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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산상수훈(1) : 심령이 가난한 자 (마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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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수훈(1) : 심령이 가난한 자 (마 5:3)
 

오늘부터 몇 주일에 걸쳐서 산상수훈 가운데서 팔복의 가르침에 대하여 상고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을 요약한 것이 산상수훈이고 이를 더 압축한 것이 팔복의 가르침이라고 쓴 글을 읽어본 적이 있는데, 수긍이 가는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복 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복을 비는 기복행위를 합니다. 한국인들은 정초에 해맞이를 하면서 한 해의 복을 기원합니다. 주고받는 연하장에 적힌 글은 하나 같이 복을 비는 내용입니다. 정월대보름이 되면 달을 보고 복을 빕니다. 그러나 세인들이 원하는 복은 하나같이 현세적인 것입니다. 

유교에서는 다섯 가지 복을 말합니다. 부자가 되는 것, 오래 사는 것, 덕을 좋아하며 즐겨 행하는 것, 건강하고 평안한 것, 제 명대로 살다가 평안히 죽는 것입니다. 여기에다 자손이 번성하는 것을 추가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 같은 복을 고루 누리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런가하면 이 모든 복을 받았다고 합시다. 그러면 행복자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 누구도 그렇다고 단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행복감이란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님들께서는 알렉산더 대왕과 거지 철인 디오게네스의 일화를 아실 것입니다. 전자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다 소유했으나 후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 개처럼 통속에서 살았습니다. 한번은 알렉산더 대왕이 디오게네스의 소문을 듣고 찾아갔다고 합니다. 마침 디오게네스가 통속에서 일광욕을 하고 있는데, 알렉산더 대왕이 그 앞에 서서 말했습니다. “소원이 있으면 말해 보시오 무엇이든 들어주겠오” 

그러자 니오게네스가 말하기를 “내게 그늘이 지지 않도록 좀 비켜주시지요”라고 했습니다. 이에 알렉산더 대왕이 말하기를 “내가 알렉산더가 아니라면 디오게네스가 되고 싶구나"라고 했다고 합니다. 수많은 나라를 정복했지만 만족이 없었던 알렉산더 대왕과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면서도 만족하며 살았던 디오게네스, 둘 중에 누가 더 행복한 사람이었을까요? 

요즘 우리 사회는 톱 탤런트의 자살로 인해 큰 충격에 휩싸여 있습니다. 소위 인기 연예인들의 자살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사실, 그들을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지만 정작 그들 가운데는 살맛을 잃고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겉으로 보이는 것과 속의 내용이 같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라는 말과 같이, 행복은 재산순도 아니고, 명예순도 아닙니다. 사회에서 크게 성공했다고 반드시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마음 상태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행복자가 되기 위한 마음 상태를 살펴봄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진정한 행복은 육적인 것이 아니라 심적인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돈입니다. 현대인들의 행동을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원리는 경제 원리입니다. 이는 어느 개인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전 세계적인 현상입니다. 우리나라의 비정상적인 교육열도 그 뿌리는 돈에 닿아 있습니다.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교를 나와야 사회에서 출세하고 성공해서 돈을 많이 벌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렇게 성공해서 부자가 되면 행복이 보장되는 것일까요?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크게 착각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부자는 행복하게 될 수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부자든 가난한 자든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부자가 행복의 필수 조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돈도 있고, 건강하고, 명예도 있더라도 그 마음에 평안이 없고 불안하거나, 불만족스럽거나, 우울하다면 행복할 리가 만무할 것입니다. 최근에 자살한 연예인들의 대다수가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멋진 외모와 재능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하는 연예인들이 실은 내면적으로는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린다고 합니다. 그 스트레스를 이기려고 술을 마시고 마약에 손을 대기도 합니다. 

대기업의 CEO 가운데 암으로 사망한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요즘처럼 경쟁이 심한 세상에서 기업을 경영해 나가는 일이 쉬울 리 있겠습니까? 아마도 일반 직원들보다 몇 십 배의 스트레스를 받을 것입니다. 세인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 우월감을 만족시켜 줄지는 몰라도 마음에 평안을 가져다주지는 못합니다. 마음속에 평안이 없다면 사람들이 선망하는 모든 조건을 갖추었더라도 행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마음에 평안을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로,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욕심에 사로잡히면 결코 평안을 맛볼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욕심을 품으면 현실에 대한 만족을 모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만족이 없는 곳에는 평안도 없습니다. 성경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하신 대로, 욕심과 죄와 사망은 뗄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돈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성경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딤전 6:10)고 경고합니다. 

그 대신, 자족을 배워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장에서 “11)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사도 바울처럼 욕심을 버리고 자족할 때 비로소 마음에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치고 걱정이 없는 사람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걱정하는 것은 심신의 건강을 해칩니다. 걱정에서 해방되려면 삶의 짐을 하나님께 다 맡겨야 합니다. 성경에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시 55:22) 하신 대로, 우리가 모든 짐을 하나님께 맡길 때 하나님께서 우리 짐을 다 맡아주시고 마음에 평안을 부어주십니다. 

시편 131편 2절에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라고 했습니다. 잠자는 아기의 얼굴을 드려다 보면 얼마나 평화로운지 모릅니다. 어디서 그 같은 평안이 나온 것일까요? 그 평안은 아기가 자기의 모든 것을 엄마에게 맡김으로써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즉 어린아이처럼 하나님께 성도님들의 모든 문제를 맡기고 마음에 평안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평안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데, 그러므로 이사야서 57장 21절에 보니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누가 악인입니까?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과 불화한 상태에서는 마음의 평안을 누릴 수 없습니다. 신명기 28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불순종하는 자들을 ‘미침과 눈멂과 경심증으로 치실 것’(28)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서 26장 3절에는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한 세상 사노라면 형통한 때도 시련의 때도 있는 법입니다. 누구나 형통할 때에는 매사에 자신감이 넘치지만, 시련의 때에는 의기소침해 집니다. 그러나 시련이 아무리 클지라도 스스로 생명을 버리는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살은 고통에서 도피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긴 하지만 더 이상 패배를 만회할 수 없게 합니다. 혹자는 자살을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말하지만, 실은 시련에 맞서 나가는 용기가 없는데서 비롯된 행동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고난을 당하여 패배자가 되지 말고 기어코 고난을 이겨내서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사전에는 자살이란 단어가 없어야 합니다. 시편 84편 6절에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눈물 골짜기는 시련의 시기를 말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시련의 때를 은혜 받는 기회로 선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복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천국에 들어가려면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마음이 겸손한 것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성경에 보면, 교만한 사람을 가리켜 마음이 부자가 되었다 또는 마음을 살지게 했다고 합니다(약 5:5).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흔히 가난해도 만족하며 사는 것을 일컬어 ‘마음은 부자’라고 합니다. 같은 표현이라도 이처럼 의미가 다른 말이 있으므로 혼동하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곧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사람을 말하는데,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첫째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다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뱀이 하와를 꾀는 장면이 나옵니다. 뱀이 먼저 하와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기를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뱀이 말하기를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고 했습니다. 

하와는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뱀의 말에 넘어가서 그만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처럼 된다면 구태여 하나님의 명령을 지킬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아담과 하와가 이제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는 교만을 드러낸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는 너무나 비참했습니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낯을 피해 숨는 처지가 되었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가시와 엉겅퀴가 나는 땅에서 땀 흘려 수고하는 고단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마음이 교만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못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살아갑니다.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자기를 하나님의 양에 비유했는데, 이는 그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표명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생애를 다 바쳐서 이방 지역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해서 많은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자기를 자랑하기는커녕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고 했습니다. 그가 이룩한 모든 아름다운 결과가 전부 다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다윗과 바울과 같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까?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합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 많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래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크로스비 여사가 작사한 찬송가에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찬송가사와 같이 우리의 눈에도 구속한 주님만 보여야 합니다. 주님은 보이지 않고 세상이 보이면 큰일입니다. 주님은 보이지 않고 돈이 보이면 큰일입니다. 주님만 보여야 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 하신 대로, 신앙의 경주에 출전한 성도들이 바라보아야 할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도 가려느냐” 하시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줄 믿고 알았삽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는 성도가 곧 마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 안에만 영생과 은혜와 기쁨과 승리가 있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우리에게 이 모든 복을 내려 주십니다.
  

셋째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되려면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잠언 4장 23절에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 마음을 밭에 비유합니다. 밭에서 곡식과 채소와 같은 농작물을 재배하듯이, 우리 마음 밭도 생명의 근원이 될 수 있습니다. 밭을 지키는 것은 밭에 곡식이나 채소의 종자를 뿌려서 가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밭에 작물을 재배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해 두면 잡초가 무성하게 되거나, 쓰레기장이 되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을 지키지 않으면 온갖 잡초와 같고, 쓰레기 같은 생각들이 자리를 잡게 됩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5)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마음을 방치해 두면 온갖 육신에 속한 생각들이 생겨나서 결국 사망의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자살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자살충동으로부터 마음을 지키지 못해서 일어난 비극입니다. 마음을 지키지 못하면 낙심, 좌절, 증오, 살의, 악한 생각 등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납니다. 그러나 이 같은 육신의 생각은 사망으로 귀결되고 맙니다. 

반면에, 영의 생각 곧 성령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을 가져다줍니다. 우리가 영의 생각을 하려면 성령님을 마음에 모셔 들이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시면 우리 마음에서 건강한 생각, 믿음의 생각, 긍정적인 생각이 샘솟듯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육의 생각을 버리고 성령의 생각을 우리 생각으로 받아들임으로 늘 겸손한 마음 상태를 지켜나가야 하겠습니다. 
  

세 번째로, 주님께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에게 천국을 선물로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구절은 장차 우리가 죽어서 영혼이 천국에 가게 될 것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물론, 마음이 가난한 성도들은 장차 천국에 들어가겠지만, 주님의 이 말씀은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도 천국을 맛보면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천국을 천국으로 만드는 조건이 무엇일까요?

첫째로,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 천국입니다. 

계시록 21장은 천국을 천국 되게 하는 가장 핵심적인 조건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천국의 조건은 하나님께서 구속받은 성도들과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그리스도인들의 심령에 와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겸손히 성령의 인도하심에 귀를 기울이고 그 지시하심에 순종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와 계시니 우리 마음이 천국으로 변하게 됩니다. 

지옥은 왜 지옥일까요?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므로 지옥입니다. 아무리 웅장하고 화려한 궁궐이라도, 매일 같이 파티를 열고 즐길지라도, 성령의 임재하심이 없다면 천국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성도들은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라고 고백합니다. 시편 84편을 지은 성도는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함께 살아감으로써 천국을 누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생명과 희락이 충만한 것이 천국입니다.

성경은 천국을 생명이 충만한 곳으로 설명합니다. 이 때 생명은 영생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지옥은 생명으로부터 단절되고 사망이 왕 노릇하는 곳입니다. 계시록 20장 14절에 보니 불못에 던짐 받는 것을 둘째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성도는 주님으로부터 끊임없이 영적 생명을 공급받기 때문에 언제나 활기찬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 2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장차 영생을 받는 것이 아니라 지금 영생을 소유한 사람들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천국은 희락이 충만한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6:22)고 하셨습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은 철저하게 조건에 좌우됩니다. 건강하면 기쁘지만 병들면 기쁨도 사라집니다. 그러나 마음이 가난한 성도가 누리는 기쁨은 현실의 조건에 따라서 좌우되지 않습니다. 질병과 가난과 시련을 만났을지라도 마음의 기쁨을 빼앗아 가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같은 기독교의 역설적인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날 우리는 물질만능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육신의 즐거움과 물질적인 번영에 정신을 빼앗기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공해가 심할수록 오염되지 않은 생수의 있어야 하듯이, 이러한 시대일수록 팔복의 가르침이 더욱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같은 가치관을 버리고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다. 바로 이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이 수록된 곳이 산상수훈이고 그 가운데서도 팔복의 가르침입니다. 오늘은 팔복의 첫째 복인 “심령이 가난한 자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 라는 주님의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여덟 개의 복으로 이루어진 천국 사다리를 올라가려면 첫 계단인 마음이 가난한 자가 받는 복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아무쪼록 오늘 설교를 경청하신 성도님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되어서 천국을 선물로 받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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