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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원한 친구 예수님 (마 28:20, 히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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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친구 예수님 (마 28:20, 히 13:5~6)


故 함 석헌 선생이 남기신 글 가운데 “그 한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명시가 있습니다. “그 사람을 가졌는가?/만리 길 나서는 길/처자를 내 맡기며 마음놓고 갈만한 사람/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온 세상 다 너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너뿐이야 하고 믿어주는/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탔던 배가 가라앉을 때 구명대를 서로 사양하며/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때/너 하나 있으니 하며 빙그레 웃고 눈 감을/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온 세상의 ‘예’보다도/‘아니오’라고 가만히 머리를 흔들며 진실로 충언해 주는/그 한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이런 사람을 무엇이라고 묘사하면 좋겠습니까? 저는 한 마디로 이런 사람을 바로 ‘진실한 친구’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소심하고 소극적인 성격으로 인해 친구를 별로 사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능동적으로 먼저 나서서 친구를 사귀지 못했던 저는 늘 가장 친한 친구가 누구냐?는 물음 앞에 대답을 못하는 콤플렉스를 갖고 청소년 시절을 지냈습니다. 그러던 제가 20대초 예수를 믿고 성경을 읽기 시작하면서 제일 큰 충격으로 다가온 사실은 예수께서 그를 따르는 자들을 친구라고 부르고 계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요한15:13-14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하면 나의 친구라” 제가 처음 이 말씀을 대하면서 예수님이 내 친구가 되셨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감동으로 다가왔던 지요. 오늘 우리는 친구를 갖기 어렵고 친구조차 믿기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인생들에게 예수님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친구가 되시는 분일까요? 

1. 그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심을 약속하시는 분이십니다. 

마태복음의 마지막 부분의 말씀을 우리는 흔히 지상 명령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주께서는 지상 마지막 명령으로 제자들에게 모든 족속, 모든 민족에게로 나아가 사람들을 주를 따르는 사람들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연히 제자들은 우리처럼 연약한 인간들이 그런 일을 어떻게 이룰 수 있느냐고 묻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때 부활하신 주께서 주신 말씀이 마태28:20입니다. 

“내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러나 아직도 질문은 남습니다. 이미 죽음으로 세상을 떠나가신 주께서 구체적으로 이 세상에 남아 사는 우리와 어떻게 그분이 어떻게 현실적으로 함께 하실 수 있으시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께서는 이미 그 대답을 요한14:16-17에서 주신바가 있었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그렇습니다. 해답은 보혜사 성령이십니다. 보혜사라는 말의 원어는 ‘parakletos’(para/곁에kaleo/부르다)로 “곁에 부름을 받아 함께 계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성령으로 주께서는 지금도 변함없이 주의 제자들과 함께 하십니다. 요14:16의 약속의 말씀을 다시 상기해 보십시오. 그는 얼마동안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나요? 맞습니다. ‘영원토록’입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의 영원한 친구이신 것입니다. 

남가주 대학에서 사랑학을 가르치던 레오 버스카글리아 교수의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할아버지 한분이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계셔서 주변 모든 사람들과의 만남 자체를 거부하고 계셨답니다. 상담자의 노력도 실효를 거두지 못했고 가족들의 노력도 별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아파트에 사는 어린 소년이 할아버지를 만나고 와서는 할아버지의 병세는 급격하게 호전되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어린 소년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너, 도대체 할아버지 만나서 무슨 일을 했니?” 소년의 대답은 뜻 밖에 “아무 일도 안했어요. 할아버지를 붙들고 울었어요”하더랍니다. 

이웃들은 다시 물었습니다. “너, 어떻게 할아버지 붙들고 울 생각을 했니” 소년은 다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와 저는 친구이거든요” 

보혜사 성령이 하시는 일이 바로 그런 일인 것을 아십니까? 보혜사이신 성령 곧 예수님의 영은 우리와 단순히 공간적으로만 ‘함께’ 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 ‘속에’ 거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는 우리의 속사람 안에 역동적으로 내주하시며 우리의 깊은 내면을 어루만지시면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진실로 우리의 영원한 친구이신 것입니다. 


2. 그는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분이십니다. 

오늘의 또 하나의 본문인 히브리서 13장은 주경학자들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박해 받는 상황에서 주어진 권면이라고 추정됩니다. 믿음 때문에 박해 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아마도 박해 그 자체의 상황보다도 주님이 당신을 위하여 고난을 감수하고 있는 우리를 어떻게 이렇게 그냥 버려두실 수가 있느냐의 물음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마침내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히13:5의 말씀입니다.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주께서 당신의 제자들과 친구로서 세상 끝까지 함께 하시리라는 약속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제자들이 현실에서 경험하는 소위 세상 친구들의 실상은 믿음들이 너무나 쉽게 배신되는 모습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히브리서의 약속을 통해서 그의 우정은 결코 세상 친구들의 우정과 다른 것을 확인해 주실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주께서 약속하신 우정의 차별성을 ‘결코’라는 단어로 확인해 주십니다. 옛날 개역 한글 번역에서는 이 대목을 ‘과연’이라는 단어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말입니다. 영어로는 ‘never’입니다.(NIV-Never will I leave you, never will I forsake you) 

사실 세상의 우정도 의리 있는 우정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세계 제1차 대전이 남긴 아름다운 우정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의 어떤 마을에서 두 친구가 같은 날에 징집되어 같은 전선에 배속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루는 수색 정찰을 나갔던 친구가 적진에서 고립되어 부상 당한채 피를 흘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친구가 참호에서 빠져나와 달려 나가려 하자 분대장이 그를 가로막습니다. “가면 안되, 너 까지 죽어. 이미 늦었어” 그러나 잠시후 그는 분대장이 한눈을 파는 사이 친구에게로 달려 나가 피 흘리는 그를 들쳐 업고 다시 아군의 참호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친구는 숨을 이미 거둔 상태였다고 합니다. 분대장은 화를 내며 “그것보라우. 내가 늦었다고 했잖나.” 그때 그는 분대장을 향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분대장님,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가 친구 곁에 다가 갔을 때에는 아직 친구의 목숨이 붙어 있었습니다. 친구가 저에게 뭐라고 한줄 아십니까?” “뭐라고 했나?” 묻는 그에게 이 병사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예, 친구는 이렇게 저에게 말했습니다. 친구야, 나는 네가 나한테 올 줄 알았어” 그것이 바로 친구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바로 그런 친구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는 영원한 친구라고 말입니다. 


3. 그는 언제나 우리를 도우시겠다고 약속하시는 분이십니다. 

본문 히13:6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요” 본래 이 말씀은 시118:6-8에서 인용된 말씀이었습니다. 시편에서 읽어 볼까요.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 할까. (7)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중에 계시니(8)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시편기자는 그의 인생의 밤, 아마도 배신과 핍박, 그리고 상실을 경험하며 하나님께 나아와 위로를 얻고 이 말씀을 고백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의 시간을 지나며 우리가 기대하는 도움이 당장에 임하지 않을 때 우리는 흔히 버림받았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그러나 시편기자는 마침내 도우시는 그분의 임재를 경험하면서 그분은 그 때에도 내 편에 계셨다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때 반드시 우리가 기억하실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도움을 기대하는 방식으로 언제나 우리를 도우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기도하고 있다면 그 분은 그분의 방식으로 언제나 우리를 도우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히13:8의 고백은 이 모든 고난을 통과하며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이 교리적으로가 아니라, 경험적으로 고백하게 된 고백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고 말입니다. 동일한 고백을 찬송으로 남긴 한 찬송가 작시자의 이야기를 들려 드리고 싶습니다. 

1819년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나 명문 트리니티 대학을 졸업한 조셉 스크리븐(Joseph Scriven)이라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아름답고 사랑스런 아일랜드 처녀와 약혼하고 행복한 앞날을 꿈꾸고 있었는데 1840년 결혼 전야에 신부가 익사하는 사고가 일어난 것입니다. 1845년 그의 나이 25세에 과거를 잊고 새로운 삶을 찾아 캐나나로 떠납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상처를 디디고 새 삶에 적응해 갔지만 캐나다에서 만난 두 번째 약혼자가 다시 결혼을 앞두고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보내는 비극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과의 깊은 사랑에 빠져있던 그는 이 모든 슬픔을 주께 맡기고 기도하면서 자기 인생을 독신으로 살라는 주의 뜻을 발견하고 그는 이웃 사랑과 이웃 섬김에 모든 것을 걸고 살아가게 됩니다. 

마침내 캐나다 온타리오 포트 호프(Port Hope)에서는 그를 산상수훈대로 사는 사람, 선한 사마리아인, 성자라는 별명으로 부르게 됩니다. 1857년 아일랜드에 그가 남겨 두고 온 어머니가 중병을 앓고 있다는 소식을 받은 그는 당시의 정황상 달려 갈수도 없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어머니를 위해 기도하며 자신의 아픔 속에 다가와 그를 위로 하시던 친구 예수님이 어머니의 친구가 되어 주시기를 기도하며 붓을 들어 시 한편을 써내려 갑니다. 바로 이 시가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을 받은 찬송시가 된 것입니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마을 사람들은 고속도로변에 그의 시비를 세워 그를 기념하고자 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온타리오 고속도로 변에 그를 기념하는 시비에서 “위대한 박애주의자, 신실한 그리스도인, 1857년 포트 호프에서 쓴 위대한 시의 작시자 조셉 스크리븐 펭겔리 묘에 잠들다”라는 소개와 함께 바로 그 아래 그가 쓴 아름다운 찬송시를 읽을 수 있습니다. 

“죄짐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걱정근심 무거운 짐 우리 주께 맡기세/주께 고함 없는 고로 복을 얻지 못하네/사람들이 어찌하여 아뢸 줄을 모를까/시험 걱정 모든 괴롬 없는 사람 누군가/부질없이 낙심 말고 기도드려 아뢰세/이런 진실하신 친구 찾아볼 수 있을까/우리 약함 아시오니 어찌 아니 아뢸까”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스크리븐이 만난 진실하신 친구 예수님을 아십니까? 아름답고 젊은 청년 스크리븐으로 하여금 사랑하는 여인을 두 번씩이나 잃은 슬픔을 떨치고 일어나 포트 호프의 성자가 되게 한 그 예수님, 인생의 비극속에 가장 아름다운 찬송 시의 작사가가 되게 한 그 예수님을 말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인생의 모든 고통을 설명하지 못할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모든 성도 곁에 반드시 다가와 만나주시는 그 분의 또 하나의 이름은 친구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지난 사흘간 이 땅에 사는 우리 모두를 함께 고통스럽게 한 스타 최 진실 씨의 죽음의 소식은 그녀가 술이 아닌 기도로 이 친구 되신 예수님 앞에 나아와 인생의 짐을 내려놓는 법을 왜 배우지 못했을까 하는 사실 때문에 우리 모두를 더 안타깝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교회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그분을 만나며 살아가는 삶을 배우는 일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기도할 때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 모두는 이런 우리의 구주요 영원한 친구이신 예수님을 참으로 알지 못하는 이웃들에게 그 분을 전해야 할 때입니다. 당신은 아십니까? 친구 예수님을?  (이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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