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당신에게는 변화가 필요합니다 (창 39:21~23)

  • 잡초 잡초
  • 279
  • 0

첨부 1


당신에게는 변화가 필요합니다 (창 39:21~23)

 
어느 날 자동차를 타고 가던 맹구가 정신병원 앞을 지날 때 타이어에 펑크가 났습니다.  그 바람에 바퀴를 지탱해주던 볼트가 풀어져 하수구 속으로 빠져버렸습니다.  맹구는 속수무책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정신병원 담장 너머로 이 광경을 지켜보던 환자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세요!  그렇게 서 있지만 말고 남은 세 바퀴에서 볼트를 하나씩 빼서 펑크난 바퀴에 끼우고 카센터로 가세요."

맹구는 정말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하고 말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런데 당신 같은 분이 왜 정신병원에 있나요?"

그러자 그 환자가 버럭 화를 내면서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야 임마!  나는 미쳤기 때문에 여기에 온 거지, 너처럼 모자라서 온 게 아냐!"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왜 여기에 왔을까요?  우리는 모자라서 온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미쳤기 때문에 왔습니다.  나를 강권적으로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미쳤기 때문에 여기 이 자리에 왔습니다.  오늘 여기, 이곳 주님의 전에 나오신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지난 주간에 아주 아름답지 못한 사건이 일어났었습니다.  제가 죽은 자에 대해서 말을 하는 것은 유가족에 대해서 결례가 되기 때문에 적절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자기 생명을 사랑하셔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천하에 생명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고 했습니다.  천하보다 소중한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분명히 죄악입니다.

어떤 분은 저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이 사람이 천국에 갔을까요, 지옥에 갔을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왜 이런 물음을 던져야 합니까?
 
기억하십시오.  성경은 분명히 자살에 대해서 아주 강하게 거부하고 있습니다.  자살은 분명히 잘못된 자기 이기주의의 극단적 행동입니다.  이 같은 극단적인 자기 포기는 살아있는 가족들과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주게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이런 죽은 자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다는 결코 바른 신앙적 자세가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의롭지 못한 죽음, 극단적 이기주의적인 자기 포기에 따른 이런 행동을 한 사람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나누지 말아야 합니다.  비슷한 이야기도 나누지 말아야 합니다.  덕이 되지 않고 은혜가 되지 않는 이야기는 하지 마십시오.  그러한 이야기는 우리의 거룩한 영적 흐름을 방해할 뿐이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직 복음만 이야기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만 나누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아침에 부드러운 눈으로 한 번 옆 사람을 가만히 보시기 바랍니다.  부드러운 눈으로 세상을 한 번 보십시오.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눈인사를 좀 하십시오.  부드러운 눈으로 옆 사람들을 한 번 보십시오.  이 아침에 강하게 우리들의 심령에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다 모질고 못되고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만나고 부딪히는 사람들이 다 못되고, 다 나쁘고, 모두가 자기 이기주의적인 사람들만은 아닙니다.  아직도 세상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습니다.  아직도 이 땅의 사람들은 내가 판단하고 경험하는 것보다 훨씬 더 사랑스럽고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사랑하는 여러분, 망망한 대해에서 난파하여 표류하는 배를 본 적이 있습니까?  왜 표류합니까?  엔진이 고장나서 그렇습니다.  엔진만 고장나지 않으면 이겨 나갈 수 있습니다.  이 시간 다시 여호와의 신으로 권능의 채움을 받으십시오.  내가 여호와의 신으로 다시 내 삶에 권능의 채움을 받으리라!  자기 속에 내재해 있는 모든 자기 파멸의 씨앗을 거룩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좇아 내십시오.  내 안에 있는 모든 부정과 불신과 미움과 좌절과 자기 파괴의 영들을 성령의 능력으로 태워 버리십시오.  인생은 표류하는 난파선이나 떠다니는 뗏목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 깊은 산골을 헤치고 계속해서 나가는 생명이 있는 물고기를 보십시오.  역류하지 않습니까?  솟아 올라가지 않습니까?  방향 감각만 살아나면 뭘 해야 한다는 자기 삶에 대한 그 사명화 된 목적 의식만 부여되어 있으면, 기억하십시오.  어떤 어려움과 난관이 앞을 가로막아도 올라갈 수 있습니다.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놀라운 사실을 아십니까?  하나님은 오늘도 언제나 불확실한 상태에서 불완전한 사람들을 붙들고 하나님의 뜻과 역사를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내 상황이 불완전하다든가, 내 현실이 불완전하다든가, 내가 정확하지 못한 사람이라든가 그것을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완벽한 조건을 갖추기를 기대하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완벽주의의 노예가 되기보다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모자라면 모자라는 대로 있는 그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서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주여!  당신에게 붙잡혀 순종하고 의지하는 이 한 생명을 통하여 하나님이 살아 계신 역사가 내 생애에 어떻게 나타나는지 하나님이 내 삶의 증인이 되시옵소서!"

♪"나는 비록 약하나 주 예수는 강하다.
나를 인도하시는 주님 곁에 가까이 가려네"♪

그렇습니다.  나는 분명히 부족합니다.  나는 연약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내가 믿고 의지하는 그분, 예수 그리스도는 강하십니다.  그분은 능력이 많으십니다.  그분을 의지하고 그분 곁에 서십시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 목사인 제가 여러분을 보면서 고민하는 것은 '진리를 찾을 것인가, 위로를 찾을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혼란을 겪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위로를 찾기 위해서 이곳에 나온 것은 아닙니다.  위로를 찾고 간다고 하면 그것은 어린아이에 불과합니다.  진리를 찾아야 합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네가 위로를 찾았으니 네가 자유케 하리라"는 말이 없습니다.  진리를 찾으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진리를 알지니, 하나님을 알지니, 그리스도를 알지니 그가 너를 자유케 하리라.  그렇습니다, 여러분.  진리를 찾으십시오.
 
"아! 이것이로다!"  내 영혼이 깜짝 놀라서 경악하는, 내 삶이 감화와 감동으로 "이것이로구나!" 온 몸이 오싹거리는 하나님의 절대 전능에 생포되는 사건, 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에 생포되는 사건, 내가 거부할 수 없는 절대적인 어떤 진리에 눈을 뜨는 사건, 이 사건이 오늘도 저와 여러분에게서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농부가 작은 텃밭에서 아주 보잘 것 없는 씨를 심습니다.  그 때 작은 씨를 심고 자라는 것을 지켜보고 김을 매주고 그 결실을 보는 만족!  생명을 키우는 소박한 그 자유의 맛!  현재의 위치에서 미래에 있어야 할 그 위치를 옮겨가면서 나타내는 그 자유의 감격!  이것이 농부의 심정이 아니겠습니까?  올 때의 발걸음과 갈 때의 발걸음이 달라지리라.  올 때의 표정과 갈 때의 표정이 달라지리라.  올 때의 눈빛과 갈 때의 눈빛이 달라지리라.  무엇보다도 올 때의 내 생각과 갈 때의 생각이 달라지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때 삶이 상품이 아닌 이상 어차피 완제품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에 우리가 늘 보는 아름다운 분재가 있다고 하십시다.  그런데 이 분재에 벌레가 끼기 시작했습니다.  이 벌레를 잡겠다고 매일 비판의 약과 판단의 약만 계속 뿌리면, 꽃도 열매도 다 죽이고 결국은 나무도 죽이고 맙니다.
 
기억하십시오.  나를 완전하게 만들겠다고 계속해서 비판과 판단을 하면 결국 내 나무도, 내 생명도, 내 열매도 꽃도 다 죽이고 맙니다.  중요한 것은 인생은 상품이 아니기 때문에 불완전한 상태, 불완전한 환경, 불완전한 사람들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의를 볼 수 있는 눈이 열려야 됩니다.  그러므로 비판하지 마십시오.  판단하지 마십시오.  남을 비판하지 말고 나도 비판하지 마십시오.  남도 판단하지 말고 나도 판단하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인생을 달려갈 때 남들이 좀 어정쩡하다고 보면 어떻습니까?  좀 고개가 삐딱하면 어떻고, 손이 좀 이상하게 저으면 어떻습니까?  걸음걸이가 좀 절룩거리면 어떻습니까?  우리의 인생은 마라톤입니다.  완벽한 폼을 겨루는 장소가 아닙니다.  완벽한 자아를 다루는 장소가 아닙니다.  그러니 자신을 비판하지 마십시오.  남도 판단하지 마십시오.  폼은 좀 부족해도 모든 고통을 뛰어넘은 지구력과 인생을 아름답게 사는 재미에 취하는 그런 것이 여러분의 삶 속에서 나타나기를 축복합니다.
 
기억하십시오.  환경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 주변에 어떤 사람들이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런 것들이 나름대로 도움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환경이 좋고, 주변에 좋은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어도 자신의 마음이 무너지면 다 무너집니다.  자신의 생각이 오염되면 결국은 모든 것이 오염이 되고 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예배드리는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변화가 철철 넘쳐흐르기를 축복합니다.  변화에 대한 지혜와 행동에 대한 열정에 눈을 떠야 합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이 땅에는 영원한 안전지대란 없습니다.  다만 변화에 대한 끝없는 기회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면 자멸하고 맙니다.
 
이 변화의 속도를 어떻게 하면 탈것인가?  빌게이츠가 말하는 빛의 속도도 결국은 변화의 속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변한다는 사실 하나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순간 순간마다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영으로 이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주도권을 차지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옥토의 법칙으로 일하십니다.  이 땅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 25%의 사람만이 변화의 물결을 따라갑니다.  또 그 중에 10%의 사람만이 변화의 물결을 확실히 주도합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하는 것과 신앙을 갖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깊어진다고 하는 것은 그 10%의 물결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들은 틀림없이 하나님의 손길에 쓰임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이 10%의 변화를 주도하는 정확한 사람만 있으면 세상까지도 뒤엎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경지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변화를 주도하는 10%의 물결 속에 들어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왜 사람들은 이 변화를 저항할까?  왜 이렇게 변화가 힘든 것일까?  변화를 저항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먼저 그들은 통제 받는 것을 싫어합니다.  자신의 이익에 부합되지 않으면 변화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아이디어가 없습니다.  상상력의 부족, 자기 안일에 안주해서 인간은 누구나 현상유지 본능에서 잠자려고 합니다.  귀찮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변화를 거부하고 지금의 상태에 눌러 앉으려는 이유는 변화에는 언제나 그에 따르는 장애물이 있는데 그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버드 바겟이라는 사람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장애물이란 당신이 목표에서 눈을 뗄 때 당신 눈에 보이는 무서운 것들이다."
목표가 아닌 것은 대개 장애물입니다.  목표라는 것은 수많은 장애물 속에 우뚝 솟아 있는 푯대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 앞에 놓인 장애물과 부족함을 보기 전에 그들에게 주어진 목표를 먼저 보았습니다.  그들은 먼저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주셨다는 것을 전제하고 들어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장애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장애물은 감사의 조건이었습니다.  땅을 취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취할 것이냐의 문제로 보았던 것입니다.  놓여진 문제를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놓여진 문제 속에서 무엇을 먼저 보느냐가 그 문제를 풀 수 있는 열쇠입니다.

변화에 민감하며 변화를 주도하는 사람은 문제를 장애물로 보지 않고 징검다리로 봅니다.  부정적인 사람들에게 문제란 모두가 장애물입니다.  그 장애물은 언제나 크고 복잡합니다.  해결의 실마리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문제는 자신을 낙담시키기 위한 걸림돌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피해 의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부정적인 사람들은 과거에 기초하여 현실에 안주하려고 합니다.  과거가 좋았다며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합니다.  과거에 누리던 것들을 그리워합니다.  과거에 하던 것들을 말합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사람들은 다릅니다.  그들은 미래에 기초하여 현실을 초월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미래에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말합니다.  미래에 이루어질 것들을 소망합니다.  그것이 지금보다 훨씬 좋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의 가슴은 언제나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를 향해 열려 있습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이처럼 긍정적인 믿음의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우리 제단의 성도 모두가 미래에 이루어질 것들을 소망하면서 그것을 이야기하는 꿈의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과거는 불신앙의 상징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과거란 본질상 진노의 자녀된 때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미래의 사람들입니다.  현실을 살고 있지만, 현실을 초월하는 미래의 사람들입니다.  현실 앞에 닥친 장애물 너머에 있는 미래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긍정적인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은 장애물 앞에서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사람을 쓰신 일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의 환경이 앞으로 더 나아질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미래가 없는 사람은 계획을 세우지 않습니다.  계획이 없기 때문에 행동하지 않습니다.  행동하지 않기 때문에 변화가 없습니다.  변화가 없기 때문에 발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긍정적인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장애물 너머에 있는 미래의 푯대를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변화에 마지못해서 끌려가는 사람이 아니라 변화를 주도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배움을 멈춘 사람은 성장을 멈춘 것입니다.  성장을 멈춘 사람은 이미 늙기 시작했습니다.  배운다는 것은 젊다는 것입니다.  늙은 사람은 배우지 않습니다.  배울 수 없습니다.  인생의 비극은 우리가 죽는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이 죽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성장을 멈춘 마음은 이미 죽은 마음입니다.  성장은 바로 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배우는 것은 단순한 지식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변화를 위한 것입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도 변화를 위한 진실한 작업입니다.
 
변화는 논리적으로는 이해되지만 현실은 잘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나라가 변한다, 내 기업이 변한다, 교인이 변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내가 낳은 내 아이도 내 마음대로 못하는 것입니다.  그 아이의 태도 하나를 바꾼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우리는 잘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변화는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힘들고 어렵기에 변화가 되면 기적이 있습니다.  변화가 일어나면 살 길이 있습니다. 믿으십니까?  오늘 우리들에게도 기적과 살 길이 열리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변화의 목적이 분명치 않을 때는 사람들이 변화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싫어합니다.  변화에 대한 보상이 분명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변화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나라가 왜 이렇습니까?  변화를 주도하는 지도자 집단이 신뢰와 존경을 잃어버리면 국민들은 절대로 따라가지 않습니다.  너희들은 안 하면서 왜 우리보고 하라고 하느냐?  지금 우리 나라는 여기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기득권의 포기라든가 헌신과 협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개혁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르짖는 그들에게서 헌신과 협조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가장 개혁되지 않는 대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헌신과 신뢰와 미래에 대한 아름다움이 없으면 백성들은 그 변화를 따라가지 않습니다.

참여하지 않으면 기적도 보상도 없습니다.  지금 우리 민족의 제일 큰 약점은 어떤 일에도 참여하지 않는 것에 있습니다.  전부 구경만 하고 비판과 판단 속에 안주해 있습니다.  변화를 주도할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변화를 저항합니다.  전통은 변화와 개혁을 거부합니다.  변화를 위한 수고의 두려움에 사람들은 주저하고 있습니다.  변화에 대한 수고를 두려워하면 변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변화에는 칭찬과 격려와 분위기가 중요합니다.

변화에 대한 과정이 이해되지 않으면 사람들은 변화를 따르지 않습니다.  변화의 흐름에 뒤떨어지면 폐기물이 되고 맙니다.  성장이라고 하는 것은 변화의 결과물입니다.  변화하지 못하면 마른 가지처럼 용도 폐기가 되고 맙니다.  변화만이 살 길입니다.  변화만이 나라가 살 길입니다.  민족이 살 길입니다.  사회가 사는 길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교회도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변화의 흐름에 따라가지 못하면 교회도 죽은 교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묘한지 아십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이 어떤 모습으로 왔든지 하나님은 그 모습 그대로 다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그대로 두기를 원하지 안는다는 사실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놀이터에 옷도 예쁘게 입고, 모자도 예쁘게 쓴 4살 된 아이가 있다고 하십시다.  그런데 이 아이의 엄마는 아이를 잠깐 두고 아이스크림을 사려고 가게에 갔습니다.  엄마가 없는 사이에 이 아이는 흙을 입에 묻히고, 강아지가 눈 똥을 손에 묻히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런데 엄마를 보자 이 아이는 아이스크림을 달라고 울고 불며 난리를 칩니다.

이때 이 아이의 엄마가 오물이 묻고 흙이 묻은 이 아이에게 아이스크림을 그냥 주겠습니까?  아이의 고집 앞에 지겠습니까?  착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고집 앞에 그렇게 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 고집을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아이스크림이 다 녹아 내릴망정 절대로 아이에게 아이스크림을 주지 않습니다.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겁니다.  여러분, 고집을 꺾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적 원리는 대단히 깊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새로운 샘으로 데려가서 씻기시고 새로운 옷을 입하시기 원하십니다.

자기 아집과 고집으로부터 탈출하면 살 길이 있습니다.  탕자가 당한 모든 고통의 원인은 어리석음에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하늘의 깨달음을 찾고 아버지 품으로 돌아왔을 때 그 모든 고난은 한 순간에 다 없어졌습니다.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신을 신기고, 가락지를 끼우고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내 잃어버린 아들이로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로다"  이 회복의 역사, 생명의 역사는 오늘 이 자리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변화란 회개의 내용입니다.  변화란 헌신의 핵심입니다.  변화한 사람은 헌신할 수밖에 없고 충성할 수밖에 없습니다.  변화란 충성과 헌신의 최종 목적입니다.  변화를 통해 성장하면 열매를 맺고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변화했노라고 말하면서 헌신이 없고 충성 봉사가 없다면 그는 변화하지 않았습니다.  변화하지 않기 때문에 헌신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변화하지 않기 때문에 충성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 앞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변화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변화 받고 크게 주 앞에서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개척자입니다.  여러분은 탐험가입니다.  우리가 밀림 한 가운데 놓여지면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나침반입니다.  똑같습니다.  아직 탐험되지 않은 미래의 영역을 향하여 믿음이라는 나침반을 들고, 하나님의 능력에 취하여 또 변하고 또 변하며 모험해 가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죄가 무엇인지를 아십니까?  실수가 죄가 아닙니다.  실패도 죄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또 다른 세계를 바라보며 변하지 못하는 것이 죄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고 여러분 속에 신령한 것을 채우십시오.  하나님의 저항할 수 없는 절대적인 능력에 사로잡힘 바 되는 경험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신령한 힘이 나를 지배하고 있다면 우리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나를 통하여 변화의 역사와 물결과 파도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변화가 철철 넘칠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에 보면 십대의 나이에 역사의 격동 속에서 세상 한가운데로 내버려졌던 한 젊은이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바로 요셉입니다.  17살에 꿈을 꾸었습니다.  역사적인 꿈을 꾸었습니다.  국가적인 꿈을 꾸었습니다.  미래적인 꿈을 꾸었습니다.  중동 팔레스타인 일대에 가나안을 정복한다는 어마어마한 비전을 주었습니다.

21세기 우리의 앞날이 어떻게 될까?  우리의 자손이 어떻게 될까?  사랑하는 여러분, 꿈을 꾸시기 바랍니다.  꿈이 없으면 방자해 집니다.  꿈이 없으면 무너집니다.  꿈이 없으면 답답해집니다.  사람은 사명적 존재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큰 것에 미치지 않으면 시시하고 작은 것들이 달려듭니다.  큰 것에 미치시기 바랍니다.  이 사명을 위하여 오늘도 사는 것입니다.

요셉은 이 사명 때문에 버림당하는 아픔을 겪습니다.  세상은 언제나 변화를 시도하는 꿈쟁이들을 버릴 때가 있습니다.  형제가 버릴 때도 있습니다.  가정이 버릴 때도 있습니다.  조직이 버릴 때도 있습니다.  깊고 깊은 캄캄한 수렁에 떨어졌습니다.  형제들이 버린 굴속에서 요셉은 무엇을 했을까?  어떻게 이런 사람이 가는 곳마다 사람이 돕고, 가는 곳마다 형통하는 역사가 일어났을까?

요셉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하나님이 그를 형통케 하시므로 그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두 가지를 붙드시기 바랍니다.  깜깜한 그 웅덩이 속에서 요셉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그래도 변화는 일어난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캄캄한 칡흙같은 상황에 놓일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경제적인 문제이든, 사회적인 문제이든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래도 내 삶에는 반드시 위대한 변화는 일어난다!"고 외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사람이 배신한 것을 하나님이 배신한 것처럼 그렇게 길길이 뛰지 마십시오.  만일 요셉이 그랬다면 아무런 역사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역사는 일어난다"  이 말을 요셉은 끝까지 붙들었습니다.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서 요셉은 무엇을 했을까?  "그래도 변화는 일어난다"  여러분, 아무런 기도가 되지 않을 때 이렇게 외치십시오.
"그래도 변화는 일어난다"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이 변화를 위한 준비를 하도록 하신 수업이었습니다.  만일 요셉이 이 수업을 받지 못했다면 14년간이라는 긴 시간동안 그렇게 형편없던 나라를 이끌어 갈 수가 있었겠습니까?  변화를 이끌어 가는 지도자를 만들려고 하는 하나님의 또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당하는 내 고통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님의 세계를 만들려는 기회라는 사실을 믿으시고 꿈을 꾸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본질이 명확하게 되는 것은 변화를 행동으로 끌어내기 때문입니다.  믿는 사람, 하나님을 믿기에 교회와 사회에서 변화의 파도를 일으킵니다.  베드로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고 가니까 3천명, 5천명의 사람들 가운데 변화의 파도가 일어났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에 들어가니까 로마가 들썩들썩했습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저들이 변화의 능력인 성령을 힘입고 나가니까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이 묻습니다.  "저들 가운데 나타나는 이 능력이 무엇이냐?"  온 도성을 소란케 하는 사람들이라고 별명이 났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믿는 이 믿음은 감상이 아닙니다.  신앙은 명상도 아닙니다.  신앙은 도덕 군자를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윤리학자를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은 점잖은 사람을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거룩한 바른 능력에 취하여 이 험난한 어둔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거하는 증거자를 만드는 작업입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윌리엄 제임스라는 사람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시대의 가정 위대한 발견은 태도를 바꾸면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우리의 태도에 따라 다르게 보입니다.  좋은 것도 나쁜 태도로 보면 나쁜 면만 보게 됩니다.  그러나 나쁜 것도 좋은 태도로 보면 그 속에서도 선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보십시오.  꿈의 사람 요셉이 가는 곳마다 변화의 물결이 일어났습니다.  사람이 사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저는 이 시간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합니다.
저와 여러분에게서 미래를 향한 변화의 물결이 출렁거리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변화의 물결을 일으키며 가는 여러분의 걸음걸음마다 생명을 살리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 내 가정이 변화되고, 내 자녀가 변화되고, 이 민족이 변화되는 한 알의 밀알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한 심령 심령을 통해서 사랑하는 제단에 변화의 물결이 일어나고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 황무한 이 땅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주철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