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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침묵속의 하나님의 음성 (단 3: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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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속의 하나님의 음성 (단 3:13~18)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실 것이니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 지라도 .... 

오늘은 전천후 시대라고 말하고 유비쿼터스 시대라고도 말합니다. 옛날에는 비행기가 구름이 짙게 덮이거나 안개가 끼면 뜨지도 못하고 내리지도 못했지만 오늘은 그것이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옛날에는 비가 안 오면 기다리기만 했지만 오늘은 비를 내리게 할 수 있습니다. 공중에 위성을 쏘아 올려서 이 지구상 곳곳을 앉아서 들여다 볼 수 있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오늘을 전천후 시대라고 말합니다. 이제는 우리 신앙도 전천후 신앙이 필요한 때입니다. 전천후 신앙은 어느 경우 어느 환경에 처해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전천후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믿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 사람은 무신론자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을 믿지 않는가 하면 믿음의 대상이 잘못 선택된 것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 대신 물질을, 권세를,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우상을 섬기는가 하면 가장 큰 이유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으면 질서를 지켜야 하고 정직해야 해고 율법을 지켜야 하고 11조를 드려야 하고 술담배하지 말아야 하는데 이것들이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놀이에 장애받지 않는 종교를 택하다 보니까 우상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우상은 그런 요구를 하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인간이 종교성을 가지고 있어서 무엇인가를 믿어야 하는데 하나님은 부담스럽고 그래서 절묘하게 인간이 만들어낸 기능신이 우상입니다. 이것이 맹목적 신앙입니다.  

사람에게는 다 종교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종교를 선택할 때 깊이 생각을 안 합니다. 논리적 수준이 부족하고 단순한 종교성으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다 보니까 맹목적 신앙자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청소년들도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는 풍조를 따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좋으면 그냥 선택해 버립니다. 어느 스타를 좋으면 맹목적으로 사랑합니다. 좋아하는 그 스타의 생일날이면 집에 찾아가 밖에서 선물을 들고 밤샘을 합니다. 그냥 좋아서 입니다. 그 스타가 어느 날 병이 나면 병원 밖에서 눈물로 밤을 지새웁니다. 그것이 맹목적 사랑입니다. 일본 부녀자들이 한국의 스타를 보기 위해서 전세 비행기로 날아옵니다. 와서 눈물을 흘리고 고함을 지르며 정말 행복해 합니다. 시간과 물질과 정열과 자존심을 다 버리고 찾아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위해서 그렇게 해 보았습니까. 그러니까 그것이 맹목적인 사랑입니다. 흔히 음식점에 가 보면 방마다 부적을 부쳐놓는데 그것이 맹목적인 신앙입니다. 

오늘은 전천후 시대입니다. 이제는 맹목적인 신앙시대에서 전천후 믿음 시대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전천후 믿음이 오늘 읽은 본문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다니엘과 세 친구가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 왕궁의 내시가 됩니다. 그 시대는 왕의 신상을 섬기던 시대였습니다. 왕의 신상을 섬기는 시간에는 모든 백성들이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모든 악기 소리에 맞추어 그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해야 합니다. 그 종교의식을 거역하면 끓는  풀무불 속에 던져집니다. 여기 풀무불은 오늘날로 말하면 용광로라는 말입니다. 여차하면 그곳에 던져집니다. 누가 그 앞에서 오금을 펴고 그 왕명을 거역을 하겠습니까.      

여기에 다니엘의 세 친구가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이 세 친구는 왕명을 완강히 거부하여 마침내 왕에게 보고되어 왕이 이 세 친구를 직접 불러 국문을 했습니다. 왕이 “그것이 사실이냐(14)”고 묻고 회유를 합니다. “이제라도 절하라. 아니면 풀무불 속에 던져 넣으리라(15).” 그러자 세 친구가 대답합니다. “대답할 필요 없습니다, 던져지면 하나님이 건져주실 것입니다(17).” 이것이 난국시대에 표현되는 믿음입니다. 

신앙인은 이 믿음 때문에 때로 순교도 하고 피를 흘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 세친구가 더 대답합니다. 이 말씀이 본문의 키이고 핵심입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18).” 그 말은 “하나님이 건져주시지 않아서 죽을지라도 우리는 절대로 절하지 않을 것이다” 그 말입니다. 이 대답이 전천후의 신앙고백입니다. 얼마나 감동적입니까. 왕이 나서서 직접 세 친구를 설득하고 있습니다. 그 앞에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왕명을 어기면 수천도로 끓는 용광로에 던져져야 합니다. 그래서 결국 이 세 친구는 풀무불 속에 던져집니다. 여기서 우리는 전천후적인 믿음을 보게 됩니다. 전천후적인 믿음의 내용은 세 가지입니다.  

1. 어려울 때 좋은 믿음 

살아가다 보면 너무 힘들고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일이 너무 안 될 때, 실패했을 때, 고난당할 때 그때 믿음을 지키기가 참 힘듭니다. 그때 잃어버린 믿음을 되찾는 분도 있기는 합니다. 그런 분은 축복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조금 어려움이 오면 떨어져 나가는 분들이 많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믿음은 어려울 때 더 좋아지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그런 모습을 본문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지금 눈앞에 풀무불이 놓여있습니다. 여차하면 풀무불 속에 던져져야 할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을 포기하면 아무 일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에게 그런 상황이 주어진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런데 여기 세 친구들은 그때 믿음이 더 빛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신상에게 절하지 않겠습니다.” 신앙은 어려울 때 더 빛나고 확실해져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이고 신앙이고 신앙고백입니다. 전천후 믿음은 어려울 때 더 빛나는 믿음입니다. 


2. 일이 잘될 때 더 좋아지는 믿음 

일이 잘될 때 좋은 믿음은 당연한 것 아니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이 신앙의 삶이 이렇게 묘한 것입니다. 일이 잘되고 사업이 확장되고 건강이 좋아지고 살기가 편해지면 믿음이 더 좋아질 것 같지만 아닙니다. 월급 200만 원 받을 때 11조 헌금 드리기는 쉽습니다. 그런데 일이 참 잘되어서 월급이 2천만 원이 되었습니다. 더 감사해서 잘해야 하는데 그것이 잘 안됩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의 분량입니다. 일이 너무 잘되어 바빠지게 되면 열심히 봉사하고 헌신하던 것들도 다 내려놓는 분들이 있습니다. 마침내 주일도 지키지 못하고 일하는 분이 있습니다. 일이 너무 잘되니까 기도도 헌신도 주일도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일이 너무 안 될 때에도 조심해야 하지만 너무 잘될 때도 조심해야 합니다. 그 때에 좋은 믿음이 진정 좋은 믿음입니다.  

신학교에 가서 강의를 마치고 앞에 있는 음식점에 가서 식사하려고 하는데 음식점 앞에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습니다. 종업원들이 정신없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간신히 자리 잡고 방으로 안내받아 들어갔는데 벽에 교회 달력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 집이 기독교인이라는 말입니다. 반가워서 주인이 교회에 다니느냐고 물으니 집사님이라고 합니다. 너무 반가워 주인 얼굴 좀 보자고 하라 했더니 “지금 구역예배에 갔다”고 대답합니다. 지금 식사시간이라 손님들이 줄지어 서 있습니다. 일손이 모자랍니다. 그런데 주인은 일하는 분들에게 다 맡겨 놓고 구역예배를 드리러 갔습니다. 저는 순간 “그래 이 집이 이렇게 잘 되는 이유가 있어”라는 생각이 번쩍 들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때 구역예배는 상상도 못 합니다. 언제 구역예배에 가는가 하면 일이 잘 안되어서 손님이 없을 때 갑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수준에 오르면 생각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일이 잘 안될 때에도, 일이 너무 잘 될 때에도 좋은 믿음이 전천후 믿음입니다. 


3. 까닭 없이 잘 믿는 믿음 

본문에서 세 친구는 여차하면 풀무불 속에 던져질 판입니다. 지금 왕이 협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포기하라, 아니면 풀무불 속에 던지겠다.” 그때 이 세친구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풀무불 속에 던져 넣어도 염려 없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건져주실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상식적인 신앙고백입니다. 그렇게 믿는 믿음도 대단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더 빛납니다. “풀무불 속에 던져 넣어도 염려 없습니다, 하나님이 건져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 우리가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겠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이 건저주시지 않을 지라도 .... 상관없습니다” 그 말입니다.  이것이 까닭 없이 믿는 전천후 믿음입니다. 

오늘은 너무 이해타산적인 믿음시대입니다. 좋은 조건 앞에서는 믿음생활을 잘 합니다. 그런데 조금 어려움이 엄습해 오고 슬그머니 주저앉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던 일에 복을 주실 줄 믿고 헌신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기대한 것처럼 일이 잘 안됩니다. 그러면 슬그머니 실망이 찾아옵니다. 의기소침해 지고 회의가 찾아옵니다. 그 믿음을 “조건부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인에게 필요한 믿음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절대 믿음이고 전천후 믿음입니다. 

신앙생활 하다보면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어려울 때 기도하면 곧 응답이 옵니다. 그러면 얼마나 감사하고 기쁘고 행복합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런 경우 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풀무불 앞에 서 있는 성도들을 하나님이 급히 건져주셔야 하는데 그것이 우리의 바람인데 문제는 하나님이 그렇게 급히 개입하시는 빈도가 극히 낮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대부분은 그대로 풀무불 속에 던져져 죽도록 내버려 두십니다. 우리는 이 점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어려운 일이 발생했을 때 하나님이 턱 나타나셔서 위기 속에서 구해주시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면 하나님 좋고 나 좋고 사람들 앞에서 폼 잡을 수 있어서 좋고 전도되어서 좋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처신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세 친구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믿음의 세계를 깊이 들어가 보면 그런 고난 때에 보란 듯이 건져냄을 받아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 보다는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시간이 더 많았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왜 나를 버리십니까”하고 몸부림을 치실 때도 결국 하나님은 그를 죽도록 내 버려두셨습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순교한 분들이 순교하는 순간에 다 애절하게 기도했습니다. 위기에서 건져주시기를 기도했고 위기에서 헤어나기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기도했을 때 핍박자들 앞에서 보란 듯이 하나님이 해결하셨더라면 모두에게 영광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 하나님도 결코 손해 보는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철저하고 냉혹할 만큼 그냥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순교자들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라는 믿음을 가지고 순교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응답이 없다고, 복을 안 주신다고 불평하기에 앞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라는 믿음을 터득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믿음이 한 단계 성숙해 가는 나 자신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것이 성숙한 믿음, 전천후 믿음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일본의 엔도 슈사꾸라는 분이 “침묵”이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그 책을 보면 그런 점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포르투갈 예수회에서 일본에 페이라라는 신부를 선교사로 파송합니다. 그는 교토와 나가사키를 중심으로 39년 동안 은신하여 선교를 합니다. 그러다 어느 날 발각되어 구덩이 속에 매달려 고문을 받다가 그 고문이 너무 혹심해서 그만 항복합니다. 그 소식이 포르투갈 선교회에 보고됩니다. 고국에서는 큰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럴 리가 없다고 모두 의심하게 됩니다. 그래서 포르투갈 예수회에서는 세 명의 성직자를 확인 차 일본으로 파견합니다. 그중 한명은 로똘리고였는데 이 사람도 체포되어 마침내 수용소에서 페이라 신부를 만납니다. 나머지 두 명도 체포되어 고문당하는 동안 비명을 지릅니다. 그리고 끝내 그들이 보는 앞에서 순교합니다. 

이 두 사람이 그 순교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페이라 신부가 부르짖으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내가 배교한 것은 저 신음소리 때문이야, 저렇게 신음소리를 내며 죽어 가는데도 하나님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셨어, 저들이 주의 영광을 위해서 신음하고 부르짖으며 고통당하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잠자코 팔짱만 끼고 침묵만 하셨단 말이야” 하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로똘리고 신부도 두 친구의 신음소리를 듣고 페이라 신부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후미애를 발로 밟습니다. 후미애는 예수 상을 앞에 놓고 발로 밟고 지나가게 하는 배교 틀입니다. 그 예수 상을 발로 밟고 지나가면 배교로 인정하고 놓아주었습니다. 

그런데 밟지 않고 건너뛰면 앞에 있는 300도로 끓는 지옥 탕에 던져졌습니다. 로똘리고는 앞에 있는 사람도 건너뛰다가 지옥 탕에 던져지고 그 뒤에 있는 사람도 건너뛰다가 지옥 탕에 던져지고 또 그 뒤에 있는 사람도 똑같이 건너뛰다가 지옥 탕에 던져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로똘리고는 자기 차례가 왔을 때 그 많은 사람들이 주의 영광을 위해서 지옥 탕에 던져지는데도 하나님이 아무런 액션도 취하지 않고 건져 주시기는 커녕 살인자들에게 재앙도 내리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로똘리꼬는 마침내 후미애를 발로 밟고 살아납니다. 

여기서 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침묵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람들이 고통을 이겨가며 신앙고백을 할 때 하나님이 금방 나타나셔서 불이라도 내려 핍박자들을 심판하시던지 아니면 300도로 끓는 지옥 탕에 던져졌을 때 기적같이 건져주셔서 지켜보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보란 듯이 액션을 취하셔야 나도 살고 하나님도 영광 받으시고 그래야 불신자들이 보고 하나님을 믿을 것이 아닙니까. 그곳이 우리의 바람이고 기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답답하게 끝까지 묵묵부답 침묵으로 일관하고 결국 귀한 생명들이 말없이 지옥 탕으로 떨어져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로똘리고 신부도 마침내 하나님의 침묵 속에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는 수많은 순교자들이 비명소리에 그만 후미애를 밟고 항복하고 맙니다.  

믿음의 세계를 우리는 너무 피상적으로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잘되고 건강하고 앞길을 훤히 인도해 주실 것으로만 믿는 믿음이 오늘 대부분의 믿음입니다. 그래서 조그만 어려움이 찾아오면 기대와 어긋난다고 고개를 갸우뚱하고 회의감에 빠지고 불평에 빠지기 쉽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세계가 그 정도의 깊이라면 그것은 믿음도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이 사뭇 흔들리고 좌초되고 그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다니엘의 세 친구는 하나님이 이 위기에서 건져주실 줄 믿었습니다. 그러나 건져주시지 않을 지라도 우상에게 절할 수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세 친구는 결국 풀무불 속에 던져졌습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들려오는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왜 나를 버리십니까”하고 절규했지만 예수님은 그 절규에도 침묵하시는 그 침묵 속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이 침묵속의 음성을 들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침묵 뒤에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어야 그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탓하기 전에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모르는 나 자신을 탓해야 합니다. 그래야 침묵 속에 감추어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와 깊으신 경륜의 세계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 믿음이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믿음 즉 전천후 믿음인 것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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