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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살아있는 간증 (요 12: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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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간증 (요 12:9~11)
  

“그리스도인들에게 최고의 영예가 과연 무엇일까?”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누군가 나를 가리켜 이렇게 말할 때 가장 영광스러울 것 같습니다. “내가 OOO 때문에 예수님을 믿게 됐다!” “내가 OOO 때문에 은혜를 받는다!” 그렇습니다! 흔히 많은 사람들은 세상의 권세나 명예를 영광스러운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런 것들은 잠시 있다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영원히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것은 나 때문에 누군가 예수를 믿게 되고, 나 때문에 누군가 은혜를 받고 변화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과거 자신이 추구하고 성취했던 세상의 부귀와 권세를 결코 자랑거리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배설물로 여겼습니다.(빌3:8 참조) 그리고 이제 새로운 자랑거리를 찾았습니다. 살전2:19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무슨 말입니까?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이 바울에게 전도 받고 양육 받은 사람들입니다. 말하자면 바울 때문에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두고두고 천국에 가서도 자랑거리가 될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단12:3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 ...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나 때문에 많은 사람이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면 나는 하늘의 별과 같은 존재가 된다는 겁니다. 한 마디로 ‘천국의 스타’가 되는 겁니다. 세상의 스타는 문자 그대로 반짝하고 사라집니다. 그러나 천국의 스타는 영원합니다. 진정 그리스도인의 최고 영예는 나 때문에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반대로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큰 수치는 무엇일까요? 다른 사람들로부터 이런 소리를 듣는 겁니다. “내가 OOO 때문에 예수 못 믿겠다!” “내가 OOO 때문에 시험에 든다!” 

구약 성경을 보면 ‘요나’라는 인물이 그랬습니다. 그는 선지자로 하나님으로부터 니느웨로 가서 말씀을 증거하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싫어서 분순종하고 다시스로 도망갑니다. 배를 타고 한참 가는데 광풍이 붑니다. 배가 파선 지경이 됩니다. 요나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배를 타고 있던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기도합니다. 욘1:14 “무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 때문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 ” ‘요나 때문에’ 자기들이 죽게 생겼다는 겁니다. 사람들을 구원하는 선지자가 오히려 사람들을 죽이는 꼴이 되었으니 정말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옛날 제가 부교역자로 시무하던 교회에서 경험한 일입니다. 하루는 여전도사님과 어느 여집사님 가정에 심방을 갔습니다. 그런데 약속이 잘못되어서 집사님은 외출 중이고, 아직 교회에 나오지 않는 며느리만 있었습니다. 난감했지만, 전도할 기회다 싶어 양해를 구하고 집에 들어갔습니다. 그 며느리는 마지못해 찬송도 따라 하고 말씀도 들었습니다. 예배 후 대화를 하다가 넌지시 권유했습니다. “이제 어머님 모시고 함께 교회에 나오시죠. ” 그랬더니 야릇한 표정을 지으며 대뜸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요, 우리 어머니 때문에 예수 믿고 싶지 않아요.” 당돌하다고 느꼈지만, 한편으로 평소 좋은 성도로 생각하던 그 시어머니가 가정에 어떻게 처신했기에 저러나 생각하면서 무척 당황했습니다. 다행히 나중에 두 사람의 관계가 좋아지고 며느리도 교회 나와서 예수를 믿게 되었지만, 그 일이 저에게 오랫동안 안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시험 당하고 실족하면, 그건 정말 큰 수치요 죄악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심지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마18: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남을 실족시키는 것은 큰 맷돌을 달아 물속에 빠뜨리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이라는 뜻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떤 케이스에 해당됩니까?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주님께로 돌아옵니까? 아니면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시험을 당하고 주님에게서 멀어집니까? 이런 것들은 항상 나 자신에게 던져야 할 질문들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 보니까, 한 사람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주님께로 돌아온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나사로! 본문 11절을 보면, 어떤 표현이 나옵니까? “나사로 때문에 ... ”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도 “OOO 때문에 내가 예수 믿게 됐다” “OOO 때문에 내가 은혜를 받았다” 이런 말을 들을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부끄러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영광스런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1]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 : 살아있는 간증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나사로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죽었다가 예수님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난 사람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예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란 사실에 대한 명백한 증거, 다시 말하면 ‘살아있는 간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은 본문 바로 앞 장 1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건은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많은 이적들 중에서 최고의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기적들을 행하셨나요? 각종 병든 자 고치시고, 시각장애인을 눈 뜨게 해 주시고, 귀신을 쫓아 주시고, 풍랑 이는 바다를 잔잔케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 그런데 나사로는 살린 사건은 죽은 지 무려 나흘이 지난 후에 일어난 기적입니다. (요11:39 참조)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들은 죽은 자를 살려도 가사 상태에서 깨어났다는 둥 허튼 소리를 하면서 안 믿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전혀 꼬투리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죽은 지 4일이 지나서 시체에서 냄새가 진동하는 상황에서, 그것도 많은 조문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일어난 사건인데 어찌 부인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이 사건이 일어나자마자 그 소문이 급속도로 퍼져 나갔습니다. 그리고 나사로의 가족들은 너무 기뻐서 예수님과 나사로를 위한 잔치를 벌였습니다.(요12:1~2, 마26:6~13 참조) 이 일은 베다니에서 일어났는데, 베다니는 예루살렘 동남쪽 3 km 지점에 위치한 동네로 나사로, 마르다, 그리고 마리아 등 3남매가 살던 곳입니다. 그리고 잔치가 벌어진 곳은 ‘나병환자 시몬’의 집이었습니다. 당시 나병환자들이 마을에 거주할 수 없었던 점을 감안하면 아마도 시몬이 나병에 걸렸다가 예수님의 능력으로 치유된 게 아닌가 짐작됩니다. 혹자는 시몬이 마르다의 남편이었다고 주장하는데, 확실치는 않습니다. 

어쨌든 큰 잔치가 벌어졌는데, 마침 그 때가 유월절 명절이 가까운 시기라 예루살렘으로 가는 순례객의 인파가 그 소문을 듣고 몰려들었습니다. 9절을 보시죠.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보기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는 사람들에게 호기심과 감동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나사로도 보고 그를 살리신 예수님도 보기 위해서 구름떼처럼 몰려든 것입니다. 

그 후 어떤 결과가 생겼습니까? 요12:11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나사로 때문에 은혜 받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는 겁니다. 얼마나 대단했는지 요12:19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 하니라” 예수님을 반대하던 바리새인들이 위기감을 느끼면서 한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느낄 정도였습니다.

정말 나사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분명하게 증거하는 하나의 물증이었습니다.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는 ‘살아있는 간증’이었습니다. 물론 나사로가 증거하지 않아도 예수님은 본래부터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이십니다. 그러나 무지하고 완악한 인간들이 예수님을 몰라보고, 심지어 배척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나아가 세상 사람들을 위해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나사로처럼 우리도 살아 있는 간증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게 바로 그리스도인의 가장 귀한 사명이요, 그 사명을 잘 감당하는 것이 우리의 자랑이요 영광입니다. 아무쪼록 저도 여러분도 이런 삶을 살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2] 살아있는 간증이 되는 삶 : 예수님의 능력과 인격을 나타내는 삶

그러면 과연 우리가 어떻게 해야 나사로처럼 ‘살아 있는 간증’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나의 삶 속에 ‘예수님의 능력’과 ‘예수님의 인격’이 나타나면 됩니다. 그럴 때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믿기 때문에 별 어려움이 없이 성경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성경을 보지도 않을 뿐더러, 본다 할지라도 잘 모릅니다. 당연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이심을 믿을 수 없습니다. 당연히 천국이 실재하는 사실과 오직 예수 믿는 사람들만 그곳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믿는 우리가 물증을 제시해 줘야 합니다.

① 예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삶 :

먼저 우리의 삶 속에 나타난 예수님의 능력을 보여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려주시기 전에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요11:25~26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은 당신을 가리켜 죽은 자를 살리는 부활의 주님, 생명의 주님이라고 증거하셨습니다. 이제 그를 믿는 자는 죽어도 천국에 들어가 영원히 살고, 살아서 믿으면 육신의 죽음은 천국에 들어가는 관문일 뿐 죽고 끝나는 게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보란 듯이 분명한 물증으로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우리가 고난과 시련을 당할 때면 때때로 의기소침해지기 쉽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성경 인물 중 어느 누가 항상 형통함으로 주님의 영광을 나타낸 사람이 있는지 ... ? 전혀 없습니다. 고난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고,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 사람들이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다니엘이 그랬고(사자굴), 요셉이 그랬고(노예, 감옥살이), 모세가 그랬습니다.(홍해, 광야, ...) 

하나님은 항상 위대하시고, 항상 영광스러운 분입니다. 그런데 평소에는 모릅니다. 고난의 때에 비로소 하나님을 만나고 그 위대하심을 체험합니다. 마치 이런 것과 같습니다. 하늘의 별이 낮에도 있고, 여전히 빛납니다. 그러나 사람의 눈에는 밤에 빛나는 것입니다. 아주 캄캄한 밤중일수록 ... 그러므로 여러분! 고난의 때에 낙심하지 말고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오, 주님! 고난 가운데 주님의 능력을 보여 주옵소서!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그래서 주님의 능력으로 고난을 이겨낸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예수 믿게 하옵소서! 은혜도 받게 하옵소서!” 그렇게 하시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시고, 역사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② 예수님의 인격을 나타내는 삶 :

다음으로는, 우리의 삶 속에 예수님의 인격을 나타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 속에 예수님이 들어오시는 겁니다. 그로부터 우리는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그를 닮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2:5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빌2:5 “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 ” 우리에게서 예수님의 인격이 풍겨 나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갈5:22~23 보면 성령의 열매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여기 열거된 것들은 하나하나 예수님의 성품과 인격을 나타냅니다. 사랑의 열매는 미워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예수님처럼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희락의 열매는 슬퍼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예수님처럼 기뻐하는 모습입니다. 화평의 열매는 불안해 할 수박에 없는 상황에서 예수님처럼 평안해 하는 모습입니다. 오래참음의 열매는 조급하고 힘든 상황에서 예수님처럼 잠잠히 인내하는 모습입니다. 이런 식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어 가면 우리 주변 사람들이 우리의 모습에서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이런 삶을 살아가는 것은 엄청난 기적을 보여주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일입니다. 

스웨덴의 장애인 가수 레나 마리아(Lena Maria 1968~ )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가스펠 가수이면서, 장애인 수영 국가대표입니다. 88서울장애인올림픽에 참가했고, 그 후에도 우리나라에 와서 몇 차례 콘서트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의 몸은 태어날 때부터 양 팔이 없고, 한쪽 다리는 짧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으로 양 팔이 생기고 발이, 한쪽 다리가 길어졌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러나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모신 그의 마음, 그의 인격은 예수님처럼 변화되었습니다. 정상인처럼 아무런 구김살 없이 지냅니다. 항상 기뻐하며 해맑은 미소를 보여줍니다. 그런 심령에서 나오는 목소리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래서 그를 가리켜 많은 사람들이 ‘천상의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라고 칭송합니다. 

한번은 그가 공연을 앞두고 TV에 출연한 자리에서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레나, 당신은 왜 그렇게 밝을 수 있죠?" 그는 머뭇거림이 없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 그거요?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내 삶을 움직이고 계시며, 내가 필요한 것을 채우시며, 또 내 곁에서 위로해 주시고 새 힘을 주시니까요.”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건 기적이 아닙니까? 놀라운 인격의 변화! 이것도 기적입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이런 방식으로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그런고로 우리 중에 누구도 형편이나 조건 때문에 예수님의 능력이나 인격을 나타낼 수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있는 곳에서 예수님을 마음 속에 모시고 살아가면 얼마든지 예수님을 증거하는 살아있는 간증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그렇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3] 증인의 삶의 중요성 : 세상 사람들에 영생의 길을 제시하는 것 

우리가 살아있는 간증이 되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이 일은 세상 사람들에게 영생의 길을 제시해 주는 엄청난 일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믿습니다. 예수님만이 오직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입니다. 요1:4 “그(=예수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모든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 살 동안 사망 그늘 아래 우울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의 빛을 받으면 행복해집니다. 영원히 삽니다. 죽어도 천국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요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예수 믿는 것은 영원한 생사(生死)의 갈림길에서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증거하는 것은 바로 그 갈림길에서 사람들을 구원해 내는 귀중한 일입니다.

지난 주간 탤런트 최진실 씨의 자살 사건으로 많은 분들이 충격을 받았을 겁니다. 저도 영화나 TV를 많이 보는 편이 아닌데도 마음이 너무 이상했습니다. 국민 배우라는 칭호처럼 우리도 모르게 우리 마음 속에 자리를 잡고 있었나 봅니다. 너무 안타깝고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채업자라는 인터넷의 악플 때문에 그랬다, 우울증을 앓았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가 많습니다. 여러 보도를 보다가 일간 신문의 칼럼과 사설 제목이 제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최진실, 미안하다!” 그의 죽음은 이 사회의 공동 책임이라는 겁니다. “최진실 씨, 그쪽은 탈출구가 아닙니다!” 아무리 괴로웠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주신 고귀한 생명을 스스로 끊은 자살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저에게 개인적으로 가장 충격적이었던 그가 교회에 다녔던 분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제대로 예수님을 만났었다면 안 그랬을 텐데, 교회 공동체 안에서 예수님의 사랑으로 위로받을 수 있었다면 안 그랬을 텐데 ... 그런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 교회 목사님의 이야기가 신문에 조금 언급된 것을 읽어보았습니다. 평소에 “김혜자 선생님처럼 살고 싶어요!” 이런 말을 했다는 겁니다. 그 기사를 읽으면서 더욱더 아쉬웠습니다. 정말 예수 잘 믿어서 정말 본인도 시련을 잘 극복함으로 기뻐하고, 탤런트 김혜자 권사님처럼 혹은 세기의 여배우 오드리 헵번처럼 아프리카에 가서, 아니 국내에서라도 살아있는 간증으로 계속 살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어디 최진실 씨뿐이겠습니까? 우리 주변에 겉은 번듯해 보이지만 우울증으로 시달리는 사람들, 이런 저런 인생고로 시달리는 사람들, 사망의 어둠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나라 우울증 환자는 인구의 7.5%인 375만 명으로 추산된다고 하니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죠. 또 10명 중 1명이 자살 충동을 자주 느끼고, OECD 국가 중에서 자살률이 최고라는 통계도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먼저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이 큽니다. 우리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서 생명으로 나아가게 해줘야 합니다.

여러분! 이 가을에 ‘나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기를 소원합니다. 다가오는 「새생명축제」를 준비하면서 그저 연례적인 행사로 지나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런 기회에 죽어가는 인생을 살려내는 겁니다. 너무 너무 중요한 일입니다. 아무쪼록 오늘 말씀을 마음 속에 되새기면서 나사로처럼 ‘살아있는 간증’이 되셔서 나 때문에 많은 사람이 예수께 돌아오는 역사가 넘쳐나기를 소원합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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