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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떤 상황에서도 복음은 전해야 합니다 (행 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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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상황에서도 복음은 전해야 합니다 (행 4:12)


여러분께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처음 어떻게 복음을 접하셨습니까? 

한 형제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믿게 되었냐는 질문에, 이 형제는 자신이 스스로 교회를 찾아 왔다고 했습니다. 

이건 정말 드문 케이스여서 자세히 그 형제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습니다. 
이 형제가 대학교를 졸업하고 막 회사에 취직을 해서 신입사원으로 열심히 회사를 다니던 때의 일이었습니다. 
신입사원이어서 매일 상사들의 구박과 야근으로 힘들던 그 시기, 언제나처럼 야근을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지하철역에서 전도를 하던 한 자매를 만났답니다. 

처음에는 정중히 거절을 했지만, 자꾸 따라오며 예수님 믿으라고 하니까 짜증이 나서 “안 믿는다니까!!” 하고 외치며 이 자매를 밀쳤는데, 그 자매가 넘어졌답니다.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너무 귀찮게 하니까 그랬던 거라고 합리화하며 다시 길을 가는데 그 자매가 또 따라와서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독기어린 눈을 뜨고, 따라오지 말라고 엄포를 놓고 돌아서는데, 그 자매가 울면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예수님 안 믿으면 지은 죄 때문에 심판 받고 지옥가요.......지옥 가면 안 돼요.......흐흑.........” 

그 순간에도 너무 짜증이 나서 그냥 무시하고 집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날부터였습니다. 
자꾸 그 자매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는 것입니다. 

“지옥가면 안 돼요........” 

아침밥을 먹을 때에도, 회사에 가는 길에도, 화장실에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그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도는 것입니다. 

며칠을 그렇게 지내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는 마음에 교회를 찾아갔는데 목사님의 설교가 모두 자기한테 하는 것 같아서 그렇게 눈물이 나오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교회에 정착했답니다. 

영혼 구원사역은 이런 식으로 전개됩니다. 

우리교회는 일 년에 두 차례 봄, 가을에 총력 전도를 합니다. 
올 가을 총력전도는 10월 26일 주일로 선포되었습니다. 

① 우리 교회의 주요 전도방법은 ‘관계전도’입니다. 

교회 성장 연구소에서 14,000명에게 설문조사한 결과 95%이상이 친구 혹은 친척을 통해서 교회에 나왔다고 응답했습니다. 

따라서 효과적인 전도의 열매를 거두려면 성도들의 현재 관계하고 있는 사람(친척, 가족, 이웃, 단골미장원, 가게 등)에 집중해야 합니다. 
매년 제자양육 프로그램과 함께 개설되는 ‘오이코스 전도학교’가 관계전도방법을 훈련하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경험으로 보면 등록목표에 도달하려면, 최소한 그 숫자의 4배를 전도 대상자로 선정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등록교인 200명 목표’라면 전도대상자(태신자)가 800명이 되어야 합니다. 


② 새벽기도회시 전도대상자를 호명하며 기도를 합니다. 

올해도 다니엘세이레 기도기간 동안에 태신자들을 호명할 것입니다. 
“새벽에 이름을 부르고 기도한다고 전도하는데 무슨 효과가 있을까?”라고 반문할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전도는 영적 싸움이기 때문에 기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한 영혼을 구원한다는 것은 이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했을 때 얻어지는 전리품입니다. 
우리는 새벽기도회 때마다 이 영적 전쟁을 감행할 것입니다. 

③ 오늘부터 3주간에 걸쳐 매주일 전도도전 설교를 합니다. 

④ 수요예배 때에는 ‘가족구원’을 주제로 전도 강의를 합니다. 

⑤ 다음주일부터 두 차례에 걸쳐 교우들의 전도 간증을 합니다. 

⑥ 강력한 전도 도전을 받기 위하여 10월15일에는 외부강사 초청 일일 부흥집회를 갖습니다. 

⑦ 화요일(7일)에는 속회지도자들이 외부로 나가 전도 출정식을 갖습니다. 

⑧ 마지막 주간(20-25일)에는 총력 전도주일을 매일중보기도를 실시합니다. 

⑨ 그리고 10월 26일 총력 전도주일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1. 예수님 외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본문의 내용입니다. 
복음이 확장되는 것만큼 사탄의 역사도 강력하게 일어나는 법입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인 환자를 일으킨 사건으로 몰려든 군중들에게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때에 사간이라고 불리는 성전 맡은 자가-그는 성전의 파수대장으로서 성전의 모든 질서의 유지를 책임지고 있는 대제사장 다음가는 높은 지위의 사람이었습니다. - 자기의 부하격인 사두개인들을 데리고 몰려가서 두 사도를 체포했습니다. 

행4:1-3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 저희를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문 고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저들을 잡아 감옥에 가두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 질병으로부터 자유를 얻어 뛰면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름 듣기를 죽기보다도 더 싫어했습니다. 

뒤돌아보면, 복음의 역사는 언제나 그랬습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감당하려면 누군가 고통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아무런 희생 없이 무엇이 이뤄지지는 않습니다. 

작년에 아프가니스탄에서 배형규목사와 심성민형제가 순교를 당했습니다. 
탈레반에게 잡혔을 때 한국교회는 그들의 무사귀환을 위하여 모두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석방이 아니었습니다. 
애석하게도 두 분은 그 땅에서 순교의 피를 흘렸습니다. 
너무도 안타까웠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러나 감정을 가라앉히고 조금만 차분하게 생각해보면, 사람은 어떤 모양으로든 죽더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 영원히 살 사람은 없습니다. 
자살로, 암으로, 강도를 만나 칼에 찔려서, 자동차 사고로, 교수형으로, 굶어 영양실조로........ 
오늘도 200만 명이 넘는 사람이 죽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게 사실이라고 인정한다면, 
어떤 의미에서 배형규 목사와 심성민 형제의 죽음은 축복된 죽음이었습니다. 
영광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이런 죽음은 쉽게 얻을 수 없는 선택받은 자의 죽음입니다. 
저는 이들의 죽음이 그 가정에, 한국교회에, 우리 민족에 큰 축복과 영광이 될 줄 확신합니다. 

지난해 한국교회는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 100주년을 기려 성대한 기념예배와 행사를 가졌습니다. 
한국교회 100년을 회고해볼 때 ‘평양 대부흥운동’을 가장 영향력 있는 사건으로 평가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앞으로 100년을 더 지난 후, 우리의 아들들이, 그 아들의 아들들이 한국교회사를 뒤돌아볼 때 어떤 사건을 가장 의미 있었던 일로 기억하고 기념할까요? 

저는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배형규목사, 심성민형제의 순교사건을 가장 영광스러운 일로 기억하리라 확신합니다. 
“우리 믿음의 조상들 중에 조국이 아닌 이슬람의 땅에서 복음을 위하여 순교한 사람들이 있었노라고.” 

그 때 여기 앉아있는 우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모두 이 땅을 떠나 있을 것입니다. 
복음의 역사에는 그에 따른 희생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영광’이라고 부릅니다. 

이튿날 두 사도는 서슬이 시퍼런 유대인의 최고 법정에로 이끌려 나갔습니다. 
베드로의 증언을 들어보십시오. 

12절입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베드로는 어떤 상황에서 이런 증언을 하고 ,복음을 선포했습니까? 

1) 주후 1세기의 세계는 종교가 없는, 무종교 시대이기 때문에 베드로가 이렇게 선포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그 당시도 다종교사회로 얽혀있었습니다. 
이원론의 영지주의, 생산의 신인 아테미, 로마황제 숭배, 쓰스와 헤메라는 토속신앙, 이런 종교들은 우리 귀에도 익숙하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볼까요? 
바울이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할 때였습니다. 
바울의 전도로 아테미신상을 만들어 팔던 사람들은 경제적인 손실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소리치면서 데모했습니다.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행19:28)” 

이정도로 열렬한 다종교 사회였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이런 종교적인 다원사회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주장하는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도 물론 배타적이라고 비난을 받았겠지요? 
그들은 그런 비난에 연연하지 않고,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라고 담대히 증언했던 것입니다. 

구원의 유일성!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의 구원의 유일성 주장에 대하여 심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 꼭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느냐?” 
“기독교는 하나님께 이르는 여러 길 중에 하나가 아닌가?” 
“다른 종교들을 무시하고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다는 그 독선과 배타성이 싫다”라고 몹시 언짢게 생각합니다. 

이해가 가는 얘깁니다. 
만일 성경에 ‘기독교 외에도 구원이 있다.’라는 주장과 비슷한 얘기만 나와도 저는 누구보다 앞서서 서슴없이 ‘기독교 구원의 유일성’을 포기하겠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성경에는 그와 비슷한 얘기가 없어요. 
오히려 예수님은 “나 밖에는 구원의 길이 없다”고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요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세상에 어떤 종교 지도자가 나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말했습니까? 
오직 예수님만이 그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만큼 확실하다는 말씀입니다. 


2) 베드로는 이런 증언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모르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위협하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을 처형한 장본인들이 아닙니까? 
저들은 사도들을 똑 같은 방법으로 처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자기에게 미칠 결과를 알면서도 행동하는 것은 진짜 용기입니다. 
사도들은 죽을 줄 알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에는 나름대로의 진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진리에 귀의하여 신심을 다하여 수련하거나 고행을 하면 착한 사람, 선한 사람이 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말하자면,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새사람, 구원받은 사람은 될 수 없습니다. 

이 개념을 잘 파악하십시오. 
왜냐하면 그 종교들은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고후 5: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구원! 
이 진리는 양보할 수도, 포기할 수도 없는 기독교의 기본적인 진리입니다. 


2. 어떤 상황에서도 복음은 전해야 합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나라에 최초로 복음을 전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바로 우리 감리교의 아펜젤러 선교사와 장로교의 언더우드 선교사입니다. 
그런데 그 분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의 나이가 몇인지 아십니까? 
당시 아펜젤러 선교사는 26살, 언더우드 선교사는 25살이었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기도문 중 일부를 읽어드리겠습니다.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한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사람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 줄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주겠다고 하면 의심하고 화부터 냅니다. 
........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 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사오나, 
지금은 우리가 서양 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20대의 젊은이들이 예수의 심장을 가지고 태평양을 건너 미지의 나라, 조선에 복음을 전하러 온 것입니다. 
복음은 어떤 환경에서라도 전해져야 합니다. 

복음성가- 세상 모든 민족이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기까지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 
주의 심장 가지고 우리 이제 일어나 주 따르게 하소서. 

세상 모든 육체가 주의 영광 보도록 우릴 부르시는 하나님 
주의 손과 발 되어 세상을 치유하며 주 섬기게 하소서 

물이 바다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온 세상 가득하리라 물이 바다 덮음같이 물이 바다 덮음같이 물이 바다 덮음같이 
보리라 그날에 주의 영광 가득한 세상 우리는 듣게 되리 온 세상 가득한 승리의 함성 
물이 바다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온 세상 가득하리라 
물이 바다 덮음 같이 물이 바다 덮음 같이 물이 바다 덮음 같이 


젊은이들은 이렇게 찬양하며 입술로 고백합니다. 

“아버지 당신의 마음이 있는 곳에 나의 마음이 있기를 원해요. 나의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 알아 내 모든 뜻 아버지의 뜻이 될 수 있기를.......” 

우리는 이렇게 아버지의 마음이 있는 곳에 나의 마음이 있기를, 아버지의 뜻이 내 뜻이 되기를 원한다고 고백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마음이 뭘까요? 
죽어가는 영혼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 아닌가요?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고백하면서도 막상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심지어는 내 가족들에게조차 복음을 전하지 않습니다. 

이런 이율배반적인 삶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이런 위선적인 삶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는 20대에 조선 사람의 영혼을 위해 울었는데 우리에게는 왜 안타까움이 없을까요? 

배형규 목사와 심성민 형제는 이방 땅 아프가니스탄에서 순교의 피를 흘렸는데 우리에게는 왜 안타까움이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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