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 (출 3:9~12)

  • 잡초 잡초
  • 801
  • 0

첨부 1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 (출 3:9~12)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고 부르시는 것을 소명(召命, calling)이라고 합니다. 이 소명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구원에로의 부르심과 사역에로의 부르심(고전7:20)입니다. 구원에로의 부르심은 다시 내적 소명(내소)와 외적 소명(외소)로 나눕니다. 외소란 복음을 듣고 교회에 오는 것처럼 아직 구원을 받지 못했지만 교회 생활을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교회에 나와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나 아직 성령을 통한 중생을 체험하지 못한 상태입니다.(마 22:2-14; 막 16:15, 16; 요 3:36; 행 13:46; 살후 1:8) 

성경은 이런 사람들을 가라지라고 합니다. 신앙의 지도자 가운데도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 거짓 사도라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들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7:22-23)”

내적 소명을 받은 사람은 말씀을 듣고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을 말합니다.(고전 1:9; 롬 8:30; 엡 1:10) 이런 사람들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롬 10:10)” 사람들입니다. 천국 백성이 된 사람들이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사역에로의 소명은 교외내의 직분에로의 소명과 교회 밖의 직업으로의 소명이 있습니다. 교회 내에서 목사로, 장로로, 권사로, 집사로, 교사로, 성가대원으로 봉사하는 것 다 소명입니다. 직장에서 사장으로 부장으로, 사업으로, 가정에서 주부로 섬기는 것 다 소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역사를 진행하시면서 사람들을 불러 사용하십니다. 모세는 80세에 불렀고, 예레미야를 불러 멸망해 가는 민족에게 눈물로 호소하게 하였고, 꿈이 없는 백성에게 에스겔을 불러 비전을 제시하였고, 성벽이 무너진 것을 재건하기 위해 느헤미야를 불러 사용했습니다. 불신의 암흑 속에서 진리를 잃은 백성에게 진지를 빛을 보여 주기 위해 엘리야를 불러 사용하였고, 시대마다 사사들, 다니엘, 에스더, 모르더게, 12제자, 바울, 바나바 등 수많은 사람들을 불러 사용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내용은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80세 된 모세를 사명자로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부르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1. 하나님의 때에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9-10)-이제

모세는 40세에 고통 받는 자기의 민족을 도와주려고 애굽인을 살해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패로 끝이 났습니다. 결국 도망자 신세가 되었고, 그 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잃어 버렸습니다. 돈도, 명예도 권력도 다 잃어 버렸습니다. 애굽에서 도망 나온지 40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참으로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제 잊혀진 사람이고 이제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한 때입니다. 

그런데 그 때 하나님이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모세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모세를 부르신 것입니다. “모세야, 모세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고통을 알려주시고 하나님의 계획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를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는 사명자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9절에 보십시오. 이제(아타)라는 말은 '이제부터는', '곧장'이란 뜻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역사에 개입하셔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시고자 하는 적극적 의지를 담은 표현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이제” 사용하겠다는 것입니다.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하나님의 때가 되어, 역사의 가장 절적한 때가 되어 너를 사용하겠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몰랐을 지라도 하나님은 모세를 준비시켰습니다. 모세의 호렙산 등산과 하나님의 현현은 우연의 일치가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계획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집트에서의 이스라엘의 번성과 그에 따른 새 왕조의 탄압이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준비였습니다. 순수한 레위 혈통에서 내어난 모세,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기적적인 구출, 애굽 왕실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것, 살인 사건으로 미디안 광야로의 도피한 것, 호렙산에 이르는 그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섭리였습니다. 모세를 부르기 위한 하나님의 준비였습니다. 하나님은 호렙산에서 모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인류 구원사역의 원대한 계획을 진행하시면서 한 시대 모세를 사용하시길 원한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십 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 산 광야 가시나무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행 7:30)” 

우리는 하나님의 때가 지났다고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재기 할 수 없다고 패배감에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잊혀진 사람이고 이제 끝난 사람이라고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80세의 목부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100살에 약속을 성취 받았습니다. 갈렙은 85세에도 하나님의 쓰임을 받았습니다. 이미 늦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80세의 노인 모세에게 이제 너를 쓰겠다고 부르고 계십니다. 

썬샤인 잡지에 의하면 세계 역사상 최대 업적의 35%는 60세부터 70세 노인들에 의하여 이루어 졌고 23%는 70-80세 노인, 그리고 6%는 80대에 의하여 성취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역사적 업적의 약 64%가 60세 이상의 사람들에 의하여 성취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시성(誇聖 ) 밀튼은 만년의 20년 간 두 눈의 실명이라는 역경 속에서도 그 숭고한 시문(誇文)을 수많이 엮어냈습니다. 악성(樂聖) 베에토벤은 만년의 15년 동안 전혀 듣지 못한 귀머거리였지만 죽을 때까지 작곡의 길에 정진하였습니다. 괴테가 「파우스트」을 완성한 것도 여든이 넘어서였습니다.

미켈란젤로는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의 돔을 일흔 살 때 완성했습니다. 베르디, 하이든, 헨델 등도 고희(古稀)의 나이를 넘어 불후(不朽)의 명곡을 작곡했습니다. 프랑스와 모리악은 「지난날의 청년」을 여든 세 살 때 출판하여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이탈리아의 가극 작곡가 쥬제페 베르디는 그의 불후의 명작 <아베마리아>를 85세에 작곡했고, 모세는 80세에 민족을 위해 부름받고 40년 동안 험한 광야에서 민족에게 희망을 주며 정열적으로 일하였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때가 지났다고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더불어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여 서두르지 말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25년을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결국 이스마엘을 낳아 인류에게 비극을 안겨 주었습니다. 다윗 하나님의 때 기다렸습니다. 사울 역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여 결국 전쟁에서 실패하고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리브가는 하나님의 때 기다리지 못하여 남편을 속이고 결국 야곱을 도주시키고 죽을 때까지 그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아간도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전략품을 훔치다가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보십시오. 얼마든지 사울을 죽이고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미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를 기다린 것입니다. 요셉의 감옥 생활은 소비된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시간이었습니다. 

전도서는 말씀합니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전 3:1-8)

하나님의 때가 되면 갑자기 풀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갑자기 중앙 무대에 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최상의 때입니다.
 
찬송가 작가 필립 부룩스는 “제 삶속에서 가장 힘들었던 일은 하나님께서 나를 붙잡으실 때까지 가만히 앉아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실낙원의 작가 존 밀턴은 크롬웰과 함께 혁명에 가담하였습니다. 그러다 크롬웰은 죽고 그는 사형수가 되었다 풀려났습니다. 그는 실낙원을 쓸 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때를 역행해서 만들어가는 것보다는 내 속에 이루어져 가도록 대망하고 기다리는 것이 훨씬 더 위대하다.”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방법이 있습니다. 문제가 복잡하고 어려울수록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모든 문제는 풀릴 때가 있습니다. 감기 걸려도 때가 되어야 치료되는 것입니다. 기도해 놓고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포기해서는 아니 됩니다. 문제가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바쁠수록 돌아가고 피곤하면 쉬고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다윗은 모든 형편을 맡기고 잠잠히 기다렸습니다. 요동치 않고 기다렸습니다. 주께 소망을 두고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임을 믿고 약속 붙들고 기다려야 합니다. 자녀에 대하여 실망하지 마십시오. 때가 있습니다. 그릇 만드는데 필요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하나님께서 말씀합니다. 

"기다려서 일천삼백삼십오 일까지 이르는 그 사람은 복이 있으리라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이는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날에는 네 업을 누릴 것임이니라 (단 12:12-13)"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애 3:26)"


2. 연약한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11)-내가 누구관대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 모세는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11절을 보십시오.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내리이까?”

“내가 누구관대”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겸양의 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겸양의 말보다는 자기 비하의 말입니다. 이 거부는 단순히 겸손의 차원이 아닙니다. 한 번이 아닙니다. 계속적으로 거부하는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보게 됩니다. 구약 성경에 하나님의 사람들을 부르시는 모습이 여러 곳에 나옵니다. 

예레미야(렘1:4-10), 이사야(사6:1-13), 에스겔(겔2:-3:10) 기드온(삿6:11-24), 여호수아(수5:13-15) 등을 부를 때 일정한 패턴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소명을 줍니다. 그러면 반응을 합니다. 하나님은 기적적인 방법으로 재 확신을 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인간이 응답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즉각 응답하는 사람들이 있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거부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거부한 사람으로 예레미야는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렘1:4-10) 

기드온도 삿6:11-24에 ”나는 약하고 적다“고 거부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세처럼 집요하게 계속적이고 반복적으로 거부하지 않습니다. 모세의 거부는 겸양의 차원이 아닙니다. 40년 전 모세는 자신을 스스로 이스라엘의 구원자요 재판관으로 내세웠습니다(2:14), 그러나 이제는 초라한 한 목자로서 자기 자신의 무능함을 하나님께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누구관대 바로 앞에 가겠냐는 것입니다. 당대 최고의 권력자입니다. 바로에게 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단지 목부에 불과하고 실패자, 도망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곳은 모세를 죽이려고 찾은 사람들이 있는 곳입니다. 애굽왕을 만나는 일만 생각해도 몸서리쳐지는 일일 것입니다. 자신감을 상실하였습니다. 목동으로서의 40년의 세월을 어떻게 보내었을까를 짐작할 수 있는 말입니다. 불안하게 보내었을 것입니다. 살인자인 자신을 애굽에서 언제 추적해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유목민들 중에서 자신의 과거 경력을 알아차리고 밀고하지는 않을까 하는 일종의 편집증 또는 피행망상증을 갖게 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무엇을 해야 할 때 지나치게 불안해하는 것을 사회공포증이라고 말합니다. 어쩌면 모세에게 이런 사회 공포증이 있었을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내가 누구관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겠냐고 반문합니다. 그들은 이미 자신을 거부한 사람들입니다. 실패의 경험이 있는 사람입니다. 사람들로부터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친어머니로부터 양어머니로부터 분리되었습니다. 공동체로부터 배척받았습니다. 인정받고 못하고 수용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거절합니다. 계속적인 하나님의 부르심에 모세는 어떻게 거절합니까? 

4장 1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거부당하고, 인정받지 못할 것이라는 깊은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낮은 자존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내가 누구관대라는 말 속에는 나는 이 일을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이일을 하기에 적격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라고 말합니다. 

4장 13절에서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라고 말합니다. 자신을 낮게 평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을 비하하고 있는 것입니다. 낮은 자존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하여 갖는 태도가 부정적인입니다. 소극적입니다. 비관적입니다. 지금 현재 가지고 있는 자기 자신의 성격과 능력과 소유를 가치 있는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모세처럼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거부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사랑해 주지 않습니다. 결국 그 일을 함으로 나는 상처만 받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지나치게 자신이 가진 능력을 폄하하고, 조그만 실수에도 자신을 질책하며 비난하는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연약한 자도 부르십니다. 끝까지 모세의 이유를 들어 주십니다. 세상에서는 뛰어난 자만 쓰려고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약한 자를 불러 강한 자를 만드십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들어주시고 격려하며 용기와 징표를 주어 약한 우리라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1:27-29)”

“넘어져 가는 자를 말로 붙들어 주었고 무릎이 약한 자를 강하게 하였거늘 (욥 4:4)”

“그 작은 자가 천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 (사 60:22)”

사람들은 배반하고 실패하고 약한 자 쉽게 버리지만 우리 하나님은 배반한 자도, 실패한 자도, 약한 자도, 간음한 자도, 우상을 섬긴 자도 불러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용하십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우상장사의 아들입니다. 두 번이나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를 끝까지 버리지 않고 불러 사용하였습니다. 요셉은 사기꾼의 아들입니다. 다윗은 한갓 목동에 불과했습니다. 충분히 교육받은 명문가의 아들이 아닙니다. 바울 살인을 방조한 사람이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이려고 찾아다닌 사람입니다. 일평생 질병으로 고생한 사람입니다. 베드로 배우지 못한 사람입니다. 배신자이고 예수님을 저주까지 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들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 2:17)” 

예수님은 병든 자에게 찾아 왔습니다. 세리와 창기처럼 버림 받은 자에게 찾아 왔습니다. 한센씨 병으로 완전히 죽음만 바라보는 소외된 자에게 찾아 왔습니다. 굶주리고 실패한 자에게 찾아 왔습니다. 

“지금 내게 무엇이 있느냐?” 
“내가 가지고 있는 실력이 무엇이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를 쓰시는 분이 누구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붙들여 쓰이면 아무리 약한 자이라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쓰시니까 모세의 지팡이가 홍해를 가르고 반석에서 물을 내는 것입니다. 기드온의 300명의 용사가 수많은 적을 물리치는 것입니다. 다윗의 물매와 돌이 골리앗을 넘어뜨리는 것입니다. 쓰임받으니까 삼갈의 소 모는 막대기가 블레셋 사람 600명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하나님이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나에게 미모가 없고 능력이 없고 돈이 없다고 할지라도 있는 것 하나님이 쓰시면 거기에서 오병이어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파스퇴르 하면 대부분 사람은 우유회사를 떠올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독실한 기독교인이며 미생물학의 창시자입니다. 그는 46세가 되던 해에 뇌출혈로 몸의 절반이 마비되었답니다. 그것으로 포기해 버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쓰임받았습니다. 반신불수의 장애인이 된 이후에 실험기구도 제대로 다룰 수 없었던 그는 광견병 치료와 전염병 예방법 발견 같은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변화시킨 무디를 보십시오. 1875년 미국에서 7남 2녀 중 6남으로 태어난 아들이 있었습니다. 가난한 집에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석공으로 일을 했는데 일찍 돌아가시고 학교 공부를 여섯 달밖에 하지 못하였습니다. 10살 때 출판사의 직공으로, 16살 때에는 친척이 운영하는 구두 깁는 공장의 직공으로 취직을 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하나님께 쓰임받게 되었습니다. 교회 학교 교사가 너무 하고 싶었지만 시켜 주지 않습니다. 교회에 사정을 합니다. 아이들을 자신이 데려다가 교회 신발장 앞에서 가르칠 테니까 허락만 해달라고 사정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100명의 교사들이 가르치는 아이들보다 더 많아졌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그가 미국을 변화시킵니다. 미국에 청교도 정신으로 다시 한 번 정신 혁명을 일으킵니다. 일년에 200만 명을 전도할 만큼 세계적인 부흥사로 일어서게 됩니다. 누가 하십니까? 우리 하나님이 하십니다.

미국의 교육가 버틀러(1862~1947)는 일에 관해 세 부류의 사람을 말했습니다. 첫 번째는 일을 창조하는 소수의 사람들. 이들은 개인의 일 차원을 떠나 공동체를 바꿉니다. 두번째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방관하고 기피하는 사람들입니다. 세번째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생각조차 안하는 수많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무능력과 연약함을 계속 말하며 거부하는 모세에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뇨 나 여호와가 아니뇨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출 4:11-12)”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우리는 왕같은 제사장입니다. 


3. 부르시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12)-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어

두려움과 자신의 무능력으로 거절하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12절을 읽어 보십시오.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을 것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스스로의 모습을 바라보고 지레 낙담에 빠진 모세에게 '임마누엘'의 약속을 해 주십니다. 이 약속은 백만 대군을 얻는 것보다 확실한 보장을 해 주는 것입니다.(사 35:3;고전1:27;히 12:12). 

능력이 없어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지 못한다는 그에게 네가 애굽에서 인도하여 낼 것이라고 확신을 주십니다. 그리고 바로 지금 서 있는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길 것이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들을 회복시키는 목적이 바로 하나님을 섬기게 하기 위한 것임을 말씀합니다. 그 일이 이루어짐으로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었다는 증표가 될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하나님은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시지 않습니다. 부르신 자들과 함께 하십니다. 모세는 육신의 부모도 그를 어찌하지 못하고 결국 버렸습니다. 양어머니도 정치적 득실을 계산하여 그를 버렸습니다. 자기가 도와 주려고 했던 이스라엘 백성도 자신을 배반하고 버렸습니다. 지난 80년 하나님도 자신을 떠난 것 같았습니다. 자신은 이제 광야에 홀로인 것 같았습니다. 

기독교 심리학자 크레이 엘리슨 이럴 때 느끼는 외로움을 세 가지 유형으로 설명합니다. 

① 정서적 외로움을 느낍니다. 정서적으로 완전히 혼자다는 느낌을 갖습니다.
② 사회적 외로움을 느낍니다. 목적이 없고 막연하고 공허하다고 느낍니다. 고립되어 있으며 삶의 변두리에 있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아무 쓸모없는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③ 실존적 외로움을 느낍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아마 모세은 이런 정서적, 사회적, 실존적 외로움에 저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호렙산에 나타나신 우리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합니다.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이 말씀이 오늘 저와 우리 성도님들에게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음성이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결코 홀로가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나 홀로가 아닙니다. 죽음의 순간까지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눈물 흘리는 골짜기에도, 실패와 절망 가운데 울부짖는 순간에도, 승리의 환호에 젖어 있는 순간에도 우리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불러 사용하신 사람들을 보십시오. 

바울이 고린도에서 고난을 받을 때(행18:9-10) 함께 하셨고, 바울이 공회에서 잡혀 죽음의 위험에 처했을 때(행23:11)도 함께 하셨으며 파선의 위험을 당했을 때(행27:23) 함께 하였습니다. 

엘리야가 홀로 있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이 함께 하였습니다. 

다윗이 음식 먹을 기력까지 잃었을 때도 하나님은 다윗과 함께 하였습니다.(시102:1-7) 

야곱이 형을 속이고 도망자로 불안과 초조에 떨고 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야곱과 함께 하여 주었습니다. 이 사실을 잘 아는 다윗은 시32에서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해 받음을 두려워 아니함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라고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아 사업을 하면서 나 홀로 남았다고 생각하며 홀로 외롭게 싸워 가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 있습니까? 가정에서 남편도 아내도 자식도 부모도 나의 외로움 나의 고통을 몰라준다고 생각하시는 분 계십니까?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환영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는 분 있습니까? 나만 외롭게 홀로 신앙 생활하신다고 생각하시는 분 계십니까? 아닙니다.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바울과 함께한 하나님, 다윗과 함께한 하나님,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함께하신 하나님, 모세와 함께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주님께서 약속해 주시고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사람이 외로워하고 소외감을 갖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게리콜린스 외로움의 심리적 원인을 
① 낮은 자존심(자신을 과소 평가) ② 의사소통 능력 부족(대화) ③ 자멸적 태도, 적의 ,두려움 등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능력의 부족 때문에 소외당하고 외로워합니다. 힘이 없을 때, 재력이 없을 때, 능력이 없을 때 소외당하고 따돌림 받습니다. 돈 있으면 아버지 입원하면 뻔질나게 찾아갑니다. 그러나 사업 망하고 돈 없으면 빨리 돌아가셨으면 하는 것이 인간들의 악한 모습니다. 그러나 돈, 사람, 명예, 권력으로 인간의 외로움이 근본적으로 풀릴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새 힘을 얻습니다.(사40:27-31) 하나님이 힘을 주시면 어떤 경우도

(1)곤비치 않고 피곤치 않습니다.(31) 힘을 다 잃고 죽기를 자청하기까지 하였던 엘리야 40주야를 달리 수 있는 새 힘을 얻었습니다.(왕상19:1-8) 울 기력이 없을 정도로 맥이 빠졌던 다윗이 (삼상30:40)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을 때(삼상30:6) 이틀을 계속 싸울 새 힘을 얻어습니다.(삼상30:17) 

(2)고난 능욕 많은 싸움에서도 하나님의 일을 계속 할 수 있습니다.(17,살전2:2) 

(3)그들이 하는 일을 마침내 완성합니다.(17,시84:7)

우리는 내 힘으로 하려고 할 때 지치고 외롭습니다. 내 힘으로 하려고 할 때 실패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힘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시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도저히 풀리지 않은 문제들이 신비하게 풀립니다. 홀로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늘 하나님과 함께 하였던 리빙스턴은 정글에서 수많은 난관과 위험에 직면할 때마다 "하나님의 뜻이 내게 이루어지기 전까지 나는 죽지 않는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인생은 너무 짧습니다! 자기연민 속에서 고독을 느끼면서 자기를 학대하고 자기 감상 속에 빠지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습니다. 

고독하십니까? 외롭습니까? 홀로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힘이 없고 능력이 없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포기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힘을 주십니다. 베토벤은 보청기를 사용해도 들을 수 없을 정도 귀가 먹었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고독을 극복하고 제9번 "영광의 합창"을 작곡했습니다. 

윌러 스코트는 어려서부터 절름발이었지만 세계적 작품을 만들었고 디즈니랜드 세문 월트 디즈니는 젊은 시절 교회창고에 절망의 나날을 보내었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속에서 미키 마우스를 그려 디즈니랜드를 만들었습니다. 로버트 스티븐슨은 14년간 앓아 누워있으면서도 "보물섬"을 썼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능력을 주십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막 9:23)"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이미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믿음이 있고 능력의 통로 기도가 있습니다. 아무도 나를 돕는 자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말씀합니다. 

사58:11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 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요셉을 보십시오. 고난의 인생이었습니다. 외로운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늘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창 39: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창 39:21)"

사업을 하면서 홀로 외롭게 싸워 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환영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외롭게 홀로 신앙 생활하신다고 생각하십니까? 질병에 걸려 홀로라고 생각하십니까? 자식들 다 쓸데없다고 생각하십니까? 홀로되어 외롭게 인생의 가을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홀로가 아닙니다. 항상 우리 곁에 주님이 계십니다. 

오늘 모세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통하여 오늘 우리를 부르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1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내 백성은 개인마다 다 다릅니다. 수렁에 빠진 자녀일 수도 있고, 하나님의 교회일 수도 있고, 내게 맡겨준 사업 터일 수도 있고, 굶주리고 헐벗은 어린이일 수도 있고, 내 부모 내 형제일 수도 있습니다. 

1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정녕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김필곤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