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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빌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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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빌 2:1~4)


지난주간에는 제93회 교단총회가 제주성안교회당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저는 평양노회의 총대로 총회에 다녀왔습니다.  총회를 다녀온 보고는 자세하게 정리되는 대로 홈페이지를 통하여 보고하려고 합니다.  24일 수요일 저녁에는 합동 총회가 모이는 서귀포 중문단지에 있는 국제 컨벤션센터에서 5000명의 목사와 장로님들이 모여 “한국장로교 연합예배”를 드렸습니다.  우리 교단 통합측과 합동측, 기독교장로회, 합신측 이렇게 4개 교단이 연합으로 역사적인 연합예배를 드렸습니다.  인도는 본 교단 총회장이신 김삼환 목사님이, 설교는 합동측 총회장이신 최병두목사님이 하셨고 아주 의미 있는 순서를 가졌습니다.  

집회를 마무리 하면서 인도하는 김삼환 목사님이 통성기도를 진행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감격스러운 예배를 이렇게 끝낼 수 없습니다.  선교 123년 역사에 이렇게 장로교단이 한 자리에 모이는 일이 일찍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크게 세 가지를 회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로는 제27회 총회에서 결의한 신사참배를 회개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제일 싫어하시는 죄가, 신사참배의 죄입니다. 주여, 우리의 신사참배를 회개합니다. 용서하여 주옵소서.  

두 번째는 우리 교단의 분열을 회개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몸을 찢었습니다. 주여 분열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세 번째는 우리가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여, 이 세상은 캄캄한 어두움에 쌓여 있습니다. 빛과 소금으로 이 민족의 갈등을 회복해야 합니다.  주여,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한 죄를 회개합니다. 주여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강단에는 수십 명의 교단장을 지내신 분들과 현직 교단장, 임원들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고, 컨벤션센터에 모이신 모든 목사님과 장로님들이 두 손 들고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 어떤 선언문 낭독이나 설교보다도 그 기도회가 간절하였고, 감격스러웠습니다.  총회의 모든 시간 시간이 다 은혜롭고, 의미 있는 순서들이 많았지만, 장로교 연합예배가 금번 총회를 빛나게 하였습니다. 

분열만 거듭하던 총회가 연합하여 한 자리에서 예배드린 것으로 감동과 감격 그 자체였습니다.    서로가 얼싸안고 사랑한다고 하면서 한 하나님, 한 주님, 한 성령님의 역사로 하나 될 수 있었습니다. 

시133:1-3에는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가 있습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형제가 하나 되는 감격을 저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든 성도들이 함께 느껴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정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고 되어 있지만, 새번역에는 “내 기쁨이 넘치게 해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주님에게 기쁨이 된다는 말과 같습니다. 

명언 중에는 “기쁨을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기쁨을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은 참으로 좋은 말입니다.  

우리 민족은 속마음을 잘 나누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좋아도 혼자 좋아하고, 싫어도 혼자 싫어합니다.  무엇을 고민해도 털어놓지 못하고 끙끙 앓는 민족이기에 그렇게 좋은 명언은 우리 정서에서 나온 말이 아닐 것입니다.  이 말은 영국의 격언집에 나오는 말이라고 합니다.  영국 신사들이니, 그런 말을 한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슬픔이란 혼자서도 얼마든지 간직할 수 있습니다.  슬프게 지내고 싶습니까?  이 세상과 담 쌓고 친구 없이 혼자서 외톨이로 살아가면 슬픔을 잠기게 됩니다.  그는 결코 슬픔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쁨이란 반드시 누군가와 나의 벅찬 감사와 감격을 나누어 가질 때에만 일어나고 또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슬픔에서 오히려 웃음과 기쁨을 가져오고, 남의 기쁨에서 슬픔을 얻어오고 있습니다.  우리말에는 우리의 옹졸한 정서를 잘 담아내고 있는데,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의 기쁨에 함께 기뻐하지 못하고, 겉으론 기뻐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슬픔에 빠져들고, 기분이 썩 좋지 않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 좋은 일이 있어 기뻐하는데, 함께 기뻐해주지 못하면서, 남이 잘 되는 것을 보면서 스트레스를 받고,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기분 나빠서 돌아서게 됩니다.    아무개는 승승장구하는데, 나는 왜 이렇게 잘 안 되는 것이야 하고 기분이 떨어지게 됩니다.  우리 심령 깊은 곳에는 놀부 심보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롬12: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했습니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것은 할 수 있는데, 실상은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하는 척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은 어렵습니다.  

여러 글을 읽다보면 참 좋은 말이었는데, 메모하지 않으면 그 좋은 말을 다 잊어버리고 맙니다. 단편적으로 생각나는 말도 어디서 읽었는지도 모르는 것도 많습니다.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만 울게 될 것이다.” “올드보이”라는 영화의 한 장면에 나오는 글귀입니다.  주인공이 15년 동안 감금당한 방안의 액자에 적힌 글인데, 후에는 주인공이 그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살아가게 됩니다.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만 울게 될 것이다.” 이 말은 19세기 영국사람 ‘엘라 윌콕스’라는 시인이 쓴 시의 첫 구절이라고 합니다.  한번 따라 해보세요.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만 울게 될 것이다.” 

어느 책에서 이런 짧은 글을 메모한 적이 있습니다.  “너 자신은 알고 있잖아!”라는 글이었습니다.   1940년 아카데미 8개상을 휩쓸었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라는 영화는 속치마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빅터 플레밍 감독은 대연회 장면을 찍을 때 스칼렛의 자매들에게 비싼 실크 속치마를 사 입고난 후에 계산서를 청구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스카알렛의 동생이 차액을 남기려했는지 싸구려 속치마를 사 입고 왔습니다. 관객이 알 수 없는데 어떠냐고 항변하는 여배우에게 감독은 버럭 큰소리를 질렀습니다. “너 자신은 알고 있잖아!”  

감독은 실크 속치마를 입은 배우의 행동과, 실크 속치마를 입은 척 하는 배우의 행동이 관객의 눈에 달리 비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비단 속치마를 입고 춤을 추는 마음과 싸구려 속치마를 입고, 춤추는 것은 마음이 다르고, 자세도 다르고, 행동이 다르고, 반응 또한 달라질 수 있습니다. 진실은 진실을 낳고, 진실하게 반응하게 됩니다.  진실만이 진실을 낳을 수 있습니다. 거짓을 품었으면, 거짓을 낳을 수밖에 없고, 거짓을 거둘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이 짧은 에피소드를 읽으면서 “너 자신은 알고 있잖아!” 라는 말을 마음에 새겨두기로 했습니다.  무슨 생각을 해도, 무슨 말을 해도, 어떤 행동이라고 해도 ‘내가 알고 있다.  또 하나님이 아신다.’라는 생각입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정직하고 성실을 다한다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한 시간 설교하기 위하여 하루 종일 꼬박 자리를 지키고 준비하며, 기도하기로 했습니다.  

성실이 성실을 거두고, 진실이 진실을 낳고 변화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자세로 살아가는데,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드러나지 않는 부분에서, 언제나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정직하게 살아야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는 4절 마지막에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기쁨을 충만케 하라”고 하셨습니다. 새번역 성경에는 “내 기쁨이 넘치게 해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직접적으로는 바울 자신의 기쁨이 넘치게 해달라는 말인데, 사실은 주님에게 기쁨이 되게 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삶, 우리 주님에게 기쁨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 주님의 기쁨되기 원하네.  내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  새부대가 되게 하여 주사 주님의 빛 비추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이란 성가가 있습니다.  이 복음성가는 한 때 정말 많이 불러진 성가였습니다.  우리들이 소원하는 한 가지가 있다면, 주님이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계시는 주님,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짊어지신 우리 주님이 흐뭇해하시고 미소를 머금게 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주님이 기뻐하셨다는 것, 주님이 미소를 지으셨다는 것, 주님이 마음으로 받아주시는 일을 하였다고 하면 그것으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우리 주님으로 기쁨이 충만케 하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첫째로 “그리스도 안에서 좋은 인간관계를 가지라”고 합니다.   1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이 말씀은 다 대인관계를 잘 하라는 말씀입니다.  권면, 사랑의 위로, 교제, 긍휼과 자비 이 모든 것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인간관계를 좋게 하라는 말이지, 자기 자신을 위한 덕목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이런 말씀은 다, 좋은 인간관계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과 자비라는 말도 인간관계를 위한 말이지, 나 자신을 위한 덕이 아닙니다.  

여러분, 누구를 권면하고 싶습니까?   권면이나, 사랑의 어떠한 위로도 그리스도 안에서 나와야 진정한 권면이 되고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누구와 무슨 교제를 하고 싶습니까? 누구를 긍휼히 여기고 자비한 마음으로 대하고 싶습니까? 그것도 성령 안에서 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모든 행동이 그리스도 안에서, 또한 성령 안에서 나올 때에야 사람을 변화시키고, 좋은 인간관계를 형성합니다. 무슨 말을 하든지, 주님에게 대하듯이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성령 안에서 말해야 진정한 권면이요, 참 위로가 됩니다. 

우리 주님으로 기쁨이 충만케 하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두 번째로는 “마음을 같이 하고 하나 되라”고 하십니다.     2절입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혼자서 독불장군이 될 수 없습니다.  내가 있기 위하여 당신이 있어야 하고, 내가 잘 되기 위하여 다른 사람도 잘 되어야 합니다.   

빌립보교회는 일치와 연합이 안 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신앙생활을 잘 하는 사람들인데, 연합과 협력하는 데는 실패하였습니다.   인간관계가 좋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이 교회가 여성주도형의 교회였기에 교역자인 사도바울에게 지극정성으로 잘 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이 감옥에 갔다하면 열심을 다하여 돌아보았습니다.    영치금도 잘 넣어주었습니다.  사람을 보내어 옆에 있으면서 도와드리게 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암투가 끊이지 않았고, 문제가 많았습니다.  지도자들이 하나 되지 못하였습니다.  바울이 나중에는 실명을 거명하면서 “하나 되라”고 했습니다.  빌4:2에서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까지 명하였습니다.  이들 이름은 여성들의 이름이요, 빌립보교회의 여성 지도자들이었습니다.  하나 되지 못하고 있었기에 교회와 온 성도들은 불편하였습니다. 

교회는 일치와 연합을 깨뜨리며 해야 할 만큼 시급한 일도 없고, 중요한 일도 없습니다. 일치와 연합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여러분, 가정과, 우리의 교회가 같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 되어야 잘 된다는 것입니다.  가정이 하나 되지 못하면, 그것은 지옥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 됨으로 천국을 만들고, 다툼과 미움으로 나눠지므로 지옥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저는 비행기를 탈 때마다 정말 첨단과학의 혜택을 누린다는 생각을 가집니다.  100년 전에 이기풍목사님이 제주도에 갈 때는 며칠 걸리는 목선을 타고 가는데, 바다 빠져 죽을 각오를 해야 했습니다. 조선시대에 제주목사로 파견된 사람들의 명단을 본 적이 있는데, 제주도는 누구나 싫어하는 자리입니다.   왜냐하면 부임하다가 죽은 사람도 있고, 귀임하다가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무리 유능한 선원이라고 해도 바다의 풍랑을 어떻게 피할 것입니까?  지금은 비행기로 한 시간이면 제주도를 가는데, 아침 일찍이 가서 하루 종일 할 일 다 마치고, 저녁 늦게 돌아오면 제주도를 한 바퀴 돌면서 관광할 수도 있습니다.  제주도는 얼마나 깨끗하고 아름다운지, 우리나라에서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곳은 제주도가 유일합니다.  

비행기는 수만 개의 부품을 모아서 조립하고, 하늘에 띄웁니다. 여러분, 자동차 한 대의 부품이 2만개가 넘는다고 하는데, 비행기는 그보다 더 많을 것입니다.   F15기의 전투기는 23만개의 부품이 모아져 한 대의 전투기가 태어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부품이 하나 될 때에 무서운 전투력을 가지고 하늘을 날게 됩니다.    어느 하나라도 말썽을 부리거나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면, 치명적인 결함을 가지게 되고, 하늘에서 바다로 땅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같이하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어야겠습니다. 주님은 한 사람이 일을 잘하는 것도 중요하게 보시지만, 모든 사람들이 한 마음이 되어, 한 뜻을 이루어가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온 성도들이 합심하여 기도하는 것을 정말 기뻐 받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 주님으로 기쁨이 충만케 하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세 번째로는 “다른 사람을 높이라”고 하십니다.  우리 주님이 기뻐하는 인간관계는 남을 나보다 높이라고 하십니다.  3절 말씀에 “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하셨습니다.  다툼이나 허영이란 무엇입니까?    경쟁심이나 명예심으로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해도 자신의 이름을 높이고, 자신을 드러나게 합니다.  다툼이나 허영이란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을 높이기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자신은 겸손하게 낮추고, 다른 사람을 높여주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단점이나 캐고 허물이나 찾으려고 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장점을 발견하고 높이 사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인간관계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심으로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더하여 주십니다. 

우리 주님으로 기쁨이 충만케 하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의 일을 돌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이란 자신에게 머물지 말고, 어려운 사람들,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라고 하셨습니다.  4절입니다.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나의 일 다 하기에도 힘에 벅찬데, 누구의 일을 돌아볼 것입니까?”  그렇게 말씀하지 말고, 나의 일을 제대로 못해도 나를 필요로 하는 다른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의 요구를 외면하지 않는다는 정신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잘 믿는 경건이라는 것이 세속에 물들지 않고, 혼자서 명상하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조용히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약1:27에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의 삶이란 경건을 추구하는 삶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경건에 대하여 그릇되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냥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고 깨끗하게, 고고하게 사는 삶을 경건한 삶이라 여기는 것입니다. 물론 바람직한 경건은 세속에 물들지 않는 깨끗한 삶이 경건한 삶의 기초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거기에 한 가지 더하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환란에 처하여 있는 이웃을 돌아보는 일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환난 중에 있는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일”이 먼저이고, 이어서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삶”이라 하였다.  “고아와 과부를 돌아본다.”는 말은 굳이 고아와 과부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말할 대에 대표적인 예로 고아와 과부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반드시 나를 통하여 영광받으실 일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를 이용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돌아보게 하시는 사람을 두셨습니다.  물론 우리 자신을 먼저 돌보아야 합니다.  나를 위하여 살아가야 하지만, 그것으로 머물지 말고, 우리의 어려운 이웃을 돌보아야 합니다. 

파스칼이란 사람이 한 말이라고 하는데,  “가슴은 이성이 알지 못하는 그 자신의 이성이 따로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감정입니다.   인간관계의 매듭은 이성으로 풀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마음으로 풀어가야 합니다.  마음과 마음이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인관계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좋은 인간관계는 우리의 인생을 참으로 풍요롭게 하고, 살아갈만한 가치를 가져다줍니다.    그러나 인간관계가 나빠지면 무엇을 하여도 의미도 없고, 보람도 없고, 실망하게 됩니다.  

따뜻한 마음으로 손을 잡아 주십시오.    때로는 아주 작은 일에, 정말 작은 손짓 하나에, 평범하게 던진 말 한마디에, 우리들의 가슴이 찢어지고 가슴이 시리도록 아프게 합니다.  무심코 던진 말인데, 말 한 마디에 입은 상처는 일생 아물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진한 사랑을 느끼고 싶어서 교회를 찾아 왔습니다.  그래도 세상과는 다를 것이라는 생각으로 교회를 찾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번만 더 손잡아 주어야 합니다.    따뜻한 마음으로, 손을 내어 밀어야 합니다.  그리고 세 번 이상 손을 잡아 흔들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말에 한번 주면 정이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말에는 삼세번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두 번 흔들면 비교급이고, 세 번 이상이면 최상급이 됩니다.  최상급의 사랑으로 손을 잡아주어야 합니다. 

인간관계라는 것은 헤어지기는 쉬워도, 또 다시 만나기는 어렵습니다.  등 돌리기는 쉬워도 다시 손잡고 사랑하긴 어렵습니다.  비방하기는 쉬워도 용서하고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좋은 인간관계를 회복하여야 합니다.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만이 마음에 도달할 수 있으며, 살아있는 양심에서 나온 것만이 양심을 꿰뚫을 수 있다.”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얼어붙은 마음을 녹일 수 있는 것은 그 마음을 감싸 안을 수 있는 따뜻한 가슴뿐입니다.  

우리는 일생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힘써야겠습니다.  주님에게 기쁨을 드리기 위하여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좋은 인간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또 번째로는 “마음을 같이 하고 하나 되라”고 하십니다.  “다른 사람을 높이라”고 하십니다.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의 일을 돌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기쁨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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