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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찬식] 자신을 먼저 살핀 후에야 (고전 11: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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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먼저 살핀 후에야 (고전 11:17~34)


로마의 기독교 박해가 한창이던 트라얀 황제(AD 98-117) 시절에 비두니아의 총독이던 플리니가 황제에게 보낸 보고서의 내용을 보면 초기 기독교의 성만찬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대교와 이교도들의 극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계속하여 로마 제국 전역을 향해 퍼져가고 있을 때 비기독교들 눈에 보이는 기독교의 예배의식과 성도들 사이에 이루어지던 사랑의 교제는 불건전한 집단이 벌이는 비도덕적인 행위로 여겨졌습니다.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것이 곧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이라는 말을 들은 사람들은 기독교도들을 식인 습관을 가진 집단으로 오해하였습니다.  그리고 성도들 사이에 형제와 자매라 부르며 주 안에서 서로 사랑한다는 고백을 가리켜 동성애와 근친 상간을 하는 이상한 집단이라는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그리하여 비두니아 총독 플리니는 기독교인들의 예배의식과 생활에 대하여 조사를 하였습니다.

플리니가 조사한 결과 이런 소문은 잘못된 것이었음이 밝혀졌습니다.   기독교도들의 예배나 생활에서 소문처럼 괴악한 비도덕적인 행위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단정한 생활과 이웃에 대한 사랑 그리고 정직한 삶 등이 그들의 특징이었습니다.   다만 기독교인들이 주장하는 오직 하나님만 참 신이며 로마의 황제에게 예배하는 것은 우상숭배라고 가르치는 것이 로마의 정신과 대치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플리니는 기독교들이 주장하는 황제숭배 반대에 대한 부분만 엄히 다스리고 누구든지 하나님을 거부하고 황제에게 충성을 다 하겠다고 맹세하면 석방해주어야 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트라얀 황제에게 보낸 기록이 있습니다.

오늘날도 비기독교인 혹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일지라도 성만찬의 참 의미를 알지 못하면 성찬식을 가리켜 식인종들의 주술적인 파티나 이상 야릇한 이교도들의 종교의식 정도로 이해하고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성찬식을 행할 때마다 주께서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명하신 대로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으신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는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죽음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셔서 제자들을 방문하셨을 때 또 다시 그들과 식탁에서 음식을 나누며 성찬의 의미를 상기시키셨던 것처럼 성찬식은 그리스도의 죽음만 기억하고 슬픈 마음으로 예식에 참여하는 장례식이 아니라, 다시 살아나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을 주신 그 기쁨을 나누는 식탁입니다.   또 하나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이미 주님과 연합하여 하나가 된 것처럼 이 거룩한 음식을 먹고 마시는 사람들은 한 피 받아 한 몸을 이룬 한 형제와 자매로 서로 사랑하며 그 사랑을 확인하는 공동식사의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에 성만찬의 소중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이 떡과 잔을 먹고 마시는 그리스도인들은 주께서 가르치신 그 정신을 따르며 이 예식에 참여할 때 비로소 그리스도와 하나됨을 실천하게 됩니다.  반대로 이 정신을 따르지 않으면서 종교적인 습관으로 혹은 무지함으로 그리스도의 떡과 잔을 먹고 마심은 자신의 죄를 먹고 마심이라는 바울의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문제가 많은 고린도 교회가 성찬에 관하여 오해하고 있었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교회 안에 있던 편 가름 때문에 한 몸과 한 피를 먹고 마시는 교인들 사이에 이미 하나됨이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모일 때마다 성찬식을 하였지만 그것은 다만 습관을 따라 진행하는 의식이었을 뿐 진정한 사랑의 정신은 벌써 저만큼 멀어져 있었습니다.   왜 고린도 교회가 이런 어리석음에 빠지게 되었을까요?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 예루살렘의 교회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고린도 교회도 처음에는 주 안에서 형제와 자매의 사랑이 가득한 교회였을 것입니다.   신분과 빈부의 차별이 없이 한 자리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공동식사를 하며 부자와 가난한 자들이 가진 것을 서로 나누며 그들 가운데 핍절한 자가 없을 만큼 아름다운 공동체 생활을 누렸을 것입니다.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신앙을 고백하고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부자도 가난한 자도 있었고,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자와 자유인도 있으며, 노예의 신분으로 예수를 영접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복음 안에서는 남녀노소와 빈부와 인종의 차별이 없이 평등하다는 가르침이 계급주의 사회에서 억눌리고 소외된 약자들에게는 얼마나 매력적이고 파격적인 새 소식이었겠습니까?   세상 그 어느 종교의 가르침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이 넓디 넓은 사랑의 복음에 감동한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노래하며 예배를 드리고 공동식사를 나누며 교회는 날로 성장해 갔습니다.   

그러나 그 순수한 복음의 열정은 얼마 가지 못하여 식어지고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 인간의 냄새가 솔솔 풍기고 완전히 벗어버리지 못한 옛 사람의 모습들이 슬며시 머리를 들고 일어나 기어코 쓴 물을 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고약한 습성 중의 하나는 처음에는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서로의 허물을 감싸고 형제의 약점을 대신 짊어지던 그들 가운데 끼리끼리 모이는 파당이 생겼습니다.   부자는 부자들끼리, 가난한 자들은 가난한 자들끼리 노예를 부리는 주인계급들끼리 남의 집 하인과 종으로 일하는 사람들끼리 어울립니다.   마음 맞는 사람과 가까이 지내는 것이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자기들끼리만 어울리고 다른 그룹과는 소 닭 보듯 대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뿐 아니라 서로에게 상처 주는 말이 오고 갑니다.   그것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고백하며 노래하는 교회 안에서 말입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하였을까요?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는 날에 각자 집에서 가져온 음식을 내놓고 함께 식사를 하며 교제를 하였습니다.   예배는 주로 낮의 일이 끝난 밤중에 이루어졌습니다.   살림이 넉넉한 부자들은 자기 몫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풍성한 음식을 가져왔고 음식도 기름지고 맛있는 것들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시간 여유도 있고 하인들을 시켜 음식을 만들도록 할 수도 있었으니 일찌감치 좋은 옷을 차려 입고 음식을 준비하여 예배 장소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생활이 넉넉지 못한 사람들은 겨우 자기 먹을 분량의 식사와 그것도 거칠고 소박한 음식들이었을 것입니다.   그것도 하루 종일 바쁘게 일하다가 시간이 되었을 때 부지런히 준비하여 예배 장소로 왔습니다.   

그뿐 아니라 교인들 중에는 노예들도 있습니다.   주인의 명령을 따라 하루 종일 일하다가 예배 시간이 거의 가까웠을 때 비로소 일과를 마치고 어렵게 시간을 내어 모임으로 달려오는 사람들입니다.   온 종일 허리가 휘도록 일하느라 지치고 힘든 하루였지만 그곳에 가면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을 만나고 함께 예배를 드리며 교제를 나눌 수 있다는 기쁨으로 허겁지겁 찾아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언제 몸을 닦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에 분 바르고 나올 겨를이 없습니다.    땀내나는 옷을 입은 채 거친 숨을 몰아 쉬며 달려온 그들 손에는 함께 나눌 음식조차 없을 때가 더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이 그들에게 아무런 흉이나 부끄럼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에 가면 이런 것들을 다 사랑으로 덮어주고 이해하며 등을 두들겨주면서 ‘피곤하지 힘을 내, 우리는 주 안에서 한 가족이야’하고 격려해주는 넉넉한 마음을 가진 형제자매들이 기다려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입니까?   이것이 예수 이름으로 모였던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가진 독특하고 파격적인 새로운 사회의 모습이었습니다.   상상해 볼 수 있습니까?   그 모습이 하나님 나라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사랑의 공동체였습니다.   

거기에 가면 하나님의 은혜를 느낄 수 있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하고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사랑의 교제를 나누고 나면 다시 모이는 그날까지 그 고달픈 삶의 현장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용기 있게 살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벅찬 삶의 자리일지라도 내일에 대한 소망과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포기하지 않고 주님께서 다시 오실 그날까지 견디고 또 견디며 살아야지 하는 결심이 새로웠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힘을 소유하였기에 괴팍하고 폭력적인 주인의 온갖 학대를 견디면서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용기도 생겼습니다.   비록 가난하고 천한 신분이지만 세상에서의 부귀영화가 전부가 아님을 알았기에 하나님 앞에서 오늘 나에게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고 정직하고 바른 인생을 살자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면서 자녀들에게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꿈 같은 신앙공동체 생활에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처음에는 한 없이 너그럽고 온유하며 허물이 없던 이웃들 사이에 조금씩 틈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다가 주일마다 예배 드리러 모이는 사람들 사이에 뭔가 불편한 기색이 드러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먼저 공동식사를 한 후에 다 함께 찬양을 하고 말씀을 들으며 기도하며 성찬을 나누는 형식의 예배 모임이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다 모인 후에 식사가 시작이 되는데 모이는 시간이 서로 다르다 보니 먼저 온 사람들이 점점 불만이 생겼습니다.   나는 일찍부터 준비하고 나와 기다리고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시간이 다 되어서야 허겁지겁 달려오고 그것도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야 도착하니 기다리던 사람들이 짜증이 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그 정도는 사랑의 마음으로 이해하고 기다려줄 수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그런 식의 기다림이 귀찮은 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불평이 생겼습니다.    그리고는 먼저 온 사람들끼리 가져온 음식을 열어 먹고 남은 것은 늦게 오는 사람들이 자기들 가지고 온 것과 함께 먹도록 하자는 의견이 나와 그렇게 시작하였을 것입니다.    일찍 그리고 풍성한 음식을 준비해 온 사람들은 배부르게 먹고 감칠맛 나는 포도주를 마시며 마음껏 즐겼을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만들어 온 음식은 솔직히 말해 우리와 수준이 달라 너무 거칠고 입맛에 안 맞는다고 툴툴거리며 자기들끼리 좋은 것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달려온 사람들은 가지고 올만한 음식도 없어 앞서 먹은 사람들이 남겨둔 것과 자기들이 가져온 거친 음식으로 허기를 달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상상이 너무 과장되었을까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리하여 어떤 이들은 마음껏 먹어 배부르고 포도주에 거나하게 취한 상태로 예배에 들어갔고 어떤 사람들은 겨우 남은 것으로 허기를 채우고 시장기를 느끼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자주 반복이 되었을 때 나중에 온 사람들은 못 먹은 것이 서운하기 보다 기다려주지 못하고 함께 교제하지 못하는 자신들의 처지가 서글퍼졌습니다.   결국 교회에서도 사람을 차별하고 수준에 맞는 사람들끼리 어울리고 마는구나.  우리가 설 자리는 여기도 없구나 하는 서운함입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려니 이전처럼 찬양과 말씀과 기도에 감동이 되지 않았습니다.   내가 오지 못할 곳에 왔는가 싶고 낯선 곳에 이방인으로 불청객으로 와있는 것 같아 힘이 들었습니다.   

결국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보이지 않는 장벽이 사람들 사이에 생겼습니다.   신분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비슷한 생활수준에 사는 사람들끼리, 서로 통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끼리만 만나게 되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물론하고 서로 화목하던 가족적인 분위기는 옛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서로 험담하고 비쭉거리며 노골적으로 다투기도 하고 사소한 일로 소송을 걸기도 했습니다.  더 이상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아니라 콩가루 공동체가 되고 말았습니다.   

동시대를 살던 야고보 선생님도 야고보서에서 비슷한 예를 들었습니다.   ‘교회에 오는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여 금가락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고 들어오는 사람에게는 호의를 베풀며 좋은 자리로 안내하면서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오면 당신은 거기 섰든지 내 발 아래 앉으라고 한다면 교우들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사람이 되는 것 아니냐?’(약2:1-4) 하고 책망하였습니다. 

이렇게 행동하면서도 식사 후에는 한 자리에 모여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성찬상을 받았다면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었겠습니까?   거기에 과연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있을까요? 서로 하나가 되지 못하고 보이지 않는 장벽을 두고 갈라선 그들에게 빵은 그저 빵이고 포도주는 포도주일뿐입니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형식적인 의식과 나만 신앙생활 잘하고 하나님 사랑 받고 복 많이 받으면 된다는 이기적인 생각뿐이었습니다.    교회를 세상의 사교 클럽이나 동우회, 친목회로 착각하는 사람들의 모임일 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가지고 있는 이런 기막힌 모습을 보고 엄하게 꾸짖었습니다.   그것이 오늘 읽은 본문의 내용입니다.    

“여러분은 먹고 마실 집이 없어서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가난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듭니까?   내가 무슨 말을 할까요?  여러분이 이런 일로 칭찬 받을 줄 알았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전에 전달하였던 성찬식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께로부터 전해 들은 거룩한 예식입니다.   예수께서 잡히시기 전 날 밤에 떡을 가지고 축복기도 하신 후 떼어 주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먹음으로 나를 기념하라’ 하셨고 또 잔을 들고 말씀하시기를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로운 언약이니 이 예식을 행하며 마실 때 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기억하고 그가 다시 오실 때까지 이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 중에 누구든지 주의 떡과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습니다.   사람이 자신을 먼저 살핀 후에야 비로소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셔야 합니다.   만일 이것이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주신 거룩한 음식인 것을 깨닫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사람은 결국 자신의 죄를 먹고 마실 뿐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형제들이여 여러분이 식사하러 모일 때 서로 기다려주십시오.   만일 기다리기 어려울 정도로 시장한 사람이 있으면 집에서 먹고 오십시오.   이렇게 해야 여러분들이 먹는 문제로 서로 서운함이 없을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이처럼 간곡하게 권하는 것은 주 앞에서 아름답고 거룩해야 할 이 모임을 서로 비판하는 모임으로 만들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편지 속에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저지르고 있는 어리석음에 대하여 바울이 얼마나 가슴을 치며 안타까워하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니, 이 예식을 친히 제정하신 그리스도께서 이런 모습을 보고 얼마나 슬퍼하실지 상상이 갑니다.   

서론 부분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성찬식을 행할 때마다 이 말씀을 반복하여 드렸습니다.  성찬식의 의미는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일과 그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사심을 찬양하는 감사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한 떡과 잔을 먹고 마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됨 같이 이 음식을 함께 나누는 교우들이 주 안에서 한 몸을 이루어 교회를 세운다는 소중한 뜻입니다.   성찬식을 행하는 주님의 제자들로서 우리는 고린도 교회와 어떤 점에서 다르고 또 어떤 점에서 닮았을까 스스로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주께서 나에게 주시는 떡과 잔을 대하기 전에 먼저 나 자신을 살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이 떡과 잔을 먹고 마시기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인가?    주 안에서 하나가 되라고 하신 그 말씀을 내 편리한대로 해석하여 내가 좋은 사람과만 하나가 되고 나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면 그것으로 다 되는 것인지 생각해 봅시다.   서로 하나되라고 하신 말씀을 따르지 못하고 주의 몸을 분열시키는 사람은 아닌지 살펴봅시다.   그리하여 나를 위해 생명을 아낌 없이 주신 주님의 거룩한 음식이 내 자신을 정죄하는 거리낌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성찬식에서 먹고 마시는 이 음식이 무슨 마술적인 힘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먹으면 병이 낫거나 마음이 평안해지기 때문에 먹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먹으면 내 죄가 사라지고 깨끗한 사람이 되기에 먹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성찬은 세상 사람들이 먹고 마시는 술자리처럼 자기의 즐거움을 위하여 먹는 음식이 아닙니다.   세상 술판은 많이 먹고 마시며 자기 입과 배를 즐겁게 하고 실컷 먹고 난 후에는 정신을 가누지 못하여 낯 뜨거운 술주정에다 추한 꼴 다 보이는 싸움판으로 가고 맙니다.   시작은 화기애애한데 뒤끝이 참 안 좋습니다.    

주의 거룩한 성찬을 내 기분 달래려고 받는 그런 자리로 여기지 마십시다.  먼저 자신을 살피고 주의 말씀에 합당한 그리스도인으로 이 음식을 먹을 때 진정 그 은혜가 내 안에서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찬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며 입으로 맛을 보는 살아 있는 하나님의 메시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나와 하나가 되어 이 험한 세상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힘 있게 살라고 권하시는 주님의 떡과 잔입니다.    나와 너희가 하나 된 것처럼 이 떡과 잔을 먹고 마시는 형제자매와 하나가 되라고 주시는 음식입니다.   세상을 이기고 당당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라고 주시는 음식입니다.   그래서 성찬은 즐거운 잔치 음식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몇 시간 후에는 자신을 팔아 넘길 것을 아시면서도 가룟 유다에게 이 잔을 주셨고, 홀로 남겨두고 뿔뿔이 도망칠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도 이것이 내 살과 피라고 하시며 나눠주시던 주님의 음식입니다.   나와 함께 고난의 자리에도 슬픔에도 그리고 즐거움과 영광의 자리에도 함께 가자고 하시는 주님의 마지막 만찬이었습니다.    희생이 없이 하나됨을 이루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시지요?    내가 먼저 낮아지고 엎드러지고 자신을 내어주어야 화해가 이루어지고 화평을 만듭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내가 옳고 상대방이 그르다고 고집하면 하나됨이 불가능합니다.   미움과 시기와 질투로 멀어진 관계를 회복하십시오.  서로간의 오해로 갈라진 마음이라면 적극적으로 그 오해를 풀려고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노력도 없이 오늘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시겠다면 다시 한 번 주님이 제자들에게 주셨던 말씀과 오늘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주신 말씀을 되새깁시다.   먼저 자신을 살핀 후에야 이 떡과 이 잔을 마십시다.   그러할 때 오늘 이 성찬이 우리에게 진정한 은혜가 됩니다.   주의 은혜가 우리 가운데 충만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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