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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죽음에 이르는 병 : 절망 (요 1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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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이르는 병 : 절망 (요 11:1~16)


그리스도인에게서 죽음은 자기의 죽음이 아니요 한 생명 얻음에 대한 책임의 결정이다. 이 죽음은 죽음의 암흑을 새로운 삶의 시작으로 믿고 희망하며 살아가는 신앙인 것이다. 이는 인류구원을 위해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신앙에 그 기초를 두고 그와 관계됨을 알게 한다. 죽음과 삶은 오로지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창조된 인간은 함께 사랑하며 살도록 남녀의 사람을 지어 만들었으나 인간은 죄로 인해 창조 때의 하나님의 모습을 잃고 관계가 단절되어 버린다. 이것은 성서의 죽음에 대한 견해이다. 

키르케고르(1813-1855)는 덴마크의 종교적 실존사상가로 1813년 코펜하겐에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서 그의 형 두 명과 누나 세 명이 모두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가 이를 자신의 죄에 대한 신의 벌이라 받아들인 것이 젊은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의 저서 ‘죽음에 이르는 병’은 그의 개인적인 사정과 당시 시대를 견주어 보며 성서의 요한복음에 준하여 쓰여 지게 된다. 

성서에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나사로가 병들었나이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이본문은 지난번 날(요9:3) 소경되었던 자와 관련지어 “이 사람이 소경된 것은 그 자신이나 부모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는 이 두 가지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에 주목하게 된다. 예수께서는 ‘나사로의 죽을 병’ 실화에서 나사로의 병에 관해 ‘이 병은 죽음에 이르지 않는다’고 한 말이다. 

여기에 유래하여 키르케고르는 제목을 ‘죽음에 이르는 병’으로 책을 썼다. 그는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이요 죽음에 이르지 않는 병은 희망으로 말함을 뜻한다. 절망은 정신의 병이며 자기와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에 분열이 생기는 상태를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절망이 죄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고 이러한 죄의식을 기회로 신앙의 길이 열린다고 한다. 그의 저서에서 그는 ‘절망’을 제1편은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임을 알게 한다. 절망은 정신적인 병이며 자아의 병이라는 것이다. 제2편에서는 절망은 죄라는 것이다. 죄는 인간이 신 앞에서 혹은 신의 관념을 가지고 절망적으로 자기 자신이라고 하지 않는 것 또는 절망적으로 자기 자신이기를 원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죄는 인간이 올바른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것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것 또한 인간이 그것을 원하지 않는 것에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즉 죄는 절망의 강화이다. 절망은 변증법적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교의 이해로 죽음은 정신적인 비참을 말한다. 그러나 죽는 것 안에 다시 말하면 서서히 죽어가는 것 안에 바로 구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세상적으로 말하면 죽음은 모든 것의 종말을 말하며 생명이 있는 한 희망이 아니며 그리스도교적으로 말하면 죽음은 결코 모든 것의 종말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내부에 있어서 하나의 작은 사건에 불가할 뿐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적으로 해석하면 인간적인 의미보다도 무한히 많은 희망이 죽음 안에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말하면 죽음도 역시 ‘죽음에 이르는 병’은 아니다. 더욱이 지상의 일시적인 고뇌, 즉 고통, 병, 비참, 곤란, 불운, 고역, 한탄, 우수, 회환 등은 그 어느 것도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니다. 그런 것 들은 그리스도교교인들에게 익살과 같은 것이며 그리스도교교인만이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알고 있다.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이라고 했다. 절망은 정신적인 병, 자기에게 있어서의 병으로 거기에는 세 가지 경우가 있다한다. 즉 절망하고 있으면서 자기를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를 말하며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기를 욕망하지 않는 경우를 말하고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기를 욕망하는 경우를 말함이다. 이것은 그의 실존의 의미가 단독자임을 말한다. 죽음 앞에서 인간 수명의 수수께끼는 절정에 달한다. 인간은 아픔과 꺼져 가는 육체의 파멸을 괴로워할 뿐 아니라 영원한 것의 소멸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인간 실존의 완전한 파멸과 결정적 종결을 싫어하고 거부할 때 마음의 본능에 따른 이 판단은 옳은 것이다. 사람들은 죽음의 부정적인 측면만을 생각한 나머지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조차 꺼려하게 된다. 그러나 죽음은 긍정적인 측면이 더 많음을 알게 한다. 죽음은 이 세상에 태어난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자연스런 현상이며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들어 준 존재이다. 빈부귀천, 남녀노소를 따지지 않고 다가오는 죽음은 인간을 가장 평등하게 만들어주는 존재임을 알게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멸망이 아닌 희망으로 승화되어진 죽음은 인간의 가치를 더욱 높여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결국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감하는 죽음은 새 하늘 새 땅의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새 사람인 것이다. 사람들의 육체적인 죽음은 모든 것이 끝나는 종국(終局)이 아니다. 죽음은 최후의 심판을 앞두고 일시적으로 휴식을 취하는 수면 상태이다. 이것은 가톨릭이 주장하는 연옥에서의 대기 상태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비록 육체적으로 또는 세상으로는 죽은 상태(잠자는 상태)인지 모르지만 그 영혼은 하나님 앞에서 깨어있는 것이다.(고후5;8, 빌1;21-23)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는 죽은 신도들 뿐 아니라 죽은 악인들까지도 부활하게 되며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신도들은 영생에 악인들은 영벌(永罰)에 처하게 됨을 믿는 것이다.(고전15;51-53, 계20;11-15) ‘나사로의 죽을 병’ 소식을 듣고도 예수께서는 곧바로 나사로의 집으로 가시지 않고 거기 계시던 베레아 지방에서 이틀을 더 머무신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행동은 야이로의 딸이나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즉각적으로 살려 주셨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이틀간이나 행동을 지연하신 이유는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이기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의 때를 기다리시기 위함이요 마르다와 마리아의 신앙을 연단하기위해 ‘죽음에 이르는 병’으로 절망하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희망을 기대하기 위한 메시지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가 살던 그 당시 시대상은 프랑스혁명과 산업혁명으로 서유럽 자본주의가 그 확립을 자랑하던 바로 그 시기에 바로 거기에 살고 있던 인간의 공허함과 고뇌를 파헤친 그의 저서 ‘죽음에 이르는 병’을 쓰게 된 동기이기도 한다. 같은 해인 1848년에 발표된 마르크스.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과 함께 이후의 자본주의 사회 및 그 속의 인간의 미래를 예시하고 있음을 그는 그의 저서에서 넌지시 알게 하는 것이다. 

이의 저서 중에 가장 많이 익히는 책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그의 책의 첫 머리에 “인간은 정신이다. 그러나 그 정신이란 무엇일까. 자기란 하나의 관계, 그 관계 자체와 관계되는 관계이다”라고 쓰여 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누구나 정신적인 소양을 지니고 태어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감성과 육체로서만 살아간다. 이와 같은 무정신적인 생활의 근저에는 무의식중에 불안과 절망에 따라 관계가 단절되어 절망이 바로 고개를 들이밀고 만다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 죽음은 결코 모든 것의 최후가 아니다. 죽음 또한 모든 것을 포용하는 영원한 생명 내부의 작은 한 사건에 지나지 않는 다고 한다. 절망은 죽음과 싸우면서도 죽을 수 없는 죽을병에 사로잡힌 자의 상태와 흡사한 점이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이 시간과 영원, 육체와 정신이라는 이중적 존재로 태어난 것은 창조자인 신이 정한 것이라고 믿는다. 

인간을 창조한 신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은 자기 자신과 관계하고 자기 자신이기를 바라는데서 자기를 조정하는 힘(신)안에 자기 자신의 근거를 둔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자신의 이중성을 인식하고 이 이중성을 만든 신으로부터 영원한 것을 받아 내는 것 이것이 신앙임을 확인하는 것으로 그의 저서에서 밝힌다.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이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임을 알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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