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인치심을 받은 자 (계 7:1~8)

  • 잡초 잡초
  • 1344
  • 0

첨부 1


인치심을 받은 자 (계 7:1~8)

 
정체성(正體性)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전을 보니까 “변하지 않는 존재의 본질을 깨닫는 성질”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존재하는 것들 그 본질이 무엇인지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특히 자기 자신의 본질이 무엇인지 깨닫는 것을 “자아 정체성”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행복하지 못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정체성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바로 “정체성 혼돈”입니다. 본질이 무엇인지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본질을 잘못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있어야 할 위치를 지키지 못하고 방황합니다.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보면 분명히 자기는 남자인데 여자인 줄 압니다. 아니 여자이고 싶어합니다. 아예 여자로 성전환 수술을 합니다. 여자라고 우깁니다. 여자처럼 삽니다. 성 정체성이 혼돈된 것입니다. 잠시 잠깐은 행복해 보입니다. 그러나 길게 보면 또 전체적으로 보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행복하지 못한 이유 가운데 하나도 바로 이 정체성 혼돈 때문입니다. 분명히 그리스도인인데 아닌 것처럼 숨기고 삽니다. 때로는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싶어합니다. 그러다가 아예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삽니다. 그러나 그 깊은 속에 예수를 만났던 소중한 경험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엄연히 살아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잘 압니다. 이런 사람들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 그리스도인이 누구인지를 가르쳐주는 중요한 표현이 나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깨닫게 해주는 소중한 표현입니다. 바로 “인침을 받은 자”라는 말씀입니다.


인치심을 받은 자

본문을 보면 “인침을 받은 자”라는 표현이 4절에 두 번, 5절에 한 번, 8절에 또 한 번 나옵니다. 합이 네 번 나옵니다. 그러면 인침 받은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인침이라는 말은 헬라어 원어로는 “스프라기스”(spragis)입니다. 이 말은 글자 그대로는 “도장 찍음”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의 동사형은 “스프라기조”(spragizo)입니다. 이 말은 원뜻 그대로는 “도장찍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비유적으로도 사용되어 “보증하다, 인정하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옛날에는 노예제도가 일반화되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대개 진 쪽 사람들을 노예로 끌고 옵니다. 때로는 돈 주고 사람을 노예로 사기도 합니다. 이럴 때 그 사람이 자기 집 노예라는 표시를 합니다. 많은 경우 문서로 하기도 합니다. 문서에 도장을 찍어서 자기 집의 노예임을 표시합니다. 

그런데 몸에 낙인을 찍는 경우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로마시대입니다. 이 때 이마에 주인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첫 자를 인두에 새겨 낙인을 찍었습니다. 로마 황제 씨저는 자기 노예의 이마 한 복판에 “V"자를 새겼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아프리카 흑인을 노예로 산 뒤에 가슴에 낙인을 찍었습니다. 어떤 나라에서는 뒤통수에 찍기도 하고 등에 찍기도 했습니다.

본문 2-3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받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이마에 인을 치신다는 것입니다. 마치 로마 황제 씨저가 자기 종들의 이마에 “V"자를 인쳤던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의 이마에 인을 치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영적인 의미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다고 우리 이마에 눈에 보이는 어떤 낙인이 찍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보이는 영적인 낙인이 찍혀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인치셨다고 강조하는 것일까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의 소유로 삼으신다는 것을 확인하시려는 것입니다. 마치 노예의 주인이 자기 인침받은 노예를 각별히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건강도 돌봐줍니다. 생활도 돌봐줍니다. 일할 수 있도록 여건과 환경도 챙겨줍니다. 다른 노예야 어떻든지 상관하지 않지만 자기 노예는 각별히 챙깁니다. 

미국은 지나칠 정도로 자국민 보호에 신경을 씁니다. 1980년에 이란이 미국인을 인질로 체포하고 있었습니다. 여러 차례 협상을 시도했지만 해결의 실마리가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미국은 이란 영내에 헬기 8대에 특공대 80명을 투입하여 구출작전을 감행했습니다. 물론 이란의 강력한 저항으로 성공하지는 못했습니다. 1989년에는 파나마 정부가 미국인을 억류한 일이 있습니다. 외교적 노력이 별 진전을 보이지 않자 미국 2만 명을 파나마에 투입했습니다. 물론 전 세계의 여론에 비난을 받았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더 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떤 상황 가운데 있는지 눈여겨보십니다. 그리고 손을 쓰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철저하게 보호하십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잊지 말고 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인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고후 1:22 말씀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확인하시려고 인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치심을 받은 사람들 그 마음에 성령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인치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이 보증이십니다. 비록 우리 이마에 인이 남아있지는 않습니다만 우리가 영적으로 인치심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성령이 확인시켜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번 제 93회 총회에는 역사상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사이벤트가 있었습니다. 60년 전부터 갈라지기 시작한  한국 장로교 핵심 교단이 한 자리에 모여서 감사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 저녁 통합, 합동, 기장, 그리고 합신 한국 장로교 핵심 4개 교단 총대와 교인들이 6천여명이 제주 컨벤션선터에 함께 모여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고 함께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분열이 시작되면서 각 교단은 저마다의 신학, 저마다의 교단 제도, 저마다의 전통을 발전시켜왔습니다. 저마다의 길로 나아갔습니다. 이제 도무지 서로 말이 통하지 않을 정도로 달라져버렸습니다. 그래서 예배를 준비하는 과정이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를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함께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임을 깊이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감격의 연합예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치심을 받은 사람들 그 마음 속에 성령이 거하십니다. 그분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으로 나가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게 해 주십니다. 이제 우리가 성령이 충만한 삶을 살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임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인침을 받은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

본문을 유심히 살펴보면 인침을 받은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인침 받은 사람들 모두를 기억하십니다.

본문을 보면 인침을 받은 자의 수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4절을 보면 14만 4천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12 지파 각 지파마다 일만 이천 명씩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숫자의 의미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많은 이단 종파들은 이 숫자가 실체적 숫자라고 주장합니다. 구원 받을 사람은 정확하게 14만4천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들 무리 14만 4천명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빨리 이 14만 4천 안에 들어와야 한다고 포교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숫자는 상징적인 숫자입니다. 14만4천은 우선 144x1000을 상징합니다. 144는 또 12x12를 뜻합니다. 신성한 완전수 12를 제곱했습니다. 또한 1000은 10x10x10을 의미합니다. 세속적인 완전수 10을 세제곱했습니다. 이것은 구원받을 하나님의 백성 그 모두를 말합니다. 

결국 14만 4천은 구원받을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 전체를 말합니다. 구약 시대와 신약시대를 망라합니다. 이스라엘과 새 이스라엘 전체를 망라합니다. 서구 기독교 국가와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오지의 이름 모를 그리스도인들 그 모두를 다 망라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한 그 모든 시대, 그 모든 장소의 모든 사람들 그 모두를 인치셨다는 것입니다.

가끔 어처구니 없는 뉴스가 전해집니다. 산부인과 병원에서 태어난 아이가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간호사들이 착각해서 아이가 뒤바뀐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 장례식장에서 시신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자기부모인줄 알고 매장을 하고 또 화장을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다른 사람이더라는 것입니다. 영안실 담당자들이 착각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결코 이런 실수를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키로 하신 사람들 모두를 한 사람도 빼놓지 않으시고 기억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결코 헷갈리는 일이 없으시고 실수하시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그 모든 사람들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기억하고 계십니다.

 
둘째, 인침 받은 사람들을 배려하십니다.

본문 7장은 앞 장과 긴밀하게 연관되어있습니다. 계 6장은 무시무시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예언입니다. 어린 양이 일곱 인을 차례로 떼시면서 무시무시한 재앙이 쏟아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정말 두려운 징벌이 무자비하게 가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6장 마지막 절에는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이제 이 무서운 심판의 날이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이 예언을 들은 사람들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비록 자신들이 그 심판의 대상은 아닐 지라도 두려움이 밀려왔을 것입니다. 이런 재앙의 날에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염려하는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예언을 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두려움과 염려하는 마음을 헤아리셨습니다. 그래서 본문 7장을 삽입해 두셨습니다. 여섯 인을 떼는 이야기와 일곱 인 이야기 사이에 7장을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전체 심판 예언 진행에는 없어도 될 부분입니다. 그런데 구지 이 말씀을 삽입해 놓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따뜻한 배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조그만 사건에도 두려워합니다. 쉽게 믿음이 흔들립니다. 염려하고 걱정하며 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런 연약함을 잘 아시고 우리를 붙잡아주시려고 이 장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따뜻한 배려입니다.


[행복한 고물상]이란 책속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고물상을 하던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일을 할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돈벌이가 시원치 않던 중에 그마나도 돈을 벌 수 없었습니다. 가족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하루는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지붕에서 비가 새기 시작합니다. 한두 방울씩 천정에서 비가 새더니 점점 심해집니다. 엄마는 양동이를 받쳐놓고 연실 걸레질을 했습니다. 갑자기 아버지가 다녀올 때가 있다며 밖으로 나갔습니다.

밤 12시가 되도록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비는 점점 더 심해져서 가족들은 불안해 졌습니다. 엄마와 누나가 아버지를 찾아 나섰습니다. 동네 구석구석 다 다녀봐도 아버지는 없었습니다. 걱정하며 집으로 돌아오는데 갑자기 누나가 지붕 위에 누군가 우산을 들고 쪼그리고 앉아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버지였습니다.

다가가서 아버지를 모시고 내려오려 하지 엄마가 말렸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가 가엾어도 지금은 아버지를 부르지 말자. 너희들과 엄마를 위해서 아버지가 그것마저 하실 수 없다면 더 슬퍼하실지도 모르잖니” 엄마는 목이 메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셨다. 아버지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눈에도 끝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가족들을 향한 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의 배려입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안타까운 형편을 너무도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대신 십자가에 달리게 하셨습니다. 놀라운 배려입니다. 그 뿐 아닙니다. 오늘도 보혜사 성령님을 통해 세밀하게 돌보시고 살펴주십니다. 따뜻한 배려를 하고 계십니다.

  
셋째, 인치심을 받은 사람들을 구원하십니다.

본문 3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 하더라” 14만 4천명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그 모든 사람들이 다 인치심을 받을 때까지 심판을 유보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다 인치심을 받고 난 후 하나님의 때에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구원하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출 12장을 보면 유월절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의 모든 집 장자를 다 죽이시는 심판을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심판에서 구원하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명하셨습니다. “해 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그 피를 양을 먹을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출 12:6-7) 어린 양의 피를 그 집에 발라 표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13절에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피로 표가 된 집은 심판에서 구원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인치심을 받은 사람들 그들은 마지막 심판 날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비록 오늘 힘들고 고달픈 삶을 산다고 해도 마지막 그 무서운 심판이 임할 때 인치심을 받은 사람들은 구원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출애굽 때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그 약속대로 피로 표한 집은 심판을 면했던 것처럼 인치심을 받은 사람들은 그 약속대로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인치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키로 작정하셨고 영적으로 인을 치셨습니다. 그리고 그 보증으로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 하나하나를 세밀하게 기억하십니다. 우리들을 세심하게 배려하심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