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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섬김이 진짜 은사 (롬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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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김이 진짜 은사 (롬 12:3~8)


작년에 바른 교회 아카데미를 수강할 때 한 강사가 와서 강의했던 내용의 그림입니다.

설교 시간에 웬 외설스러운 사진을 보여주는가? 라고 반문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오늘 이 그림을 설명하면서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영국 런던에서 차로 약 1시간 정도 떨어진 코벤트리(Coventry)라는 조그마한 도시가 있습니다.
바로 코벤트리에 가면 대성당이 있는데 대성당의 광장에 세워진 조형물의 그림이 바로 이 그림입니다.
(고다이버)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채 알몸으로 말을 타고 있는 여인의 동상입니다.
이 동상의 주인공 여인은 11세기경, 코벤트리 영주의 부인이었던 고디바입니다.

당시에 코벤트리의 영주였던 레오프릭은 가혹하고 잔인한 영주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 고디바는 그와는 정반대 성격을 가진 아름다운 부인이었습니다.

고디바는 신실한 크리스천이었는데 나날이 몰락해 가는 농민들의 삶의 이유는 남편의 과중한 세금정책 때문임을 알고 농민들을 위한 정책을 필 것을 조언했습니다.
그러나 영주 레오프릭은 아내의 조언에 대하여 거들떠도 보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디바는 남편에게 계속해서 농민들을 위한 정책을 고언했고 그 고언은 계속되었습니다.
귀찮아진 영주 레오프릭은 더 이상 아내가 그 일로 자기를 괴롭히지 못할 일을 제안하기에 이릅니다.

만약에 농민들에 대한 당신의 사랑이 진실이라면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느냐고 제안을 했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닌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벌거벗은 몸으로 말을 타고 나가 마을을 한 바퀴 돈다면 그녀가 그토록 호소하는 세금감면을 고려해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고디바는 갈등했지만 남편의 폭정을 막고 죽어가는 농민들을 구할 방법이 그것뿐이라면 그 길을 택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남편의 제안을 수락했습니다.

이 일이 코벤트리의 농민들 사이에 소문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언제 어느 때 레이디 고디바의 거사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도 알려졌습니다.
농민들은 영주의 부인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숭고한 뜻을 이어받아 농민 스스로도 큰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그것은 고디바가 벌거벗고 마을을 도는 동안 마을 사람 누구도 그녀의 몸을 보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마침내 고디바가 벌거벗고 마을로 내려온 날에 코벤트리 전체는 무거운 정적 속에서 은혜로운 영주부인의 나체시위가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을 위해 희생한 영주 부인을 위해 집의 창문을 걸어 잠그고 커튼을 친 다음 그 누구도 내다보지 않았으며 그 날의 일을 모두 비밀에 부친 것입니다.

고디바는 결국 백성들의 세금을 줄이는데 성공했고, 그녀의 이야기는 전설로 남아 전해져 오고 있으며 그 때의 뜻을 그리며 고디바의 동상이 세워진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통하여 함께 나누기를 원하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섬김이란 참으로 고귀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전문적인 용어 중에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을 굳이 우리나라 말로 번역을 하자면 '가진 자의 도덕적 의무'를 의미하는 뜻으로 쓰이는 말입니다.

이미 사회적으로 명예나 권력을 갖고 있는 자들은 나약하고 병들고 힘이 없는 자들을 위하여 그들에게 도덕적으로 섬기고 베풀어야 한다는 의미인데 바로 고디바 부인은 이런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의무를 다한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에서도 섬김은 정말로 귀하고 아름다운 데 하물며 교회 공동체에서의 섬김은 얼마나 아름다울까는 물어보나 마나입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교회 공동체의 지체들이 섬김을 감당하는 방법에 대하여 본문을 통하여 살피려고 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구원 받은 뒤에 삶의 예배를 드려야 하는 성도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하나님이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게 하시는 뜻을 분별하기 위하여 몸부림치는 성도들이라면 다음의 은사들을 통하여 주의 사역을 기쁜 뜻으로 감당하여야 한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본문에서 소개하고 있는 은사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본문에서만 7가지 은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본문 6-7절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이외에도 다른 성경에 기록된 내용들을 보면 성경에 기록된 은사는 약 27가지의 은사가 더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을 중심으로 이렇게 많은 은사를 하나님께서 주셨는데 왜 하나님께서 지체들에게 은사를 주셨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는 그 은사들마다 다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은사를 말씀하시는 본문의 내용을 통하여 어떤 은혜를 받아야 합니까?


1. 은사는 믿음의 분량대로 겸손하게 사용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3절을 보십시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3절의 이 본문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품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은사를 주시는데 사람의 믿음의 분량에 맞게 은사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참 중요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은사를 통하여 교만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특별히 3절의 하반절에 있는 말씀은 주목하여야 합니다.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그런데 무엇에 대하여 지혜롭게 생각을 하라는 것입니까?

3절에서는 계속 이야기를 합니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

이 말씀은 헬라어 원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자신에 관하여는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

이 말이 무엇을 말합니까?
‘자신에 대하여’라는 주어가 첨가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은사를 활용할 때 나의 믿음의 분량을 체크하면서 내 믿음의 분량에 대하여 정확하게 진단하면서 은사를 사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흔히 생각하면서 빠지는 착각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교회의 일을 자신에게 맡겨 주었기 때문에 내가 아니고서는 교회의 일은 절대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착각입니다.

그런데 이 생각처럼 어리석은 생각은 없습니다.
이 생각처럼 무모한 생각은 없습니다.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만약에 내가 세상을 등진다면 정말로 큰 일이 날 사람이 누군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일 먼저 아내가 그럴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일 것입니다.
그 다음에 저의 부모님들일 것입니다.
아마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세상을 살 수 없을까?
내 마음속에는 적어도 내가 없다면 나를 따라 죽어야지 하는 것이 본마음일지는 모르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들놈은 저 없이도 살 수 있습니다.
아내는 어떨까?
힘은 들겠지만 그래도 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 수많은 과부들도 힘은 들지만 그래도 용기를 가지고 살아가지 않습니까?
저의 부모님들도 마음은 아프겠지만 다른 자식들을 보면서 살아가실 것입니다.

무엇을 말하려는 지 아십니까?
하나님만 계시면 내가 없어도 분명히 세상은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더욱 그렇습니다.
제가 만약 제 신상에 이상이 생기면 아마도 당장 후임자 목사를 청빙할 것입니다.
교회에 이목사가 없으면 안 된다고요 천만에 말씀입니다.

이목사가 없어도 하나님의 교회는 돌아가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건축하고는 사명이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대곡교회에서 건축을 하려고 행정적인 전반을 준비하고 건축헌금도 시작해서 준비하였는데 법원동산으로 가라하셔서 건축을 못했습니다.
그랬더니 후임자가 그 터에 교회를 건축했습니다.

법원동산에서도 교회를 옮겨 건축을 하려고 움직이면서 건축헌금을 실시했고 교회 건축의 자화상까지 잡았는데 진해교회로 가라 해서 건축을 못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터전 위에 후임 목사가 교회 대지를 구입해서 아름답게 건축을 했습니다.

흔히들 하는 착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사는 자기에게 혼자 다 주어서 자기 말고는 절대로 교회가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는 착각입니다.
이 착각에서 하루 속히 벗어나길 바랍니다.

심지어는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나를 데리고 가시면 내 손해가 아니고 하나님 손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서운 착각이며 궤변입니다.
당신이 없어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시고 교회는 아주 잘 돌아갑니다.
이것이 정답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한 가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들은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은사를 잘 활용하는 겸손하게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도 이렇게 바뀌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나 하나 없어져도 멀쩡한데 그래도 하나님이 나 없으면 안 되는 것처럼 나를 써 주시니 정말로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은사를 주신 것은 겸손하게 주의 사역을 감당하라는 주님의 명령인 줄로 믿고 이렇게 겸손하게 믿음의 분량대로 받은 은사를 주님을 위하여 지혜롭게 사용하는 백성이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은사를 잘 개발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은사를 주시기는 주시되 다르게 주십니다.
한 사람에게 여러 가지의 은사를 한꺼번에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각 다른 은사를 받기 때문에 그 은사를 잘 개발하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를 잘 아시지요?
왜 1달란트를 받은 종이 주인에게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책망을 받았습니까?
이유는 은사를 개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이유입니다.

우리는 주어진 은사를 적극적으로 개발하여야 합니다.
안 되는 은사를 가지고 씨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에게 주신 은사를 냉철하게 판단하여 그 은사를 개발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제가 경험한 일 가운데 이런 일이 있습니다.
신학대학시절에 헬라어를 가르치던 교수님이 계셨습니다.
그 분은 한국에서 아마도 제일가는 헬라어의 석학일 것입니다.
정말 그 분을 보면 어떻게 저렇게 헬라어에 능통할까에 대해 감탄사를 연발할 정도의 석학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수업을 하는 것을 보면 정말로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한국인임에도 불구하고 한국말에 대한 커뮤니케이션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 분이 강의했던 신약신학 시간만 되면 고통이 극에 달합니다.
오늘은 또 어떻게 수업을 극복할 수 있을까?
오늘은 교수님의 말을 몇 마디나 알아들을 수 있을까?
오늘은 과연 몇 %가 수업 시간에 졸까?
뭐 이런 등등의 내기를 하면서 수업을 들었습니다.
그러니 공부가 되겠습니까?

그러던 어느 날 대형 사고가 터진 것입니다.
그 날도 역시나 학우들이 거의 반 가사 상태로 수업을 듣고 있었습니다.
한 참 열강을 하시던 교수님께서 교탁 모서리에 걸려서 꽈당 하고 넘어지셨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낄낄대고 웃어야 하는 시간인데 전혀 웃지를 않습니다.
이유인 즉은 수업을 듣고 있던 학생들이 그날따라 거의 다 잤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 날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시되 믿음의 분량대로 은사를 주신다는 말이 은사를 한 사람에게 여러 가지를 주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에 그 교수님에게 그렇게 엄청난 실력을 소유했는데 거기에다가 강의도 잘 하는 달변의 은사까지 주셨다면 그 교수님의 상황이 교만해 질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자기에게 맡는 은사를 한 가지 씩은 반드시 주십니다.
그 은사를 개발하십시오.
그래야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나에게 주신 은사를 잘 개발하고 그 은사를 겸손하게 개발하고 훈련하여 하나님의 사역을 위하여 쓰임 받는 도구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은사는 섬기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4-5절의 본문을 보십시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우리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라는 것입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각각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신 은사는 결국 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용하도록 주신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본문에서 은사를 7가지로 열거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은사는 교회의 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용하도록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우리는 지체들입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두령들이 범죄 하였을 때 이스라엘 공동체가 징벌을 받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은 하나가 없습니다.
개인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한 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공동체였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라는 한 배를 탄 공동체입니다.
이제 우리들이 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공동체를 위하여 섬기는 사역을 감당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섬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지금 미국은 대통령 선거로 한창입니다.
박빙의 차로 후보들이 엎치락뒤치락하고 있습니다.

왜 백악관을 그토록 가려고 하는 것입니까?
이유는 딱 한 가지입니다.
후보들 스스로가 백악관이 목표이며 목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권을 얻기 위해서 자신들의 삶을 올인하며 목숨을 걸 정도로 치열하게 권력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역대 대통령 중에 일반의 여느 다른 대통령들에 비해 아주 특별한 대통령이 있었습니다.
지미 카터입니다.
지미 카터는 지금 미국에서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대통령에서 물러난 이후에 더 엄청난 존경을 받고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는 철저한 하나님께 받은 은사의 사람이었고 또 그 은사를 정말로 아름답게 활용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일찍이 교회에서 예수님을 영접하였고 신앙생활을 잘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셨는데 ‘가르치는 은사’를 주신 것을 발견하고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어김없이 자신의 고향인 조지아주에 있는 작은 교회로 주일에는 날아가서 주일학생들을 가르치는 주일학교 교사의 일을 감당했습니다.
그리고 대통령에서 은퇴를 한 후에도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주일학교 교사의 직을 감당하였고 지금도 헤비타트 운동의 창시자로 하나님의 사역을 아름답게 감당하고 있습니다.

일전에 미국의 시사 주간지인 타임지에서 지미 카터의 활동을 소개하고 있는데 아주 의미 있는 기사를 썼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the only president who used White House as the stepping stone"

번역하면 이런 뜻이 됩니다.
‘백악관을 디딤돌로 생각했던 유일한 대통령’

무슨 뜻입니까?
지미 카터의 삶은 백악관이 그의 삶의 목표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백악관을 디딤돌로 삼아서 남을 섬기고 사랑하는 도구로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멋있는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들의 인생은 권력과 욕망과 권세를 출세의 가도를 달리는 수단과 목적으로 살고 있는데 카터는 그렇게 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적어도 우리는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일을 통하여서 우리에게 주어진 은사를 끝까지 잘 활용하는 백성이 되어야 지혜로운 백성이 된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한 사람 한 사람이 각 양의 은사를 받은 성도들입니다.
섬기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은사 활용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귀한 축복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섬김이 곧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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