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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도] 이 아름다운 소식을 전파하자 (왕하 7: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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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름다운 소식을 전파하자 (왕하 7:1~10) 

  
옛날 이스라엘에 사마리아 성이, 지금 시리아 지역인 아람 왕, 벤하닷에게 포위를 당했다. 아람 왕 벤하닷(은혜 있는 자의 아들)은 많은 군대를 거느리고, 사마리아 성을 첩첩이 둘러쌌기에, 성안에는 굶주림이 가득했다. 나귀머리와 비둘기 똥이라고 하는, 여물지 않은 콩도 비싸게 팔렸다. 

이렇게 굶주렸을 때, 하루는 왕이 성 위를 걸어가는데, 한 여인이 뛰어 나와서 ‘왕이여 이 문제를 해결하여 주소서’하고 외쳤다. 왕이 말하기를 ‘내가 무엇으로 해결할 수 있느냐?’라고 했다. 여인은 이야기는 이렇다. ‘너무 배가 고파서, 이웃과 서로 아들을 잡아먹기로 했다. 

오늘은 내 아들을 잡아먹고, 내일은 그의 아들을 잡아먹자고 약속을 했다. 그래서 먼저 내 아들을 잡아먹고, 오늘은 이웃의 아들을 먹을 차례였다. 그런데 그는 아들을 감추어 놓고, 내어놓지 않으니, 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가슴을 치고 옷을 찢었다. 그리고 신하를 불러 ‘이 나라에 선지자가 있느냐? 이미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렸으니, 선지자 따위는 필요 없다. 엘리사를 찾아서 그 목을 베라’고 명령했다. 왕은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죄를 선지자와 하나님에게 뒤집어 씌웠다. 

이미 엘리사는 성령님께서 감동해서, 왕이 사자들을 보내서, 자기를 죽이러 오고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엘리사는 ‘저 살인한 자, 아합의 아들 아하시아가 내 목을 베려고, 신하들을 보냈으니, 보고 있다가 사자가 오면 대문을 닫아라. 왕의 발소리가 그 뒤에서 난다’고 했다. 

얼마 후에 왕의 사자가, ‘이 재앙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왔으니, 어찌 더 여호와를 기다리리요’하며 문을 열라고 말했다(왕하6:24-33). 그러자 엘리사는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양식을 싸게 팔게 된다고 했다(1). 본문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는가? 


1.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된다. 

왕이 의지하는 장관이,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창문(아루바, ה󰔯󰙢󰔣)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했다. 정말 믿음 없는 말이다. 축복을 받을 수 없는 말이다. 

창문을 할론(ןלּוֹ󰖏)이라고 한다. 성경에는 창문이 여러 번 나온다. 그러나 본문의 창문은 아루바로, 숨겨진 문을 말한다. 이 아루바는, 구약성경에 몇 번 사용되지 않는다. (창7:11) 노아 때 홍수로 땅을 심판하실 때, 하늘의 아루바가 열려, 사십 주야 비가 땅에 쏟아졌다. 이때는 심판의 아루바다. 

그러나 (말3:10)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면서,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는가 보라고 했다. 이때의 하늘의 문은 넘치는 축복의 문이 된다. 믿음으로 나아오는 자에게는, 축복의 아루바가 되었다. 

그러나 의심하고, 원망하며, 따지고, 믿지 못하는 자에게는, 심판의 아루바임을 명심하시기 바란다. 엘리사는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고 했다. 엘리사의 말대로, 사람들에게 밟혀 죽고 말았다. 

 (17) “왕이 그의 손에 의지하였던, 그의 장관을 세워, 성문을 지키게 하였더니, 백성이 성문에서 그를 밟으매,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죽었으니, 곧 왕이 내려왔을 때에 그가 말한 대로라.” 물건을 싸게 파니까, 사람들에게 밀려 밟혀 죽고 말았다. 

성문 밖의 나병환자 네 사람이, 우리가 여기 앉아서 죽지 말고, 성읍으로 들어가자고 했다. 해 질 무렵, 나병환자들이 아람군대의 진영으로 걸어갔다. 그때 하나님은 병든 네 사람만 가게 하지 않고, 천군 천사들과 함께 가게 하셨다. 평소에는 천군 천사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천군 천사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아람 병사들에게 들렸다. 병사들이 저녁 먹으려고 할 때, 갑자기 수백만의 군대가 오는 소리가 들렸다. 전차부대 소리와, 수없이 많은 말들의 발자국 소리가 환청으로 들려오자, 아람 군대는 혼비백산하여, 모두 그대로 놔두고 도망쳤다. 

이들이 생각할 때, 헷 사람의 용병과 애굽의 용병들이 몰려온다고, 착각하게 되었다. 나병환자들이 아람진영에 다가가 보니, 병사들이 그대로 나두고, 도망간 사실을 발견했다. 이들은 제일먼저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하여,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아람 군사들이 차려놓은 음식을 먹었다. 

배불리 먹은 다음, 금은보화를 숨겨두었다. 그러다 나병환자들은 깨달았다. 하나님께서 아람군대를 쫓아내셨고, 사마리아 도성에 있는 백성들은, 지금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만일 이 아름다운 소식을 속히 알리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읍 문지기를 불러 말했다. “어이, 우리가 아람 진에 이르러 보니, 거기에 한 사람도 없고, 오직 말과 나귀만 매어있고 장막들이 그대로 있으니, 양식을 가져가라고 했다. 여호와의 말씀대로, 가져가 양식을 싸게 팔게 되었는데, 그 장관은 사람들에게 떠밀려 밟혀 죽고 말았다. 

(2하)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 못하리라”하던 말씀도, 그대로 이루어졌다. (16하)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되었다”고 했다. (20) “그의 장관에게 그대로 이루어졌으니, 곧 백성이 성문에서 그를 밟으매 죽었더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엘리사를 통하여 주신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다. 따라서 당신이 하신 말씀은 반드시 지키신다. 그러므로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 인생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에 맞지 않고, 내 이성에 부적합할지라도,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며 나가야 한다. 

하나님은 다시 오신다. 그때는 심판의 주로 오신다. 약속을 붙잡음이 신앙이다. 충성된 자들에게 면류관을 주신다. 그러므로 말씀을 붙들고 충성하자. 다가오는 시대에 하나님 앞에 축복된 인생들이 되시기 바란다. 


2. 아름다운 소식이 복음이다. 

이렇게 자기 자식들을 잡아먹을 수밖에 없는 자들에게, 양식이 쌓여 있다고 전한 소식이 복음이다. 먹을 것이 없어 죽어가는 자들에게, 풍성한 양식이 있다는 소식보다, 좋고도 아름다운 소식은 없다. 

러시아에 ‘죄와 벌’이라는 유명한 소설을 쓴 ‘도스토예프스키’가 있다. 그는 사회주의 클럽에 가담하여, 왕정 치안대에 체포되어, 동료들과 함께 사형 집행 장에서, 총살형을 받기 위해 서 있던 중에, 황제의 특사로 사면되어 극적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방아쇠만 당기면 목숨을 잃게 되는 긴박한 순간, 사형을 중단시키라는 특사의 외침은, 정말 좋은 소식이었다. 사람들은 육체의 생명만을 중요시해서, 육체의 죽음을 가장 두려워한다. 이 세상에서도 죄를 지은 사람들이 형벌을 받게 하기 위하여, 교도소가 있다. 

그러나 육체의 죽음보다, 영혼이 지옥으로 떨어지는 두 번째 사망은, 더 무섭고 고통스런 곳이다. 지옥은 죽음의 고통을 계속 겪으면서도, 죽지 않는 곳이다. 수천수만 번 고통당하는 곳이 지옥인데, 인간이 이 세상에서 행한 죄 값을 치르는 곳이다. 이곳에 들어가지 않음이, 복음 중의 복음이다. 

신약성경을 보면, 제일 먼저 복음서가 나온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생애에 대해 기록한 성경들이다. 예수님이 복음이다. 복음은 좋은 소식, 복된 소식이라는 뜻이다.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좋은 소식은 바로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식이다. 

인류에게 가장 기쁜 소식은, 죄를 용서받아 지옥에 들어가지 않는 소식이다. 구원받는 ‘아름다운 소식’(사40:9, 61:1), ‘기쁜 소식’(사41:27)을, 히브리어로 베소라(ה󰙜שׂוֹ󰔶)라고 한다. 복음은 ‘아름다운 소식을 가져온다’(ר󰙵󰔯)는 말이다. 여기서 육체(ר󰙴󰔯)가 나왔다. 육체가 됨이 아름다운 소식이다. 

말씀(ר󰔯󰕏)이 육신이(ר󰙴󰔯)이 될 때, 아름다운 소식인 복음(ה󰙜שׂוֹ󰔶)이 된다(요1:14). 따라서 복음은 히브리어로,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신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해결하기 위하여,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지옥에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우리를 사랑하는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죄를 대신 담당하시어, 우리 죄가 모두 용서받아, 천국 갈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 죄를 해결하시려고,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신 사건을 복음이라고 한다. 

예수님께서 인간이 되어야 하는가? 하나님과 천사는 육체가 없기에,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질 수 없다. 육체가 있어야 인간의 죄를 짊어지실 수 있다. 사람은 죄를 짊어질 수는 있지만, 죄가 있기에 짊어질 수 없다. 죄를 짊어지려면, 죄가 없어야 한다. 예수님은 죄가 없이 태어나신 분이다. 

예수님은 남자의 씨가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되어, 죄 없이 태어나셨다. 예수님은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이다. 예수님 외에는 복음이 없다. 복음에는 양면성이 있다. 복음을 받아들여 믿으면, 죄에서 건짐 받지만, 받아들이지 않으면 심판을 받게 된다. 받느냐 받지 않느냐에 따라 운명이 달라진다. 

(요3: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이 놀라운 좋은 소식을 받아들여, 믿게 됨을 감사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주신다고 하니까, 믿지 않은 사람의 비극이 나타난다. 

  
(2) “그 때에 왕이 그의 손에 의지하는 자, 곧 한 장관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하더라, 엘리사가 이르되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하니라” 

이 장관은 국고의 사정을 오죽 잘 알았을까? 장관이니까, 나라의 식량과 돈이 얼마나 있는지 잘 알았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느냐고 했다. 이 장관은 상식적으로 나라의 현실을 잘 진단했다. 

자기의 명철한 이성과 계산을 가지고,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명백하게 관찰했고 분석했다. 따라서 그의 잣대로 볼 때, 어림없는 소리였기에,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셔도,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오늘날의 지식인들이 자주 범하는 과오를, 이 장관의 과오 속에서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생각으로 판단하고, 사람의 생각으로 가둬두면 안 된다. 자기 생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둬버리는 사람은, 언제나 손해를 본다. 나아만은 나병을 고침 받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엘리사는, 자기의 생각는 전혀 다른, 엉뚱한 말을 한다. 

나아만의 기대는 “내가 당신의 병이 낫도록, 안수기도를 해드리겠다”는 말인데, 엘리사는 자신을 맞이하지도 않고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아만은 “내 생각에는 보다 좋은 생각이 있는데, 하필이면 요단강에 가서 씻으라고 하는가?”하면서 분노했다. 

내 생각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져야만 한다고 생각하면, 신앙이 아니다. 신념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져야하지, 사람의 생각대로 이루어짐이 아니다. 나아만처럼 자기 생각대로 하면, 결코 나병을 치료받지 못한다. 

그러나 자기 생각을 접고, 엘리사의 말대로 요단강에서 일곱 번 씻음으로, 병 고침을 받게 된다. 우리는 지식의 한계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묶어두려고 하면 안 된다. 그러면 절대 하나님의 세계를 경험할 수 없다. 우리는 좀 더 단순하고, 순수해져야한다. 

하나님의 세계와 사탄의 세계는, 모든 면에서 대조적이다. 하나님의 세계는, 질서와 믿음과 순종의 세계이지만, 사탄의 세계는 혼돈과 불신앙과 거역의 세계이다.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세계도 존재하고, 사탄의 세계도 존재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수도 있고, 사탄의 종으로 살수도 있다.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무한한 축복과 안식과 행복과 평안을 맛볼 수 있지만, 이 놀라운 축복의 진리를 흐리게 만들고, 믿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사탄이 있다. 사탄의 영향을 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어두움에 빠져서, 하나님의 축복을 다 놓쳐버리고, 실패와 불행의 삶을 살아간다. 


3. 아름다운 소식을 전했다. 

아람진영을 찾은 네 명의 나병환자들은, 굶어 죽어가고 있는 사마리아 백성들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해야 할 사명이 있음을 깨달았다. 

병들어 죽어 가는 나병환자들도,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고자 했다. 나 자신만을 생각하며 살면 죄다. 네 명의 나병환자들은, 처음에는 자신을 위해, 먹고 마시고 감추는 일을 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깨달았다. “우리가 이렇게 해서는 아니 되겠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자기들만을 생각하여, 먹고 마시고, 감추는 일이 죄임을 알았다. 그래서 저 성안에, 쌀 한 톨, 보리 한 톨이 없어, 자기 자식을 잡아먹어야 하는, 동족을 생각했다. 기아에 허덕이며 죽어 가는, 사랑하는 이웃들을 생각했다. 우리는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지극히 이기적이다. 자기 자신 밖에 모른다. 자기 자식 밖에 모른다. 자기교회, 자기 가정 밖에 모른다. 비가 오지 않아 농작물이 말라 가고, 북한의 동포들이 굶어 죽어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죄다. 

왜 죄인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셨기 때문이다. 네 명의 나병환자들이 적진 속에서 먹고 마시게 됨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셨고, 그 사실을 전하라 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이 한 일은, 적진을 향해 나갔을 뿐이다. 하나님께서 적들로 물러가게 할 때, 모두 다 놔두고, 몸만 도망치게 했다. 

우리가 이렇게 건강하고, 배부르고, 남부럽지 않게 살게 됨은,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모든 것들을 주심은, 나만을 위해 살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도록 하기 위해 주셨다. 그러므로 자신만을 위해 살면, 하나님 앞에 죄가 된다. 축복의 통로가 되시기 바란다. 

네 명의 나병환자는, 비록 사람들에게 왕따를 당하고, 인간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살았지만, 그들은 복수하지 않았다. 도리어 동족의 굶주림과 배고픔, 그리고 기근과 아픔에 대하여 생각했다.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지 않으면, 벌이 우리에게 임한다고 했다. 
  
아름다운 소식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허물과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모든 죄를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이것이 복음이다. 이 예수를 믿으면, 죄를 사함 받는다. 어떤 죄를 지었든지, 무슨 죄를 지었든지 예수님을 믿고, 주님 앞에 나아오기만 하면, 용서를 받는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썩어지지 않을, 천국의 소망을 갖는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얻는다. 저주에서 해방된다. 

이런 아름다운 소식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는다면, 죄가 된다. 그래서 나병환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침묵하고 전하지 않는다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 네 명의 나병환자들로 하여금, 먹을 것들로 쌓여 있는 것을 보게 하셨을까요? 

왜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셨나요? 왜 이 기쁜 소식을 듣게 하셨을까요? 이 복음을 자기 백성에게, 전하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오늘 내가, 이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지 않는다면, 주님이 저와 여러분을 벌하실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피 값을, 우리에게서 찾으신다고 말씀했다. 

(겔3:17-19)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의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의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고 하였다. 피 값을 찾으시겠다고 했으니,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러면 언제 이 아름다운 소식을 전해야하나? 오늘이다. “오늘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거늘 우리가 침묵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복음을 전하는 일은 미룰 수 없다. 

만일 네 명의 나병환자들이, 내일까지 더 먹고 마시다가, 내일 아침 밝아오면 그때 가서 전했다면 그 날 저녁에도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야 했다. 내일은 우리의 시간이 아니다. 오늘이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왜 저와 여러분을 부르셨나요? 이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다.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도록 하기 위해서 부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 복음의 소식을 멸시받고, 인간이하의 취급을 받는 나병환자들로 하여금 전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못 배웠다고 가진 것이 없다고 핑계하지 마시고, 이 복음을 전하자. 이 복음은 죽은 영혼을 살리는 능력이 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이 아름다운 소식이, 온 세상에 전파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똑똑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사용하지 않고, 미련하고 어리석은 인생을 들어,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죽어가고 있는 불쌍한 영혼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 

아직까지 이 아름다운 소식을 받아들이지 않는, 저 불쌍한 이웃들을 사랑하여, 멸시와 비웃음과 욕들을 각오하고, 좋은 소식을 전해야 할 사명을 우리는 가지고 있다.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살리는,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발’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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