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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의 증인이 되라 (행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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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증인이 되라 (행 1:6~14)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라고 기억됩니다만 1968년에 ‘국민교육헌장’이 발표되어 모든 학생들에게 외우게 했었습니다.  저도 당시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열심히 외웠습니다.  이렇게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이것은 반공과 민족중흥이라는 통치세력의 이데올로기를 담아 선포할 당시부터 정치적 논란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긍정적으로 보면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국가관을 확립하는 데는 더 없이 좋았다고 봅니다.  이 땅에 태어난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그야말로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갖고, 수고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보통 인간을 ‘사명적 존재’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이 땅에 태어나 한평생 사는 것은 그냥 사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먹고 자고 그렇게 의미 없이 살다가 간다면 그것은 동물이나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인생은 의미가 있고, 또 있어야 합니다.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왜 사는지, 무엇 때문에 사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물으면서 인간답게 사는 것이 인간의 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스위스의 철학자 칼 히티는 말했습니다.  ‘인간생애의 최고의 날은 자기의 사명을 자각 하는 날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새롭게 태어난 우리도 신앙적인 관점에서 보면 부름에 분명한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명을 알아야 하고, 그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본문은 바로 그 사명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 예루살렘, 유다, 사마리아, 땅 끝까지 가야 합니다.  이것은 공간적인 의미에서의 영역을 말하기도 하지만, 시간적인 의미에서 증인의 사명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점점 확산된다는 뜻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복음은 예루살렘부터 시작되어 땅 끝까지 갔습니다.  우리가 이런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주님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처럼 고백해야 합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그렇게 우리가 사명을 감당해야 하고, 주님의 증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본문을 통해 우리는 몇 가지로 그 방법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주님을 체험해야 합니다. 

두말할 나위도 없고, 또 당연한 것이지만 주님의 증인이 되려면 주님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을 내가 먼저 만나야 하고, 주님을 믿어야 하고, 주님과 더불어 사는 신앙생활의 맛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주님의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을 모르는데 어떻게 주님을 말합니까?  주님을 믿지 않는데 어떻게 주님을 믿으라고 권합니까?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열정을 쏟을 수 있습니까?  내가 먼저 주님을 만나고, 체험해야 합니다.  내가 먼저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경험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런 면에서 여기에서 말하는 ‘증인’이란 말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여기 증인은 법정적인 용어입니다.  보통 법정에서 증인을 세우는 것은 한 사건의 판결을 내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증인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만약 증인이 위증을 한다면 그 역시 처벌을 받습니다.  증인이 고백이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가 사건을 직접 보았기 때문입니다.  현장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증인은 목격자요, 체험자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보고 들은 그대로 증거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이런 사람들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에 대하여 아는 자요, 주님을 만난자요, 주님의 은혜를 체험한 자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증인으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판사나 검사나 변호사가 아닙니다.  이들이 아무리 똑똑하여 논리적으로 말해도 증인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런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먼저 내가 주님을 알고, 체험해야 합니다. 

증인이란 말의 히브리어 어원은 ‘되돌아가다, 반복하다, 되풀이 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백번 천 번 물어도 똑같은 대답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을 뜻합니다. 진실에 있어서 명백한 체험을 갖고 확신이 있다면 천번 만번 물어도 똑같은 대답만 되풀이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거짓이라면 한번 물을 때는 거짓으로 하다가 열 번 백번 물으면 다르게 말한다는 것입니다. 체험에 대한 확신이 있으면 계속 물어도 똑같이 대답합니다.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이요,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1세기를 살던 성도들은 바로 이런 면에서 주님의 증인입니다.  그렇게 수없이 똑같은 말로 진실을 반복하다가 결국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증인이란 말이 순교자와 같은 말이 되었습니다.  증인은 순교자입니다.  순교자는 번복하지 않습니다.  천번 만번 물어도 똑같은 말을 되풀이 할 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이 진실이고, 그것이 목격자로서 체험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진실을 속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아는 것을 어떻게 부인할 수 있습니까?  체험이 없기에 약한 것이고, 경험이 없기에 확신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나의 이런 상태와 상관없이 확실한 진리입니다.  내가 문제이지 주님이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확신하고 체험하기만 문제는 없는 것입니다.

어떤 무당이 사람들을 모아놓고 굿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무당에 홀려 그가 말하는 것에 신기한 듯 바라보았습니다.  그것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사람들이 떠나간 뒤 어떤 개척교회 목사가 당신은 그렇게 사람을 잘 모으는데 왜 나는 안 되는 것일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무당이 ‘나는 가짜를 진짜처럼 하는데, 당신은 진짜를 가짜처럼 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세상은 가짜를 진짜처럼 합니다.  

그러나 진짜를 가짜처럼 하는 것도 있습니다.  진짜는 영원히 진짜입니다.  문제는 내가 확신이 없고, 체험이 없고, 감격이 없고, 은혜를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증인으로서 사명을 감당하는 길은 무엇보다도 내가 먼저 주님을 체험해야 합니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경험이 있어야 하고, 주님의 깊고 넓은 은혜를 체험해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 능력이 나타납니다.  확신이 없고, 체험이 없으면 능력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주님의 증인이 되기 위해 먼저 내가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알고, 주님을 체험하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성령이 임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주님은 증인이 되라고만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사명이요, 행동이요, 결과입니다.  그런 증인이 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선행될 것이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입니다.  순서적으로 보면 이것부터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땅 끝까지 가는 것도, 복음을 전파하여 열매를 맺는 것도 중요하고 좋은 일이지만 먼저 성령이 임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것은 성령이 아니고는 안 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다 그렇지만 특히 증인이 되는 일은 더욱 그렇습니다.  성령부터 받아야 합니다.  우리 영혼에 성령이 임해야 하고, 그것도 충만히 임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사도행전을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성령의 이야기입니다.  처음부터 성령을 강조하고, 마지막까지 성령으로 끝납니다.  사도행전은 성령으로 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성령이 모든 것의 출발이고, 과정이며, 결과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니까 능력과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성령이 임하니까 주님의 제자가 되어 증인의 귀한 사명을 온전히 감당했습니다.  성령이 임하니까 교회가 세워지고, 풍성한 사랑과 교제가 이루어지고, 성령이 임하니까 안보이던 것이 보이고, 보이던 것이 안보이게 됩니다.  

반대로 성령을 속이니까 끔찍한 일이 벌어집니다.   무엇보다도 성령이 임하니까 사도들이 복음을 전합니다.  성령이 임하니까 그들은 선교사를 파송하여 땅 끝까지 갑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의 이야기입니다.  사도행전은 성령을 빼면 남는 것이 없습니다.  성령이 빠지면 해석되지 않고, 이해도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바로 그 성령이 오늘 우리에게도 임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증인의 사명을 감당합니다.  성령이 아니면 힘들고 지치고 피곤한 것입니다.  성령으로 하지 않으면 형식적이고 늘 지루합니다.  성령으로 하지 않으면 불만과 불평이고, 전혀 기쁨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성령으로 해야 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해야 합니다. 그래야 기쁨도 있고, 열매도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서 이것을 잘 깨달은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처음 베드로가 성령이 아닌 자기생각이나 인간적인 방법으로 뭔가 하려고 할 때는 늘 좌충우돌이었습니다.  자기도 힘들고 또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성령을 받고 하던 모든 일은 감격과 은혜와 감사가 충만했습니다. 

사도행전의 전반부는 단연 베드로가 중심입니다.  그 베드로는 바로 성령이 임한 베드로라는 것입니다.  그런 베드로가 세상을 떠날 때 기록한 베드로전서에서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베드로의 이 말은 체험적인 고백입니다.  우리가 귀담아 듣고 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신앙의 모든 일은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쉽게 지칩니다.  낙심하고 좌절합니다.  실망하고 중단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공하시는 힘으로 하면 분명 기쁨과 평안이 가득하고, 감사가 넘치고, 불평이 사라지고, 놀라운 능력이 나타납니다.  

성도여러분, 이제 다시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 성령이 주시는 능력으로 일어서서 증인의 사명과 맡겨진 모든 사명을 잘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는 기도를 통해야 합니다. 

본문의 결론은 이렇게 끝납니다.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성령이 임한 것은 2장이고, 주님의 지상명령이라고 말하는 증인이 되라는 말씀은 1장 8절입니다.  그 중간에 오늘 말씀이 들어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분명히 아는 것은 성령과 증인사이에 기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론적으로, 실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성령이 임해야 권능을 받고 성령의 체험을 통해 증인이 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의 출발은 기도라는 것입니다.  기도해야 성령이 임하고, 성령이 임해야 능력을 받고, 능력을 통해 증인의 사명을 감당합니다.  사도행전의 이야기는 이것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증인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첫 단추는 기도입니다.  기도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것이 단계적으로 점점 확산되어 결국 주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성경은 ‘기도’라고 단순히 말하지 않고 ‘전혀 기도’라고 말하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전혀’라는 말은 ‘오직, 오로지’라는 말입니다.  영어성경에는 이 말을 ‘지속적으로, 계속해서’라는 의미로 말합니다.  당시 제자들은 그렇게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여기 전혀 기도라는 것에는 2가지의 귀한 기도의 모습을 배웁니다.  하나는 기도의 집중력이고, 다른 하나는 기도의 지속력입니다.  그들은 집중적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기도하는 일에만 매달렸습니다.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았고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직 기도만 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그런 기도를 한번 두 번 하고 쉬지 않았습니다.  기도를 지속했다는 것이 더 놀랍습니다. 성령은 바로 그런 곳에 임한 것입니다.  집중력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기도하는 그들의 심령에 불같은 성령이 임한 것입니다.  성령과 함께 능력을 받았고, 능력으로 주님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기도의 힘을 믿습니다.  안 되는 것도 되게 하고, 없는 것도 있게, 낙심하고 걱정하는 곳에 소망을 주고, 포기하고 절망하는 곳에 희망을 주는 것이 기도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능력이 임하는 현장에, 불안과 염려의 현장에, 문제와 실패의 현장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모든 것이 시작이 기도이고, 기도로 모든 것을 풀어야 하기에 기도의 집중력과 지속력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의 열기가 넘쳐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의 힘으로 밀려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참 증인이 됩니다.  

찜질방의 불가마에 들어가면 더운 열기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합니다.  그래도  그 안에서 땀을 내며 버팁니다.  어떤 사람은 노래도 부르고, 음악도 듣고, 이야기도 하고, 잠도 잡니다.  그러다가 할 만큼 하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나옵니다.  열기가 밀어내는 것입니다.  그때 나와서 느끼는 상쾌함은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압니다.  증인의 사명도 이렇게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가 안으로 먼저 들어가야 합니다.  그곳이 열기로 달아올라야 합니다.  그러다가 참지 못하고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 심정, 그 마음으로 주님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감당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의 안이 열기가 없다면, 그래서 들어가든지 나가든지 아무 느낌도 감정도 흥분도 열기도 못 느낀다면 우리는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기 힘듭니다.  아니 그 어떤 일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중요하고, 모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곳에서 힘을 얻어야 하고,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 힘으로 현장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거기에서 주님의 제자로서 참되고 바른 삶을 살고, 변호된 모습을 통해 사람들을 인도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의 출발이 기도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주님은 우리를 향해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나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우리가 이 사명을 주님오실 때까지, 주 앞에 서는 날까지 감당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은혜의 체험이 필요합니다.  또한 성령의 능력이 충만히 임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로 다시 영혼에 힘을 얻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 모두 날마다 기도로 시작하여 성령의 큰 능력을 받고 체험적인 은혜를 힘입어 증인의 사명을 잘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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