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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아끼시는 대상 (욘 4: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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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아끼시는 대상 (욘 4:1~10)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탕자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중 둘째 아들이 버릇이 없는 불효막심한 놈이었습니다. 천하에 몹쓸 놈이 이 둘째아들입니다. 아버지 빨리 돌아가세요. 이렇게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나누어줄 재산을 지금 먼저 주세요. 그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겠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재산을 나눠줍니다. 아들을 그 재산 다 팔아서 돈을 모아 외국에 가서 허랑방탕하여 거지가 되어 돌아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셨습니다. 드디어 동구밖에 거지꼴을 하고 걸어오는 둘째아들을 발견한 아버지는 달려가서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그리고 목욕을 시키고, 새 옷을 입히고, 신발을 신겨주면서 잔치를 합니다. 

이 모습을 본 큰아들이 있습니다. 이 큰 아들은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모릅니다. 이제 동생이 없으니 아버지의 재산은 모두가 다 내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동생이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염려하는 것이 있다면 다 망해가지고 돌아오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염려가 현실이 된 것이지요.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가서 허랑방탕하여 다 허비하고 거지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 아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고 있으니 이같이 억울한 일이 어디 있을까요?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집에 들어가기를 거부합니다. 그 잔치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아버지는 큰 아들에게 찾아오지요. 큰 아들은 아버지를 향해 따지기 시작합니다. 

(눅 15:29-30) 
[29]보십시오. 저는 수 년 동안, 아버지를 섬겨 왔습니다. 그리고 한 번도 아버지의 명을 어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한 번도 저를 위해서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신 일이 없었습니다.
[30] 그런데 창녀들과 함께 아버지의 재산을 다 써 버린 아들이 집에 돌아오니까 아버지께서는 그를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저는 큰 아들의 이 말을 이해합니다. 저 같아도 이런 마음을 갖고 원망과 불평의 소리를 더 많이 했을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요나가 그랬습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이 정말 싫었습니다. 꼴도 보기 싫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도망을 치기까지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불순종할 만큼 그렇게 미운 존재가 니느웨라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 백성들이 싫었고, 왕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반드시 망해야만 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나를 끝까지 보내셔서 외치게 만드시고, 그 외치는 소리를 듣고 성이 소동하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도록 하십니다. 이 사람들이 회개할 때에 요나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정말 두려웠을 것입니다. 이러다가? 하나님이 심판의 불을 내리지 않으시면 어떻게 되는 것이지? 내가 전한 말 때문에 회개하고 심판을 면한다는 것은 최악의 시나리오였습니다. 

1. 요나의 악한 모습

요나는 니느웨 성이 망하는 꼴을 꼭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하룻길을 다니면서 ‘40일 후에 니느웨가 무너진다’는 말만 외치고 성 밖으로 나갔습니다. 

(욘 4:5)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
거기에 앉아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해야 하는 그 성읍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성읍을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욘 3:10)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이것으로 인하여 요나가 하나님께 얼마나 생떼를 쓰는지 모릅니다. 매우 화를 냅니다. 얼마나 화를 내는지 모릅니다. 어린 아이가 막무가내로 떼를 쓰는 경우처럼 그렇게 생떼를 씁니다. 

이 모습이 악한 모습입니다.

본문 1절을 보면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라고 되어있습니다. 성낸다는 말은 “라아(הער ra'a)”인데 이 말이 4절에도 있고, 6절에서는 ‘그 괴로움’이라는 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원어를 3장10절에서는 ‘악한’으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같은 단어를 ‘재앙’으로도 표현합니다. 성내는 것이 악한 죄라는 말이지요. 

하나님은 니느웨의 악한 죄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지자였던 요나의 악한 모습을 지금 보여주고 있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의 성품이 포악하여 잔인하게 살인을 저지르고 전쟁을 일삼은 악이 있다면 요나에게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옳음만을 주장하는 그런 악한 모습이 있습니다. 그 두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는 같은 악한 죄라는 것입니다. 

저도 요나처럼 그렇게 소리를 지르면서 화를 냈을 것입니다. 큰 아들이 둘째를 받아들이기 싫어했던 것처럼 그래서 둘째를 받아들인 아버지를 향해 화를 냈던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께 따져 물었을 것입니다. 

요나의 모습이 오늘날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으로 다가오지는 않습니까? 나는 이렇게 되어야 맞다고 생각하고 기대했는데 전혀 그런 결과가 아닌 다른 결과가 찾아왔을 때에 우리는 놀랍니다. 그리고 화가 납니다. 때로는 부모님을 향해 화를 낼 수 있습니다. 선생님을 향해 화를 낼 수 있습니다. 목사님을 향해 화를 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 화를 낼 수 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이 니느웨 성 사람들을 심판하지 않고 용서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화를 낸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될까요?
내가 기대 했던 결과가 아닌 다른 결과가 나올 때 화를 내고 실망하고, 시험이 들어서 교회를 옮기거나, 교회에 나오지 않거나, 화를 내면서 싸우거나 하게 될까요?
그것은 자기 의가 강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의가 강해서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화를 냅니다. 
분명히 니느웨 사람들은 너무나 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큰 죄를 졌기 때문에 반드시 심판을 받아 멸망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니느웨 성이 무너지는 재앙이 임하여서 겨우 목숨만 살아남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나님의 심판은 임하지 않고 그 땅이 예전처럼 평온하게 잘 살고 있는 것입니다. 

밀양(2007년 5월 개봉)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신애라는 여 주인공의 운명은 참 기구한 운명이었습니다. 남편을 잃은 슬픔을 잊기 위해 밀양으로 가서 삽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유일한 삶의 희망이었던 아들 준이마저 학원원장에게 유괴당해 죽게 됩니다. 그 후 절망가운데 살던 신애는 어느 부흥 집회에 참석해 가슴을 쥐어짜는 눈물을 흘리고 평안을 찾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다가 준이를 살해한 학원장을 용서하겠다는 마음이 들어서 찾아가 그를 용서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이 죄수도 감옥에서 주님을 만나 용서를 받고 평안하게 생활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같은 은혜를 받았으니 감사하다고 합니다. 그 소리를 듣고 신애는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신애는 하나님을 대적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과 싸우는 것이지요. 장로들을 유혹해서 죄에 빠지게 하고, 부흥회 장소에서 거짓말이야 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거부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향해 소리를 지르는 것이지요. 

신애라는 여인의 마음속에 자신의 의가 하나님보다 위에 있었기 때문에 자기가 용서하기 전에 하나님이 용서한 것을 인하여 화를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향해 삿대질을 하면서 온갖 죄를 저지르는 것이지요. 감옥에서 죄책감으로 고통의 세월을 보내야 하면 자신이 찾아가서 용서한다고 말할 때에 눈물을 흘리면서 고맙다는 말을 해야 정상인데 이미 다 용서 받았다고 당신도 내가 만난 하나님을 만나게 되어 감사하다고 오히려 더 평안하게 있는 나쁜 사람의 모습을 인하여 화가 났습니다. 왜 그런 녀석을 나보다 더 먼저 하나님이 용서하십니까?

이 모습이 악한 모습입니다. 내가 의의 자리에 앉아서 하나님이 하실 일을 이래라 저래라 지시하는 격입니다. 죄 지은 사람이 너무나 쉽게 용서를 받고 평안하게 살아가는 것을 보면 불공평하다고 생각합니다. 죄에 대한 어떠한 대가를 치른 후에 용서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것을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조건 용서하는 것은 불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불평을 합니다.

기도하면서도 악하게 반응하는 요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욘 4:2-3) 『[2]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3]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요나는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기도를 해도 하나님의 뜻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기도하는지 모릅니다. “나는 고국에 있을 때부터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습니다. 내가 급히 다시스로 도망쳤던 것도 그런 까닭에서였습니다. 나는 주께서 자비롭고 은혜가 많으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주께서는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사랑이 많으시기 때문에, 그들을 심판하시기보다 용서해 주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이렇게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뜻에 불만을 갖고 있었던 것이지요. 절대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면서 결국에는 죽는 것이 사는 것보나 낫다고 까지 생각하게 됩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로 그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자신의 생각이 이렇게 차이가 났습니다. 이것이 괴로웠습니다. 죽을만큼이나 괴로웠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것인데 내 마음 속에서는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이 모습이 우리의 약한 모습이고 죄악된 모습은 아닐까요? 나보다 더 악하다고 생각하는 상대방이나, 내 모습이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똑 같이 악한 사람이고, 똑 같이 용서받아 은혜 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연약함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지는 않습니까?

지난 주에 목사님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기도에 대해 말씀을 들었습니다. 기도라는 것은 내 뜻을 관철시키기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혹시 우리가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지는 않았을까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면서 하나님을 내 뜻에 맞도록 설득시키려 들지는 않았습니까? 그렇게 기도하다가 응답되지 않으면 오히려 화를 내고 시험에 들어서 기도를 포기해 버리고 하나님을 향해 삿대질을 하면서 하나님은 내 기도를 들으시지 않아! 하지는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모습이 악한 모습입니다. 이것은 니느웨 사람들이 사람들을 죽여 사람의 목을 베어다가 길거리에 전시를 하고 사람의 가죽을 벗겨냈다고 합니다. 얼마나 악한 사람들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모습만이 악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그 뜻이 내 뜻에 맞지 않다고 화를 내는 것도 같은 죄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2. 박넝쿨을 통해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이런 연약함을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요나에게 작은 사건을 일으키십니다. 
그것이 박넝쿨입니다. 동편 산위에 올라가 초막을 짓고 앉아 있을 때에 박넝쿨을 준비하셔서 요나에게 즐거움을 주셨습니다. 뜨거운 태양 볕을 가려주는 그들을 만들어 주신 것이지요. 그래서 박넝쿨로 인해 얼마나 기뻤는지 “크게 기뻐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박넝쿨에 벌레를 보내셔서 갉아먹게 합니다. 그러니 당장에 시들지요. 거기에 동풍을 준비하십니다. 뜨거운 열기를 몰고 온 동풍은 요나의 마음을 혼미하게 만들어버립니다. 얼마나 뜨거웠던지 정신을 잃을 정도입니다. 열사병에 걸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또다시 화를 냅니다. 화를 내면서 사는 것 보다 죽는 것이 낫다고 떠들어댑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말씀하시지요.

(욘 4:9)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이 모습이 얼마나 이기주의적인 인간의 모습인지 모릅니다. 나에게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받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내가 용서받고 은혜를 받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은혜를 받고 축복을 받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너무나 이기적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이기심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행동입니다. 

하나님은 그랬습니다. 요나가 박넝쿨 때문에 행복하고 기뻤던 것처럼 회개하는 한 영혼을 인하여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을 수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선지자였지만 하나님의 선지자다움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세상을 바라보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육신에 속한 사람들과 같이 자신만 복을 받아야 하고, 우리 민족만 복을 받아야 하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해야 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복을 받으면 화가 납니다. 내 뜻에 반대하는 사람을 보면 화를 냅니다. 

(고전 3:3)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어떤 목사님은 교인들이 자꾸 빠져나가니까 저주를 한다고 합니다. 이 교회를 떠나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될 것이다. 십리도 못가서 발병이 날 것이다. 이런 비슷한 말로 저주를 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기는 하지만 육신에 속한 사람이지요. 목사님다움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결론 : 하나님의 마음과 나의 마음이 하나 되게 합시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은 요나는 더 이상 말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 것이지요. 

(욘 4:10-11) 『[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 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하나님은 요나에게 설명을 해 주십니다. 네가 아꼈던 박넝쿨을 네가 심었니? 네가 물을 주었니? 그런데 그 박넝쿨을 얼마나 아꼈니? 네가 심지도 않고 물주는 수고도 하지 않은 거져 난 박넝쿨 이것은 하룻밤에 났다가 말라버리는 식물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너는 이것을 얼마나 기뻐했니? 
그렇다면 생각해 봐라! 저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 못하는 수 많은 사람들을 내가 아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겠니? 무엇이 더 소중하니? 박넝쿨이니? 수많은 영혼들이니?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것이 더 소중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물질이 더 소중합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맡기신 영혼들이 더 소중하십니까? 여기에서 박넝쿨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물질의 축복이라 볼 수 있습니다. 물질들은 때가 되면 모두 불타 없어질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번 후 하고 불어버리면 끝나는 것들입니다. 이러한 것들에 얽매이는 어리석음이 저와 여러분에게 없기를 바랍니다. 

어떤 분들은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은혜를 받고 회개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렇게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교회에 오는 것을 못 보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화를 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은혜를 받아서 열심히 봉사를 하면 화를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싫어지고, 괜히 교회 나오기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용서받고 은혜를 받아도 괜찮지만 저 악한 사람은 용서받고 은혜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런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 악한 죄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더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저 영혼을 저렇게 사랑하시는 구나! 감사하다! 이렇게 생각하시고 한 영혼이라도 회개하여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품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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