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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결코 포기하지 맙시다 (느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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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포기하지 맙시다 (느 4:1~6) 

  
어떤 교인이 목사님을 찾아와서 “목사님, 저는 은사가 꼭 하나밖에 없어서, 쓰임 받는 인생을 살아갈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목사님은 “기독교 역사에는, 단 하나의 은사를 가지고도, 주님 나라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의 기록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하면서, “한 가지 은사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잠시 주저하더니 “비판의 은사인데요”했다. 목사님은 다시 “그렇군요. 저는 그 은사도 유익하게 쓰여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단, 그 은사를 가지고 남을 비판하지 말고, 자신을 비판하는 일에 쓰신다면 말이다”라고 대답했다. 비판은 가끔 긍정적지만, 대부분 부정적이다. 

긍정적인 비판은, 거의 분별과 동의어로 쓰인다. 분별의 동기는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개인과 공동체를 세운다. 그러나 부정적인 비판은, 개인과 공동체를 무너뜨린다. 이런 비판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탄에게서 온다. 성경은 이런 비판을 삼가 해야 한다고 말한다. 

(마7:1-2)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라고 하셨다. 우리는 이런 비판 때문에, 흔들리거나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최진실 씨가 사채업 괴담 때문에, 너무 마음이 상해서, 그만 자살했다. 우리는 대개 누가 사고를 당하고, 누가 이혼하고, 누가 큰 어려움을 당했다고 하면, 그걸 남의 이야기로만 듣는다. 어느 순간 나에게도 닥칠 수 있는, 이야기인데도 말이다. 

우리는 특별히 문제가 있는 사람들에게만, 그런 일이 닥친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란다. 사고를 당한 사람들도, 모두 다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결코 시험이나 방해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 뜻대로 살아도, 시험도 있고, 핍박도 있고, 방해도 있다. 

사단의 사명은 성도를 실패하게 만들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지 못하게 방해한다. 우리가 무너진 가정을 살리고, 사회를 살리려고 할 때, 사단은 절대 가만히 있지 않는다. 사단은 꼭 방해를 하기에,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실패하고 만다. 

사단은 지금도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고 있다. 어떤 때는 환난으로, 어떤 때는 유혹으로, 어떤 때는 낙심으로, 또 교만으로 넘어뜨리려고 한다. 그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승리하는 종이 되시기를 바란다. 

본문을 보면, 느헤미야 때 유다 백성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다가 중단해야 될 정도로 낙심한 일이 있었다. 낙심은 마음을 상하게 하고, 의욕을 상실하게 한다. 말하기도 싫어지고, 밥맛을 잃게 된다. 만사가 귀찮아지고, 생각하기 싫어진다. 기운이 떨어지고 어깨가 축 늘어진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병이 되고, 자살하게 된다. 낙심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신앙인도 낙심할 수 있다. 고라 자손은 (시42: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하였다. 

낙심하는 때가 올 수 있기에, 우리는 낙심을 극복하는 삶을 배워야 한다. 사단은 우리가 낙심하여 인생을 포기하기 원하므로, 사단과의 전쟁에서 싸워 이기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낙심한 원인을 살펴보고, 그것을 극복하는 성경의 지혜를 얻고자 한다. 

1. 낙심하는 이유 

(1) 대적들의 비웃음 때문이다(1-3). 

“산발랏이 우리가 성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크게 분노하여 유다 사람들을 비웃으며, 자기 형제들과 사마리아 군대 앞에서 일러 말하되, 이 미약한 유다 사람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스스로 견고하게 하려는가, 제사를 드리려는가, 하루에 일을 마치려는가, 불탄 돌을 흙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 하고, 암몬 사람 도비야는 곁에 있다가 이르되, 그들이 건축하는 돌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하더라.” 

페르시아의 총독 간교한 산발랏은, 유다 백성이 성을 건축한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분노하였다. 산발랏은 예루살렘 성이 재건되기를 원하지 않아서, 듣고 크게 분노하였고, 유다 사람들을 비웃었다. 저들이 건축하는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무너진다고, 약을 올렸다. 

성도가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할 때, 제일 먼저 쓰는 방법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비웃는 일이다.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면, 여기저기서 자꾸 훼방을 놓는 무리들이 있다. 뒤에서 사단이 조종하기 때문이다. 

교회 일 좀 하려고 하면, “저 사람은 실업자라서 시간이 많잖아, 그러니까 저렇게 열심이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소리를 들으면, 일할 맛이 나지 않는다. ‘내가 할 일이 없어서, 이러는 줄 아냐? 나도 바쁜 사람이라고, 이렇게 치사한 소리 듣느니, 교회 일 안하고 말지’하며 그만 두게 된다. 

또 등록한지 얼마 안 된 성도가 하나님 앞에 충성하려고 하면, “도대체 교회 나온 지 며칠 됐다고 저렇게 설쳐대는 거야? 조용히 좀 지내지?”하면, 기운이 빠져서 “그래 나는 교회 나온 지 1년 밖에 안 됐다. 그러니 교회 나온 지 오래된 너 혼자 해라”하고 만다. 다 사단의 장난이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중단하는 이유는, 주변의 비웃음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의 한두 마디 말 때문에, 넘어지는 사람이 많다. 몽둥이와 돌멩이는 뼈를 부러뜨리지만, 잘못된 말 한마디는 영혼을 다치게 한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나, 탤런트는 사람의 눈에 쉽게 띄기에, 그만큼 공격도 많이 받는다. 따라서 말 때문에 넘어지는, 약한 성도가 되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하라. 말 때문에 쓰러지면, 큰 인물이 되지 못한다. 악한 마귀의 심리전에 넘어지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2) 위협에 무너졌기 때문이다(7-8).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아스돗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이 중수되어, 그 허물어진 틈이 메꾸어져 간다 함을 듣고, 

심히 분노하여 다 함께 꾀하기를, 예루살렘으로 가서 치고, 그 곳을 요란하게 하자 하기로” 요란하게 하자고, 위협을 하였다. 위협은 너희가 이렇게 하면, 이득이 없다. 불이익을 당하게 된다는 협박이다. 악한 사람들이 연합해서 공격하려고 한다. 그들의 힘이 강하게 느껴진다. 

“내가 너희를 치겠다, 봐라 사마리아 군대가 얼마나 많으냐? 여기에 아라비아 사람, 암몬 사람, 아스돗 사람이 함께 연합해서 가면, 너희는 꼼짝없이 당할 것이다”라고 위협을 한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분명히 불이익이 올 수 있다. 

이러한 불이익과 위협 속에서도, 오히려 싸워 이기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 회사생활을 할 때도, 이런 위협이 있을 수 있다. 회식자리에서 술을 먹지 않으면, 괴로게 된다. 왕따를 당하거나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 

대학교 신입생 오리엔테이션도, 거의 다 술 먹는 분위기다. 밤만 되면 좋다고 어깨동무하고, 술을 엄청나게 마신다. 4년 동안 잘 버텨 내려면, 같이 동조하라. 군대에 가도, 술을 먹게 만든다. 가족들 모임에서도 술을 먹게 만든다. 같이 잘 지내려면 먹어야 한다고, 억지로 먹인다. 

그러나 이러한 위협에 무릎을 꿇게 되면 안 된다. 차라리 왕따가 되시기 바란다. 차라리 불이익을 당하시기 바란다. 협박에 무릎 꿇지 말고, 오히려 협박을 이김으로, 영향력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 바란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패배일지 모르지만, 이것이 승리인 줄 믿는다. 


(3) 힘이 쇠하여, 감당할 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10). 

“유다 사람들은 이르기를, 흙무더기가 아직도 많거늘, 짐을 나르는 자의 힘이 다 빠졌으니, 우리가 성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하고” 

업신여김과 조롱당하며, 생명의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 마음이 위축되었기에, 유다 백성의 눈에는 흙무더기가 아직도 많이 남아 보였다. 자기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아 보였다. 감당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 눈앞에 남아 있는 일은, 더욱 많아 보이기 마련이다.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낙심하게 된다. 육신의 힘이 쇠약하거나, 피곤해지면, 낙심할 수 있다. 대적들은 방해하고, 아직도 할 일은 산더미 같고, 육신의 힘마저 쇠약해질 때 낙심하게 된다. 더욱이 고치기 어려운 병이 들면 남아 있던 기력이 더 떨어지고 만다. 

최진실 씨가 보통은 45Kg정도였지만, 죽을 때의 몸무게는 31kg 이었다 하니, 얼마나 괴로웠는지 육신이 얼마나 쇠약했는지 알 수 있다. 그래서 낙심하여 주저앉게 되었다. 그대로 주저앉으면, 일을 영영 끝내지 못할 수 있다. 사탄은 이런 방법으로, 하나님의 사람과 하나님의 사역을 파괴한다. 

육신적으로 지치면, 엘리야처럼 스스로 포기하게 된다. 우리는 무슨 일로 인하여 낙심할 수 있고, 실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주저앉고 일어서면, 영향력을 발하는 인생이 될 수 있다. 힘들어 포기하고 싶을 때, 절망하지 말고,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에게 새 힘을 주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일어서라. 


2. 어떻게 낙심을 극복할 수 있는가?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을 중건할 때, 이런 파괴적인 비판을 받았지만, 훌륭하게 극복하였다. 따라서 그에게 파괴적 비판에 대한 처방을 배우자. 

(1) 기도해야 한다(4-5).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우리가 업신여김을 당하나이다, 원하건대 그들이 욕하는 것을 자기들의 머리에 돌리사, 노략거리가 되어 이방에 사로잡히게 하시고, 

주 앞에서 그들의 악을 덮어두지 마시며, 그들의 죄를 도말하지 마옵소서, 그들이 건축하는 자 앞에서 주를 노하시게 하였음이니이다 하고.” 느헤미야와 사람들은, 모멸감과 분노를 느꼈다. 그때 느헤미야는 기도한다. 사단의 말과 조롱을 묵상하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도하여 이기자. 

업신여김을 당하니, 그들이 욕하는 것을, 자기들의 머리에 돌리소서, 이런 자들은 용서하시지 말라고 기도했다. 지나친 기도라고 느껴지지만, 오죽하면 그런 기도를 했을까? 얼마나 억울하게 느꼈으면, 이런 기도를 했을까? 

자신을 공격하는 상대방을, 직접 대응하지 않고, 문제를 가지고 주님께 나와 기도하였다. 하나님께 아픈 심정을 토해냈다. 성경학자들은 느헤미야의 이런 저주기도가, 과연 성경적인가를 논의하기도 한다. 

유명한 문학가요, 기독교 변증가 C.S. Lewis가, 구도자시절 성경을 읽으며 부딪친 첫 번째 문제다. 그는 기독교를 알아보기 위해 시편을 읽었다. 아름다운 시편을 기대하고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원수에 대한 저주가 기록되어 있음을 보고 “이것이 어떻게 성경인가?”라는 물음이 생겼다. 

그러나 말씀을 묵상하다, 성경은 인간의 감정에 가장 정직한 책이며, 성경의 하나님 특히 시편의 하나님은 “누군가를 저주하고픈 마음까지도, 받아주시는 하나님”을 깨닫게 되었다. 느헤미야는 이런 하나님을 알고 있었다. 

어떤 불평과 좌절, 어떤 감정을 쏟아 놓아도, 넉넉히 들어주시고 받아 주시는 그 하나님께, 자신의 억울한 감정을 쏟아놓고 있다. 억울한 일이 있고, 복수하고 싶은 원수가 있는가? 하나님께 토해내라.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 쏟아 놓으면, 나무라지 않고, 들어주시고 도와주신다. 

우리는 대적들보다도 크신 하나님을 바라볼 때, 낙심을 극복할 수 있다.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때, 낙심을 극복할 수 있다. 대적들의 업신여기는 소리보다, 하나님의 약속에 귀를 기울일 때, 낙심을 극복할 수 있다. 

전도할 때 ‘교회 나가면, 누가 밥 먹여 주냐?’며, 면박을 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럴 때면 “그럼요, 우리 교회는 밥만 아니라, 떡과 과일도 준다. 같이 가서 먹자”고 말하면 된다. 그러면 누가 비웃을 수 있는가? 더 이상 비웃을 수가 없다. 

비웃음과 조롱을 퍼붓는데도, 상대가 눈썹도 까딱하지 않으면, 비웃은 사람이 더 화가 나게 되어 있다. 억울한 일을 당하여 낙심될 때, 한바탕 하지 말고,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 나와 호소하시기 바란다. 억울하게 비판당하고 공격당할 때, 기도하기를 잊지 마라. 기도는 역전시키는 능력이 있다. 


(2) 포기하지 말고, 맡겨진 일에 전념해야 한다(6). 

“이에 우리가 성을 건축하여, 전부가 연결되고, 높이가 절반에 이르렀으니, 이는 백성이 마음 들여 일을 하였음이니라.” 

느헤미야를 공격했던 원수들의 작전은, 일종의 김빼기 작전이다. 이렇게 해서, 예루살렘 성을 건축할 의욕을 좌절시키려고 하였다. 그때 실망하여 건축하지 포기했다면, 원수들은 얼마나 기뻐했을까? 이것이 바로 사단의 작전이다. 사단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다. 

사단은 하나님의 사역이, 진전되지 못하게 하는데 있다. 다행히 느헤미야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작전에 말려들지 않았다. 적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맡은 일에 여전히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부당한 비판 혹은 조롱을 받고 느끼면, 포기하지 말고 기도하라. 맡겨진 일에 전념해야 한다. 

뉴욕 양키스에는, 약을 잘 올리는 유명한 포수, ‘요기 베라’가 있었고, 밀워키에는 전설적인 강타자 ‘행키 아론’이 있었다. 월드시리즈 마지막 결승전에서 맞붙었다. 요기 베라는 타석에 들어서는, 행키 아론의 집중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아론을 놀려대기 시작했다. 

“자네 방망이를 잘못 쥐고 있잖아. 그 방망이 상표를 읽을 수 있도록 잘 잡아야지” 행키 아론은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고, 투수가 다음에 던진 공을 공략하여, 홈런을 만들어 냈다. 그가 홈베이스를 밟으면서, 그는 상대방 포수 요기 베라에게, 유명한 한 마디를 했다. 

“이보게 요기 베라, 나는 상표를 읽으려고, 타석에 서지 않았어!” 아론은 집중력을 분산시키려는 전술에 말려들지 않고, 목표에 전념하여 승리자가 되었다. 인류역사에서 가장 의미 있는 발전들은, 비판과 조롱을 극복하고, 사명감을 따라 일했던 사람들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인류 역사상 첫 번째 증기 기관선이, 뉴욕에서 알바니를 향해 떠났을 때, 지금 1시간이면 충분한 거리인데, 무려 32시간이 걸렸다. 첫 번 자동차를 시운전을 했을 때, 말이 끄는 수레보다도 늦었다.  첫 번째 전구가 실험됐을 때, 그 전구는 너무 희미하여, 가스램프로 비쳐 보아야만 했다. 

첫 번째 비행기가 하늘로 올려 졌을 때, 그것은 공중에 불과 59초를 머물다가 곤두박질하여 내려 왔다. 사람들은 무모한 일을 한다고, 조롱하고 비판했다. 그러나 이런 비판과 조롱을 받은 사람들의 공통점 하나가 있다. 그것은 그들이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맡은 일에 집중했다. 조롱과 비판이 있어도, 포기하지 마시기 바란다. 실패하고 넘어졌으면, 다시 일어나면 된다. 7번 넘어지면, 8번 일어나면 된다. 우리는 포기할 수 없다. 이루어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발명왕 에디슨은 만 번을 실패해도, 실험을 포기한 적이 없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포기하지 않으셨다. 가룟유다는 포기했기에 회복될 수 없었다. 영국의 윈스턴 처칠의 유명한 졸업식 축사, Never give up!, Never, Never, Never를 기억하시기 바란다. 

베토벤은 귀가 들리지 않고, 우울증과 싸워야 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기에, 더 훌륭한 악성이 되었다. 반복해서 죄를 범하기도, 너 같은 사람이 무슨 교회에 나가느냐는 소리를 들어도, 포기하지 말라. 나는 안 된다고 하면서, 포기하지 말라. 

가정에 대해서 포기하지 말라. 많은 사람이, 1년 동안 기도했는데, 나의 가정이 변화되지 않는다. 2년 동안 기도했는데, 아버지가 변화되지 않고, 어머니가 변하지 않는다고 포기하지 말라. 21일 작정 기도회를 했는데도, 응답이 없다고 포기하지 말라.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응답하신다. 

3마리 개구리가 우유 통에 빠졌다. 그 중 1마리는 운명이라 생각하여, 체념하고 거기에서 죽었다. 또 1마리 개구리는, 도무지 우유 통을 벗어날 수 없다면서, 한숨만 쉬다가 죽어갔다. 그러나 세 번째 개구리는, 우유 통에 빠진 현실을 직시하고, 코끝을 밖으로 내놓은 채 침착하게 헤엄을 쳤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자 개구리의 발끝에, 무엇인가 닿기 시작하였다. 개구리가 헤엄을 치는 동안, 우유가 굳어 버터가 되었다. 그래서 3번째 개구리는, 무사히 우유 통을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체념은 운명보다 더 무섭다. 자살할 용기가 있으면, 그 힘과 용기로 살아보자. 


(3) 하나님을 기억하고 힘을 내라. 

아무리 사명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도, 계속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육신적으로 지치게 되면, 낙심하게 될 수 있다. 이때 우리가 할 일은, 크신 주님을 기억하는 일이다. 하나님을 바라보라. 

따라서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억해야 한다. (14) “내가 돌아본 후에 일어나서, 귀족들과 민장들과 남은 백성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고, 너희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싸우라 하였느니라.” 

그는 어려움을 당할 때 돌아보았다. 그때마다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다. 대적들을 볼 때는 겁이 났다. 그러나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기억할 때는, 용기를 얻어,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싸울 수 있었다. 우리의 하나님은 크시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다. 

자기 백성은 홍해를 마른 땅같이 건너게 하시고, 애굽의 군사를 물에 잠기게 하신 하나님이시다. 낙심보다 더 큰 재앙이 있다면,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하나님만 잊어버리지 않으면, 언제라도 재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모든 것을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에 대한 핍박이 절정에 달했을 때, 말할 자유도, 밖으로 돌아다닐 자유조차 잃었을 때, 서로를 격려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할 수 있었던 일은, “하나님, 예수님을 기억하십시오.” 이 한 마디를 새기는 일이다. 

이 세상에 기다림은, 고독하고 허무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은 예수님을 기다림이 결코 헛되지 않다. 반드시 응답되어진다. 강철 왕 카네기의 사무실 한 가운데는, 낡고 커다란 그림 하나가 평생 동안 걸려 있었다. 

걸려있는 그 그림은, 유명한 화가의 그림도 아니었고, 골동품적인 가치가 있는 그림도 아니었다. 커다란 나룻배와 배를 젓는 노가 썰물 때 밀려서, 모래사장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는 그림이었다. 무척 절망스럽고 처절하게 보이는 그런 그림이었다. 

그런데 그 그림 밑에는, 한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반드시 밀물의 때는 온다!” 결론의 말씀은 ‘닉 부이치치’의 동영상을 보자. 힘들어 쓰러질 수밖에 없어도,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고, 하나님의 사명을 
기억하고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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