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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울증을 넘어서는 성숙한 신앙 (창 50: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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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을 넘어서는 성숙한 신앙 (창 50:15~21)


현대인을 위협하는 가장 무서운 질병중에 하나는 우울증입니다. 그런데 독립된 생활을 강조하는  미국 사람들의 경우에는 15%가 우울을 질병으로 갖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대가족제도에  의해서 어릴 때부터 인간관계를 맺어온 우리 한국 사람들은 한 6% 정도가 우울을 질병으로 앓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21세기에 들어서 우울을 질병으로 앓는  사람들의 숫자가 20% 이상으로 급증하고  있습니다. 모두 외롭습니다. 자기 내면속에 갇혀서 지내고  있습니다. 누구하고도 진정한 대화할 상대가 없습니다. 
   
우울증은 본인의 기질 때문에 생깁니다. 그런데  이 우울은 대상관계에  의해서 결정되는 요인이 많습니다. 다시말해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큰 상처를 입을때 발병할 확률이 높습니다. 그 중에 첫 번째 대상 관계는 부모라고 합니다. 그래서 부모와 어떤 관계를 가졌느냐에 의해 결정된다고 합니다. 부모와의 관계가 순기능이냐, 역기능이냐에 영향이 큽니다.  부모에게 상처를 많이 받고 자란 사람은 그것이 고통으로 깊이 뿌리 박히게 됩니다. 이런 역기능의 가정에서 우울증을 앓는 환자가 많이 나온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역기능의 가정에서 자라났다고 모두 우울증을 앓거나 불행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요셉입니다. 요셉은  역기능 가정 중에 역기능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가 네 명이었습니다. 게다가  친어머니는 어릴 때 세상을  떠났습니다.  동생 베냐민을 낳다가 세상을 떠납니다.  

또한  아버지의 극단적인 과보호가 있습니다.  동생이나 형에게는 안입히는 멋진  채색 옷을 그에게는 언제나 입혔습니다.  그리고 어린 나이에 친구들과 나가서 뛰놀아야 되는데 아버지가 한시도 놓치 않고 옆에 놔두었습니다. 이것도 얼마나  지겨운 일이었겠습니까? 거기다가 아버지의 사랑이 자기에게 쏟아지니까 그것을  시샘한 형제들로부터 왕따 당하는 수모를 어릴  때부터 겪었습니다.  또한 사춘기 무렵 누나 디나가 강간을 당하고 형들은 그에 대한 보복으로 무자비한 살인을 저지릅니다. 이 또한 적지 않은 충격으로 요셉의 마음에 자리잡았을 것입니다. 
  
엄마 없는 하늘 아래서 자라며 배다른 형들에게 치여 지내는 요셉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형들과 다투다 얻어 맞기라도 하면 누구에게 달려가 하소연 했을까요? 아무도 요셉을 감싸주고 눈물을 닦아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무작정 투정을 받아주고 보호해줄 엄마라는 보호막이 없이 요셉은 외롭게 어린 시절을 보내고 힘든 사춘기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요셉이 열 일곱 살이 되었을 때 형들은 요셉을 죽이려고 하다가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요셉이 그 때 어떤 말로 울부짖었는지 성경에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후일 곡물을 사러 애굽에 갔다가 곤경에 처한 형들은 저희끼리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창42:21)'  요셉은 구덩이에서 애걸복걸했습니다. "형님들, 살려 주세요. 제발 저를 죽이지 마세요."  "형님들, 낯선 사람에게 나를 팔지 마세요. 저는 가족과 같이 살고 싶어요."  그러나 매정한 형들은 애걸하는 요셉의 부르짖는 소리를 외면하고 요셉을 팔아버리고 은스무냥을 나누어 가졌습니다. 그렇게 요셉은 노예가 되었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기구하고 부조리한 인생이 있을까요. 어머니가 일찍 죽고, 배다른 형들의 시기와 미움을 한 몸에 받으면서 이리 저리 치이며 힘들게 가정생활을 하며 자랐는데 이제는 형들에 의해 죽을 뻔하고, 죽음의 위기를 겨우 모면하는가 싶더니 어린 나이에 노예로 팔려가며 살려 달라고 애원하였건만 철저하게 거절당하고... 이보다 마음에 더 큰 상처를 받을 수 있을까요?   그런데 하나님은 도대체 왜 묵묵부답으로 아무것도 모르는양 가만히 계신 것일까요? 
  
그런데 이처럼 역기능적인 요인이 많은 요셉이었는데 그의 생애를  보면 놀랍습니다.  그 삶의 균형이 무너지지 않습니다. 어떻게 그 역기능을 뚫고,  아픔을 당하면 당할수록, 역기능적인 사건이 자기의 생애 속에 두드러지면 두드러질수록 그 생애의 아름다운 모습이 드러날 수 있었을까요?  고통이 더 그 인생을 빛나게 만듭니다. 역기능적인 사건들이 그의 삶에 더 복되게 나타납니다.  어떻게 그런 삶을 살 수가  있습니까?  보통 사람같으면 이렇게 하나님을 원망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안계신다. 왜냐하면 내가 아버지와 함께 하나님을 믿고 잘 섬겼는데 어떻게 이런 고난과 억울한 일이 연속된다는 말인가? 게다가 하나님 앞에서 날마다 우리 아버지와 함께 예배드리는 형놈들이 나를  팔아먹어서 내가 노예가 되었다.' 얼마나 마음 속에 깊은 고통과 좌절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요셉의 신앙은 그처럼 엄청난 고난속에서도 요동함이 없습니다. 자기 형들이 그처럼 악한 행동을 하고 큰 상처를 안겨 주었건만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그 모든 일들을  이겨냅니다. 그것은 애굽으로 팔려가서 요셉이 어떻게 받은 상처와 고난을 극복하는가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 팔려갔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그 보디발의 집에서 10여년간 노예생활을 하며 정직하고 충성했던 모습 때문에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습니다. 어디가도  정직하고 겸손하면 반드시 사람 눈에 띄는 법입니다.
   
요셉은 보디발에게 인정받고 그의 집에서 그는 온 가정 가사를 다스릴 수 있는 그런  권세있는 책임을 부여받았습니다. 그 때 그에게 유혹이  찾아옵니다. 그것은 그 가정에  가장 존귀한 여인인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는 것입니다.  젊은 날의 정욕 보다 더 어려운 시험은 없을 것입니다.  요셉은 애굽에서도 혼자였습니다. 가족도 없이 홀로 객지에서 오랜 세월을 지내며 얼마나 외로왔겠습니까? 그러나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 때 요셉은 어떻게 자기 생애를 살았는가 하는 신앙고백을  합니다. "내가 어찌 이 악을 행하여 하나님의 목전에서 득죄하리요?" 요셉은 자기를 사랑하는 아버지의 눈보다, 자기를 미워하는 형제들의 질시하는 눈 보다, 하나님의 사랑의 눈동자를 더 크게 보고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 분과 시선을 마주치며 살았습니다. 자기 형들이 어떤 믿음을 가져도, 자기 형들이 어떤 행동을 해도 그는  그 형들의 시선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밀려오는 유혹 앞에서 하나님의 목전에 있음을 알았습니다. 늘 마주쳤던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시험을 이길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울함을 우리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눈을 바라보십시오. 여러분을 비난하는 사람들의 험악한 눈을 바라보면 우울증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여러분을 좋아하는 사람의 눈만 바라보아도 우울증에 걸릴 수 있습니다. 저 눈들이 어느날 갑자기 돌변하여 나를 외면하지 않을까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을 바라보며 살면 외롭지 않습니다. 두렵지 않습니다. 삐뚫어지지 않습니다. 어려운 시험과 유혹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사랑스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십니다. 고통스럽고 힘들때 격려와 위로가 가득 담긴 눈으로 나를 바라보십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이겨냈습니다. 그랬으면 상을 받아야 됩니다. 그처럼 어려운 시험을 이겼으니까 칭찬을 들어야 됩니다. 그런데 그에게 돌아온 것은 상도 칭찬도 아니라 모함입니다. 억울함입니다. 누명을  쓴 채 그는 감옥으로 이유도 없이 잡혀갔습니다. 사람을 가장 크게 분노케 만드는 것은 공평하지 않을 때입니다.
   
여러분, 억울하다고 요셉만큼 억울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요셉의 삶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못믿겠습니다. 내가 하나님 바라보면서 진실했지 않아요? 정직했지 않아요?  주님을 신뢰했는데 결과가 이것입니까?' 원망해야 됩니다.  그렇지만 그는 조금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요셉은 그 깊은 고통 속에서 조용히 평상심을 유지한 채 감옥에서  삽니다. 감옥의 전옥이 자기들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산 이 젊은 청년에게 놀랍니다.
   
여러분, 그처럼 하나님을 신뢰하던  요셉에게 하나님께서 행하신 손길이  있습니다. 창세기 39장 보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셨다"(창39:21)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요셉의 생애  속에 그 환경을 바꾸어주고 새로운 환경을 갖다주는 것이 아니라 저에게 인자를 더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환경을  변화시켜주시기 보다는 부족한 것을 채워주시기 보다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 속에 하나님의 인자를 더해주십니다.
   
이것은 고통을 당한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첫 번째  작업입니다. 빌립보서 4장 6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간절히 기도했을 때 그 환경이 일순간에 요술처럼 사라졌으면 좋겠습니다. 그 고통이 나와 상관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까지  내가 당했던 그 환경에서 그렇지 않은 환경으로 일순간에 바뀌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을 향해 성경은 약속하기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내 마음과 생각을 지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에 관심이 있습니다. 우리의  환경보다, 나의 소유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나 자신입니다.  하나님의 최고, 최대의 관심은 여러분 자신입니다. 환경이 아닙니다. 소유가 아닙니다. 그래서 고통당하는 요셉에게 인자를 더해주십니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 하나님의  깊은 위로로 채우십니다.  
  
그렇게 감옥에서 지내던 어느 날 바로의 술 맡은 관원과 떡 맡은 관원이 감옥에서 같이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관원들이 꿈을 꿨습니다.  술 맡은 관원이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을 요셉이 해몽해주었습니다.  "당신은 사흘 후에 나가서 자유를 얻을 것이다." 그것을 옆에 보고 있던 떡 맡은 관원이  자기 꿈을 또 이야기했습니다. 그랬더니 "당신은 사흘안에 죽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대로 되었습니다. 그는 술 맡은 관원이 감옥을 나갈 때 신신당부합니다. "당신이 나가거든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그러니까 그가 장담합니다. "나가기만  하면 내 은인인 당신을 그냥 둘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나가자마자 이 술맡은 관원은 요셉을 기억치 않습니다.  

2년 세월이 흘렀습니다. 어느 날 술 맡은 관원에게 바로가 "내가 어제 꿈을 꾸었는데 해석할 사람을 데려오라 합니다." 그러니까 그 관원이 바로에게 "꿈해몽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저 감옥에 최고의 전문가가 있습니다.  요셉이라는 친구인데 정말 정확하게 맞춥니다."하며 자신이 겪은 일을 말합니다. 그래서 요셉이 바로 앞에 불려나가 꿈을 해몽해줍니다. 그리고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얼마 전에 발견된  고문서에 의하면 이집트에서는 나이가 30이 되어야 고급 관리로 등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두 관원을 꿈을 해몽해줄 때가 요셉의 나이 28세였습니다. 자, 28세에 구명이 되어서 나왔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는 고향으로 가서 자기 아버지 야곱의 목을 껴안고 울고 끝났더라.' 하고 요셉의 이야기가 끝났을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애굽의 법이 30세에 총리로 세우는 그 시간까지 하나님께서 2년동안 요셉을 감옥에 놔두십니다.
  
중요한 것은 요셉의 꿈이 정확하게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만인이 요셉의 앞에 와서 절을 하는 최고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요셉을 깔보고 괴롭히며 죽이려고 하다가 노예로 팔아버린 형들도 요셉앞에 와서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하고 쩔쩔맵니다. 그런데 요셉은 한번도 꿈이 성취되었다고 아무에게도 떠벌이지 않습니다. 형들에게도 그 꿈의 성취에 대하여 한번도 드러내지 않습니다. 

성경은 요셉이 어렵고 힘든 시절을 거쳐 부자가 되고 큰 권력을 잡아 떵떵거리고 잘 살다가 죽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자신을 미워하고 팔아넘긴 원수를 용서하고 도리어 그들의 안전을 책임지며 그들의 모든 가족들의 먹고 살 것까지 공급해주며 그들을 위로하며 그들에게 봉사하는 삶의 자리에까지 요셉이 성숙한 신앙에 이르렀다는 사실입니다. 
  
요셉은 모진 고통을 맛보며 험난한 세월을 숱하게 보냅니다. 그 고난은 요셉을 크게 성숙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손길이었습니다. 고난을 통과하며 꿋꿋하게 신앙을 지키고 나갈 때 원한이나 우울증이 그를 침몰시키지 못했습니다. 시험을 통과하며 하나님만 바라보며 전진할 때 죄악이 그를 침몰시키지 못했습니다. 존귀에 처하여 온갖 아첨과 화려함이 그를 흔들었을 때도 교만이 그를 넘어뜨리지 못했습니다. 요셉은 정상에서 하나님이 그에게 맡겨주신 지위와 부요와 능력을 가지고 만인을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원수를 먹여살리고 위로하며 그를 통해 하나님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형들은 요셉의 힘이 무서워서 어쩔 수 없이 머리를 숙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요셉을 존경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고통의 시절을 지냅니다. 아픔의 시절을 지냅니다. 이것의 의미를  잘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덧없이 지나가는 고통의 세월 속에서도  나를 잊지 않습니다. 나의 생애를 향해서 놀라운 계획을 가지신 하나님입니다. 우리도  요셉처럼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 이제까지 내 생애 속에 늘 함께 하시는, 나를 나보다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끝까지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신뢰하며 한 걸음, 한 걸음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 나아가십시다. 고난과 시험을 잘 극복하고 스릴을 즐기며 통과하십시다. 원한이나 우울, 죄악이나 교만이 우리의 발목에 매달려도 믿음으로 떨쳐버리고 전진하여 원수도 사랑하는 성숙한 신앙의 정상에 설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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