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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용서합시다 (마 18: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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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합시다 (마 18:21~35)


어느 영어 잡지에서 읽은 유머입니다. 유머는 유머이니 절대 따라하면 안 됩니다. 어느 부부가 심한 갈등으로 부부싸움이 잦았습니다. 이상한 것은 싸움이 시작되면 남편의 일방적 싸움이지 아내는 전혀 대꾸를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내는 더욱 침착해지고 조용해집니다. 마음을 가라앉힙니다(collected). 어느 날 남편은 아내의 자제력에 대해 감탄하며 아내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화를 낼 때마다 당신은 전혀 내게 대응하지 않는데 어떻게 당신의 분노를 자제하는가?” 

아내가 대답합니다. “나는 화장실 청소를 하면서 분노를 풉니다”(I work it off by cleaning the toilet). 남편이 다시 물었습니다. “화장실 청소가 어떻게 도움을 줍니까?” 아내가 태연히 대답합니다. “나는 늘 당신의 칫솔로 변기를 닦습니다.” 절대 따라하지 마세요.

오토싸이클 경찰이 작은 사고를 당해 며칠간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경찰관의 상처는 주로 발과 발목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상히 여기는 것은 그의 가슴에 큰 반창고를 붙여 놓은 것이었습니다. 환자복을 벗어보니 상상했던 것보다 더 크고 강력한 밴디지가 가슴에 붙어 있었습니다. 왜 여기에 이렇게 큰 밴디지를 붙였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의 가슴에는 털이 많아서 그것을 뗄 때는 엄청난 통증이 그를 괴롭혔습니다. 떼어보니 밴디지 위에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이 선물은 지난주에 당신이 교통위반 티켓을 준 간호사로부터 주어진 것임”(A gift… from the nurse you gave a ticket to last week).

어떤 사람이 개에게 물렸습니다. 후에 이 개가 광견병(rabies)에 걸려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광견병을 치료하는 약이 없었을 때입니다. 담당의사는 나쁜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당신을 편안하게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다 취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당신에게 거짓 소망을 줄 수는 없습니다. 당신에게 드릴 수 있는 최선의 조언은 가능하면 빨리 당신의 모든 일들을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죽어가는 이 환자는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그는 종이와 펜을 요청했습니다. 모진 마음을 먹고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한 시간 쯤 뒤에 담당의사가 와서 환자에게 말합니다. “내 충고를 받아주셔서 기쁩니다. 당신이 쓰신 유서를 제가 전달해 주겠습니다.” 그러자 환자가 퉁명스럽게 말합니다. “이것은 유서가 아닙니다. 내가 죽기 전에 물어뜯어야 할 사람들의 명단입니다.”

오늘 설교의 주제는 용서(forgiveness)입니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 나를 학대한 사람, 나를 애먹인 사람, 나를 착취한 사람 등, 나에게 해를 준 사람들을 몇 번이나 용서해야 되나? 이것이 시몬 베드로의 질문이었습니다. 일곱 번이면 충분합니까? 베드로의 심중에는 일곱 번 정도면 충분히 자애로운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왜냐면 유대교의 랍비들은 세 번까지 용서하면 된다고 가르쳐 왔기 때문입니다. 아모스 1:3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다메섹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철 타작기로 타작하듯 길르앗을 압박하였음이라』(암 1:3)

이는 “세 번까지는 용서하라. 그러나 네 번째는 안 된다”(Forgive three times, but not the fourth)는 랍비들의 가르침을 뒷받침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제시한 일곱 번은 랍비들의 가르침을 두 배로 늘린 것에 또 하나를 더한 것이니 이만하면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그것도 충분치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 18:22)

이것을 어떤 문자주의자는 7X70=490이라는 산술개념으로 490번까지 용서하라는 말씀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용서에는 제한이 없다”(Forgiveness is limitless)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용서는 기독교 신앙의 심장이다”(Forgiveness is at the heart of Christian Faith)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원한을 품고 있으면 안 됩니다. 분노를 짊어지고 다녀서도 안 됩니다. 괴로움을 품고 있어도 안 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것의 중심에 용서가 있어야 합니다(It is at the center of everything we believe about Christ). 실천하기가 힘들고 어렵지만 이것은 매우 중요한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발견해야 합니다. 

첫째로 용서를 거절하는 것은 곧 신앙의 죽음을 의미합니다(Refusing to forgive can be deadly). 이것이 신앙의 입문에서 맨 먼저 알아야 할 진리입니다. 용서하는 것을 거부하고서는 대신할만한 것이 없습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분노를 품고 사는 것은 마치 독약을 먹는 것과 같으며 다른 사람이 죽는 것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우리 안에 증오를 끓어오르게 하는 것은 우리의 감정과 몸을 괴롭히면서 쥐를 잡기 위해 집을 태우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Someone else has said that letting hatred simmer within us, eating at our emotions and our body, is like burning down our house to get rid of rats). 루이스(C. S. Lewis)는 어떤 사람을 30년 후, 그 사람이 죽은 다음에야 마침내 용서해준 적이 있다고 회고했습니다. 30년 동안 부정적 감정을 마음에 지니고 다녔다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동안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자신을 그렇게 괴롭힐 이유가 있습니까? 결국 자신만 손해나는 일입니다.

어떤 판사의 고뇌에 찬 판결이 있습니다. 중동지역의 어느 법정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남편을 죽인 원수를 꼭 사형에 처해 달라는 아내의 제소를 받은 판사는 난처한 재판을 해야 했습니다. 이 부부가 어느 나무 아래에서 데이트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나무 위에 있던 한 남자가 남편 위로 떨어지는 바람에 남편이 현장에서 즉사했습니다. 그 남자가 남편을 죽인 원수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고의적 살인은 아니었습니다. 나무 위에 있다가 실수로 떨어져서 남편을 죽게 한 것 뿐입니다.

 “이 남자는 당신의 원수가 아닙니다. 의도적인 살인이 아니잖습니까?” 판사가 아내를 설득하려해도 막무가내로 사형을 고집합니다. 복수를 해야 된다는 강박관념이 그녀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법이 정한 대로 피의 보복을 원했습니다. 판사는 그 과부의 미래를 풍족하게 해 줄 보상비를 지급토록 하겠다고 했지만 과부는 듣지 않았습니다. 판사는 결국 이렇게 판결했답니다. 

“배상을 청구하는 것은 당신의 권리입니다. 이 죄인의 생명을 요구하는 것도 당신의 권리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남자를 죽게 하는 방법을 선고하는 것은 나의 권한입니다.” 

그러면서 마지막 판결문을 낭독했습니다. 
“당신은 즉시 이 남자를 데리고 가서 종려나무의 뿌리에 묶어 놓으시오. 그리고 당신은 나무에 올라가서 이 남자 위로 뛰어 내리시오. 당신의 남편이 죽은 대로 당신은 이 남자를 죽이면 됩니다.” 

판사의 판결은 잠시 재판장 안을 조용하게 만들었습니다. 판사는 그 과부에게 좋은 선택을 권면했습니다. “당신은 아마도 돈을 택하는 것이 더 좋을 듯합니다.” 결국 그 과부는 돈을 보상받고 말았다는 이야기입니다

http://www.dbcity.com/churches/res/01-08-06.htm). 이 판사는 솔로몬의 지혜를 갖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용서를 거부하면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을 괴롭게 하고 상처만 입게 합니다. 용서할 때 나를 분노의 쇠사슬에서 해방시킵니다.

1950년 1월에 보스톤에서 300만불을 강탈한 강도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때의 300만불은 지금의 수천억불에 해당하는 큰돈입니다. 공소시효 11일을 남겨두고 강도들 중 하나가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자수하고 말았습니다. 11일만 지나면 처벌을 받지 않을 수 있는데 11일을 참지 못하고 자수했습니다. 얼마나 괴로웠으면 11일을 견디지 못했을까요?

필립 얀시(Philip Yancey)는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나를 과거에 가두어 넣고 모든 변화의 가능성을 잠가 놓는 것”이라고 했습니다(Not to forgive imprisons me in the past and locks out all potential for change).

어떤 유대교 랍비가 미국으로 이민 오면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나는 아메리카로 오기 전에, 아돌프 히틀러를 용서해야만 했습니다. 나는 히틀러를 내안에 담아 나의 새로운 나라로 그를 가져오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용서는 우리 자신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최상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가끔 용서는 마치 하나님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어떤 일이라고 착각을 합니다. 용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니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기도 하지만, 용서는 결국 나 자신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용서는 나를 위한 것입니다. 

둘째로 용서는 선택입니다(Forgiveness is a Choice). 분노, 증오, 슬픔, 미움, 복수심 등을 마음에 품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용서를 선택해야 합니다. 용서를 택하는 사람은 곧 평안과 기쁨을 얻게 됩니다. 용서를 선택하지 않고 미움과 분노, 증오와 복수심을 선택하고 살면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것과 같습니다. 

다윗 아우그스버거(David Augsberger)라는 사람이 “분노”(Anger)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분노는 선택이다”(Anger is a Choice)라고 주장했습니다. 분노를 택하면 독을 마시는 행위입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성질을 통제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매일같이 당신은 당신의 성질을 조절할 수 있습니다. 통제할 수 있습니다. 선택만하면 됩니다. 

2차 대전의 영웅 죠지 패턴(George Patton)장군은 자신의 성질을 통제하지 못한 젊은 장교였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패턴의 상관인 아이젠하워 장군(Dwight D. Einsenhower)은 패턴이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단지 패턴은 그것을 실천하는 것을 거부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아이젠하워는 패턴이 입원해있는 장병의 뺨을 때린 것을 사과하도록 하고 그의 장군 진급을 연기했습니다. 그 이후 패턴이 자기감정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보고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패턴은 자신을 통제하는 것을 택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용서하기를 택한다면 매일같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용서는 선택이기 때문에 용서를 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해결하지 못하는 분노는 나 자신만을 상처 줄 뿐입니다. 오히려 나에게 해를 끼친 사람이 한 짓보다 용서하지 못하는 내가 나를 더 상처받게 만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당신에게 망치질하는 분노를 왜 안고 있습니까? 버려야 합니다. 집어 던져야 합니다. 성서는 말합니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골 3:13)

셋째로 우리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의 모델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비유가 그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만 달란트 빚진 종을 임금은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에게 갚을 능력이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큰 은혜를 입은 종은 다른 사람들에게 용서의 모델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만달란트를 탕감 받은 그 종은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탕감해 주지 않고 옥에 가두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은 화가 나서 그 종을 데려오게 하였습니다.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마 18:32-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이 말씀은 지금 꼭 나를 향해 꾸짖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려옵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치실 때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빚을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라 명하셨습니다.

1990년대 말 피터슨(Pete Peterson)은 베트남 주재 미국대사로 임명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래 전에 피터슨은 베트남 전에 참전했다가 포로가 되어 6년 동안 “공포의 하노이 힐튼 포로수용소”(the dreaded Hanoi Hilton prison camp)라고 불려지는 곳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는 말할 수 없는 고문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굶주림, 야만적인 학대, 상상을 뛰어넘는 고문들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피터슨의 되돌릴 수없는 6년의 삶을 몽땅 착취하였습니다. 그는 거기서 다시는 되찾을 수 없는 인생을 빼앗겼습니다. 그가 베트남 대사로 부임하자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어떻게 이 땅에 돌아올 수 있었느냐고.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나의 분노를 1972년 포로수용소를 나올 때 수용소 문에 두고 떠났습니다. 나는 내 뒤에 그 모든 것들을 내려놓으며 내 인생의 앞을 향해 나가기로 결심했습니다.”(Dr. Les Parrott, Shoulda Coulda Woulda(Grand Repids, MI: Zondervan, 2003))

오늘 이 성전 안에 있는 분들 중에서 오늘의 메시지를 들어야 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용서하십시오.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을 위해서 입니다(You need to forgive… not for their sake, but for you own).

당신을 위해서, 당신의 미래를 위해서 용서합시다. 결코 후회하지 않는 선택을 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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