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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고전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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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고전 13: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고전 13:5). 

I. 본문해설 

오늘 말씀의 “성내지 아니하며”라는 사랑의 특성은 그 앞에 나오는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라는 사랑의 특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II. “성내다”의 말뜻 

그렇다면 본문에 나오는 성내다의 뜻은 무엇일까요? 

A. 희랍어: ‘파로크쉬네타이’ 

희랍어 성경은 이 부분에 ‘파로크쉬네타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말에 ‘성내다’는 능동태이지만 희랍어 성경에서 이 단어는 수동태로 쓰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직역하자면 “사랑은 어떤 것에도 분내도록 자극받지 아니하며” 혹은 “사랑은 무언가에 의해 화가 돋워지지 아니하며”라는 의미입니다. 

B. 단어의 의미 

또한 이 단어는 바울이 아덴에서 복음을 전할 때 많은 우상을 보고 마음이 격분하였다고 성경이 기록할 때 쓰인 단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는 ‘다투다’ 혹은 구약적인 배경에서 ‘분노하다’, ‘노하다’, ‘진노 하다’라는 의미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III. “성내지 아니하며”의 참뜻 

그렇다면 본문 말씀에서 사도가 사랑의 특성으로 들고 있는 “성내지 아니하며”의 참뜻은 무엇일까요? 

A. 어떠한 분노도 없다는 뜻이 아님 

로마시대에는 스토아 사상이 사람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습니다. 이 사상은 세상에 있는 모든 물질의 변화와 사람의 인연을 덧없는 것이라고 보고, 인간의 가장 높은 덕은 환경에 의해서 어떠한 흔들림이 없는 바위와 같은 상태가 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래서 기뻐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증오하고, 분노하는 것에 전혀 가치가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라고 말했을 때 지칭하던 의미는 그들처럼 어떠한 감정에 흔들림도 없이 분을 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오히려 분노의 이유와 관계있습니다. 

B. 분노의 이유와 관계있음 

만약에 사도 바울이 그들과 같은 주장을 했다면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 성전을 정결케 하신 예수님은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많은 사람들이 성전에서 돈을 바꾸며 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일이 있기 전 멸망할 예루살렘을 보고 슬퍼하시던 예수님은 그 광경을 보시고 그들의 상을 엎으며 진노하셨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무리들을 내쫓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셨으며 그 마음 안에는 인간이 도달할 수 없을 정도의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의 생애는 어떠한 감정의 흔들림도 없는 무정한 생애가 아니었습니다. 기뻐하실 때도 있었고, 눈물 흘리실 때도 있었으며, 안타까워하신 적도 많았습니다. 이렇게 볼 때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의 참뜻은 아가페 사랑을 가지고 있으면 모든 분노가 사라진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한 사람의 신자가 주님을 만나 참된 사랑으로 충만하면 분노의 이유가 바뀐다는 뜻입니다.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은 세상에 대하여서는 울고 웃지만 하나님을 향해서는 흔들림이 없는 바윗덩어리와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아무런 영적인 생명력도 없고 하나님을 좋아하는 마음의 취향도 없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지식들이 전달될 때 떨며 기뻐하는 행복도 낯선 것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흔들리지 않음이 높은 수준의 인간의 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경향의 문제입니다. 여러분들이 예배시간에 하나님 앞에서 단지 침묵할 수 있고 어떠한 감정의 흔들림이 없다는 것은 높은 수준에 도달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관심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우심과 여러분의 취향에 어떠한 부딪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우리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진정으로 회심하고 나서 주님을 향한 참된 사랑을 가지게 되면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수 없는 풍부한 정서의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는 틀림없이 주님이 분노하실 자리에서 함께 분노하고 기뻐하실 자리에서 함께 뛸 듯이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어떤 경우에도 성내지 아니하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 사랑이 그 사람 안에 인격화 되어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C. 분노의 이유는 두 가지로 대별됨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분노의 이유입니다. 

1. 자기사랑 

우리가 자주 볼 수 있는 분노의 이유는 자기사랑입니다. 자기사랑으로 가득한 사람은 자신의 이익이 침해 받을 때 분노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옛날에 시골에서는 새우젓 독에다가 뜬 물을 버렸습니다. 그 안에는 온갖 음식 찌꺼기들이 둥둥 떠다녔고 때가 되면 돼지를 키우는 사람들이 그 물을 가져갔습니다. 그런데 이 물을 하루 종일 내버려 두면 부유하던 찌꺼기들은 천천히 가라앉아 표면은 마셔도 좋을 것 같을 만큼 맑은 물이 되곤 합니다. 마치 청주처럼 은은한 빛깔을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수거하려고 온 주인이 긴 막대기로 그 물을 푹 찌른 후 확 휘두릅니다. 그러면 언제 맑은 물이었던가 싶을 정도로 온갖 더러운 찌꺼기들이 솟구쳐 오릅니다. 여러분들은 가끔 성질나면 무섭지만 건드리지 않으면 정말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이들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의 좋고 나쁨은 내면의 세계를 가리키는 것인데 건드려서 언제라도 올라올 찌꺼기가 많은 사람은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좋은 사람은 어떻게 건드려도 전과 같이 맑은 사람들입니다. 

자기 사랑이 위와 같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손해를 줄 것 같은 자극이 주어질 때 항상 똑같은 방향으로, 똑같은 정도로 성을 내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에 민감해서 돈 문제라면 앞으로의 모든 인간관계를 깨뜨릴 정도입니다. 반면 어떤 사람은 자존심에 대해 매우 민감하여 명예가 실추되었을 때 매우 큰 고통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런 식으로 나타나는 양상은 다르지만 이것은 모두 하나의 핵심에 도달합니다. 바로 자기 사랑, 자기 이익입니다. 누군가 막대기로 자신의 내면을 건드리면 찌꺼기들이 확 올라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사랑이 있는 인간이 어떤 자극을 받았을 때 성내는 것은 바로 자기 이익을 지키는 한 방법이 분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이 가진 어떤 것 때문에 하나님도 기꺼이 외면해 버릴 정도로 그 분 앞에서 분노합니까? 

2. 하나님 사랑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 심령이 충만했던 사람도 때로는 격렬하게 분노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그 사랑으로 충만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동포를 하나님 사랑으로 끌어안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모세가 어느 날 구스 여인과 혼인하는 문제로 미리암과 아론의 심한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라고 반박하였습니다. 

그 때 성경은 모세의 반응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민 12:3). 모세가 그렇게 반응했던 이유는 그 사건이 단지 모세 자신의 이익만을 자극했던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와 전혀 다른 상황이 민수기 25장에 나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생활 중 싯딤이란 곳에 머물 때의 일입니다. 이스라엘 남자들이 모압의 여인들과 함께 음행하며 함께 바알브올이라는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 때도 모세가 온유함을 보였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바알브올에게 절한 이들을 잡아 죽이라고 명하였습니다. 이는 모세에게 사랑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모세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충만했었음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끔찍하게 언약 백성을 욕보이는 무리들을 제거하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 얼굴을 들 수 없는 충성심이 모세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일로 하나님은 진노는 그치고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 하나님의 인도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래도 괜찮고 저래도 괜찮다는 태도는 모두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과 하나님 사랑이 식어버린 성도의 본보기일 뿐입니다. 오히려 신앙생활은 그렇게 무덤덤한 것이 아니라 활기로 가득한 것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주님의 마음을 느끼게 되며 주님과의 실제적인 연합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IV. “겪음”과 사랑의 진보 

인간은 끊임없이 환경과 접촉하고 그 환경에 의해서 끊임없이 변하는 존재입니다. 특별히 내적 변화가 외적인 변화보다 두드러집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지금의 어떠한 마음과 영혼을 지니고 있는지 혹은 어떤 태도를 지니고 있는지는 그가 어떠한 환경 속에서 살아 왔는가와 밀접하게 관련됩니다. 그것을 가리켜 ‘겪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환경을 ‘겪음’이 사랑의 진보와 연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선 알아야할 것은 환경이 내 마음대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오직 그 환경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며 살 것인지 하는 것만이 우리 자신 안에 무엇이 있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똑같은 환경을 만나도 우리 안에 사랑이 없으면 원망하고 미워하지만 아가페 사랑이 있으면 오히려 그 상황 때문에 더욱 예수님을 닮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다른 이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도구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세 가지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우선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너무나 큰 고통을 주어서 일평생 미워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또 그러던 사람이 회심하여 주님의 사랑을 받아 진심으로 자신을 괴롭힌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몇 년 후 은혜가 떨어져서 다시 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가능합니까? 이 세 가지 모두 가능합니다. 결국 이것은 이 세상에는 정말로 치유가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근래에 횡행하는 치유의 대부분은 신학적으로 잘못된 토대위에서 인본주의 심리학적인 접근을 한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절망해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매일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오늘, 오늘의 은혜를 달라고 주님께 구하면 되는 것입니다. 달리말해서 우리에게 언제나 필요한 것은 끊임없이 주님을 향한 순전한 사랑에서 자라가는 것, 즉 사랑에서 진보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왜 그렇게 ‘성화’되기를 간절히 열망합니까? 성화의 결과는 잘 다듬어진 도덕적인 삶, 교회에서 상승하는 직분이 아닙니다. 성화의 결과는 우리의 본성 안에서 죄가 죽는 것만큼 주님을 향한 사랑이 순수해지고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순간도 신앙의 걸음을 멈출 수 없습니다. 

A. 진리의 빛과 은혜의 힘으로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놀라운 신앙의 체험을 갖고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했어도 끊임없이 주님을 붙들지 않으면 미끄러지게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식으로도 교만해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백합니다. “이 손을 꼭 잡고 나를 놓지 말아주십시오. 매 순간 진리의 빛으로 또한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은혜의 힘으로 살 수 밖에 없는 저희들을 붙들어 주십시오.” 


V. 그리스도를 본받아 

예수님은 이 땅에 내려오셨을 때에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자기 안에 충만하셨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무덤덤한 인생을 사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울고, 웃고, 분노하고, 사랑하며, 열정적으로 인생을 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분을 따라 까리따스의 사랑이 마음 안에 충만할 때 그렇게 살게 됩니다. 주님이 눈물 흘리셨던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고 주님이 분노하신 자리에서 분노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비록 가진 재물이 없고 남에게 있는 탁월한 지식이나 건강이 없더라도 주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있으면 주님이 살라고 허락하신 세상에서의 날들 동안 예수님을 본받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그 분의 뜻을 따라 사는 자녀들로 인하여 이 세상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세상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도 주님의 은혜에 목말라하며 그 은혜를 간절히 구해야하는 것입니다.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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