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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 (잠 22:24~25, 고전 10:33~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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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나를 본받으라 (잠 22:24~25, 고전 10:33~11:1)


‘모방본능’이란 말이 있습니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문학과 예술은 모방본능에서 출발했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많은 비판도 받았지만 인간에게 모방하고자 하는 본능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사람은 누구를 닮고자 하는 본능이 있는 것입니다. ‘모방춤’이 있습니다. 이 춤은 선사시대에 시작된 최초의 춤이라고 합니다. 동물을 흉내 내는 춤입니다. 학을 모방하는 춤이 있는가 하면, 거북을 모방한 춤도 있습니다. 최근에 와서는 그렇게 좋은 뜻은 아닌 것 같지만 병신춤도 있고 승무라는 것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의 모방본능에서 나온 춤들이라고 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함께 살아가는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것을 ‘모델’이라고 합니다. 심리학자 밴듀라는 어떤 사람을 모델로 하여 스스로 변해가는 것을 모델링이라고 불렀습니다. 누구를 모델링의 대상으로 삼느냐에 따라 한 사람의 인생이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이 모델링에는 세 가지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관찰과 학습의 효과입니다. 둘째는 어떤 행동을 억제하는 억제 효과와 억제되어 있던 행동을 활성화하는 탈억제효과입니다. 셋째는 프로이드 심리학 등에 등장하는 동일시(identification)입니다.
  
아이들이 밖에서 놀다 오면 누구와 놀았는지 어머니들은 금방 압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의 말씨나 제스추어나 요구 등이 아이들이 놀던 그 친구를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우리의 사고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나고 좋은 사람의 영향을 많이 받아야 합니다.
  
“미워하면서 닮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절대로 미워하지도 마세요. 우리는 사랑하면서 닮아가야 합니다. 제가 어릴 때 보니 어떤 사람은 자기 아버지가 첩을 들였다고 아버지를 그렇게 욕하더니 자기도 나이 들면서 첩을 들였습니다. 욕하면서 닮는다는 말이 딱 맞습니다. 사람은 누구를 닮아가는데는 천부적인 소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잠언서 22:24-25에는 “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울분한 자와 동행하지 말지니 그의 행위를 본받아서 네 영혼을 올무에 빠뜨릴까 두려움이니라”고 합니다. 나와 동행하는 자, 함께 하는 자는 나도 모르게 닮아가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를 본받느냐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인생의 문제입니다.
  
에머슨은 “모든 사람이 누군가에게 영웅이자 현인이다. 그 누군가에게는 그의 모든 말이 큰 가치를 지닌다”고 하였습니다. 나도 모르게 영웅을 만들고 또 자신이 영웅이 됩니다. 누구를 영웅으로 만들 것이냐, 누굴 닮을 것인가,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인생의 문제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3:17에서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고 합니다. 바울은 “나를 본받으라”는 신앙적 당당함에서 삽니다. 어디서 이런 당당함이 나왔겠습니까? 바울이 가진 이런 자신감을 신앙 안에서 우리도 가지기를 바랍니다. 지금이 아니라도 죽기 전 언젠가 우리가 이 말을 당당히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바울을 통해 신앙적 이 당당함을 배우기를 바랍니다.

첫째,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 10:33에는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라고 합니다. 바울의 말을 들어보면 자기와 같이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을 본받으라고 합니다. “나와 같이”는 바울의 신앙적 모범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신앙적 당당함을 제시하는 말입니다. 바울은 처음부터 이런 모범적인 삶을 살았습니까?
  
“나와 같이”라고 하고 있지만 바울은 항상 모범적인 삶을 살지는 않았습니다. 바울 같이 살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이 사울일 때에 그는 모든 사람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만날까봐 두려워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 같은 공포의 대상이 어떻게 바울 같은 기쁨의 대상이 되었습니까? 바울이 어떻게 나와 같이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라고 할 수 있습니까? 사실은 ‘내가 박해자입니다’, ‘내가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기에 나와 같이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을 본받으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초대교회의 김익두 목사님은 모든 사람이 기피하는 인물이었습니다. 평양의 깡패이었던 그는 장날이면 장에 오는 사람들의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김익두 만나지 않게 해 달라고 서낭당에 빌었다고도 합니다. 이번 교단 총회가 지난주에 제주도에서 열렸습니다. 제주 선교 100주년을 기념하는 총회였습니다. 제주도에 처음 선교사로 갔던 이기풍 목사님도 한 때는 평양의 유명한 깡패였습니다. 사람들이 피하던 사람이었지만 그가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내가 있으므로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그 분이 가는 곳마다 재미가 있고 모든 사람이 그를 반깁니다. 이런 사람은 없어서는 안 될 사람입니다. 어떤 분은 그 분만 있으면 재미가 없어집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 사람을 기피하는 기피인물이 된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갈리디아서 4:12에는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합니다. 바울은 이전에는 핍박도 했지만 지금의 자신과 같이 될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합니다. 지금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고 헤롭게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우선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자기 속에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기뻐야 기쁨을 줄 수 있습니다. 내가 기쁨이 없으면 항상 다른 사람에게 기쁨 대신 슬픔을 줍니다. 고통과 근심을 줍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서 2장에서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각각 다른 사람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고 합니다.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건강에 대한 강의를 하는 것을 잠시 보았습니다. 그 내용 가운데 건강하지 않으면 하지 못하는 것이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자연을 보고 웃지 못한다고 합니다. 둘째는 콧노래를 부르지 못한다고 합니다. 셋째는 유머를 하지 않습니다. 나아가서 유머를 하는데 웃지 못합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우선 내가 건강해야 다른 사람에게 즐거움을 줍니다. 내가 영적으로 즐거워야 남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사막의 선인장은 비가 와도 물이 잘 빠지므로 뿌리가 길게 뻗지 못하고 옆으로 자랍니다. 뿌리는 옆 선인장의 뿌리와 서로 얽혀 좀처럼 쓰러지지 않고 모두가 다 잘 견딥니다. 그러나 홀로 서 있는 선인장은 함께 할 뿌리가 없어 뿌리가 얕아 곧잘 쓰러진다고 합니다. 함께 있어 의지할 사람이 없으면 불행입니다. 기쁨을 얻고, 주는 대상이 되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남에게 도움을 주고, 기쁨이 되고, 의지가 되는 것이 우리의 존재 가치입니다.
  
로마서 12:15에는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뻐하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우리가 슬퍼하고, 아프고, 걱정하고, 싸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서로 기쁘게 해주고, 함께 기뻐하고,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을 하나님도 기뻐하십니다.
  
최근에는 연예인이 자살로 죽었다 하면 ‘성도’랍니다. 빈소에 ‘성도 아무개’라고 써 있습니다. 왜 성도가 자살합니까? 다른 사람도 아닌 성도인데 왜 하나님의 기쁨이 되지 못하고 슬픔의 대상이 되고 세상 모든 사람에게 안타까움을 줍니까?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줘야 할 사람인데 슬픔을 주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이 아닙니다. 지난 번 한 연예인의 자살로 그 후에 3건의 연탄불 자살 건이 있었습니다. 그 만큼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기쁨이 되어야 하고, 기쁨의 영향력을 주어야 합니다.
  
성경에는 나오미라는 여인이 등장합니다. 나오미는 베들레헴 사람 엘리멜렉의 아내였습니다. 나오미에게는 기룐과 말론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모압 여인 며느리를 얻어 모압에 사는 동안 아들들이 다 죽습니다. 큰 며느리는 오르바였고 작은 며느리는 룻이었습니다. 아들들이 죽자 나오미는 자신은 베들레헴으로 돌아가지만 며느리들에게 모압에 머물러 있으라고 합니다. 큰 며느리 오르바는 시어머니의 말을 듣고 모압에 머물지만 작은 며느리 룻은 끝까지 시어머니를 따라 갑니다. 

나오미는 두 아들을 다 잃었을 때 며느리들을 편하게 해 주려고 하였습니다. 며느리에 대한 사랑이 극진했습니다. 후에 룻이 베들레헴 들에서 일하다가 보아스를 만나 재혼할 때에 시어머니가 오히려 서둘러 그들을 합하게 해 줍니다. 나오미는 며느리에 대한 사랑이 많은 시어머니였습니다. 그런데 나오미라는 이름의 뜻이 기쁨입니다. 영어는 anointed oil of joy 즉 기쁨의 기름을 부음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나오미는 기쁨을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지금도 며느리를 편하게 해주는 시어머니가 기쁨의 사람입니다.
  
이사야 62:4에는 “다시는 너를 버림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고 합니다. ‘헵시바’란 ‘내 기쁨이 그 나라 안에 있다’라는 뜻입니다. 헵시바는 히스기야 왕의 아내이며 므낫세 왕의 어머니였습니다. 항상 기쁨을 가진 여인이라는 뜻입니다. 참 좋은 이름입니다.
  
바울은 “나와 같이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 기쁘게 하는 나를 닮으라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기억할 때마다 기쁨을 주는 사람이라고 기억하게 합시다.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삶이 바울을 닮는 길입니다. 이것이 곧 그리스도를 닮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를 닮기를 원하십니까? 기쁨을 주는 사람이 되십시오.


둘째,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11:1에는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합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나를 본받으라고 할 수 있는 자신감이 있습니다. 나를 본받는 전제는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지 않는다면 나를 본받으라고 할 이유도 없습니다.
  
바울은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를 일으켰습니다. 이 일로 사람들은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오셨다”고 하여 바나바를 제우스라고 하였고, 바울을 웅변의 신 헐메스라고 신격화하여 숭배하려고 하였습니다(행 14:14). 그 때 바울은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신이 아닙니다. 우리의 숭배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을 본받으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본받고 있기 때문에 이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누구나 흠이 있고 불안전한 것이 사람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닮으면 내 속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본받게 할 수 있습니다. “나를 본받으라”는 말은 내 속에 있는 그리스도를 본받으라는 뜻입니다.
  
사도행전 20:35에는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라고 바울은 에베소 장로에게 자신감 넘치는 고백을 합니다. 바울의 사도로서의 삶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는 삶이었고 언제나 어디에서나 자신을 닮으라고 외쳤습니다. 이 얼마나 자신감이 넘치고 당당한 고백이었습니까?
  
‘본 받는자’란 말은 헬라어의 ‘미미메테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흉내 내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미메오마이’(mimeomai)라는 말은 모방하다(to imitate) 혹은 흉내 내다(to mimic)라는 말입니다. ‘본받으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흉내 내는 자가 되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흉내 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 예수님의 식사, 예수님의 잠, 예수님의 성품, 예수님의 가르침, 예수님의 설교, 예수님의 고통 그리고 나아가서 예수님의 죽음까지 흉내 내며 살아야 합니다.
  
요즘에는 영성이란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영성이란 그리스도와 일체된 삶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최고의 영성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과 내가 하나가 되는데 십자가에서 하나가 됩니다. 그리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다는 말은 최고의 영성이며 닮은꼴을 의미합니다. 토마스 아켐피스는 ‘그리스도를 본받아’(Imitation of Christ)라는 책에서 최고의 영성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적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모방하고 사는 것은 최고의 영적인 삶입니다.
  
진정 우리가 닮아야 할 대상은 예수님이십니다. 찬송가에 있는 가사처럼 “예수를 닮기 내가 원하네. 날 구속하신 예수님을 내 마음 속에 지금 곧 오사 주님의 형상 인치소서”라고 해야 합니다. 주님의 형상을 우리 이마에 인 쳐야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나를 닮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모창가수가 있습니다. 나운하도 있고, 조용팔도 있고, 이미지도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지금도 엘비스 프레슬리를 잊지 못하고 매년 ‘엘비스 프레슬리 모창 대회’를 합니다. 목소리뿐만 아니라 옷도, 헤어스타일도, 표정도 다 그 사람을 흉내 내고 있습니다. 그 사람을 닮기 위해서 끝없이 노력하고 성격까지 닮아가려고 노력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자기는 없고 그 사람만이 있습니다. 때로는 그 사람들은 “내가 누구지?”라고 자신에게 반문한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친구들과 놀면 금방 닮아갑니다. 유유상종이란 말도 있습니다. 흔히 역할모델(role model)이란 것이 있습니다. 말하고 먹고 일하는 방식까지 역할모델로부터 영향을 받습니다. 그래서 좋은 역할모델과 어울려야 합니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원리’를 연구하는 동안에도 친구들을 집에 초대하여 물리학, 철학, 문학 등을 토론하였다고 합니다. 존경하는 사람들을 그룹으로 역할모델을 활용하여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얻은 것입니다.
  
알버트 슈바이처는 “본보기, 그것은 보이는 것에서 그치면 안 된다.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쳐야만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나를 본받으라”고 한다면 무엇을 본받게 하렵니까? 외모가 아니라 성품입니다. 그리스도의 성품이 내 성품이 되게 하고 내 성품이 다른 사람의 성품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결론

마르크스주의 지도자였던 구소련의 레닌은 죽기 전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아시시의 프란시스 같은 사람을 10명만 내게 다오. 그러면 내가 세상을 다스릴 것이다.” 누구를 닮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를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레닌이 성 프란시스를 만났다면 이 당에 공산주의가 그렇게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공산주의 때문에 이렇게 고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그리스도인의 책임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모습을 닮기를 원합니다. 그분의 사랑, 그분의 동정심, 그분의 눈물, 그 분의 말씀의 권능, 그 분의 고치는 능력, 그 분의 십자가 인내를 하나씩 닮아가기를 바랍니다.
  
내 자신을 잘 보세요. 내 자신의 무엇을 다른 사람에게 닮으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내 자신의 무엇을 닮지 말라고 해야 할까요? 우리 자신의 모습을 하나씩 다듬어 갑시다. 예수님을 닮게 하나씩 고쳐 나갑시다. 그래서 나를 닮으라고 할 것 많아지게 합시다.

지금 당장이 아니더라도 내가 나이가 많아져서, 바울처럼 완숙해져서 나의 후손들에게, 나의 주위 사람들에게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하는 삶의 자신감이 풍성한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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