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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마 8: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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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마 8:18~23)

(18)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쌈을 보시고 저편으로 건너가기를 명하시니라 (19)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21)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23)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좇았더니


무리와 제자

마태가 증언하는 예수님의 모습에서는 무리와 제자들을 구분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읽은 18절은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쌈을 보시고 저편으로 건너가기를 명하시니라” 하고 시작하고, 23절은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좇았더니”로 마칩니다. 그 사이에 제자의 길에 대한 교훈을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문둥병자와 중풍병자를 비롯한 각색 병든 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셨습니다. 이에 수많은 무리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주님은 이런 무리들을 뒤로 하고 바다 건너편으로 떠나려 하십니다. 주님은 사람들의 인기에 연연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다른 가까운 마을들에 가서 하나님나라를 전파해야 할 사명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표면적인 이유에서만이 아니라 주님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렇게 무리들을 멀리 하십니다. 그것은 무리와 제자를 구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제자들로 하여금 더 이상 무리와 같은 신앙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와 동일한 상황이 산상수훈 말씀을 전하실 때도 일어났습니다. 산상수훈을 시작하실 때의 상황을 마태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5장 1절입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5:1) 무리와 제자를 분리하는 모습이 눈에 그려지지 않습니까?

8장과 9장은 예수님의 기적들을 모아놓았습니다. 모두 열 가지 기적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가 예수님의 기적을 열거하는 중간 중간에 제자들과 관련된 말씀들을 싣고 있습니다. 문둥병자와 백부장의 하인, 그리고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는 세 가지 기적을 행하신 후 주님은 제자가 감당해야 할 대가에 대해서 오늘 읽은 구절들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후 바다의 풍랑을 잔잔케 하는 기적, 가다라 지방의 귀신들린 자를 고치신 기적, 중풍병자를 치유하는 기적을 행하신 후 마태를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어서 혈루증 앓는 여인을 고치시고, 죽은 소녀를 살리시며, 두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귀신들려 말 못하는 자를 고치시는 네 가지 기적 후 추수할 일꾼에 대한 말씀을 하시며 9장을 마무리합니다. 이어지는 10장은 열두 제자를 세우고 그들을 파송하는 말씀들입니다.

이처럼 주님의 관심은 철저히 제자들에게 가 있습니다. 우리는 무리가 아니라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편의상 신자와 제자, 성도와 목회자 등으로 구분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는 그런 구분 없이 처음부터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교회는 제자들의 공동체이며, 예수 믿는다는 것은 곧 제자가 된다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은 적당히 신앙생활하고 적당히 즐기는 무리로 우리를 부르시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는 누구인가? 첫째는 말씀에 순종하는 자입니다. 그들은 산상수훈의 말씀을 행하려고 노력하는 자들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오른편 뺨을 맞으면 왼편 뺨도 내어놓습니다. 은밀한 중에 계신 하나님을 철저히 신뢰하면 그분 앞에서의 삶을 사는 존재들입니다. 둘째는 능력의 사람들입니다. 8장과 9장에 언급된 예수님의 기적들은 단지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들만은 아닙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처럼 사람을 살리는 사람들입니다. 셋째 제자는 제자 됨의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나누고자 하는 말씀의 중심 내용입니다.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예수님이 다른 곳으로 떠나시려하자 한 서기관이 나아와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하고 고백합니다. 아마 주님의 말씀과 능력들을 보며 제자로 따르고 싶은 마음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주님은 이에 대해서 찬성과 반대를 표하시지 않고 다만 제자의길이 무엇인지만 밝혀주십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집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이 자기 소유의 집이거나 전세나 월세이든, 크든 작든, 아름답든지 누추하든지 누구에게나 자기가 머무르며 쉴 집이 있습니다. 

주님은 심지어 여우도 자기 사는 굴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공중의 새도 자기 보금자리를 먼저 마련한 후에야 새끼를 기릅니다. 까치가 집을 짓는 것을 보셨습니다. 까치는 대단한 건축가입니다. 나뭇가지로 집을 짓기 시작하는데 어떤 폭풍우에도 견딜 수 있는 튼튼한 집을 짓습니다. 우리 교회가 방배동에 있을 때 십자가 종탑에 까치가 집을 지은 적이 있었습니다. 못 짓게 할까 하다 야박하다 싶어 그냥 놔두었습니다. 불과 며칠 사이에 대단히 튼튼하고도 큰 집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밤새도록 십자가 불이 켜져 있는 것이 불편했던지 얼마 살지 않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주인은 없어도 까치집은 이전하기 위해 십자가 종탑을 철거할 때까지 전혀 무너짐이 없이 버텼습니다. 

이런 미물들뿐만 아니라 인간도 자기 집에 대한 욕구가 강합니다. 집이 없는 사람처럼 불안한 사람이 없습니다. 비록 좁고 누추하더라도, 또 먼 곳에 있더라도 사람들은 날이 저물면 자기 집을 찾아 갑니다. 그런데 주님은 자신의 삶은 머리 누일 곳도 없는 삶이라 고백하였습니다. 머무를 집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실제 주님은 그러셨습니다. 이 땅에 태어나실 때 주님은 자기 집이 아니라 남의 집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돌아가실 때는 자기 묘가 아니라 아리마대 사람이 소유하고 있던 남의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신 이후에는 전혀 집에 들르실 여유가 없었고 들렸다 할지라도 그곳은 더 이상 집이 아니었습니다. 가족들이 예수님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미쳤다고 하며 예수님의 길을 막으려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노숙자와 같은 자신의 삶을 언급하신 이유는 주님을 따르려는 제자의 길이 어떤 길인지를 교훈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제자는 누구인가? 그들은 이 세상에 머리 둘 곳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제자들의 삶이 머리 둘 곳이 없는 삶이 된 이유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 세상은 그들이 머무를 곳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의 나그네들입니다. 나그네가 집이 어디 있습니까? 죽어 하늘나라에 가서야 편히 발을 뻗고 잘 수 있는 것이 하늘나라 나그네들입니다. 

이 세상에 집이 있거나, 정을 많이 붙이거나, 짐이 무거우면 하늘 고향으로 가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집이나 재산을 버렸고, 가족을 버렸던 것입니다. 우리들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어렵게 살 때는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이 강합니다. 일제시대나 어렵던 시절에는 예수 천당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살만하게 되니까 짐이 무거워서 그런지 지금 사는 이곳이 좋지 하늘 고향은 멀어만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하늘고향으로 돌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때가 가까우면 짐을 조금씩 정리해야 합니다. 짐이 많으면 미련도 많아 죽기가 어렵습니다. 그들이 머리 둘 곳조차 없었던 까닭은 그들이 복음 때문에 안락하고 편안한 삶을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재물을 쌓기보다는 하늘나라에 보물을 쌓기 위하여 이 땅의 것을 다 팔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해 우리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머리 둘 곳이 없습니까? 오히려 너무 편하고 안락해서 문제가 아닙니까? 주님의 말씀은 이처럼 우리를 불편하게 만듭니다. 좀 편하게 신앙생활하고 싶은데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무리가 아니라 제자가 되어라, 제자는 머리 둘 곳도 없이 사는 사람들이라고 하며 귀찮게 합니다. 우리는 아마 여기에 등장한 서기관과 같은 심정일지도 모릅니다. 집도 있고 말씀도 들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적당히 예수 믿고 싶은데 주님은 우리를 극단적인 곳으로 몰아갑니다.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는 주님의 말씀이 힘들지만 한 번 이 말씀에 비추어 우리 삶을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몇 년 전에 청부론, 곧 깨끗한 부자론과 청빈론 논쟁이 한국교회에 있었습니다. 어느 교회 목사님이 청부론을 주장했습니다. 그분은 부를 하나님의 축복이며, 하나님이 주신 은사라 규정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부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부는 아닙니다. 무엇보다 먼저 정직하고 깨끗하게 벌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부의 일부를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할 줄 알아야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청부라 하였습니다. 요즘 같은 사회에서 예수님처럼 머리 둘 곳도 없이 가난하게 살자고 하는 것은 사실 어렵기도 하고 현실에도 맞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 분의 청부론처럼 깨끗하게 벌어서 잘 쓰자 얼마나 좋습니까? 구약시대의 축복은 물질적인 축복이었습니다. 신약 시대는 여기에 나눔을 강조합니다. 그러니 청부론 또한 성서적이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깨끗한 부자들만 있어도 한국사회에는 큰 충격일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는 거짓이나 투기하지 않고 돈을 벌지 않은 부자가 드물기 때문입니다. 부자가 되어서도 잔득 움켜쥐고만 있지 하나님이나 이웃에게 인색합니다. 어떤 때는 잘 사는 사람들이 더합니다. 한국의 부유층으로 대표되는 강남만 보아도 얼마나 자기 이익에 빠르고 자기 가진 특권을 조금도 양보하려 않는지 모릅니다. 교육문제도 그렇고 요즘 문제가 되는 종합부동산세 문제도 그렇습니다. 그 재산이 순전히 자기 노력으로만 된 것이 아닌 만큼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 정당합니다. 아마 이 목사님이 말씀하신 청부론에 근거해서 본다면 깨끗한 부자는 종부세에 오히려 찬성해야 할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100대 부자들이 상속세를 인하하려는 부시 정부의 감세 움직임에 반대 운동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부의 세습이 자녀들을 병들게 하고 미국 사회의 갈등을 부추긴다고 하여 상속세 감세에 반대했던 것입니다. 우리 한국의 부자들이 이런 청부론의 정신으로만 산다면 더 이상 부자라고 하여 사람들이 질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국사회의 계층간의 갈등도 줄어들 것입니다. 

청부론만 해도 한국사회에서는 정말 급진적입니다. 그런데 이 청부론을 반대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청빈론을 주장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이들은 머리둘 곳도 없는 나그네와 같은 가난한 삶을 살았습니다. 교회사의 전통들도 가난과 청빈의 길을 예찬했습니다. 

성 프란치스꼬는 심지어 “가난은 나의 아내다.”고까지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물질은 신과 같은 권세를 가진 맘몬이라 하여 하나님과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주님은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자 청년에게는 모든 물질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였습니다. 청빈론이 청부론을 비판하는 주된 이유는 청부론이 우리들의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욕구를 교묘히 성서적으로 포장해주고 있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부자도 되고 예수도 잘 믿어보고 싶은 마음 말입니다. 

저는 물질이 하나님이 은사며, 또 한국사회에 청부론이 필요하다는 점도 인정합니다. 물질도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요, 그 물질을 가지고 좋은 일도 많이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실제로 지금 현실에서 예수님처럼 모든 성도들에게 머리 둘 곳도 없이 살 것을 요구할 수도 없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가톨릭의 지혜를 빌렸으면 합니다. 가톨릭은 성경의 윤리를 이중 윤리로 나눕니다. 하나는 신부처럼 헌신한 성직자들이 가야 하는 길과 세상에 살고 있는 평신도의 길입니다. 예수님처럼 머리 둘 곳도 없는 식의 삶은 헌신한 사람들이 걸어야 할 길입니다. 신부님들이나 수도사는 실제 집이 없습니다. 교회에서 제공한 곳에 다만 머물 뿐입니다. 그러나 평신도에게는 이 윤리를 적용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집을 가지고 세상 속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이중윤리를 오늘 말씀에 적용했으면 합니다. 즉 저는 일반 성도들이 지켜야 될 부의 윤리와 목회자나 교회가 추구해야 될 부의 윤리를 구분했으면 합니다. 말은 이중 윤리라고 하였지만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각자의 은사가 다르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성도나 목회자나 모두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성도는 세상 속에서 살며 하나님나라를 증거하는 제자입니다. 목회자는 세상을 포기하고 철저히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사는 제자입니다. 

그러므로 일반 성도들은 청부론을 따라 살면 됩니다. 깨끗한 부자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앞에는 항상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이 살았다”는 말씀이 도전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야 욕심에서 벗어나 영원한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살 수 있습니다. 무조건 편한 게 좋지 않습니다. 말씀이 양말 속에 들어있는 모래알처럼 괴롭게 해야 합니다. 평신도일지라도 그는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항상 이 말씀 앞에 부담을 느끼며 살아야 합니다.

반면에 목회자의 삶의 태도나 교회의 운영방식은 보다 원색적으로 머리 둘 곳도 없이 사셨던 주님의 모범을 좇아가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요즘 한국교회 목회자들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인 시각은 이해할만 합니다. 최근에는 대형교회 목회자들의 호화로운 삶이 비난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여전히 한국교회 대다수의 목회자들이 어렵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를 비롯한 우리 마음 중심은 예수님에게서 멀어져 있습니다. 그 중심에는 성공하는 목회, 안정적인 목회에 대한 욕구가 가득합니다. 

한국교회는 소수의 대형교회 목회자와 다수의 대형교회를 지향하는 목회자로 분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형교회든 소형교회든 제자의 길을 가려하기보다는 머리 둘 편한한 곳을 찾는 세상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최소한 주의 종들만이라도 주님의 삶을 따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이 감동할 것입니다. 세상은 다 물질에 매여 살아가고 있는데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보게 될 때 세상은 그때서야 복음의 능력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많은 수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최소한 주의 종들이 그렇게 살 때 세상은 놀라게 될 것입니다. 물론 그들 또한 가정을 가지고 있기에 가장으로서 최소한도의 삶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목회자의 도를 넘어서는 부한 삶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합당치 못합니다. 

지난 주에는 제주도에서 주요 교단총회들이 있었습니다. 이기풍 목사 선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총회들을 이곳에 개최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역사적인 연합예배가 드려졌습니다. 장로교가 분열된 지 60년만에 장로교 대표적 4개 교단인 기장과 예장 통합, 합동, 합신이 함께 모여 감격적인 예배를 드렸습니다. 함께 예배를 드리며 이곳에서 ‘제주 선언문’을 발표했는데 그중 결의한 내용중 일부를 읽어드리겠습니다.

“하나. 우리는 오늘날 일부 목회자들과 성도들의 삶에서 발견되는 사치와 향락을 반성하며 검소한 생활을 실천하고,위선과 외식의 태도를 버리고 진실하게 생활하며,세속적 명예와 권력을 지향하던 잘못에서 돌이켜 교회와 세상을 겸손히 섬기며,하나님 앞에서 복음의 교훈을 성실하게 실천할 것을 결의한다.”

표현은 완곡하지만 교회를 향한 세상의 비판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사치, 향락, 위선, 외식, 명예와 권력 지향, 겸손! 교회나 주의 종들이 물질이나 세상의 명예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머리 둘 곳도 없이 사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십자가의 길을 포기하면서부터 타락과 부패가 시작되었습니다. 교회가 한국사회에서 정신적 지주가 되기보다는 비난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1930년대 위대한 부흥사였던 이용도 목사의 다음과 같은 말씀은 되새겨볼만 합니다. “현대의 교인은 ‘괴이한 예수’를 요구하며 현대교회는 괴이한 예수를 전한다. 참 예수가 오시면 곧 피살될 수밖에 없다. 참 예수는 저희들이 죽여 버리고 말았구나. 그리고 죄의 요구대로 마귀를 예수와 같이 가장하여 선전하는구나. 화있을진저 현대교회여! 저희가 요구하는 예수는 육의 예수, 영광의 예수, 부귀의 예수, 높아짐의 예수였고, 진짜 예수는 영의 예수, 비천함(賤)의 예수, 가난(貧)의 예수, 낮아짐(卑)의 예수였느니라” 이용도 목사는 일제시대의 물질주의에 물든 한국교회를 향하여 “벽돌로 담을 쌓고 울긋불긋 장식을 해놓은 이것이 교회가 아니다”라고 외쳤는데 오늘날 더한 물질주의에 찌들은 한국교회를 보면 아마 그는 기가 막혀했을 것입니다.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는 주님의 말씀 앞에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고 회개하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죽은 자는 죽은 자로 장사케 하고 

또 예수님의 한 제자가 나아와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하고 말합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고 말씀합니다. 사실 부친을 장사지내는 것보다 더 큰 의무는 없을 것입니다. 당시에 죽은 사람을 묻는 일은 율법을 공부하는 것보다 우선시 되었습니다. 연고가 없는 시신을 묻어주는 일은 하늘의 큰 상급을 얻는 일이었습니다. 보통 죽은 시체들을 만져서는 안 되는 제사장들도 자기 친척이 죽은 경우에는 시체를 만질 수 있었습니다(21:1-3). 더구나 돌아가신 분이 자기 부친인 이상 무엇보다 장례를 치르는 일이 우선일 것입니다. 엘리야의 제자가 되어 따르려던 엘리사에게도 그 부친과 작별할 시간이 허락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은 자는 죽은 자로 장사케 하라고 하며 부친의 장례보다 예수를 따르는 일이 더 시급하고 중요한 일임을 단호히 말씀합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를 우리는 문자 그대로보다는 그 의미를 묵상해야 합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15장 4절에서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며 부모공경을 말씀하셨습니다. 부모 공경 중에 부모의 장례를 잘 치르는 것보다 더한 공경이 어디 있겠습니까? 무엇보다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아무리 급하다하여 부친 장례 치르는 일을 미룰 수 있겠습니까? 만약 저에게 그런 일이 발생하면 더 이상 설교하는 일을 그만두고 장례를 치를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의 포인트는 우리가 이처럼 주님을 따르는 일이 긴급하고 중요함을 깨우쳐주시는 데 있습니다. 주님은 예수의 제자는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에 삶의 가장 우선순위를 두는 사람들입니다. 자기 즐거움, 자기 이익, 자기 욕구를 다 채운 후에 예수를 따르겠다는 것은 제자로서 합당치 못합니다. 항상 주님의 뜻이 무엇이고 그것에 순종하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 주님의 이 말씀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자는 장례식이나 치르는 자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주님은 죽은 자는 죽은 자로 장사케 하라고 말씀합니다. 죽은 자가 누구입니까? 예수를 따르지 않는 자가 죽은 자입니다. 그는 죽은 시체와 동일합니다. 제자는 누구입니까? 죽은 자를 살리는 자들입니다.

주님의 삶이 바로 그러한 삶이셨습니다. 8장에서 9장에 걸쳐서 나오는 열 가지 기적은 바로 생명을 살리는 사역이었습니다. 문둥 병자가 고침을 받고, 중풍 병자가 일어서고, 죽었던 자가 살아나고, 눈이 멀었던 자의 눈이 뜨이고, 벙어리가 말을 하는 기적은 바로 죽었던 생명이 살아나는 생명의 역사였습니다. 제자들이 해야 하는 일이 바로 이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지는 10장에서 제자들을 파송하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10:7-8) 주님은 자신이 행하셨던 기적을 똑같이 제자들도 행하시길 바라셨습니다. 제자는 예수님처럼 병든 것과 모든 연약한 것을 담당하고 치료하는 능력의 사람들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죽었던 생명을 살리는 생명의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우리를 향하여 명령합니다. 죽은 자는 죽은 자로 장사하게 하고 너희는 나를 따르라! 너희는 나를 따라 생명을 살리는 역사를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뒤로 물러나 침륜에 빠질 자들이 아닙니다. 어두움과 사망의 세력에 억눌려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관영한 죽음의 역사, 반생명의 역사를 뒤집어 생명의 역사를 만들어내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제자의 본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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