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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연환경을 만드는 삶 (시 19편, 롬 1:20; 롬 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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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환경을 만든 삶 (시 19편, 롬 1:20; 롬 8:22)


자연에 따라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가을이 온다. 이것은 자연의 질서에 따른 하나님의 섭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연환경을 생각해 본다. 과거의 인간의 생활은 자연에 순응하는 삶이었다. 그로 인해 인간의 환경은 자연에 의해서 인간의 생활 전반을 결정하는 요소가 되었다. 즉 추운 북부 지방으로 갈수록 가옥의 구조가 폐쇄적이고 따뜻한 남쪽으로 갈수록 개방적인 가옥 구조가 결정되었음을 알게 한다. 

그런데 서서히 인간의 기술이 발달되어 산업혁명이 발달하여 인간의 능력은 점점 커져만 갔다. 더위와 추위를 이기기 위해 에어컨과 난방 기구를 이용하여 조절하면서 인간 능력의 만능시대를 맞은 것이다. 그로 인해 과거에는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보고 자연의 질서에 따라 살았던 반면에 현대에 와서는 많은 경우에 인간이 자연의 지배자라는 사고를 바탕으로 인간의 이익에 맞추어 자연의 질서를 무리하게 뒤바꾸어 왔다. 

이는 인간의 탐욕과 자연에 대한 오만과 무지로 광우병, 변종 크로이츠펠트-야콥병, 조류독감, 사스, 중국 분유의 멜라민 파동 등의 새로운 질병으로 몹쓸 병이 자꾸 생겨나는 것을 보게 된다. 자연과 더불어 상호작용을 하며 살아가는 존재인 인간이 삶을 더욱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풍요한 결실의 계절 가을과 함께 생각해 보게 한다. 자연에 대한 성찰과 이해가 없이 이루어진 발전의 결과로 인간들이 맞이한 것은 무엇인가? 복구할 수조차 없는 훼손된 자연과 각종 질병을 단지 발전을 위한 당연한 대가로만 생각할 것인가?에는 많은 문제가 제기되는 것을 알게 한다. 

한쪽에서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는 환경 파괴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또 다른 한쪽에서는 생태, 친환경, 웰빙 따위의 지극히 자연스러운 삶으로 알고 그 삶이 진리인 양 받아들여지고 있는 현실은 삶의 모순이 아닐 수가 없다. 자연환경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유행하는 웰빙의 자연주의는 그 목적과 의미를 알지 못한 채 스쳐 가는 한 순간의 유행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과학적인 지식이 전무 했던 서양의 고대는 경외감(敬畏感)에서 비롯된 자연에 대한 막연한 숭배의 시기로 정신과 육체, 생명과 육체를 구분하지 않고 자연에도 정신이 깃들어 있다고 이해했다. 이러한 사상들은 ‘자연환경에는 정신이 충만하다.’는 원리에 기초하여 자연에 내재하는 정신이 자연환경의 규칙이나 질서의 바탕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자연 환경은 운동하는 물체들의 영역이였고 그 운동은 자연환경 자체의 생명력 또는 영혼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기독교 사상이 팽배했던 중세에는 신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을 지배할 수 있는 전권을 위임했고 따라서 인간이 자연보다 우월하다는 사고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로인한 기독교의 자연환경 이해는 자연과 인간을 분리시키기 시작했으며 인간이 자연위에 군림한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을 안다. 그리고 20세기 초의 자연환경은 생물학과 물리학, 그리고 새로운 우주론이 등장하여 자연환경을 단순히 기계가 아닌 기능의 측면으로 이해한다. 즉 인간과 자연은 상호 작용하는 하나의 유기체로서 전체적인 목적이며 발전과정을 지속하려는 목표는 그 특징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독일의 지리학자 라첼(F. Ratzel)은 ‘인류의 생활과 역사는 자연환경의 영향에 의해 규제 된다’고 함으로써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를 자연 과학적인 법칙에 의해 설명하고 인간의 생활은 그들이 살고 있는 자연환경의 영향을 받는다는 견해로 인간의 행동, 민족성, 왕조의 성쇠까지도 자연환경의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이러한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를 보는 여러 견해가 있게 된다. 이것은 자연환경이 인간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절대적으로 보는 환경론적 견해를 ‘환경 결정론’이라고 하기에 이른다.

여기에 대한 증거로서 겨울이 길고 추운 지방의 가옥 구조는 폐쇄적이다. 추운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거친 반면에 더운 지방의 사람들은 온순하나 근면하지 못한 예를 들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환경가능론’이 있다. 인간과 자연환경과의 관계에 있어 인간의 역할을 능동적으로, 자연의 영향을 수동적으로 보고 동일한 자연환경도 그것을 이용하는 인간의 문화수준에 따라 그 영향이 달라지며 자연은 단지 인간에게 가능성을 제공할 뿐이라는 ‘환경가능론’을 주장한다. 

그리고 ‘문화 결정론’이라 함은 인간의 생활 방식으로서의 문화 즉 태도, 목적, 기술 등이 사회나 지역의 변화와 발전을 가져오는 결정적인 힘이라고 보는 입장을 ‘문화 결정론’이라 한다. 여기서 ‘경제 결정론’과 ‘문화 결정론’은 자연환경의 그 대표적인 예이기도 한다. 문화결정론은 자원의 적극적인 이용을 통하여 경제 및 지역발전 등 근대화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이렇게 환경 결정론은 인간의 지역적인 생활양식이 인간의 자유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라 외적인 기후, 지형, 식생활 등의 자연환경에 의해 필연적으로 결정 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필연적인 결정들을 보면서 오늘을 사는 이 시대는 인간을 둘러싼 자연환경을 바르게 인식하고 이해하는 것이 절대 필요함을 아는 것이다. 

반면 주목하는 것은 지금의 자연환경은 생명과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음을 인지하는 것이다. 자연환경은 생명체의 생활공간이 생명력을 지닌 하나님의 피조물이 아니라 인간들에 의해 마구 파헤쳐지고 메말라지고 착취되어 버린 생명이 병든 신세(身世)가 되어 버렸음을 아는 것이다. 오존층이 파괴되어 강한 적외선이 노출되었고 땅은 산성화로 사막화가 되어가고 있으며 삼림자원의 고갈은 산소 공급원을 잃어 가고 지구는 온난화 현상이 나타나 바다는 핵폐기물을 처리하는 곳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인간들은 인간의 안락하고 편리한 생활을 담보로 생명의 터전인 자연환경을 황폐시키고 인간의 생존을 내세우며 자연을 함부로 착취하여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다. 

이것은 인간이 인간 스스로를 자살하는 현상임을 아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 중심의 발전은 자연환경의 파괴에도 아랑곳없이 가속화되어 가고 있다. ‘문화의 수준은 상향 조절만이 가능하다는 말’은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는 말을 실감케 한다. 이 끝없는 인간의 욕망들로 인해 자연은 신음하며 탄식하고 있다. (롬8;22-23) 자연의 생명을 회복시키기 위해 인간은 먼저 자연과의 관계를 회복하여야 하는 조건에 ‘좋은 자연환경을 만드는 인간의 삶’에 유의한다. 

자연환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생명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자연의 아픔은 하나님의 아픔이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망각했던 우리들의 잘못된 모습을 반성하며 하나님과 함께 아파해야 한다. 하나님은 홀로 완전하거나 홀로 자유하거나 홀로 전능한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질투하는 하나님이시고 아파하는 것을 보시고 애태워 사랑의 눈물을 흘리는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모든 만사의 고통과 절망 속에 헤매는 이들의 구원을 위해 십자의 죽음까지도 경험하신 하나님이심을 믿는 삶인 것이다. 

이 뜻을 희망의 신학자 몰트만은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으로 하나님의 성육신적, 삼위일체론 적으로 이해함을 알게 한다. 하나님은 이 자연환경을 단순히 하나님의 창조의 대상물로만으로 여기지 아니 하신다. 우주는 성령의 전이며 하나님의 영광과 섭리와 뜻이 살아있는 생명의 환경인 것이다. 그럼으로 이 우주적 생명은 총체적 생명공동체인 것을 고백하는 신앙인 것이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을 믿는 믿음이다. 

고로 자연은 하나님이 하나님을 들어내시는 방법과 유현에 따라 자연계시와 초자연계시를 알게 한다. 하나님의 창조 자체도 근본적으로는 초자연계시가 된다. 초자연계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들어난다. 그러나 하나님을 계시하는 데에는 다른 유형들이 있다. 하나님은 계시하는 장소에 따라 다를 수 있으며 보다 다른 형태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계시를 보는 것이다. 

여기서 자연계시는 자연의 모든 조화와 이루어진 자연의 모습자체로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느낌과 감성 등을 통하여 대화를 이용한 교제의 결과로서 계시를 의미한다. 이 자연환경에 하나님의 자연계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창조물의 하나하나를 통해서 깊고 심오한 뜻을 말씀하시고 계신다.(로마서 1:20, 시편19:) 이 자연계시를 통해 ‘좋은 환경을 만든 삶’을 기도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생명회복과 그 관계를 창조 절에 가을과 한께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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