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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 이끌림 받는 삶 (수 3: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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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이끌림 받는 삶 (수 3:5~13)


• Move1: 내 생각에 이끌려 가던 길

몇 해 전 미국 조지아 주 콜럼버스에 있는 한 교회의 집회를 인도하러 가던 길이 생각이 납니다. 애틀랜타에서 차로 한 두 시간 정도 걸리는 멀지 않은 거리였지만 비행기로 가던 여정이어서 항공 연결편을 타고 가게 되었습니다. 저녁 9시가 다되어 비행기를 갈아타려고 하는데 그날따라 비가 내리고 일기가 고르지 않았습니다. 탑승구로 나가보니 웬걸 작은 소형 프로펠러 비행기였습니다. 불안한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달리 방도가 없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비행기를 탔습니다. 악천후에도 이륙을 했는데 칠흑 같은 밤에 목적지는 잘 찾아가는 것인지 불안했고, 비바람 때문에 아주 롤링이 심했고, 기류 변화가 있는 지역에서는 갑자기 툭 떨어지고는 했습니다. 얼마나 불안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 성도들이 설교자를 기다리고 있는데 죽더라도 집회는 하고 죽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도가 절로 나왔습니다. 그때 작정했습니다. “이제 다시는 절대 소형 비행기는 안탄다.” 그래도 그 비행기는 한밤중,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목적지를 잘 찾아갔습니다. 자동항법장치에 이끌려 갔기 때문이었습니다.

몇 해 전, 캄보디아 프놈펜 부근의 한 산에 소형 비행기가 추락하여 탑승자 22명 전원이 생명을 잃은 사고가 발생한 적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13명은 한국인 승객이었기 때문에 참 안타까운 이야기들이 많이 들려왔습니다. 쌍둥이 아들 하나는 처가에 맡기고 한 아이만 데리고 갔는데 일가족 3명이 참변을 당했다는 어느 방송국 기자 가족의 이야기, 외국 여행을 한 적이 없는 어머니 관광시켜드리려고 적금을 들어 모시고 갔다가 참변을 당한 어느 모녀 이야기도 들려왔습니다. 추락한 비행기의 조종사는 악천후에 비행을 강행했고, 정기항로를 벗어나 육안으로 지형을 식별하면서 비행을 하다 사고를 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사고 직전 공항 관제탑이 “비행고도가 낮다”고 경고를 보냈지만 조종사는 “이곳 지형은 수십 번 다녔기 때문에 내가 더 잘 안다”고 응답했다고 하지요. 결국 항로도 따르지 않고 관제탑의 지시도 따르지 않고 자기 생각에 이끌려 간 것이 사고의 원인이었습니다. 자신도 죽고, 함께 탔던 승객까지 죽게 했습니다. 

• Move2: 너는 요단에 들어서라

사람들은 무엇엔가 이끌려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돈에 이끌려 살기도 하고, 사람에 이끌려 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명예나 쾌락에 이끌려 살기도 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야망을 이루려고 그것에 이끌려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무엇에 이끌려 사느냐에 따라 인생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이 무엇에 이끌려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들려주시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이라는 긴 기다림의 세월이 지난 후 드디어 가나안 정복길에 오르게 됩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 하는데 우기에 범람하는 요단강이 앞을 가로막습니다. 그런데 적당히 건널 방도가 없습니다. 그들의 발목을 잡는 문제에 직면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고생고생하면서 달려왔습니다. 이것을 뛰어넘지 못하면 모든 것이 헛수고가 됩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있고, 뛰어 넘을 수 있으면 괜찮습니다. 그러나 인생길을 살다보면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랬습니다. 우리 인생길에도 가는 방향을 가로막고, 신앙생활을 가로막고, 행복한 생활을 가로막고, 충만한 영적 생활을 가로막는 장벽의 문제가 있습니다. 백방으로 뛰어보기도 하고, 도움을 줄 사람을 찾아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해결되는 어려움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어려움들도 있습니다. 지금 내 인생길에서 나를 가로막고 있는 장벽이 무엇입니까? 가나안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범람하는 요단강이 발목을 잡는 장벽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명령은 무엇이었습니까? 제사장들에게 법괘를 메우고 그냥 뛰어들라는 것입니다. 법궤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그 안에는 만나 항아리와 십계명 돌판과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들어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먹이신다, 하나님이 인도하신다,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그렇다지만 법궤를 메고 범람하는 요단강으로 뛰어든다는 것은 얼마나 무모한 일입니까? 옛날 하나님께서 홍해를 갈라놓으시고 건너가게 하셨다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지만 오늘은 그때와는 전혀 다릅니다. ‘법궤를 매고 뛰어들라!’ 이런 황당무계한 말씀을 들으면서 얼마나 마음이 불편하고 힘이 들었을까요? 

어느 주일, 목사님은 교회의 큰 역사를 앞두고 오후 3시에 중요한 행사가 있다고 광고를 하셨습니다. 특별히 교회 제직들은 다 나와야 한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오후에 교인들이 교회당에 모였습니다. 목사님은 장로님들, 권사님들, 집사님들 차례로 일으켜 세우더니 제가 하는대로 똑같이 따라서 할 수 있는지 다짐을 하셨습니다. 다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버스를 타고 가는데 한강 둔치였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성경책 끼고 한강을 향해 그대로 걸어가시는 것입니다. 구두도, 옷도 안 벗고 장마철 범람하는 한강물로 그대로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이때 장로님들 어떻게 하셔야지요? 그렇지요. 목사님을 말려야 합니다. 그런데 신실하신 장로님들이 목사님과 함께 한강으로 뛰어들었더니 한강이 갈라집니다. 그럴리가 없다는 표정이신데, 이것이 여호수아 3장의 기록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까지 오기까지 얼마나 어렵고 황당무계한 말씀입니까? 지금까지 나아온 것은 모세의 강력한 리더십 때문이었습니다. 모세를 이어서 사역을 해 간다는 것이 무척 부담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이끌어가는 지도자가 되어 첫 번째 행한 일이었습니다. 후계자 여호수아에게는 그것은 또 한 번의 리더십 위기였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지금 그 부담스러운 말씀을 받아 그대로 그것을 전하고 있습니다. 8절 말씀에 “너희가 요단 물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그리고 순종하고 있습니다. 단순하게 전하고 있고, 단순하게 순종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걸어온 모든 순간이 물거품이 될 수 있는 상황입니다. 반란도 일어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자리에서 물러날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래도 말씀 붙잡고 나아가고 있습니다.

• Move3: 너는 무엇에 이끌려 살 것인가?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묻고 계시는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된 사람들에게, 지도자가 된 사람들에게 묻고 계셨습니다. 뛰어넘을 수 없는 큰 장벽에 둘러싸여 있는 사람에게 묻고 계시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너는 무엇에 이끌려 살 것인가?” 가나안 정복의 전쟁터에서,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풍요의 땅 가나안에서, 너는 무엇에 이끌려 살 것인가? 네 인생의 위기의 때에, 네 인생의 평안의 때에 너는 무엇에 이끌려 살 것인가? 그것을 묻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동안 어려움만 부딪혀오면 불평했고, 어려운 일만 있으면 원망했습니다. 지금까지 환경에 의해 이끌림을 받았고, 사람에게 이끌림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40년을 보내야 했습니다. 12명의 정탐꾼이 하나님이 예비하신 가나안을 정탐하게 되는데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이끌림 받은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환경에 이끌림을 받았고, 나타나는 현상에 이끌려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바로 가나안 땅에 들이시지 않고 다시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이끌려 사는 훈련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래도 불평하고 투정하는 그들은 결국 광야에서 다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돌고 돌아 긴 시간이 지난 후 드디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다시 가나안의 문턱에 세우시고 하나님은 묻고 계신 것입니다. “너는 이제 무엇에 이끌려 살 것이냐?” 그렇습니다. 그들은 결단해야 했습니다. 환경에 이끌려 살 것인가, 아니면 말씀에 이끌려 살 것인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참 특별한 존재들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하나님의 독특한 사랑을 받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랬고, 그들과 같은 돌보심과 은혜를 받은 족속들도 없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멀리 바라보지 못하고 근시안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작은 일에도 넘어지고 실패했으며, 늘 눈에 보이는 것에 마음을 두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나아가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현상에 이끌려 살다가 결국 그들은 광야에서 죽어갔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입은 백성이었고, 모두가 두려워할 만큼 큰 축복 덧입혀 주셨지만 믿음의 크기는 아주 작았습니다. 조금 어려우면 불평하고 투정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구원하시고, 친히 인도해 가고 계셨지만 홍해 앞에서, 물 없는 사막에서, 쓴 물로 가득한 마라에서, 마실 물이 없던 르비딤에서, 빵 없는 들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불평하고 원망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돌보심과 인도하심을 친히 보고 확인하면서도, 놀라운 권능의 역사들을 친히 맛보았으면서도 그들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상실해 버리면 그들은 허수아비와 같은 존재가 됩니다. 가나안의 문턱에 선 그들은 전혀 새로운 세대였습니다. 새로운 믿음의 방식을 따라서 약속의 땅을 차지해야 했던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묻고 있습니다. “너는 이제 무엇에 이끌려 살 것이냐?”

• Move4: 그들에게 요구되었던 것

그러나 여기에서 잘못되면 지난 40년을 걸어온 모든 것이 헛수고로 끝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매 걸음을 정말 신중하게 행동해야 했습니다. 지금까지 아무리 잘했어도 그 순간에 잘못하면 모든 것이 헛수고가 됩니다. 외국 유학 가서 10년 넘게 열심히 공부해서 학위논문을 썼습니다. 마지막 관문인 논문구술시험(oral defense)을 치루는데, 대답 잘못하면 모든 것 다 헛수고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입니다. 저도 한 3시간 가까이 논문구술시험을 치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유학 7년의 수고가 그 순간에 결판이 나는 시간이기에 긴장을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교수들이 다 모였고, 박사과정에 있는 학생들이 다 참석했습니다. 논문에 대해 한 30분 정도 프레젠테이션을 한 다음에 질문들이 쏟아집니다. 그 질문에 대해서 방어(defense)를 해야지 답변을 제대로 못하면 끝납니다. 크게 막힌 것 없이 그런대로 대답을 한 것 같습니다. 제 논문 지도위원회의 교수들 5명이 다른 방으로 잠시 자리를 옮겼습니다. 논문을 통과 시킬 것인지를 결정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한 5분 기다리는 시간이 한 50년 시간처럼 길게 느껴졌습니다. 

지금껏 걸어온 모든 여정이 다 헛수고가 될 수 있는 상황 가운데 서 있습니다. 이런 황당한 명령을 주신 것은 분명 여호수아를 당황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서 오히려 놀라운 역사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7절은 말씀합니다.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크게 하여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이 알게 하리라.”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곤궁에 빠지게 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통해서 그를 크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모든 사람 앞에서 그의 리더십을 확고하게 세워주시기를 위해서였습니다. 사실 모세와 같은 위대한 지도자의 바턴을 이어 간다는 것이 젊은 여호수아에게는 여간 부담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함이 아니라 세우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 인생에도 가로막는 요단강이 있을 수 있습니다. 힘들게 만들고, 고민하게 만들고, 밤잠을 이루지 못하게 만드는 요단이 있을 수 있습니다. 헤쳐 나갈 방도가 없어서 고민하게 만들고 방황하게 만드는 어려운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때는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때 반드시 기억하십시다. “여호수아를 세워주시기 위해서 요단강 앞에 세우셨다!”

이러한 은혜를 누리기 위해 필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성결’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몸과 마음, 생각과 삶의 정결함이 필요했습니다. “놀라운 일”을 행하실 것인데 그 은혜를 받을 자격은 한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성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거룩함이었습니다. 거룩함이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거룩은 자신을 성별하고 구별하는 것입니다. 주일도 똑같은 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하여 그날을 구별합니다. 그때 주일이 거룩한 날이 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은 점심 식사 때 내는 것과 똑같은 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베푸신 은혜를 생각하며 그것을 구별할 때 거룩한 헌금이 됩니다. 이곳을 예배를 위해 성별할 때 이곳은 거룩한 처소가 됩니다. 우리가 성결해지려고 노력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합니다. 그래서 에모리대학 교수인 돈 샐리어즈는 말합니다. “스스로 자신을 성결케 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없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자신을 성결케 하는 것이 없다.” 

성경이 제시하는 성결의 방법들은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여기에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그말씀에 순수하게 응답하며 나아가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요단강에 뛰어들라고 말씀하셨다면 네 생각은 아니라고 말할지 몰라도, 환경은 아니라고 말할지 몰라도, 사람들의 경험과 과학은 아니라고 할지 몰라도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말씀입니다. 강은 갈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은혜의 자리, 가나안으로 나아가는 순간입니다. 이때 요구되었던 것이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는 언제나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람들 앞에 열려진다! 그것을 알려주시길 원하셨던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여호수아는 여기에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한 점 의심이 없습니다. 10절에는 이 사실이 구체적으로 고백됩니다. 이것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에 계시사... 너희 앞에서 가나안을 차지하게 하실 줄을 이것으로 너희가 알리라”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반복해서 강조되는 것은 “너희 가운데” “너희 앞에서”라는 단어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이 그냥 버려두시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역경 앞에 서있을 때,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어 방황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서있을 때, 하나님에 말씀에 이끌려 나아가면 그냥 버려두시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 Move5: 도하, 그리고 그 이후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에 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14절은 말씀합니다. “백성들이 요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장막을 떠났다.” 그리고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서 나아갔다.” 이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에 온 백성들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목사님과 장로님들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교회 지도자들과 교인들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이야기가 된다면 우리의 삶에도 하나님의 신비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일들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법궤를 멘 제사장들이 물로 뛰어들었습니다. 발이 잠깁니다. 허벅지가 잠깁니다. 그랬더니 요단이 갈라집니다.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여 주의 전을 향할 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온 마음으로 찬양하고 예배할 때, 우리 가운데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상황이 어렵지만 내가 영적으로 강건해지면 아무 것도 아니게 됩니다. 심령들이 하나님의 역사를 신뢰하면서 일어납니다. 예배드리고, 하나님 만나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라면 이 자리에서 나아가는 걸음이 달라야 합니다. 얼굴 표정이 달라야 합니다. 얼마나 신나는 믿음 생활입니까? 

그런데 여기에서 제기되는 질문은 한가지입니다. 앞길이 캄캄할 때 조금만 보여주시면 안 될까, 조금만 증거를 보여주시면 안 될까? 요단강도 조금만 갈라놓으시면 뛰어드는 것도 쉬울 텐데... 눈에 보이는 현상보다 더 중요한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7-13절의 말씀은 요단강 앞에서 행한 여호수아의 설교의 내용입니다. “여러분은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일하고 계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우리 앞서 가고 계십니다. 내 생각을 신뢰하지 말고 그 하나님을 신뢰하십시다. 눈앞의 현상을 보고 흔들리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이끌려 나갑시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가시면 요단강은 문제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면 요단은 문제가 될 수가 없습니다. 말씀을 신뢰합시다. 그 말씀에 이끌려 살아가십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들은 한마음이 되었습니다. 요단강에 뛰어드는 것은 목사님들이나 하는 일이다, 장로님들이나 하는 일이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한마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성결케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이끌려 명령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들 앞에 요단은 갈라졌습니다. 그들은 가로막는 문제가 오히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온 가슴으로 경험하게 했던 사건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이야기, 우리 교회의 이야기가 되게 합시다. 

요단을 건너는 그들에게 주시는 한 가지 명령이 있었습니다. 4장 2절 말씀입니다. “백성의 각 지파에 한 사람씩 열두 사람을 택하고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요단 가운데 제사장의 발이 굳게 선 그곳에서 돌 열둘을 택하여 그것을 가져가라.” 요단강을 건너는데 그 강을 마른 땅처럼 건너가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곳을 건너면서 돌을 취하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지파별로 돌 하나씩을 취하라는 것입니다. 조약돌이 아니라 메고 가기 힘들 정도로 큰 돌을 어깨에 메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그 은혜의 자리에서 돌을 취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잊지 않기 위해, 영원히 가슴에 새기기 위해 그들은 돌을 취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이끌려 나아가면 우리가 승리한다.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돌을 취합니다. 그것을 매고 길갈까지 갑니다. 그리고 돌 열둘을 그곳에 기념비로 세우고 감사의 예배를 올려드립니다. 감격하며 예배하는 엄마를 보면서, 아빠를 보면서 아이들이 가슴 깊이 새기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이끌려 살아가면 우리가 승리하는구나. 우리 자녀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유산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 아니겠습니까? “내 사랑하는 아들아, 내 사랑하는 딸아, 엄마 아빠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단다. 남들처럼 대단한 교육을 받지도 못했단다. 단칸 셋방에서부터 시작했단다. 어려운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단다. 답답하고 힘들었던 때, 포기해 버리고 싶었던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단다. 그러나 그때마다 하나님 말씀 붙잡고 나아갔더니 하나님께서 이날까지 도와주시고, 축복해 주셨단다. 너희들도 하나님의 말씀에 이끌려 살아라.”

주일이 무엇 하는 날입니까? 지난 한 주간 삶의 요단강에 맛보았던 하나님의 은혜, 역사, 허락하신 내 삶의 간증... 그것들을 가지고 나아와 기념비를 세우는 날입니다. 내 삶 속에서 경험한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가슴 떨리는 찬양을 들고 나와 기념비를 세우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 드리는 예배는 기념비를 세우는 일입니다. 감사로, 찬양으로, 고백으로, 결단으로, 눈물로, 간증으로 기념비를 세우는 것입니다. 이날까지 하나님이 살게 하시고, 은혜를 베푸셔서 이만큼 살게 하시고, 이만큼 누리게 하셨습니다. 누가 그 은혜를 주셨는지, 누가 이 땅을 주셨으며, 누가 이 모든 것을 주셨는지를 기억하고 고백하는 날이지요. 

수 4:23에서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서 설교자와 함께 그렇게 고백합니다. “인생의 장벽을 누가 너희로 건너가게 했습니까?” “하나님 여호와께서...” “누가 하셨습니까?”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우리 생에 기념비를 세우는 것입니다. 가정에도 기념비를 세우고, 일터에도 기념비를 세우고, 젊은 날에도 기념비를 세우고, 노년에도 기념비를 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날까지 살아왔습니다.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은 삶의 순간순간을 말씀에 이끌리고, 하나님께 이끌려 살아가는 것입니다. 

• Move6: 너 하나님께 이끌리어

오늘의 모든 상황을 돌아보아도 우리들도 우리의 발목을 잡는 요단강 앞에 서있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국내외의 여러 여건들의 악화로 많이 힘든 분들이 이 자리에도 계실 줄 압니다. 어떤 분들은 건강의 문제, 자녀의 문제, 인생의 문제로 참 힘든 상황 가운데 계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앞길을 가로막는 요단강 앞에 서있을 수 있습니다. 요단강 앞에 서있기도 하고, 그것을 뛰어넘었는데 다시 여리고 성 앞에 서있을 수도 있습니다. 골리앗이 호령하는 전쟁터에 서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영적 전쟁터에 서있습니다. 교회도 공격을 당하고 있습니다. 어려운 삶의 자리에 서있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묻고 계십니다. 너의 앞길이 막힐 때, 네가 생각한 대로 네 인생길이 풀리지 않을 때 너는 무엇에 이끌려 살 것인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는 것과 같은 때 한국교회는 앞으로 무엇에 이끌려 살 것인가? 묻고 계십니다. 

지난 베이징 올림픽에서 참 행복하게 했던 경기 가운데 하나가 야구였던 것 같습니다. 한국 야구사에 길이 빛날 기록으로 금메달을 딴 경기였습니다. 아시아의 최강이라는 일본의 코가 납작해졌고, 프로야구의 최강이라는 미국, 아마 야구의 최강이라는 쿠바를 물리치고 세계 최강이 되었습니다. 일본 선수들, 감독들이 얼마나 거만을 떨었습니까? 돈과 스포츠 외교력을 총동원해 자기들이 유리하도록 대진표를 짰던 일본과의 경기에서 이승엽 선수의 홈런 한방으로 역전이 되었습니다. 쿠바와의 결승전 경기는 손에 땀을 쥐게 했습니다. 9회 초 우리나라의 공격은 조금 불안하게 득점 없이 끝났습니다. 스코어는 3:2로 한 점을 앞서가고 있었지만 많이 불안했습니다. 쿠바의 공격이 시작되었는데 1,2,3루에 주자가 서있는 상황에서 원아웃이었습니다. 남미 쪽의 심판은 눈에 보이게 편파 판정을 내리고 있었고, 그에 대해 가볍게 항의하던 포수는 퇴장을 당했습니다. 너무 중요한 순간이었기 때문에 투수의 얼굴에는 잔뜩 긴장이 서려있었고, 계속해서 안타를 내주고 있었고 홈런도 내주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나온 쿠바 타자는 그 경기에서 홈런을 쳤던 강력한 타자였습니다. 그 중요한 순간에 우리나라 팀은 포수와 투수와 교체되었습니다. 첫 번째로 던진 공을 쿠바 타자가 힘차게 내려쳤습니다. 3루 쪽으로 쭉 뻗어나간 공은 완벽한 안타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3루수가 그것을 받아서 잽싸게 2루로 던져 투 아웃을 만들고, 2루수는 그것을 다시 1루로 던져 쓰리 아웃을 만들었습니다. 통쾌한 승리였습니다. 전설적인 게임이었다고 전 세계 언론이 극찬을 했습니다. 김경문 감독의 리더십이 빛이 났습니다. 

손에 땀을 쥐고 경기를 관람했던 국민들은 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일어서게 한 역사는 오늘도 있습니다. 끝났다고 생각되었을 때 역전의 역사는 오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이끌리게 되면 우리 인생도 역전의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놓여지면 사업도, 가정도, 인생도 회복될 수 있습니다. 다시 세워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이끌려 나아가니, 말씀에 순종하면서 온전히 나아갔더니 요단강이 갈라지고 있습니다. 무엇에 이끌려 남은 생을 사실 것입니까? 보병학교에서 독도법 훈련을 잘 받아서 웬만한 길은 내비게이션의 도움 받지 않아도 잘 찾아다닙니다. 

여러 교회에서 말씀을 전해야 할 때가 있지만 웬만한 길은 다 찾아갑니다. 미국에서도 주소와 지도 한 장 가지고 다 찾아다녔습니다. 그래서 제 아내도 길눈 하나는 확실하다고 인정을 해 줍니다. 그러나 간혹 내비게이션의 필요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언젠가 양평에서 말씀을 전하고 서울로 돌아오는데 밤길에 표지판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물어볼 사람도 없습니다. 서울 쪽이라고 생각하고 한참을 달렸는데 가다보니 정반대인 홍천 쪽으로 달리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길눈이 밝아도 헤맬 때가 있습니다. 

겨울에 이 땅을 찾아왔던 철새는 봄이 오면 다시 시베리아와 그리고 저 중국 동북부로 날아가고, 여름에 이 땅을 찾아온 철새는 겨울이 오면 이 땅을 떠납니다. 독도법을 배운 것도 아니고, 지도가 있는 것도 아닌데, 철새들은 정확하게 날아왔다가 다시 그곳으로 날아갑니다. 머리 나쁜 사람들에게 “새 대가리”라고 하는데 길 찾는 것에서는 인간보다 훨씬 머리가 좋습니다. 어떻게 그 먼 길을 정확하게 찾아갈까? 나침반도 없이, 지도도 없이 어떻게 그 먼 거리를 날아갈까? 동물 세계의 신비입니다. 동물학자들에 의하면 철새가 정확하게 날아갈 수 있는 것은 지구의 자기장의 영향력 때문이라고 합니다. 철새의 머릿속에는 일생 1-2mm 정도의 자석을 가지고 산다고 합니다. 철새가 정확히 길을 찾아가는 것은 하나님이 지구에 담아 놓으신 자기장에 이끌리어 날아가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는 지금 말씀에 이끌려가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환경 바라보며 불평하고, 염려하고, 걱정하고, 원망하던 세대와는 달랐습니다. 불평과 원망을 삶의 재료로 삼던 세대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거룩하게 하여 법궤를 매는 세대요,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말씀에 이끌려 요단강에 뛰어들었던 세대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면서 기념비를 세우는 세대입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믿음으로만 취할 수 있는 세계요, 누릴 수 있는 세계입니다. “법궤를 매는 세대로 살라!” “기념비를 세우는 세대로 살아라!” 

교회가 공격을 당하고, 복음에 적대적으로 바뀌는 이 땅의 문화 사회적 상황을 보면서 답답해하고 있을 때 묻고 계십니다. 경제적으로 참 힘든 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묻고 계십니다. 크고 작은 인생의 난제에 둘러싸여 힘든 시간ㅇ르 보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는 무엇에 이끌려 살 것인가? 너희 교회는 무엇에 이끌려 살 것인가?” 우리가 즐겨 부르는 341장 찬송은 그렇게 알려줍니다. “너 하나님께 이끌리어 일평생 주만 바라며/ 너 어려울 때 힘주시고 언제나 지켜 주시리/ 주 크신 사랑 믿는 자 그 반석 위에 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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