녘이었습니다.

다시 3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저물어 해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예수께서 시몬의 장모를 고치셨다는 이 소식이 순식간에 퍼진 것입니다. 이 소문을 듣고 병자들이 앞을 다투어 시몬이 집에 찾아오기 시작합니다. 자! 병자들이 얼마나 많이 모였는가? 마가 복음의 기자 마가는 약간의 위트 어린 과장법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미 있는 이 표현을 주목해보십시오. 33절을 보시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고 그랬어요?

33절에 '온 동네가 문 앞에 모였다'고 했습니다. 문자 그대로 그 마을 안에 있었던 온갖 병자들 내과 외과 산부인과 비뇨기과 별별 환자들이 총 출동해서 시몬 베드로의 집 앞에 모여 왔습니다. 예수님의 도우심을 받기 위해서 예수께서 어떻게 했습니까? 34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시니라" 자!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병을 고치시고, 그들의 문제를 만져 주십니다. 그 날 안식일 밤은 저물어 갑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얼마나 바쁜 하루였습니까? 예수님에게서 얼마나 피곤한 하루였습니까? 이렇게 바쁜 하루를 보내신 그 이튿날 아침에 예수님의 모습을 성경은 어떻게 보여 주고 있습니까?

그것이 본문에 시작이에요. 35절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새벽 오히려 미명에 이토록 바쁜 하루를 지내고 나서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님은 일어나 기도하시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생각나십니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겟세마네에 올랐을 때 눅22:39절에 무엇이라 이야기합니까?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 갔더니” 무엇을 따라 그가 감람산에 가셨다고 했습니까? 맞습니다. ‘습관을 따라’였습니다. 그가 감람산을 찾아 기도하는 것은 그의 일상의 습관이셨던 것입니다. 거룩한 습관이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습관이라는 말을 때로 부정적인 뉘앙스로 사용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습관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습관이 운명을 만든다고 말해도 지나친 말은 아닙니다. 우리가 자주 인용하는 서양 격언에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생각의 씨앗을 뿌리면 행동의 열매를 얻게 되고, 행동의 씨앗을 뿌리면 습관의 열매를 얻는다. 습관의 씨앗은 성품을 얻게 하고, 성품은 우리의 운명을 결정짓는다.”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에게 좋은 습관을 길러준다면 자녀 교육의 90%는 이미 성공했다고 할 것입니다.

지난 9월에 북경 올림픽에서 세계를 놀라게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수영에는 변방이자 들러리였습니다. 그 이전에 우리나라 선수가 올림픽이나 세계선수권 수영대회에서 파이널 8명에 들어간 것이 손에 꼽을 정도였습니다. 그 대회에서 아시는 바와 같이 박태환 선수가 400m 자유형에서 금메달, 200m 자유형에서 동메달을 땄습니다. 그런데 박태환 선수의 주종목인 1500m 자유형에서는 9위를 해서 최종 파이널에는 나가지 못했습니다. 박 선수는 앞선 대회를 마친 후 체력을 보강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고 합니다. 정상급에 있는 선수들의 실력은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선수들은 50m 풀을 수영하는데 팔을 몇 번 젓는지, 발을 몇 번 차는지, 처음에 입수(入水)해서 몇 미터를 잠수해서 나아가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의 차이가 메달의 색깔을 바꾸고, 조금만 훈련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최종 결선에도 나가지 못하게 됩니다.

전에 유로스포츠 채널에서 수영 훈련하는 것을 잠시 본적이 있습니다. 저는 지구력이나 추진력을 기르기 위해서 50m의 풀을 반복적으로 오가며 훈련할 줄로 알았습니다. 물론 실전을 위해서 그렇게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훈련을 5-10m 남짓한 풀에서 했습니다. 그 정도의 크기라면 몇 번만 저으면 금방 맞은편에 닿을 것입니다. 그런데 앞쪽에서 물살을 강하게 흘러 보냈습니다. 그러니까 열심히 팔과 다리를 움직여도 제자리입니다. 만약 제대로 하지 못하면 뒤로 밀려갑니다. 물살이 강해도 오랫동안 잘 버티고 수영을 할 수 있어야 뛰어난 선수가 될 것입니다. 그런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서 더 훌륭한 선수가 되는 것입니다.

좋은 습관은 이처럼 중요한 것입니다. 흄이라는 철학자는 습관은 제2의 천성이라고 할 만큼 어떤 습관을 가지고 사느냐에 따라 우리 인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습관적 기도는 훈련의 결과이고 원칙의 결과입니다. 그는 그의 공생애를 광야의 기도로 시작하십니다. 제자들을 택하기에 앞서 밤을 새워 기도하십니다. 제자들을 강하게 훈련하시고자 그들을 밤바다에 보내놓고 산에서 기도하십니다. 하루 종일 가버나움 동리에서 가르치시고 병을 고치시고 지친 다음 날 새벽 한적한 곳에 나아가 기도하십니다. 기도로 그 날 어느 동리에 가서 복음을 전할 것인가를 계획하시고 결정하십니다.

예수님은 삶의 결정적인 순간에 언제나 깊은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12제자들을 선택하시기 전에, 오병이어의 표적 이후에 사람들이 왕으로 옹립하려고 할 때 등 순간순간의 기도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훈련은 반복된 시간과 마음을 들이는 습관입니다. 반복적인 시간과 마음을 드리지 않고 어떤 분야든지 훈련되는 것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영적 생활이 무엇입니까? 영적 생활은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대로 살던 사람이 믿음 안에서 거듭남으로 성령의 감화와 인도로 하나님의 말씀의 말씀중심으로 사는 삶을 말합니다. 그러한 영적인 생활에 있어 필수적인 요소는 기도생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라는 통로를 통해서만 그의 자녀들이 이 땅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십니다. 기도는 믿음의 사람들의 특권이며, 비밀의 세계입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역사의 거룩한 발자취를 남기고 간 사람들은 그들이 배웠든 배우지 못했든 기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의 역사 속에서도 믿음의 선진들은 한결같이 기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기도를 통해서 인간의 힘으로는 가히 상상도 못할 일들을 해냈습니다.

그들은 기도라는 비밀의 통로를 통해 하늘의 온갖 신령한 능력을 공급받았으며 그 능력으로 개인의 숙명적인 문제와 가정의 환란과 국가의 엄청난 재앙들을 해결해 나갔습니다. 기도로 유유히 흐르던 홍해를 가르기도 하고, 하늘에 태양을 잡아 두기도 했으며, 기도로 185,000명의 대군을 하나님의 도움으로 천사를 움직여 하룻밤 사이에 송장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기도는 하늘에서 불을 끌어내려 제물을 태우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기도로 3년 6개월의 한발로 메마른 땅에 단비를 내리게도 했으며, 병든 사람의 병을 고치기도 하고, 심지어는 죽은 사람을 살려내기도 했으며, 감옥에 갇혀 있던 이가 기도로 땅을 진동시키고, 착고를 풀고 나오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서만 인간의 사건 속에 개입하십니다. 기도의 사람 E.M. 바운즈는, ‘마귀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이 기도하는 것을 방해하려고 한다. 그는 기도가 빠진 성경공부, 기도가 없는 일들, 기도가 없는 종교는 하나님도 겁내지 않는다. 그는 우리의 수고를 비웃고 지혜를 조롱하지만 우리가 기도할 때는 떨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날 우리 시대의 비극은 기도의 시간을 가지지 않는 데에 있습니다. 먼저 행동이 앞서며 바쁘게 돌아다니느라고 참 자기와 하나님을 일속에 묻혀 잃어버리고 아무런 기쁨도 감격도 없이 살아갑니다. 우리 모두는 너무나 바쁜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10년 전에 비해서 우리의 생활 템포는 배나 빨라진 기분입니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기도할 시간이 점점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너무 바쁩니다. 너무 재미있는 것이 많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시간을 빼앗는 것들이 주변에 수두룩합니다. 이런 것들을 마귀는 최대한 이용해서 시간을 계속 좀먹어 갑니다. 기도할 시간은 점점 없어집니다. 기도한지가 언제인지 모를 정도로 한 주간을 그냥 보내버립니다. 여러분 이것은 불행한 이야기입니다. 진짜 바빠서 그럴까요? 아닙니다. 기도는 바빠서 못하는 법은 없습니다.

여러분,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한 인생을 살면서 남녀가 사랑에 빠져서 연애할 때만큼 행복한 때가 없지 않습니까? 그때 그 연애를 다른 사람한테 부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대리 연애를 시키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죠? 진정 사랑하는 사이에 사랑을 주고받는 그 기쁨을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서 대신하라고 하는 법이 있습니까? 없지요. 우리는 그런 것을 남에게 시키지 않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에 흠뻑 젖어 봅니다. 그 하나님의 크시고 전능하시고, 성실하시고, 자비로우신 모습 앞에 우리 모두가 나 자신을 잊어버리는 흥분과 행복을 맛봅니다. 그 일을 남에게 맡깁니까? 남에게 맡기면 안됩니다. 가끔 보면 "저를 위해 기도 많이 해 주십시오." 하고는 자기는 기도 안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럼 대리 기도시키는 것 아닙니까? 그 사람은 그 바보입니다. 기도가 무엇인지 몰라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 행복과 그 기쁨을 왜 남에게 빼앗기느냐 그 말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기도의 사람들이여 일어납시다! 믿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는 기도로 풀리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믿음 안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기도로써, 힘으로 능으로 풀 수 없는 많은 문제들을 풀었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 전능하신 이의 능력 안에서 풀리지 않는 문제는 없습니다. 어떤 이들이 하기 쉬운 말로 인간이 할 일은 인간이 해야 한다고 하면서 자꾸 기도의 시간을 빼앗기고 일을 자꾸 꼬이게 만듭니다. 결국 하나님의 존재성까지 의심하는 상태로 믿음이 떨어져 버리고 맙니다. 믿음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됩니다. 기억할 것은 응답 받는 기도는 그리 쉬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걸어가면서도 하고 책을 읽으면서도 하고 누워서도 한다는 그런 한가한 기도가 아닙니다. 성경에는 그런 식으로 기도하다가 응답 받았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사실 기도의 자리를 나가기가 선뜻 그렇게 쉬운 것만이 아닙니다. 왜일까요? 기도의 자리는 영적인 전쟁터입니다. 그러나 이 싸움을 피하면 평생을 살아도 영적인 풍요를 한번 누리지 못하고 부끄러운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한 번만이라도 승리하면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 교회는 오늘부터 '터치 153 새 생명 축제'를 시작합니다. 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최선을 다한 사명이 무엇입니까?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고자' 하심입니다. 그것을 위해 그는 사셨고 그것을 위해 그는 죽으셨습니다. 그는 그 길만이 그를 이 땅에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심을 믿으셨습니다. 그는 그 길만이 인간을 구원하는 유일한 길이심을 믿으셨습니다. 그는 더 나아가 그 길만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유일한 길이심을 믿으셨습니다. 그의 제자들을 향한 마지막 당부, 마지막 교훈이 무엇이었습니까?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이것은 오늘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사는 저와 여러분이 귀담아 들어야할 말씀이 아닌가요? 이제 우리도 그 일을 위해 주님의 마음을 더 깊이 알기 위해 우리 믿음의 형제들이 새벽을 열어야합니다.

누가복음 21:38에는 아주 감동적인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든 백성이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아가더라""early each morning"이란 말은 "날마다 아침 일찍이"라는 말 아닙니까? 예수님은 날마다 이른 새벽에 성전에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목마른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습관을 알고 이른 새벽에 성전으로 간 것입니다. 그들은 거기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또 교회는 사람을 세우려고 합니다. 장로님과 권사님 그리고 안수 집사님을 세우려합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늘 생각하는 것이 정말 사람을 잘 세워야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를 세우실 때 한밤을 철야하시고 세우셨습니다. 내년이면 우리 교회가 40주년을 맞습니다. 40은 새로운 출발입니다. 이 시대의 끌려 다니느냐 아니면, 변화를 주도하는가, 참 중요한 자리에 있습니다.

고든 맥도날드가 쓴 “내면 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이라는 책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삶의 형태를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었습니다. 한 유형을 가르쳐 그는 “충동에 이끌리는 삶”(driven life)이라고 했고, 또 다른 유형을 그는 “소명에 이끌리는 삶”(called life)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오늘 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냥 하루 하루를 충동적으로 본능적으로 그리고 감정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지요? 그러다가 일을 그르치고 상처받고 상처 주고 인생을 상처뿐인 전쟁터로 만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명에 이끌리는 삶은 다른 차원의 삶입니다. 그는 무엇을 먼저 해야 할 것인가를 알고 있습니다. 그의 인생에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비전과 하나님 나라의 핵심가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는 여론을 경청하지만 여론에 의해 흔들리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의 생각보다는 하나님의 뜻이 더 중요한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하나님의 비전을 확인한 후 자기가 마땅히 가야 할 길을 묵묵히 걷는 것입니다.

이런 삶이 사모되지 않으십니까? 이런 삶이 갈망되지 않으십니까? 참으로 기도하시면 그렇게 사실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기도의 갈망을 현실화한 당당한 성도의 삶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도를 위해 투자하는 것은 결코 낭비일수가 없습니다. 어떤 분은 기도를 그렇게 비유하더라고요. "기도와 헬리콥터가 같다"라고. 헬리콥터 동체는 얼마나 무겁습니까? 그러나 헬리콥터 위에 긴 이 날개, 로트를 달아 가지고 회전하면서 이 쇳덩어리는 하늘을 날아 올라가는 거예요.

우리의 인생이 피곤하고 힘들고 죄의 짐을 짊어지고 우리의 삶이 한없이 무겁고 곤궁하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하면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씀으로 우리를 인생을 들어올리게 하십니다. 기도는 우리를 들어올리는 시간이에요. 기도를 통하여 신령한 삶으로, 거룩한 삶으로 우리를 들어올려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새벽기도 나와보십시오. 여러분의 인생이 들어올려지고, 건강이 들어올려지고, 가정불화에서 벗어나 위로 올라가는 가정이 됨을 느끼게 됩니다. 경험합니다. 들어올려 주십니다. 하나님이 역사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죄악에서 들어올려 주시고 모든 걱정 근심 죄악에서 우리를 들어올리는 시간이 새벽시간이요 기도의 시간입니다.

여러분, 기도는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습니다. 우리 힘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장벽이 있다고 할지라도 기도하는 사람 앞에서는 그 장벽이 무너집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한 곳에 모여 합심해서 기도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사도들이 성령을 받은 것은 한 곳에 모여 합심해서 기도하던 때였습니다. 하나님은 개인에게 말씀하시기 보다 교회에게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새벽에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한 곳에 모여 기도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리고 새벽은 응답의 현장입니다. 난공불락으로 여겨졌던 여리고가 새벽에 무너졌습니다. 홍해 역시 새벽에 갈라졌습니다. 절망과 한숨과 탄식으로 버무려졌던 인생에게 다가오신 주님은 새벽에 부활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게도 기도의 필요가 있었다면, 연약한 인생으로 살아가는 자와 여러분은 얼마나 더 기도할 필요가 있을까요? 기도의 목마름이 있으십니까? 그러면 이제 바쁘다는 핑계를 포기하십시오. 그리고 기도를 계획하십시오. 내일 새벽 미명-여러분의 기도로 하늘의 문을 여십시오. 그러면 내일부터 당장 이 땅에서는 새 역사가 시작될 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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